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김경집 지음 / 시공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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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알고 보면 참 신기한 종교이다.

 원래 기독교는 저 변방의 그리 풍요롭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별달리 세력도 없는, 그것도 겨우 한 부족이 섬기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이 큰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으니 어찌 신기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 야훼는 당시만 해도 세상에 널린 허다한 신들 중 하나였다. 물론 지금은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절대 신의 위치에 서 있지만 말이다. 그가 그와 같은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어디까지나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언한 데 있었다. 로마가 그러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절대 지금과 같은 자리에 이르지 못했다. 그건 예수 부활 승천 이후 그의 제자들이 각지로 전도를 다녔던 여정을 기록한 사도행전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 한 대목엔 예수의 제자 베드로가 그리스에서 전도를 한 기록이 나온다. 당시 그리스에선 사람들에게 뭔가 알리려면 언제나 아고라에서 행해야 했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고라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믿는 기독교에 대해서 열심히 강론했다. 주로 유일신 사상과 원죄의 삶과 그 구원에 대해서였다. 그리스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 마디로 비웃는다. 도대체 저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비아냥거린다. 당연했다. 그들은 제우스도 있고 헤라도 있으며 바다는 포세이돈, 태양은 아폴론 하듯이 여기저기에 많은 신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 형편에 어떻게 신이 하나라는 말이 곧이곧대로 들어오겠는가? 또한 원죄의 삶과 구원이라는 것도 그들에겐 헛소리에 불과했다. 삶 자체가 어찌 원죄일 수 있단 말인가? 삶은 그저 사는 것이며 그냥 누림의 대상이 아니던가. 너무나 현실적이었던 그들은 원죄 운운하는 베드로의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논쟁을 건다. 철학에 능숙한 그들답게 증명해 보라고 소리친다. 그들 앞에서 베드로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할 뿐이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아는 것이 많지 않고 말솜씨도 별로 좋지 않은 그다. 철학과 화려한 수사로 무장한 그들 앞에서 설득은 이미 물 건너 가 버렸다. 그냥 믿으라고 외칠 뿐이다. 이처럼 초기 기독교가 전파될 때 말은 별로 힘이 못 되었다. 문명이 발달한 곳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렇다면 더욱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도대체 무엇으로 기독교는 광대한 제국이었던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로마의 황제가 불현듯 하나님의 위대함을 경험이라도 하게 된 것일까? 아니면 알고 보니 기독교의 교리가 다른 것 보다 워낙에 월등한 것이라 여기기라도 했던 것일까? 모두 아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다.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직접 사는 모습으로 기독교를 믿으면 얼마나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 아주 부유한 자들조차도 가진 것들을 모조리 아낌없이 나누어 주었고 이웃들에게 언제나 친절하고 헌신적으로 대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라 얼른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남아있는 당시 기록에 따르자면 분명 그랬다.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를 좋아했고 점점 믿어나갔다. 그들을 교화시켰던 것은 말이 아니라 실천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베드로의 그리스 전도 여행과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신앙인이 정말 무엇에 힘을 써야 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번지르한 말이 아니라 몸으로 직접 행하는 실천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로지 말로 하는 전도에만 힘을 쓴다. 생활속에서 기독교가 얼마나 삶을 바꿀 수 있게 만드는지 그걸 실천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그저 찾아가서 전하고 억지로 오게 만들고 그런 것에만 힘을 쓴다. 신도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삶에서 예수가 말하는 것을 실천하기 보다는 교회 내에서 높은 직분에 오르는 걸 더 힘쓰고 헌금이나 십일조 혹은 주일성수와도 같은 요식적인 것으로만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려 애쓴다. 내 이웃들에 대한 봉사와 헌신으로 신앙을 드러내기 보다는 나만 드러내고 높일 수 있는 것에만 헌신적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기독교는 감동이 없다. 믿는 자들이 믿지 않는 자들과 아무런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데, 아니 오히려 더 못난 모습을 보여줄 뿐인데 어찌 믿게 만들 수 있을까? 해서 지금의 교회는 악을 쓴다. 삶에서의 실천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함이 궁극적인 원인이라는 건 깨닫지 못하고 이단이 많아서라는 둥 아직 전도와 선교가 모자라서라는 둥 악을 쓴다. 말, 말, 말만 넘쳐난다. 지하철 안에서 외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들었을 때처럼 아무런 공감을 주지 못하는 말만큼 시끄러운 것은 없다. 지금의 기독교는 자꾸 사람들의 마음이 완고해져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고 하지만 정작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드는 것이 바로 현재 기독교의 모습이란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정말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그것이 종교의 궁극이다. 종교란 기복이 아니라 결국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삶의 변화는 말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삶에서 실천으로 나타날 때라야 완성된다. 사람들도 그걸 안다. 그것으로 가짜 종교인과 진짜 종교인을 구분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삶의 변화는 도외시한 채 여전히 외적인 것에만 치중한다. 교회를 더 크게 짓거나 그저 신자의 수만 불리려는 것으로. 그럴수록 자신의 입지만 더욱 줄어들게 할뿐인데도.

 

 

 그런 현실의 안타까움이 한 권의 책을 낳았다.

 

 카톨릭 대학에서 인간학과 영성 과정을 맡아 가르치는 김경집의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이 바로 그 책이다. 그는 단적으로 지금의 기독교가 눈이 멀었다고 말한다. 돈과 권세라는 세속적 욕망에 눈이 멀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 멀어버린 눈에게 다시 올바른 시각을 찾아주기 위해 쓰여 졌다. 기독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은 여타의 다른 학문에 대한 비판과 다르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는 기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건 물론 성경이다. 교리에 대한 것이든, 그 신앙 태도에 관한 것이든 모든 건 다 성경에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현실 기독교에 대한 날선 비판의 수리검을 날리는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은 기독교인들이라면 익히 잘 알고 있을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오병이어'나 ''산상수훈'등 특히 잘 알려진 모두 18개의 예수 에피소드들을 대상으로 한다. 다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라서 '달리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은데'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김경집이 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너무도 익히 잘 알려진 그 이야기들에 대한 지금까지의 해석들이 원래 성경이 의미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고정관념처럼 그 의미가 굳어진 근저에는 평범한 신도들의 목사나 전문가들의 해석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을 강조하고 평신도들이 설교나 책 이전에 먼저 스스스로 헤아려 볼 것을 권유하기 위해 그는 오히려 아주 익숙한 것들에 새로운 해석의 물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역사적 실증이나 해석학등 인문학적 방법들을 동원해서 말이다. 다시 말 해,  이 책은 누가 더 성경이 말하는 원뜻에 맞는가를 두고 겨루는 진검승부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궁극엔 정말 중요한 것은 나만의 초식으로 성경을 해석해보는 것이며 바로 그 자발적 움직임을 고취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같은 방향성에 대해 나 역시도 동의할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나와 같은 평신도들의 무비판적 추종이야말로 오늘날과 같이 부끄러운 기독교의 모습을 낳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믿음이 주가 되는 것이 신앙이지만 올바른 성찰이 수반되지 않은 믿음은 그저 맹종에 불과하다. 또한 변질과 부패로 가는 길에 있어 맹종만큼 빠른 지름길도 없다.

 

  앞서도 신앙의 완성은 실천이라고 말했지만 그 실천 역시도 이러한 성찰적 믿음에 근거할 때 제대로 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경집이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그것이다.  잘 알려진 예수의 행적들을 중심으로 그 참뜻을 다시금 밝혀 진정한 실천을 가로막는 방해물과도 같이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정당화하는 핑계 거리나 제공하는데 그치는 말들을 제거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책에서 날리는 모든 수리검은 오로지 삶의 실천으로 이끄는 자기 성찰적 믿음이란 과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를 위해서 김경집은 성경의 이야기만 하지 않는다. 모든 꼭지마다 거기에 더하여 그와 비슷한 비중으로 용산참사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와 같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현실까지 알알이 박아놓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그토록 성찰적인 믿음이 또한 그것이 바탕이 된 실천이 절실해질 수 밖에 없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때문에 읽는 이로서는 아무래도 태도의 변화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책은 바로 그걸 위한 것이다. 이 책이 성경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어쩌면 이 책에서 더러 해석상의 오류나 표현상의 잘못을 잡아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거기에 천착하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만 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소한 잘못으로 무시하기엔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뜻이 너무도 당위적이고 신앙인이라면 더욱 절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기독교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이들에겐 오래 만에 해갈을 하는 듯 한 기분을 느길 수 있을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주일날 주보 대신 이 책을 돌리고픈 마음이다. 부디 이 책을 읽어서라도 우리가 정말 힘써야 하는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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