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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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은 끝났다. 날들은 온기를 잃었다. 사람들로 가득 붐비던 여름의 해변은 황량하게 버려졌다.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가버린 여름의 축제를 아쉬움으로 곱씹게 만드는 계절,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대한 예감으로 한층 더 움츠리게 되는 계절이.

 

 75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미국은 그런 계절이었다. 72년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75년 베트남 전쟁 패배로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고 있었던 자신의 나라와 거기에 투영되었던 이상이나 꿈들은 광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윙윙' 메마른 바람소리만 맴돌고 있는 앙상한 가지들이 그러하듯이 그저 공허와 회한만을 가득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마치 이것의 반영이기라도 하듯, 이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비극은 모두 가을에 일어난다. 소설의 첫 죽음인, 다리가 하나 밖에 없었던 여자 아이 모니카가 죽은 건 가을이었다. 뒤이어 낙마로 달랜더 부인의 아들 레슬리가 죽었던 것도 가을이었다. 여주인공 네드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때도 가을이었고 네드라가 자신의 남편 비리를 떠났을 때도 그랬다. 마치 운명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네드라는 아예 가을에 죽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공교로운 시간의 겹침은 아무래도 우연의 소산이라 보기는 힘들고 그 자체로 분명히 하나의 의도를 드러낸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70년대의 암울했던 미국의 분위기에 대한 비유이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의 말을 살짝 인용하자면,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었던 '모든 단단한 것들은 이제 대기 속으로 녹아 흩어져' 버렸으며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암시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은 58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20년 가까운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이 보여주는 그들의 궤적은 마치 이제 곧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황혼의 아스라한 마지막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가버린 미국에 대한 레퀴엠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진혼곡이 사실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듯 이 소설 역시 그저 지나간 것의 씁쓸함만 되새기게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70년대 초반 미국이 그랬듯이 이제 곧 닥쳐올 희망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둔 밤 가운데 어떻게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더욱 말해주려 한다고 생각된다. 즉 이 소설은 주로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그것은 갑자기 닥쳐온 밀물에 느닷없이 무너지는 모래성만큼이나 연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해변으로 떠 밀려온 유실물들로 생존해 나가듯이 삶이 아무리 산산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그 파편 속에서나마 삶의 지속을 위한 교훈은 없는지 또한 찾아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끝이라고 해서 그냥 닫혀진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마저 포용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라도 그 끝을 계속 열어보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나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항로이다.

 

 그렇게 소설은 과연 처음엔 참으로 단단하고 완벽한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대함을 믿고 있는' 비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덕목인 양,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덕목인 양(p.65)' 여기며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빛나는 영예가 발견될' 나날을 그리며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리라 생각하고 있고 '네드라'는 '식사와 침대 시트 그리고 옷'이라는 오로지 '실존의 핵심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가사와 거기에서 비롯된 허기를 메워줄 뉴욕에서의 사치스러운 쇼핑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50년대 중산층 백인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 그 'WASP'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50년대는 분명 그랬다. 냉전시대 덕분도 있었지만 2차 대전의 승리로 고양되었던 미국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중산층 백인 가정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그저 가벼운 나날들을 구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와서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가려졌었던 인권과 평등 문제가 불궈지고 거기에 차츰 사람들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이제 그런 미국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인권과 평등 모두에 있어서 사각지대에 있던 흑인과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엄과 권리를 부르짖었고 거기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대처로 인해 국가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로부터 개인의 전적인 해방을 주장하는 히피즘도 나타났다. 60년대에 들어와 이제는 전처럼 '파티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고픈 욕망'도 없고 '유명한 사람들을 알고 싶거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마음이' 사라져버린 네드라의 변화는 정확히 이를 나타낸다. 그녀는 아울러 '혼자 있는 것'이나 '나이 드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히피즘이 바로 그랬다. 어떤 모습이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히피즘의 모토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네드라는 남편이 아닌 남자 지반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행복한 부부란 건 지루해. 더 이상 믿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 행복한 부부란 건 스스로를 속이는 거라고'하면서 남편 비리와의 이혼을 생각한다. 비리 역시 카야란 여성에 대한 욕망에 빠지게 되면서 결혼을 이미 선택한 이상 다른 것은 할 수 없게 만드는 굴레로 여긴다. 균열은 이렇게 찾아왔다. 균열로 두 갈래로 나뉘어버린 흐름이 물과 기름처럼 전혀 만나지 못했던 당시의 미국이 그랬듯이 비리와 네드라의 결혼 역시도 그저 의무감에서 지속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파국의 가을이 찾아왔고 그토록 완벽하고 견고해 보였던 비르와 네드라의 결혼은 대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똑같이 60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케네디는 암살 당하고 그동안 꿈꾸었던 모든 이상에 대한 차가운 마지막 비웃음이기라도 하듯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손에 의해 벌어진다.

 

 여전히 50년대의 미국을 믿는 중산층 백인 가치관을 대표하는 비리는 그제서야 묻는다.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고. 그 다정하고 쾌활한 웃음이 넘치던 애머갠셋의 집은 이제 비워졌다. 결국 그는 네드라에 대한 기다림의 상징과도 같았던 집을 팔아버린다. 거기서 보냈던 완벽한 여름은 이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계절에 열여섯의 네르다는 당시에는 감옥과 다를 바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탈출했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한껏 열린 계절. 하지만 그 여름의 의미는 이제 변질되었다. 네드라는 애머갯센의 집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하다. 그녀는 또다시 탈출을 꿈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건 자신의 내적인 삶에 충실하기 보다는 비리의 고백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p.67)

 

 거기서 환한 햇살은 이제 더 이상 충만한 삶을 누리게 해주지 않는다. 대신 주목을 향한 열망에 가리워져 있었던 삶의 진실을 보게 만든다. 빛 가운데서 은폐는 더 이상 힘을 잃는다. 이는 소설 초반부터 이미 나와있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비리와 네드라의 집을 묘사할 때 부터 말이다.

 

 강가의 집은 온실의 지붕을 따라 철제 장식이 있는 집이다. 강가의 집이라 오후 햇살을 받기에는 지대가 너무 낮았다. (...) 집은 정오가 되면 찬란한 햇살에 잠겼다. 칠이 더러워지거나 벗겨진 곳이 눈에 뛴다.(p. 24)

 

 햇살은 이렇게 완벽한 가정이 사실은 어떤 위장임을 드러낸다. 두번째 문장에서 가정이 환영에 불과한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것은 햇살을 충분히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걸 은연중 드러내기도 한다. 햇살의 이러한 의미는 이보다 먼저 소개된 '어젯밤'에 나오는 첫단편인 '혜성'에서도 암시된다. 그 단편의 주제는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인데 여자주인공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러다 환한 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그만 발을 헛딛는 바람에 몸으로 깨닫게 된다. 빛은 이렇게 진실을 드러내는 창구가 된다. 네드라는 여름의 환한 햇살 속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진실과 진정한 자기 욕망을 깨닫는다. 네드라에 대한 비리의 미련은 그런 빛을 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환한 봄볕 속에서 자신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공교롭게도 그 때의 깨달음에 이르게 한 건 거북이다. 사실 그 거북이는 이전에도 한 번 나타났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P. 67)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이건 이 소설의 대전제다. 두 번 등장하는 거북이를 통해 이 소설이 말하려 하는 것은 그 전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북이와 마지막의 거북이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인용된 문장의 거북이는 먼 눈으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저 생각없이 걷고만 있다. 한 마디로 이 거북이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이미 하나의 길을 선택한 순간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 비리가 그랬다. 그는 한 번 가정을 선택했다면 아예 다른 선택은 생각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카야에 대한 미련도 아이들을 위해서 접고 이탈리아에서의 다른 여성과의 만남으로 또 한 번 삶의 변화를 맞딱드렸을 때 조차 여전히 네드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지막의 거북이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구슬처럼 맑은, 연한 색의 눈이 불안하게 시선을' 돌리고 '등딱지 속으로 몸을' 숨긴다. 비리가 땅에 내려놓기까지 했으나 움직이지도 않는다. 걷지 않는 거북. 주위의 상황을 가만히 헤아리는 거북이의 모습이다. 그걸 보고 비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은 숨을 쉬는 듯했다. 마치 그를 알아보고 숲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변화를 느꼈다. 깊게 감사하듯 감동을 느꼈다. 피가 머리를 빠져나와 온몸에 돌았다.(p. 436)

 

 여기에서는 빛의 변화도 감지된다. 처음 거북이를 떠올렸을 때 비리는 이제 막 비쳐드는 아침 햇살 속에 있었다.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햇빛이었기 때문에 모처럼 깨닫게 된 삶의 대전제에 대해서도 그릇된 태도를 지향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는 오래도록 고통을 느낀다.  그가 그 햇살을 '차갑게 느낀'(p.65)것도 당연했다.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포근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였다.

 

 이미 이 소설이 새로이 열려는 시작이 무엇인지는 여기에서 암시되고 말았다. 그렇다. '변화를 받아들임'이다. 손 끝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쥐려 애쓰지 않는 것. 방생을 하듯 닥쳐온 변화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제임스 설터가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그마나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언이었다. 소설에서 햇살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햇살은 앞서도 진실을 밝히는 창구가 되었듯 다른 여러가지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인다. 네르다는 사랑스러운 햇살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녀의 딸 프랑카와 함께 햇살 속에 있을 때는 성스러운 햇빛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햇살일까? 이는 그저 가을이란 계절(처음에 난 이 소설을 가을의 소설이라 말했다.)이 여름날 그 많았던 햇살을 그리워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 눈부심, 따스함 보다 사실은 그 충만함 때문이다. 빛은 장소와 사물을 가리지 않는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자신을 나눠주는 것이 바로 햇빛이다. 그만큼 타인에게 열려있고 다른 세계에 열려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햇빛이다. 제임스 설터가 햇빛을 그토록 중요하게 취급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때의 미국이야 말로 필요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비리와 네드라처럼 60년대의 미국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때의 균열은 그때까지의 거짓된 환영을 부수고 새로이 이상적인 미국을 열 수 있는 변화의 계기도 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닥쳐온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과거의 가치를 고수했고 다른 변화를 이끌었던 이들조차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보단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결국 미국은 제멋대로 뻗어나간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터는 거기에 다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노인 화가처럼 여전히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잎새를 붙이려 한다. '끝이 아니다.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 걸어야 할 땐 걷고, 웅크릴 땐 웅크리는, 그렇게 세계를 두루 살피고 변화에 나를 열며 타인과 서로 교감하자.'는 잎새를. 때문에 이 소설은 환멸을 딛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세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만큼 환멸도 반복되었다. 미국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반복했다. 90년대 초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릭 루디라는 작가는 그 때 다시 한 번 붕괴된 가치관을 제임스 설터처럼 70년대의 한 부부에게 닥쳐온 가치관의 위기에 빗대어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그게 바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만든 이안 감독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었던 '아이스 스톰' 이었다. 어쩌면 릭 루디는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들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의 위기를 그리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위기를 형상화하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나날'이 나온 2년 후에 영화 감독 로버트 브레송은 '아마도 악마가'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설터가 느꼈던 비슷한 환멸을 드러낸 영화로서 여기엔 어른이 나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청소년들이며 그들은 그 어떤 이념도 믿을 수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 한다. 더이상 어른들의 가치를 믿지 않게 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근거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로버트 브레송은 제임스 설터와 우리를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총체적 꿈은 깨어졌으며 우리는 그 파편들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공유한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제임스 설터의 세밀화가 그저 개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함이다. 이는 분명한 동시대에 대한 언급이었고 대안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의 유통기한이 70년대에 머무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시대에 대한 환멸만큼이나 이 소설의 생명력 또한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릭 루디가 '아이스 스톰'에서 다시 한 번 비슷한 세계로 들어간 것과도 같이 2001년의 9.11에서도 그 뒤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또 2008년의 미국 금융 위기에서도 늘 다시금 들춰지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그만큼의 희망 역시 깃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마지막 잎새에 비유한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러리라 생각한다. 시대와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이 몸을 가위처럼 누를 때마다 소설 속 그녀가 잎새를 보았듯이 그 세밀하고 사려깊은 문장들 틈에서 자신만의 희망 광맥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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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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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알고 보면 참 신기한 종교이다.

 원래 기독교는 저 변방의 그리 풍요롭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별달리 세력도 없는, 그것도 겨우 한 부족이 섬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 야훼는 당시만 해도 세상에 널린 허다한 신들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 신의 위치에 서 있지만 말이다. 그가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한 데 있었다. 로마가 그러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절대 지금과 같은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 그건 예수 부활 승천 이후 그의 제자들이 각지로 전도를 다녔던 여정을 기록한 사도행전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 한 대목엔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그리스에서 전도를 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그리스에선 사람들에게 뭔가 알리려면 언제나 아고라에서 행해야 했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 열심히 강론했다. 주로 유일신 사상과 원죄의 삶과 그 구원에 대해서였다. 그리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 마디로 비웃는다. 도대체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비아냥거린다. 당연했다. 그들은 제우스도 있고 헤라도 있으며 바다는 포세이돈, 태양은 아폴론 하듯이 여기저기에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형편에 어떻게 신이 하나라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어오겠는가? 또한 원죄의 삶과 구원이라는 것도 그들에겐 헛소리에 불과했다. 삶 자체가 어찌 원죄일 수 있단 말인가? 삶은 그저 사는 것이며 그냥 누림의 대상이 아니던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그들은 원죄 운운하는 베드로의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논쟁을 건다. 철학에 능숙한 그들답게 증명해 보라고 소리친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아는 것이 많지 않고 말솜씨도 별로 좋지 않은 그다. 철학과 화려한 수사로 무장한 그들 앞에서 설득은 이미 물 건너 가 버렸다. 그냥 믿으라고 외칠 뿐이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가 전파될 때 말은 별로 힘이 못 되었다.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기독교는 광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로마의 황제가 불현듯 하나님의 위대함을 경험이라도 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알고 보니 기독교의 교리가 다른 것 보다 워낙에 월등한 것이라 여기기라도 했던 것일까? 모두 아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직접 사는 모습으로 기독교를 믿으면 얼마나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주 부유한 자들조차도 가진 것들을 모조리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이웃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라 얼른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당시 기록에 따르자면 분명 그랬다.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좋아했고 점점 믿어나갔다. 그들을 교화시켰던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그리스 전도 여행과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신앙인이 정말 무엇에 힘을 써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번지르한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행하는 실천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로지 말로 하는 전도에만 힘을 쓴다. 생활속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삶을 바꿀 수 있게 만드는지 그걸 실천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저 찾아가서 전하고 억지로 오게 만들고 그런 것에만 힘을 쓴다. 신도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삶에서 예수가 말하는 것을 실천하기 보다는 교회 내에서 높은 직분에 오르는 걸 더 힘쓰고 헌금이나 십일조 혹은 주일성수와도 같은 요식적인 것으로만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애쓴다. 내 이웃들에 대한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을 드러내기 보다는 나만 드러내고 높일 수 있는 것에만 헌신적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기독교는 감동이 없다.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아무런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아니 오히려 더 못난 모습을 보여줄 뿐인데 어찌 믿게 만들 수 있을까? 해서 지금의 교회는 악을 쓴다. 삶에서의 실천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이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건 깨닫지 못하고 이단이 많아서라는 둥 아직 전도와 선교가 모자라서라는 둥 악을 쓴다. 말, 말, 말만 넘쳐난다. 지하철 안에서 외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들었을 때처럼 아무런 공감을 주지 못하는 말만큼 시끄러운 것은 없다. 지금의 기독교는 자꾸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해져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고 하지만 정작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현재 기독교의 모습이란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정말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그것이 종교의 궁극이다. 종교란 기복이 아니라 결국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날 때라야 완성된다. 사람들도 그걸 안다. 그것으로 가짜 종교인과 진짜 종교인을 구분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삶의 변화는 도외시한 채 여전히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 교회를 더 크게 짓거나 그저 신자의 수만 불리려는 것으로. 그럴수록 자신의 입지만 더욱 줄어들게 할뿐인데도.

 

 

 그런 현실의 안타까움이 한 권의 책을 낳았다.

 

 카톨릭 대학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맡아 가르치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단적으로 지금의 기독교가 눈이 멀었다고 말한다. 돈과 권세라는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멀어버린 눈에게 다시 올바른 시각을 찾아주기 위해 쓰여 졌다.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여타의 다른 학문에 대한 비판과 다르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기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물론 성경이다. 교리에 대한 것이든, 그 신앙 태도에 관한 것이든 모든 건 다 성경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 기독교에 대한 날선 비판의 수리검을 날리는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을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병이어'나 ''산상수훈'등 특히 잘 알려진 모두 18개의 예수 에피소드들을 대상으로 한다.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달리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김경집이 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익히 잘 알려진 그 이야기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들이 원래 성경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고정관념처럼 그 의미가 굳어진 근저에는 평범한 신도들의 목사나 전문가들의 해석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강조하고 평신도들이 설교나 책 이전에 먼저 스스스로 헤아려 볼 것을 권유하기 위해 그는 오히려 아주 익숙한 것들에 새로운 해석의 물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역사적 실증이나 해석학등 인문학적 방법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다시 말 해,  이 책은 누가 더 성경이 말하는 원뜻에 맞는가를 두고 겨루는 진검승부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궁극엔 정말 중요한 것은 나만의 초식으로 성경을 해석해보는 것이며 바로 그 자발적 움직임을 고취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방향성에 대해 나 역시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나와 같은 평신도들의 무비판적 추종이야말로 오늘날과 같이 부끄러운 기독교의 모습을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믿음이 주가 되는 것이 신앙이지만 올바른 성찰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그저 맹종에 불과하다. 또한 변질과 부패로 가는 길에 있어 맹종만큼 빠른 지름길도 없다.

 

  앞서도 신앙의 완성은 실천이라고 말했지만 그 실천 역시도 이러한 성찰적 믿음에 근거할 때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집이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그것이다.  잘 알려진 예수의 행적들을 중심으로 그 참뜻을 다시금 밝혀 진정한 실천을 가로막는 방해물과도 같이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정당화하는 핑계 거리나 제공하는데 그치는 말들을 제거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날리는 모든 수리검은 오로지 삶의 실천으로 이끄는 자기 성찰적 믿음이란 과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를 위해서 김경집은 성경의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모든 꼭지마다 거기에 더하여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와 같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실까지 알알이 박아놓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그토록 성찰적인 믿음이 또한 그것이 바탕이 된 실천이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때문에 읽는 이로서는 아무래도 태도의 변화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걸 위한 것이다. 이 책이 성경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어쩌면 이 책에서 더러 해석상의 오류나 표현상의 잘못을 잡아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에 천착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소한 잘못으로 무시하기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뜻이 너무도 당위적이고 신앙인이라면 더욱 절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이들에겐 오래 만에 해갈을 하는 듯 한 기분을 느길 수 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주일날 주보 대신 이 책을 돌리고픈 마음이다. 부디 이 책을 읽어서라도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하는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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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웃긴 사진관 - 아잔 브람 인생 축복 에세이
아잔 브람 지음, 각산 엮음 / 김영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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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환영합니다.

저희 사진관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들어가시기 전에 나중에 있을 오해를 미리 막기 위하여 먼저 알려드릴 말씀이 있는데... 네? 아! 소문을 듣고 오셨다구요. 그럼, 여기가 어떤 사진관인지 잘 아시겠군요. 다행입니다. 사실 잘 모르시고 오시는 분들이 꽤 계셔서 저희도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거든요. 여기는 사진을 찍는 곳이 아니라 보여드리는 곳인데 자꾸만 이런 저런 사진을 찍겠다고 찾아오셔서 저희도 꽤 난감한 처지라서요. 물론 설립자에게 저희도 몇 번이나 건의를 했었죠. 제발 오해를 사지 않도록 사진관이라는 이름은 바꾸자고요. 하지만 안된대요. 사진관이라는 이름 자체에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나 뭐라나. 그렇게 물으셔도 안타깝지만 저 역시 그 담긴 뜻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대답해 드릴 수가 없네요. 원래 스님이라서 그런지 그 속뜻을 여간 헤아리기가 쉽지 않아요. 어떤 땐 그 왜 있잖아요? 염화시중을 내가 직접 재현하고 있는 것 같다니까요. 아, 이런 저도 모르게 손님께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군요. 제가 그동안 좀 쌓인 게 있어서 계기만 있으면 이렇게 튀어나온다니까요. 그래도 손님께 넋두리를 하면 안되는 것인데 정말 죄송합니다.

 

 네? 설립자 이름요? 아잔 브람이라고 해요. 맞아요, 외국인이죠. 원래는 영국에서 살았다고 하더라구요. 역시나 놀라시는군요. 다들 그러시더라구요. 외국인인데 스님이라고? 흔하지 않는 케이스이긴 하죠. 염불이나 제대로 외우기는 하는 건가 라고 말하는 손님도 계시고. 그래도 호주 최초로 절도 세웠다고 하니 그렇게 능력이 없는 건 아닌가 봐요. 네. 호주에 사시지만 자주 이리로 오십니다. 오셔서는 이런 저런 좋은 말씀들을 들려주고 가시고는 하지요. 멀쩡하게 대학까지 다 나와서 그 때까지의 삶에 진력이 났는지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3년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안착하게 된 것이 불교였다고 해요. 자기 딴에는 17세에 학교에서 우연히 불교 서적을 읽고 바로 자신이 불교도가 될 운명이란 걸 알았다고 하지만. 뭐 그런 말은 저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제가 6살 때 우연히 제가 찍힌 사진 앨범을 보다가 여기서 일할 운명이라고 일찌감치 깨달았다면 믿으시겠어요? 뭐라구요? 손님은 7살 때 저와 데이트 할 운명이란 걸 알았다구요. 한 술 더 뜨시는군요. 불행하게도 업무 중에 사교적인 행위는 일체 금지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흑심을 억누르기 위해서라도 얼른 저의 본직에 충실해야겠군요.

 

 제가 업무 중 누적된 불만으로 좀 비난조로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사진관은 제법 내실 있다고 자부합니다.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능력과 성격이 따로 노는 사람. 사람은 좀 꽉 막혀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람 마음 달래주는 실력 하나만큼은 참 뛰어나요. 그러니까 저도 늘 툴툴거리면서 아직도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죠. 사표 던지러 갈 때는 일도 양단의 굳은 각오로 가는데 그 앞에서만 서면 왜 그렇게 속절없이 허물어지는 것인지 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요. 아무튼 제가 늘 경험한 것이니까 믿으셔도 돼요. 어루고 달래는 능력만큼은 탁월하다는 것을. 입소문을 듣고 이 사진관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지 않겠어요?

 

 들어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안엔 모두 38장의 사진이 있어요. 아마 지금 당신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눈에 들어오는 사진이 다 다를거에요. 어떤 사진이든 당신 눈에 들어온 사진이 있으면 그 앞에 가서 가만히 서 계시면 되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래요 명상을 하듯이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귀를 기울여 보세요. 그럼 사진에서 아잔 브람의 목소리가 가만히 들려올 거에요. 저희 사진관은 그런 사진관입니다. 뭐 정확히 말씀은 안하셨지만 제가 추측해 보건대 아마 사진 앨범 같은 것에서 영감을 얻어 이런 사진관을 세운 게 아닐까 싶어요. 왜 그렇잖아요? 사진 앨범을 넘기다 보면 같은 사진이더라도 그 때 그 때 마음에 따라 다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잖아요. 그저 재밌는 풋풋한 추억만 전해주던 사진이 슬플 때 보니 큰 위로가 되어주던 경우가 있지 않던가요? 또 어떤 사진들은 뒤늦게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그 날의 마음 상태에 좌우되는 것이거든요. 아마도 그런 경험이 이러한 모습의 사진관을 세우도록 한 게 아닐까 싶어요. 많은 분들이 이 곳을 찾아 오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편안함 때문이죠. 제가 감탄하는 설립자의 능력이기도 한데 이 사람 참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에 딱 알맞은 예화를 잘도 사진으로 담아 놓거든요. 덕분에 그가 하는 말이 더 쏙쏙 들어와요. 원래 유머가 있는 분이시라 그렇지 않아도 귀를 토끼처럼 쫑긋 세우게 되는데 말이죠. 그러니 부담 없이 둘러보세요. 38장의 사진 그 어디서든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머무르셔도 됩니다. 저희는 절대 야박하게 굴지 않습니다. 다른 데서는 손님을 왕이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저희에게 손님은 신이에요. 뭐, 그런 마음으로 모시고 있다는거죠. 하하하!

 

 네? 아! 간판요? 사진관이라는 말만 있어 담백하다구요? 이런, 하하하! 아, 죄송합니다. 웃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너무 뜻밗의 말씀을 하셔서 그만. 사실 간판이 원래 그랬던 건 아니거든요. 그 앞에는 원래 다섯 자가 더 있었어요. 지난 태풍에 그만 날아가 버려서 그렇지. 그걸 여태 수리도 안하고 있었네요. 설립자께서 워낙에 느긋해야 말이죠. 아, 정식 명칭요? 원래 이 사진관의 이름은 '슬프고 웃긴 사진관'이었죠. 그렇죠? 저도 늘 이상하게 생각했다니까요. 도대체 왜 '슬프고 웃긴'이 들어간건지 도무지 모르겠다니까요. 물어봐도 뭐, 이제 그 결과정도는 예측하지 않으실까요? 염화시중. 차라리 태풍이 좋은 일을 해 준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아무튼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럼. 데이트는 업무 끝나면 얼마든지 받아들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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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7-22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보는 사진관,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스님이 꽤 별나시네요 영국 사람인데 스님이 되고, 영국도 아닌 호주에 절을 세우다니... 마음먹는다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 같습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 마음을 어르고 달래주는 것도 잘하신다니...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죠 무엇이든 빨리빨리 흘러가는데, 이곳에서는 느긋하게 보고 있어도 괜찮군요
그 점이 참 좋네요


희선

오드득 2013-07-23 23:44   좋아요 0 | URL
좀 변칙을 부려봤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
봄날에 누워있는 나른한 곰처럼 느긋함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희선님의 말씀이야 말로 갓잡은 연어만큼이나 기쁘게 하는군요^ ^
 
순분 씨네 채소 가게 - 채소 장수 일과 사람 13
정지혜 지음 / 사계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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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 할머니는 동네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놓고 채소를 파셨다. 이제는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 단지가 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집에서 한참 걸어가면 나오는 고개턱에 할머니가 매일 같이 나가서 알뜰살뜰 가꾸시던 채소밭이 있었다. 거기서 배추랑 무, 쪽파며 오이나 상추 같은 것들을 함지박 가득 담아다가 머리에 이고 오셔서는 파시는 것이었다. 사정이 있어 부모님과 떨어져 있었던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습관처럼 할머니를 밭으로 시장으로 따라 나섰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 곳들은 내게 놀이터와도 같았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를 처음 보았을 때 한동안 눈길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그 때 시장에서 할머니 옆에 앉아서 종종 사주시는 과자나 아이스크림(대개는 '쭈쭈바'였다.)을 먹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다리 바라보기를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좌판이었지만 '채소가게'는 그렇게 내 유년의 추억이 진하게 어려 있는 곳이다.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소리. 손님 모으느라 고함치는 소리. 여름날에 늘 나를 꾸벅꾸벅 졸게 만들었던 자장가 소리와도 같았던 시장 끝 동사무소 안마당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에서 맴맴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들이. 하여 읽었다. 그건 내게 그 유년의 기억들이 다시금 3D 입체영화로 상영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터 알았다. 시장이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곳만은 아니라는 걸. 할머니가 좌판을 하고 계시면 참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붙였다 가곤했다. 물론 그 모두가 손님은 아니었다. 사실 채소를 사러 온 이들보다 안부나 묻고 일없이 잡담이나 나누러 온 이들이 훨씬 많았다. 거기서 귀동냥을 하고 있으면 가만히 앉아서도 마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었다. 과자 먹는 것보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더 맛났다.

 그 맛 때문이었을까? 할머니께서도 채소 파는 걸 딱히 신경 쓰시지 않는 듯 했다. 그저 아는 얼굴 만나고 안부나 나누고 이런 말 저런 말 두런두런 나누시는 게 더 좋으신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좋았다. 들렀다 가는 어른들 때문에 별로 지루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그냥 가지 않고 내게 덕담을 해 주거나 더러 용돈도 주곤 했기 때문이다.

 

 시장이야말로 그 어느 곳 보다 진솔한 소통의 장이라는 걸 듬뿍 느꼈다. 주고받는 건 말 뿐이 아니었다. 그만큼 정 역시도 더운 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양푼 가득 담긴 칼국수 마냥 오고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시장은 사람살이의 냄새가 숯불에 구운 갈치만큼이나 진하고 구수한 곳이었고 그건 오고가는 말과 정에 의해 더욱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바로 그 먹음직스런 향기에 취해 사람들은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타임머신처럼 날 유년으로 다시 데려다 준 '순분씨네 채소가게'에 나오는 시장도 그랬다. 이 책은 채소장수의 하루를 보여주지만 그보다 더 맛깔스럽게 그려내는 것은 정감 넘치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장의 모습이다. 꼭 흥정이 아니어도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에 일없는 잡담이 가능하며 기분 좋으면 '옛다!' 하고 푹 더 얹어주는 덤이 있다. 사람이 계산서에 찍히는 가격 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다. 오래도록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 어디 꼭 물건이나 가격 때문에 오는 것이던가? 그동안 쌓인 도타운 정에 이끌려 그걸 또 한 번 더 나누어 받겠다고 찾아오는 법이듯이.

 시장은 돈 냄새, 물건 냄새 보다 맞부딪히는 살 냄새가 더욱 가득한 곳이었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는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살 냄새가 한껏 느껴진다. 그 모든 자락마다 늘 얼굴을 맞대고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하기도 힘들다. 시장에서 그렇게 말을 나누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 가지만 마트에서 그렇게 하면 좁은 통로에서 뭐하는 것이냐며 힐난 받기 쉽다. 시장은 사람이 가격 위에 있을 수 있지만 마트에선 절대 그렇지 못하다. 오고가는 흥정은 '삑'하는 바코드로 대체되고 '얼마입니다.' '일시불로 하실래요?' 외에는 별달리 나누는 말도 없다. 시장은 소통의 공간이지만 대형마트는 그냥 소비를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 시장은 말과 정의 나눔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 또한 높일 수 있지만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그저 물건 사는 단순한 소비자에 불과하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개인적으로 이 그림은 일과 사람 시리즈 첫 권인 '짜장면 더 주세요'에서 나왔던 신흥반점의 아저씨가 카메오로 나와서 더 좋았다.)


 그런 시장이 대형마트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순분씨네 채소가게'에서 다시금 시장의 매력을 듬뿍 느끼게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는 '일과 사람' 시리즈 중의 하나다. '일과 사람' 시리즈는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직업들이 있으며 그 직업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나오고 있다. 그 직업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건 모든 직업이 그 나름대로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그만의 고유하고도 소중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소중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오로지 물건을 사는 경험만 할 뿐이지만 시장에서는 그것뿐 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라든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나누는 교감 등등 참으로 이런저런 풍성한 경험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물건 밖에는 없지만 시장에서는 사람을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시장이 없어진다는 건 그런 소중한 경험을 가져다 줄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 그림에 나오는 많은 목장갑들이 왜 우리가 시장을 보호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저 수 많은 목장갑 하나마다 깃들어 있을 사연과 추억을 생각한다면 시장이란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가 아닌가 싶다. 시장이란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우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언젠가 미래에 문득 떠올리게 된다면 내가 정말 많은 이들과 추억을 쌓아왔구나 느껴져서 문득 누군가 아궁이에 불이라도 지핀 것처럼 마음의 아랫목이 따스해지는.

그런 시장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목장갑의 몇 백배나 되는 이야기가 쌓일 수 있도록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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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7-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군요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곳, 사라져가고 있다니 안타깝습니다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이 안부도 물을 수 있는 곳이라니, 그런 경험은 해 본 적이 없네요
헤르메스 님은 어렸을 때 좋은 경험하셨네요


희선

오드득 2013-07-23 23:46   좋아요 0 | URL
예전 어릴때 느꼈던 시장과 지금의 마트를 비교해보면 우리네 인간관계가 얼마나 삭막해져버렸는가를 단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리뷰에도 쓰려다가 빼버렸는데 요즘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도 이런 식으로 친밀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해요. 좀 더 이런 것을 줄 수 있는 공간으로 시장을 살려나가는 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
 
오직 독서뿐 -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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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 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로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오직 독서뿐' p. 228)

 

 정 민 작가의 새로운 책, '오직 독서뿐'을 읽다가 반가운 글을 만났다. 인용한 글이 바로 그것인데 참으로 오래만의 재회였다. 이 글은 본디 연암 박지원의 것으로 아주 오래 전 그의 문장 선집에서 첫 조우를 한 바가 있다. 그 때 이 글을 얼마나 감탄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사마천이 책을 쓸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역시 당대의 최고 문장가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부터 난 이런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암 박지원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찾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내공을 내 것으로 만들기란 누구나 다 알다시피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비록 그 문장은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였으나 이 글에 연암 박지원이 스며놓은 그 뜻만은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때부터 책을 벗할 때마다 드러난 문장 보다는 왜 하필이면 이렇게 표현했을까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요 몇년 사이 리뷰를 인터넷 서점에 올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만인에게 공개된 곳이다보니 더러 내 리뷰에서 행한 해석을 두고 의문을 표해 오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굉장히 독특한 관점인데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 있느냐를 비롯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는 질문도 받는다.(물론 자주는 아니고 거의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이지만.) 그 때의 내 대답은 이미 예상하시는대로다. 작가가 하필이면 왜 이런 구성을 취했을까 혹은 왜 이런 표현을 굳이 쓴 것일까에 주로 천착하다보니 그렇게 해석하게 되었다고. 근거 역시 바로 거기에 있을 뿐 다른 건 없다고. 추리 소설을 보면 어떤 탐정들은 어떤 증거를 대할 경우 그 자체 보다는 왜 그게 하필이면 그렇게 놓여 있었는지 그 맥락을 먼저 따지는 경우가 있다. 내 리뷰 스타일이 바로 그와 비슷한데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연암 박지원의 이 글이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시 음미해 보아도 여전히 좋은 문장이고 변함없이 좋은 뜻이다. '일침'에 이어 또 한 번의 옛 선조들의 좋은 글들을 모은 '오직 독서뿐'은 이렇게 엄선된 좋은 글들로 읽는 멋과 그 뜻을 음미하는 맛 모두가 좋은 책이다. 이번의 책은 주로 독서와 관련하여 조선 선비들의 글을 모았다. 그렇게 유명한 책벌레라고 소문났었던 '홍길동'의 허균, '성호사설'의 이익, '동사강목'의 안정복, '북학의'의 홍대용, 연암 박지원, 간서치 이덕무를 비롯하여 모두 9명의 내노라 하는 조선의 최고 책벌레들의 글이 여기엔 실려 있다. 책은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글들이 모여 있는 형국인데 그래서 읽노라면 저절로 저마다 다른 책에 대해 중시하는 부분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허균은 주로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흥취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이익은 그 자신 학자였던만큼 책을 통해 학문을 닦는 태도를 보다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글로는 처음 만나보는 백수 양응수는 좋은 독서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는데 어째 그 자신의 시행착오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느낌이 난다. 알아주는 책벌레이자 실학자이기도 한 안정복과 홍대용은 과연 그들답게 '잡서를 경계하라'나 '책 읽기의 못된 버릇'등 아주 실제적인 독서 방법들을 알려주며 박지원은 진짜 책읽기의 고수가 비법들을 들려주는 듯하며 책읽기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야말로 명실상부 책읽기의 대표자 간서치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읽기의 오타쿠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이렇게 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책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나 원칙이든 실제적 방법이든 새겨둘만한 참 좋은 말들도 많지만 이런 식으로 각 존재들의 개성적인 면모마저 드러나기에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요즘은 새삼 독서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어 좋은 독서에 대한 이런 저런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이 참 많지만 진정한 책벌레였던 우리의 옛 선조들은 과연 어떻게 했는지 더하여 알아두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옛 글이지만 거기에 녹아있는 뜻은 전혀 지금 시대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보다 현명하고도 좋은 방법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이 책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내 실제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한데, 사실 여기에 실린 글들 중 마음에 든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호응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묵독 보다 낭독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로 글을 읽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비록 문장들이 한문을 풀이한 것이긴 해도 정 민 작가가 그 쪽도 염두에 두고 번역했음인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풀이를 해서 읽어도 그 맛이 나도록 썼음인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소리 내어 읽는 맛이 제법 크다. 묵독하는 것보다 더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 것도 같고. 아무튼 낭독하기에 어울리는 책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낭독하고 그 뜻을 서로 같이 나누면 더욱 뜻깊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네 서점은 망하고 출판 시장은 계속해서 불황이다. 사람들이 책을 점점 읽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다른 재밌는 거리가 많아서라고 한다. '오직 독서뿐'에 실려 있는 옛 선인들이 들었다면 참으로 기겁할만한 소리다. 그들이 그토록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은 당시 별 다른 여흥거리가 없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독서뿐'에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다양한 많은 말들이 나오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나오지 않는다. 그건 '왜 책을 읽는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그들에게 불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책을 읽음에 있어 '왜?'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책은 그저 읽는 것이니까, 아니 읽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독서란 그들에게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읽었다. 무조건. 그것도 언제나 단정히 의복을 갖추고 바른 자세로. 아침에 일어나서는 가장 먼저 어제 읽은 것을 떠올리고 읽을 때는 그 뜻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몇 번이나 암송하면서. 그렇게 읽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책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겠지만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일단 읽어보라고. 그러면 언젠가 자연히 알게 된다고.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고 했던 한 산악인의 말과도 같이, '홍씨 맛이 나기에 홍씨라고 대답한 것 뿐이온데'라고 했던 어린 대장금의 말과도 같이 아주 단순하고도 자명하게 왜 '오직 독서뿐'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맞다. 진리는 늘 자명하다. 그 경지를 경험한 자들에게는. 그러니 '왜'라는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그냥 닥치는 대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그냥은 읽지말고 이 책에 실린 원칙과 방법들을 유념하면서.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독서가 왜 모든 것인지...

 

 독서는 순수한 몰입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위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전제로 하는 독서로는 거둘 것이 없다. (...) 자발적 독서, 무목적의 몰입, 읽지않을 수 없어서 하는 독서만이 우리 삶을 들어올린다.  업그레이드시켜준다.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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