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전설의 시작을 손에 들고 있다. 

   이 첫문장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썼다가 지웠는지 모른다. '타인의 목'을 읽고 매그레의 매력에 빠졌고 더 많은 매그레의 작품을 보게되기를 기다린지가 벌써 십여년을 훌쩍 넘었다. 그래서 다시금 찾아온 매그레가 너무도 반갑고 또한 이 매그레가 세계문학사에 남긴 커다란 족적에도 걸맞게 첫문장을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좀처럼 따라와주지 않는 머리.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당신이 알고 있는 언어의 크기가 바로 당신이 가진 세계의 크기라고 말했었는데 아... 내 세계가 이다지도 협소했단 말인가... 

   아무튼, 손바닥에 침을 뱉어 그것을 튀겨 방향을 정하는 심정으로 일단 첫문장을 저렇게 써두고, 오매불망 십여년의 기다림이 결실을 맺어 이제 뚜렷한 존재감으로 이것이 꿈이 아님을 말하는 매그레 시리즈의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을 넘겨본다. 

  혹시 유명한 명탐정들이 어떻게 등장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지? 

  우리네 시대의 유명한 탐정들이라면 대표적으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아가사 크리스티의 엘큘 포와로 그리고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이 될 것인데 이들은 모두 소설 속 등장인물의 눈에 보여지는 것으로 처음 등장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그들은 보여지는 대상, 관찰가능한 대상으로서 처음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퍼즐러' 그러니까 수수께끼의 해결이 주가 되는 추리소설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는 구성이기도 하다. 대부분 이러한 소설들은 거의 초인적인 두뇌 능력으로서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하기에 그렇게 천재적인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사고과정을 숨길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그들의 머리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그저 바깥으로 물러난 구경꾼이 되어 명탐정이 펼쳐보이는 화려한 추리쇼를 구경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독자들은 명탐정에 종속적이며 그런 위치에서 독자들은 명탐정이 보여주는 세계에 대한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퍼즐러'의 추리소설에서 독자들이 명탐정을 통해 바라보는 것은 '세계'이다. 이에 관해 세계적인 경제학자이기도 한 에른스트 만델이 자신이 좋아했던 추리소설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한 책 '즐거운 살인'에서 왜 하필이면 근대 이후에 '퍼즐러' 추리소설들이 널리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파헤친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는 그러한 추리소설들의 인기가 사실은 근대 이후의 혁신적인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급격히 팽창하게 됨으로서 이제 세계가 한 개인의 이해가능한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버렸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다. 즉 이렇게 독자 개인의 이해영역을 넘어서버린 세계를 그래도 자신의 이해영역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구가 바로 셜록 홈즈를 비롯한 수많은 명탐정의 인기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만델의 말 그대로 '퍼즐러' 추리소설에서 독자들이 바라보는 것은 인간이 아닌 '세계'다. 그리고 거기서 명탐정의 수수께끼 해결은 불가해한 세계를 이해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일에 다름아니다. 때문에 '퍼즐러' 추리소설들은 급격히 팽창하는 세계로 인해 불안해하던 독자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래서 세계가 불안해지면 불안해질 수록 사람들은 마치 종교를 찾듯이(어떤 작가는 이러한 독자들의 열광을 메시아에 대한 열광과 흡사하다고도 말했다.) 추리소설들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추리소설의 황금기'라고 불리는 1920년대에서 30년대를 생각하면 저절로 수긍이 될 것이다. 1차대전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들과 공황 그리고 파시즘의 성장... 이렇게 세계 정세가 급변하던 시대였던 것이다. 

 

   심농의 매그레 데뷔작, '수상한 라트비아인'은 1931년 그러니까 그 황금기에 태어난 작품이다. 하지만 '퍼즐러'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 길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그야말로 전인미답의 길이었기에 독보적이었다. 매그레가 가지는 그 독특성은 바로 매그레의 첫등장에서 부터 잘 나타난다. 

  매그레의 첫 등장은 이렇다. 

  기동 수사대의 매그레 반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거무튀튀하니 굵직한 연통으로 천장과 연결되어 집무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주철 난로의 소음이 왠지 약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매그레는 시작부터 전면에 나타난다. 그는 누군의 눈에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다. 문장에서 잘 드러나듯이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그인 것이다. 그는 고개를 번쩍 들고 바라본다. 그는 더이상 객체가 아니다. 그는 바라보는 주체이다. 뒤이은 문장에서 그는 자신의 사무실 세계를 바라본다. 그리고 소음이 약해지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독자는 이제 '퍼즐러'에서 하듯이 탐정의 바깥에 있지 않다. 독자는 이제 탐정을 매개로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 그는 바로 탐정의 내부로 들어가며  바로 그와 혼연일체가 되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구경꾼이 아니라 매그레와 더불어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장의 마지막 '느낌이었다.'라는 말처럼 보는 게 아니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퍼즐러' 추리소설에서 있어서 독자에게 가장 중요했던 기관은 '눈'이었다. 독자들은 혹시라도 단서를 놓치지 않을까 싶어 잔뜩 눈에다 힘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매그레가 새롭게 열어보이는 이 신천지에서는 더이상 '눈'은 중요한 기관이 아니다. 매그레에 의해서 이제 세계는 해석이 아닌 '이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해'의 가장 근원적인 정의라고 한다면 '타인의 자리에 서 보는 것'이 될 것이다. 완벽한 이해란 이해의 대상이 되어보지 않으면 불가능할테니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 대상의 자리에 서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우리는 오로지 상상력의 힘으로만 그 자리에 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상상력의 원천이 되는 것이 바로 '느끼는 것' 즉 감성이다. 

  이렇게 그들의 FIRST LOOK에서는 그들이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 독자들이 그들에게 바라고자 하는 것들이 명확히 다른 것임을 똑똑히 드러낸다. 퍼즐러의 추리소설에서는 독자들이 점점 자신의 이해가능한 영역을 넘어 커져만 가는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그것들을 찾았다. 그렇다면 매그레의 경우엔 독자들이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매그레 시리즈는 전 세계 5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고 5억권 이상 팔려나갔다고 한다.(이것은 심농 전체의 소설을 통합한 수치인지라 정확하지 않지만 심농에게 있어서 매그레 이외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매그레 만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아마 그 중8 ~90%는 분명 매그레의 것이리라. 그렇게 감하고 본다고 해도 역시 어마어마한 판매량임엔 틀림없다.) 그러니까 정말로 많은 독자들이 국경을 넘어 시대를 넘어 매그레를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매그레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얻었기 때문에 그토록 사랑했던 것일까? 물론 매그레는 '퍼즐러'가 주었던 것을 주지 않는다. 독자는 그의 소설에서 구경꾼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매그레와 함께 보고 느끼고 세상과 사람들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언제나 예외없이 세상에서 소외되고 운명 앞에서 나약한 비참한 삶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심농은 한 인간에서 자신이 매그레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한 인간의 삶'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그 인간의 삶을 보다 더 잘 보여주기 위해 그 자신이 매그레와 언제나 일체가 되려고 노력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심농은 한 인간의 삶을 독자들에게 펼쳐보이는 데 있어 아주 공을 들인다. 그래서인지 독자들은 그가 세공한 그 인간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어쩐지 그가 꼭 그만의 삶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들의 삶은 아무리 다양하다고 해도 어느정도는 보편성을 띠게 마련이다. 그래서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잘 구현하면 독자들은 어느 누구든 그의 삶에서 자신의 삶과 닮은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에는 그런 호소력이 있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가 어느 특정한 주인공 개인의 엄마의 일을 그리고 있지만 그것을 읽은 사람들은 자신의 엄마를 떠올리는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매그레를 읽는 독자들은 거기 구현된 한 인간의 삶이 사실은 자신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살면서 남몰래 느꼈던 비애감이나 우울들이 그렇게 다른 누군가에게 투영된 흔적을 본다. 그리고 독자는 생각한다. 그래 나만이 이런 아픔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었구나, 이 세상에 다른 누구도 나와 똑같은 고민 나와 똑같은 아픔을 느끼며 살고 있었구나 하는 걸. 더우기 매그레는 그러한 한 인간의 삶에 깊은 이해와 연민의 시선마저 던진다. 매그레는 절대 법대로 처벌하는 법이 없다. 그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생을 마주할 때 그는 절대로 경찰관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보통의 인간으로서, 그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이해한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행동한다. 상처입은 아기사슴을 그저 가슴에 안아줄 뿐이 어린 아이 처럼... 매그레는 그렇게 위안을 준다. '힘들었지?'하며 떨리는 어깨를 토닥여준다. 바로 그러한 것을 매그레가 주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이 세상 어디에선가 여전히 매그레를 벗하고 있는 것이다. 

 

  매그레는 단순한 추리소설이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읽는 것은 그냥 그저 그런 남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읽는 것은 바로 당신 자신의 이야기이다. 매그레의 첫 등장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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