아차 싶었다. 매그레 시리즈와 ‘NORDIC NOIR’와의 관계를 쓴다고 말은 했는데 웬걸, 막상 착수하고 보니 예상밖으로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서 참조할 만한 자료도 거의 없었다. 헉!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물릴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전적으로 내 지식에만 기반 해서 쓰자고해도 딸리는 내공으로 벅찰 게 분명하고. 자, 진퇴양난. 하지만 '이왕 뽑은 칼 썩은 무라도 잘라야하는 게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웬 사극조의 목소리가 자꾸만 심금을 경련시키길 래 결국은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몰려오는 왜군을 바라보는 신립의 마음으로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순간 가득한 백색의 공포... 도대체 무슨 말로 첫 시작을 해야 할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머릿속으로 쓰려고 헤아렸던 말들은 모니터를 마주한 순간 바람에 민들레 홀씨가 날리듯 휙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새삼 심농이 부러웠다. 심농은 저널리스트 시절 그 날의 칼럼을 1시간 만에 흭 휙 써냈다고 하던데. 그렇게 써놓고도 스스로 퇴사할 때까지 오래도록 신문사에 남아있었던 걸 보면 분명 칼럼의 질이 떨어지지 않은 게 틀림없다. 아, 그런 속성의 기술이 내게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건 있을 턱이 없으니 이렇게 심농 신에게 가호나 빌 수밖에.
   심농 님, 나를 굽어 살펴서 이 지난한 싸움을 잘 치르게 해 주소서...

   해서 나는 결국 칼을 빼들었으니, 이제는 본격적으로 심농과 NORDIC NOIR와의 관계를 재주껏 살펴보려한다. 두구두구둥~(입소리로 효과음을 내고 있는 중임.)

   애초에 이런 기획을 하게 된 동기부터 말하는 게 순서겠지? 그래, 왜 이런 스스로에게도 부치는 기획을 하게 되었느냐 하면 그것은 매그레가 다름 아니라 1930년대에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에 소개되기엔 그 연식이 너무 오래되었다는 데 있었다. 물론 오래되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이 보다 훨씬 더 연식이 오래된 ‘셜록 홈즈’나 ‘아르센 뤼팽’도 이미 우리나라에 전집이 나온 판이니. 나 역시 셜록 홈즈는 이미 전집으로만 두 세트를, 뤼팽도 전집으로 가지고 있는 형편이니. 그러니 정작 문제는 오래되기도 했지만 매그레가 그다지 우리나라에서는 유명하지 않다는데 있다고 해야겠다. 지금까지 그 어마어마한 시리즈 중 겨우 세 권만 번역되었을 정도로 매그레의 지명도는 턱없이 낮다. 바로 가까운 일본만 해도 매그레가 얼마나 유명했던지(물론 일본에서는 ‘매그레’가 아예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 거기서 매그레 부인역을 했던 사토미 토모는 심농 스스로 매그레 부인을 맡았던 연기자 중 최고라는 상찬까지 받기도했다.) 아오야마 고쇼의 만화 ‘명탐정 코난’에서는 중요한 조연 캐릭터 이름으로도 버젖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 방영될 때는 세상에! 그게 '콜롬보'란 이름으로 확 바꿔버릴 만큼 턱없이 지명도가 낮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오래된 데다 더구나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매그레를 왜 하필 지금에 와서 읽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당연히 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매그레가 여전히 동시대적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걸 설득하기 위해 지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른바 ‘NORDIC NOIR’와의 상관관계를 밝혀보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매그레와 ‘NORDIC NOIR’가 결국은 일란성 쌍둥이이며 지금 ‘NORDIC NOIR’가 널리 읽히고 있다면 당연히 매그레도 널리 읽힐 수 있다는 걸 밝혀보고 싶은 것이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NORDIC NOIR, NORDIC NOIR 하는 데 그게 대체 뭐냐고? 

  아, 참 그걸 미리 말해놓는다는 걸 까먹고 말았군. 실례. 지금부터 설명 들어가겠다. ‘NORDIC’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북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반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나온다. NOIR는 뭐, 프랑스 말로 '검다'는 뜻이고 구체적으로는 헐리우드에서 1930년대 생산된 범죄 영화의 특징이기도 한, 낮은 조명으로 음습하고 어두운 도시적 초상을 그려내던 영화들을 장르적 범주로 묶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NORDIC NOI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중심으로 출간된 ‘우울한’ 범죄 소설을 묶어서 부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NOIR'란, 거기서 나온 소설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그런 소설을 펴냈다는 말은 아니고 비평계에서 보니 그 반도에서 나오는 범죄 소설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성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느와르 적이었다는 의미로 붙여진 말이다. 이 말은 최근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가 헐리우드에 의해 영화화가 됨으로써 그로 인해 그동안 소개되었던 일련의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범죄소설에 대해 언론이 새삼 다시금 조명을 받게 됨으로서 태어난 이름이다. 물론 이러한 관심이 비단 지금에 이르러서야 태어난 것은 아니다. 이미 90년대 초반 헤닝 만켈의 데뷔작 ‘얼굴 없는 살인자’가 나왔을 때부터 당시로서는 새로운 작품 분위기와 범죄 소설로서는 이례적인 사회를 해부하는 깊이 있는 시선 때문에 세계적인 비평적 관심을 받은 바 있었다. 그래도 그 때는 한 작가가 이루어낸 독특한 분위기 정도로만 여겨졌었는데 이 후 노르웨이의 카린 포숨, 아이슬란드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 그리고 지금은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 여러 나라의 다양한 작가 군들이 그와 비슷한 색깔의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내어놓음으로써 이렇게 ‘NORDIC NOIR’라는 명칭으로 불리울 만큼 하나의 새로운 경향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뭐, 이들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는 그들의 이력에 따라다니는 굵직굵직한 세계적 수상경력이나 현재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지속적인 관심만 봐도 충분할 것 같고 여기선 당신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 뺏기 위해 다만 이들과 심농의 매그레가 어떤 상관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만 살펴보려 한다.



   우선 ‘NORDIC NOIR’가 보여주는 공통된 특징들이다.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먼저 주인공의 모습이다. ‘NORDIC NOIR’에 있어서 주인공들의 모습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일단 주인공의 직업이 모두 형사다(스티그 라르손의 경우엔 예외적으로 저널리스트지만.). 그리고 아주 고독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업무상 관계를 제외하고는 어떤 사회적 관계로 부터도 단절되어 있다. 제대로 된 가정조차 이루고 있지 않은 게 대부분이다. 마치 그들은 어디에서도 발붙일 수 없는 그렇게 계속 떠돌 수밖에 없는 존재들로 보인다. 더구나 이들에게 개인적 관계란 언제나 상처를 동반한 것들뿐이다. 범죄로 인해 사회가 고통 받는 것과 똑같이 그들은 그들만의 개인적 관계들로 상처를 받는다. 그것은 현재적 상처이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묵혀진 과거의 상처들도 있다. 아니 사실은 그 과거의 상처 때문에 현재적 상처들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근원적 고통이며 오래된 과거라는 점 때문에 그들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그렇게 능동적 개입이 불가능한 절대적 고통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아픔을 느끼는 것 말고는 다른 게 없다. 그들은 그렇게 치유할 수 없는 환부를 가진 불치병 환자들로 현재를 살아간다. 환자들에게 환부란 자신의 모든 것을 삼켜드는 일종의 블랙홀이다. 늘 자신의 환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자는 그렇게 주위를 둘러 볼 여유를 잘 가지지 못한다. 그렇게 과거의 상처는 현재의 관계마저 파탄을 불러온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아마도 아이슬란드의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일 것이다. 그의 캐릭터 에를렌두르 형사는 애정 없는 결혼생활을 이어가다 끝에 아내와 이혼을 했고 이미 장성한 자녀들마저 소원한 관계로 지낸다. 거기다 그는 경찰이지만 자식들은 모두 마약상용자로 사회 속 패배자로 살아간다. 에를렌두르는 자녀들이 그렇게 된 게 모두 자신의 탓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에를렌두르와 그의 가족들은 다만 하나의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범죄가 발생하고 그렇게 하나의 사체가 문득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평행선을 이루며 살아가던 자신의 딸에게서 도와달라는 요청이 훌쩍 날아온다. 이 둘은 언제나 에를렌두르에게 동시에 도착한다. 에를렌두르가 수사하는 범죄들은 대부분 아주 오래된 세월 깊숙이 묻혀있던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에를렌두르와 자식들간의 관계와도 같다. 어떻게 보면 떠오른 범죄는 그들의 오래도록 해묵은 상처가 비로소 그 존재를 열어 보이는 것과도 같다. 그렇게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범죄의 수사란 사실은 그들이 가진 상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대부분 삶의 깊은 아픔과 질곡들이 배여있는 범죄들이 에를렌두르에게 있어서는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작용해 결국엔 새롭이 딸과의 관계를 정립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그렇게 에를렌두르에게 있어 수사란 사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깨달음을 향한 여정이었던 셈이다. 이렇게 ‘NORDIC NOIR’의 범죄 수사란 대부분 사건의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드러난 상처(만켈이나 포숨에 있어서는 사회가 은닉한 갈등이고 인드리다손에게 있어서는 주인공 자신이 억누르고 있었던 고통이다)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결국 수사를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그것으로 수면 위로 떠올라버린 인간의 삶 그 자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NORDIC NOIR’의 주인공들은 수사관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고독한 산책자’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산책자가 주위의 풍경들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이켜보듯이 그렇게 그들 역시도 수사를 하면서 오히려 삶 자체를 관조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그대로 심농의 매그레가 보여주는 것과 같다. 매그레의 경우도 늘 범죄가 수사를 개시하게 하지만 정작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범죄 뒤에 숨어있는, ‘생플리앵에 지다’에 나오는 목 매달린 자들과도 같이, 목에 걸린 밧줄처럼 죄어오는 '생(生)'이 가져다주는 고통으로 질식할 것만 같은 그 '삶' 자체이니까 말이다.


   ‘NORDIC NOIR’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든다면 사건이 언제나 협소한 공간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NORDIC NOIR’에서는 대부분 사건들이 고립되고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다. 유독 그렇게 사건적 공간을 선택하는 까닭은 그것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세계로 보여졌으면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곳은 현실의 공간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의 은유적 공간에 가깝다. 작가들이 이렇게 공간들을 하나의 은유로 바라보게끔 하는 것은 사실 그들이 그 공간을 통하여 현재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모순이나 갈등들을 깔때기 처럼 집약시켜서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있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그냥 현실적 공간이 아니라 작가가 속한 현재 사회의 모든 모순과 갈등들이 전면적으로 표출되는 광장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특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헤닝 만켈의 ‘얼굴 없는 살인자’이다. 아주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수사하면서 정작 형사 쿠르트 발란더가 보게 되는 것은 그 마을에 아주 깊숙하게 각인된 뿌리 깊은 타자에 대한 혐오증이다. 만켈은 이렇게 발란더가 그 마을에서 목격하게 되는 외국인혐오증을 통해 당시 스웨덴 사회에서 점차 성장하고 있던 파시즘의 징후를 예리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얼굴없는 살인자'에서의 작고 고립된 마을은 그대로 현재 스웨덴 사회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 마을은 일종의 반영이며 프로이드식으로 말하자면 자아가 그렇게 감히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을 마음 한 구석 은밀한 곳에 감추어 놓듯이, 스웨덴 사회가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던 그렇게 가장 은밀한 곳에다 은폐시키고 싶었던 '이드'가 표출된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공포영화에서 그렇게 드러낼 수 없는 욕망이 종종 '괴물' '연쇄살인마'로 드러나듯이 해닝 만켈을 비롯한 'NORDIC NOIR'에서는 저렇게 하나의 공간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밀레니엄으로 상종가를 치고 있는 스티그 라르손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심농의 매그레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지금 나온 ‘갈레씨, 홀로 죽다’ ‘생폴리앵에 지다’를 보면 무엇보다 시작하는 부분이 모두 거의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이름 모를 작은 역이라는 사실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생폴리앵에 지다’의 ‘노이샨츠역’은 네델란드와 독일의 국경지대에 있고 늘 양쪽 나라 노동자들을 태운 통근열차가 지나다니는데도 그저 국경을 넘느라 잠깐 머물 뿐인 그렇게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역으로 나온다. 매그레 역시 언제나 ‘NORDIC NOIR’처럼 이렇게 어딘가 묻혀진, 작은 공간에다 자신의 소설적 영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 이렇게 제한하는 건 그 공간이 공간 나름의 분위기로 하나의 개성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심농은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나무’라는 일반명사화된 걸 그리기 보다는 ‘나의 나무’식으로 개별적인 사물을 그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키에르케고어가 ‘신 앞에서의 단독자’라고 말했던 그 ‘단독자’하고도 같으며 가라타니 고진이 말했던 일반성으로 도저히 포획되지 않는 그 자체로 고유한 단독성 하고도 통하는 개념이다. 그렇게 하나의 고유성을 가진 존재. 무엇이든지 대체 불가능한 독자적 존재. 심농은 그러한 것을 그리는 걸 좋아했으며 그건 공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렇게 공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 그 어느 것으로든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생명을 지니게끔 한다. 그리고 거기에 작품 전체의 주제랄까 분위기랄까 하는 것들을 집어넣는 것이다. 그래서 협소한 공간이라는 점에서 ‘NORDIC NOIR’와 매그레는 닮았지만 공간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조금은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NORDIC NOIR’는 사회가 어디엔가 감추고 있는 모순과 갈등들을 보다 집약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공간을 제한하지만 매그레는 오로지 그 어떤 일반성의 잣대로도 잴 수 없는 그만의 고유한 개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공간을 제한한다. ‘NORDIC NOIR’는 협소한 공간을 통해서 사회를 돌아보게 하지만 매그레는 그 공간 자체를 그가 작품에 담고자하는, 그 어떤 보편성으로 묶일 수 없는 하나의 단일한 인간의 삶 자체를 의인화한 것으로 만들려 한다. 그렇게 그는 아주 고유한 개별적인 공간에다 그와 똑같이 단독자 자체로 온전한 단 하나의 인간적 삶을 담으려하는 것이다. 둘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만 사실 이것은 결국은 똑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는 그 둘이 도달하는데 있어서 걸리는 일종의 '거리적'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NORDIC NOIR'와 매그레 둘 다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담으려 한다는건 마찬가지지만, 'NORDIC NOIR'는 그것을 사회를 경유하여 그 사회가 가진 모순과 갈등의 결과로써의 인간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삶이 가진 비극의 원인마저도 아울러 명확히 보여주려하는 반면, 매그레는 하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인간의 삶 그 자체로 곧장 뛰어듦으로써 그 어떤 보편적 잣대로도 가늠할 수 없는 고유한 개인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그 원인으로써 배경에 서 있는 사회적 원인들을 아울러 포착하려 한다는 그런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골목을 먼저 들어가느냐 정도의 차이만 있지 사실 그 둘이 담고자 하는 것 그리고 그 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 있어서는 똑같다고 할 수 있다.


   쓰다 보니 어느새 내가 생각했던 ‘NORDIC NOIR’의 공통적인 특징들을 다 말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다시 정리하자면 ‘NORDIC NOIR’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징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주인공들이 사회적 관계망을 거의 맺지 않는다. 그렇게 고독한 존재라는 점. 둘째는 사건은 언제나 협소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그것은 늘 당시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을 은유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셋째 ‘NORDIC NOIR’가 정작 주목하는 것은 범죄의 해결이 아니라 그 범죄 뒤에 가려진 비극적인 삶의 모습이며 그리고 그 비극을 잉태하고 지속시키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점이다. 그 외에 더 많이 있겠지만 대략적으로 크게 이 세 가지를 꼽을 수 있을 듯하다. 물론 이것은 사이사이 가필해왔던 대로 매그레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작 문제는 왜 이러한 특징을 가진 ‘NORDIC NOIR’가 새삼 이렇게 거센 주목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그래야만 매그레의 동시대적 가치가 진정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왜 ‘NORDIC NOIR’는 지금 인기가 있을까? 물론 그것은 소설이 정말 재밌어서 그런 것 일수도 있다. 하지만 물론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이 그런 재미를 보여주긴 하지만 이것은 ‘NORDIC NOIR’에서 다소 이례적인 재미라고 할 만하다. 대부분 ‘NORDIC NOIR’는 눈에 번쩍 뛸만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전개는 느리고 단조롭다. 그들의 수사는 전혀 극적이지 않으며 많은 탐문과 이리저리 얽혀드는 과거의 실타래들은 자주 소설적 쾌락을 주기 보다는 마음속으로 침잠하도록 이끈다. 즉, 여기서는 현재 영미 미스터리 소설들을 읽을 때 맛볼 수 있는 쾌감들은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이 소설들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소설이 주는 재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보여주는 삶을 헤아리는 깊이있는 시선과 그로부터 오는 묵직한 울림 때문이다. 그렇게 NORDIC NOIR’는 '즐김'의 소설들이 아니라 차라리 '관조'의 소설들이라 해야한다. 비유하자면 NORDIC NOIR’를 읽는 것은 ‘수사반장’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극장’을 보는 것과 같다. 외피만 범죄 소설이란 걸 둘러썼을 뿐이지 그것이 천착하는 것은 고래로 순수 문학이 계속해서 천착해왔던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바로 '인간의 삶' 자체 말이다. 앞서 ‘NORDIC NOIR’의 주인공들은 고독한 산책자와도 같다고 했는데 이와 같은 이유로 독자들 역시 바로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게 된다. 그렇게 독자들은 그들과 같이 걷고 그들이 보는 것을 같이 보고 더불어 음미하는 것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삶의 모습들을 통해서 산책을 했을 때와 같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정확히 ‘NORDIC NOIR’가 주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NORDIC NOIR’에서 독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머리가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다. 독자들과 작품들은 비애감으로 같이 묶이고 동정과 연민으로서 서로를 위로한다. 이 위로의 호소, 위안을 부르짖는 손길, 이것이 ‘NORDIC NOIR’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심농의 ‘매그레’ 또한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NORDIC NOIR’에 대해 내가 했던 말들이 그대로 ‘매그레’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새삼 사람들이 이런 삶에 대한 공감, 연민, 위안에 귀를 기울이는 까닭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NORDIC NOIR’가 나왔던 나라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NORDIC NOIR’가 나왔던, 그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은 어떠한 나라들인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를 이루었다고 인정받은 나라들, 국민들 또한 자신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며 기꺼이 말하는 나라들이 아닌가!(해마다 가장 국민들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여기는 나라들 순위를 매기는 데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은 늘 상위권을 차지한다. 반면 가장 자본주의가 발달한 미국은 늘 꼴찌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에서 나오는 ‘NORDIC NOIR’는 그 어떤 나라의 같은 장르소설들 보다도 어둡고 우울하다. 그리고 내보이는 전망 또한 암울하기 그지없다. 당연히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살기 좋아 보이는 나라들에서 나오는 소설들이 왜 하나같이 이렇게 어둡기 만한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의문 앞에서 ‘NORDIC NOIR’는 당당히 고발하는 것이다. 그렇게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로,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유토피아에 그래도 가장 근접한 나라들로 인정받고 있지만 그건 그저 보기좋은 가면에 불과하다고. 사회의 온갖 병폐와 고통들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으며 그저 보이지 않도록 덮고만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오히려 ‘NORDIC NOIR’는 복지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그토록 통제하고 억지로 봉합하려 들었던 국가 때문에 개인의 고통만 더욱 더 늘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의 대표적인 징후로 헤닝 만켈이 ‘얼굴 없는 살인자’에서 드러냈듯이 ‘NORDIC NOIR’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점점 성장하고 있는 ‘파시즘’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켈의 소설에선 외국인 혐오증으로 나타나는 파시즘은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 현실 스웨덴에서도 그 세력을 차츰 넓혀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게 헤닝 만켈의 소설은 그 파시즘에 대한 문학적 고발이었고 그것은 그대로 지금의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흘러오고 있는 중이다. 이들에게 있어 파시즘은 개인을 짓누르고 억압하는 거대한 권력의 또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이들이 한 개인의 삶에 집착하는 이유도 바로 그러한 거대한 권력에 의해 쉽게 짓밟히고 무시될 수 있는 한 개인을 그 자체로서 복원하고 거기에 저항하고자 함인 것이다. 이 점에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개인이라는 단독성에 집착하는 매그레와 전적으로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NORDIC NOIR’에는 국가 혹은 사회의 거대한 손 때문에 ‘내몰린 자들에 대한 연민’이 있고 그렇게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을 내 몬 손들을 같이 비난하고 성토하는 모습이 있다. 그래서 어디든 거대한 권력이 작동하는 곳이면, 그렇게 국가든 자본이든 이데올로기든 거대한 권력에 의해 개인이 고통을 당하고 희생되는 곳이면 ‘NORDIC NOIR’의 생생한 목소리는 호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로 현재 미국에서도 광범위한 관심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즉 지금 미국 역시도 ‘NORDIC NOIR’가 나왔던 그 때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은 그토록 미국이 추구했던 신자유주의가 그냥 허울 좋은, 거짓 이데올로기였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거기다 9/11 사태는 미국이 지금껏 추구해온 세계의 경찰로서의 위치에 심각한 의문을 가지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타격은 새삼 미국인들로 하여금 문득 자기가 딛고 서 있는 대지가 정말 제대로 된 땅인지 의심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미국인들은 지금 혼돈에 처해있고 그 가운데 미국이 생산한 장밋빛 청사진에 가려져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던 갈등과 고통들을 새삼 바라보게 된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혼돈, 그 가운데 새삼 각인되게 된 상처들로 인해 그들은 다시금 2차 대전 후 때처럼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 계기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슷한 상황에서 태어난 ‘NORDIC NOIR’의 호소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즉 ‘NORDIC NOIR’는 개인보다 더 큰 것들이면 무엇이든 그것이 할퀴고 간 커다란 현재의 상처에서 태어난 것이고 그 상처를 먹고 자라나는 나무이다. 그런데 이는 누누히 말해왔듯, 심농의 매그레 역시도 같다. 매그레가 태어났고 성장을 해가던 프랑스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더 그렇다. 매그레가 태어났던 당시의 프랑스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았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에서 거대하게 뿌리를 내려가던 히틀러의 나치즘을 바로 마주하고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점점 거세어지는 파시즘의 영향으로 일대 혼돈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미국의 공황과 더불어 열악해진 경제적 상황은 더욱 더 프랑스 개인에게 힘들고 비참한 삶을 강요했던 것이다. 영화사적으로도 중요하게 평가받는 1930년대의 프랑스 영화의 일련의 경향들을 보여주는 시적 리얼리즘은 바로 그 같은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다. '시적 리얼리즘'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휘말려버린 한 개인이 겪는 좌절이나 고통들을 있는 그대로 흔히 그려내곤 했는데 그건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했던 바로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영화가 그렇게 시대적 상황에 '시적 리얼리즘'으로 반응했다면 거기에 심농의 ‘매그레’는 문학적으로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심농의 ‘매그레’는 정확히 헤닝 만켈이 당시의 스웨덴에서 보았던 그것에 대한 반응과 똑같은 반응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외연을 확장한다면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 또한 매그레의 프랑스나 만켈이나 라르손의 스웨덴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극심한 신자유주의는 내내 인간을 거대한 경쟁의 물결 속으로 내몰고 있으며 여기에 점점 현격해지는 양극화로 인한 경제적 빈곤까지 더해져 사람들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심히 절하시키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이 이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내몰린 자들의 비참함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여주던 매그레와 'NORDIC NOIR'는 지금 그러한 자들의 슬픔이 점점 만연해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역시 그러한 존재가 되어줄 것으로 믿는다.


   결론적으로 지금의 ‘NORDIC NOIR’와 심농의 매그레는 그리 다르지 않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그 둘은 또 그렇게 모두 비슷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두려움과 불안에 의한 그리고 저항을 위한 반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NORDIC NOIR’가 현재 동시대의 참모습을 알려주는 목소리로서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면 심농의 매그레 역시도 그러한 호소력을 지금 우리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매그레는 시대에 뒤떨어진 그저 그 때의 추억으로 자신의 생명을 늘려갈 뿐인 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고 때로는 연민과 위안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세 권을 읽어본 현재 나는 이것을 확신할 수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두서없이 마구 써내려 왔지만 과연 어느 정도 당신에게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이러한 매그레의 진정한 가치를 음미하기 위해선 앞서도 말했듯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 공감을 위한 감성을 가지기 위해선 사실 시간이 필요하다. ‘NORDIC NOIR’의 소설의 진행이 느린 그 진정한 이유가 뭘까? 그것은 그 곳들이 대체적으로 밤이 길기 때문이다. 그들의 삶에서 밤이란 ‘더불어’의 시간이 아니라 늘 온전한 개인만의 시간이다. 그들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고 희미한 조명 아래서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 ‘NORDIC NOIR’는 주로 그 시간을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밤이 긴 만큼 사유의 시간도 길어지고 그만큼 속도도 느려진다. ‘NORDIC NOIR’의 전개 속도는 바로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함이라 할 수있다. 그래서 천천히 소설을 통해 한 인물을 읽듯이 스스로의 삶을 돌아볼 여유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매그레를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바로 그러한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정말 필요하다고 본다. 이것은 되도록 혼자인 시간에 천천히 삼켜야 하는 소설이다. 매그레의 문장들은 간결하고 빠르지만 그 심플한 매무새에 담겨있는 것은 오래 숙성시켜야 비로소 맛볼 수 있는 와인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어떤 강박증과고 같이 늘 뭔가에 그저 빨리 도달해야만 하는 우리들에게 너무 무리한 주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우리들이기에 이렇게 조금쯤은 멈추어 서서 주위를 돌아보게 만드는 이러한 소설들이 더욱 더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오래도록 천천히 읽어라! 오랜만에 도시를 벗어나 어느 한적한 산책길을 걷듯이 그렇게. 내가 정말 해주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그러면 매그레야 말로 당신의 가장 좋은 벗이 되어 줄 것이다. 여기에 대해 카린 포숨이 했던 말을 인용함으로써 글을 맺을까 한다.

   “오늘날은 뭐든지 빨라야 되고 시간을 들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즉석 식품이나 분말 코코아, 인스턴트 커피 처럼 말이다. 하지만 산다는 건 늘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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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남매맘 2011-07-11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르메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마지막 말 좋네요. 시간을 들인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