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분 씨네 채소 가게 - 채소 장수 일과 사람 13
정지혜 지음 / 사계절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어릴 때, 할머니는 동네 시장에 나가 좌판을 벌여놓고 채소를 파셨다. 이제는 재개발이 되어 아파트 단지가 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집에서 한참 걸어가면 나오는 고개턱에 할머니가 매일 같이 나가서 알뜰살뜰 가꾸시던 채소밭이 있었다. 거기서 배추랑 무, 쪽파며 오이나 상추 같은 것들을 함지박 가득 담아다가 머리에 이고 오셔서는 파시는 것이었다. 사정이 있어 부모님과 떨어져 있었던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는 게 싫어서 습관처럼 할머니를 밭으로 시장으로 따라 나섰다. 하루 중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 곳들은 내게 놀이터와도 같았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를 처음 보았을 때 한동안 눈길이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불현듯 그 때 시장에서 할머니 옆에 앉아서 종종 사주시는 과자나 아이스크림(대개는 '쭈쭈바'였다.)을 먹으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다리 바라보기를 했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좌판이었지만 '채소가게'는 그렇게 내 유년의 추억이 진하게 어려 있는 곳이다. 아직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하다. 여기저기서 흥정하는 소리. 손님 모으느라 고함치는 소리. 여름날에 늘 나를 꾸벅꾸벅 졸게 만들었던 자장가 소리와도 같았던 시장 끝 동사무소 안마당에 있는 커다란 소나무에서 맴맴 들려오는 매미소리 같은 것들이. 하여 읽었다. 그건 내게 그 유년의 기억들이 다시금 3D 입체영화로 상영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부터 알았다. 시장이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곳만은 아니라는 걸. 할머니가 좌판을 하고 계시면 참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붙였다 가곤했다. 물론 그 모두가 손님은 아니었다. 사실 채소를 사러 온 이들보다 안부나 묻고 일없이 잡담이나 나누러 온 이들이 훨씬 많았다. 거기서 귀동냥을 하고 있으면 가만히 앉아서도 마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 수 있었다. 과자 먹는 것보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게 더 맛났다.

 그 맛 때문이었을까? 할머니께서도 채소 파는 걸 딱히 신경 쓰시지 않는 듯 했다. 그저 아는 얼굴 만나고 안부나 나누고 이런 말 저런 말 두런두런 나누시는 게 더 좋으신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좋았다. 들렀다 가는 어른들 때문에 별로 지루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그냥 가지 않고 내게 덕담을 해 주거나 더러 용돈도 주곤 했기 때문이다.

 

 시장이야말로 그 어느 곳 보다 진솔한 소통의 장이라는 걸 듬뿍 느꼈다. 주고받는 건 말 뿐이 아니었다. 그만큼 정 역시도 더운 김 몽글몽글 솟아오르는 양푼 가득 담긴 칼국수 마냥 오고가는 곳이었다. 그렇게 시장은 사람살이의 냄새가 숯불에 구운 갈치만큼이나 진하고 구수한 곳이었고 그건 오고가는 말과 정에 의해 더욱 멀리 멀리 퍼져나갔다. 바로 그 먹음직스런 향기에 취해 사람들은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타임머신처럼 날 유년으로 다시 데려다 준 '순분씨네 채소가게'에 나오는 시장도 그랬다. 이 책은 채소장수의 하루를 보여주지만 그보다 더 맛깔스럽게 그려내는 것은 정감 넘치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시장의 모습이다. 꼭 흥정이 아니어도 손님과 가게 주인 사이에 일없는 잡담이 가능하며 기분 좋으면 '옛다!' 하고 푹 더 얹어주는 덤이 있다. 사람이 계산서에 찍히는 가격 보다 더 위에 있는 것이다. 오래도록 멀리서 찾아오는 단골이 어디 꼭 물건이나 가격 때문에 오는 것이던가? 그동안 쌓인 도타운 정에 이끌려 그걸 또 한 번 더 나누어 받겠다고 찾아오는 법이듯이.

 시장은 돈 냄새, 물건 냄새 보다 맞부딪히는 살 냄새가 더욱 가득한 곳이었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는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살 냄새가 한껏 느껴진다. 그 모든 자락마다 늘 얼굴을 맞대고 이빨이 드러나도록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꼭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들이다. 하기도 힘들다. 시장에서 그렇게 말을 나누고 있으면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 가지만 마트에서 그렇게 하면 좁은 통로에서 뭐하는 것이냐며 힐난 받기 쉽다. 시장은 사람이 가격 위에 있을 수 있지만 마트에선 절대 그렇지 못하다. 오고가는 흥정은 '삑'하는 바코드로 대체되고 '얼마입니다.' '일시불로 하실래요?' 외에는 별달리 나누는 말도 없다. 시장은 소통의 공간이지만 대형마트는 그냥 소비를 위한 공간에 불과하다. 시장은 말과 정의 나눔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 또한 높일 수 있지만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그저 물건 사는 단순한 소비자에 불과하다. 자판기에서 음료수 캔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개인적으로 이 그림은 일과 사람 시리즈 첫 권인 '짜장면 더 주세요'에서 나왔던 신흥반점의 아저씨가 카메오로 나와서 더 좋았다.)


 그런 시장이 대형마트에 밀려 점점 사라지고 있다니 정말 안타깝지 않을 수 없다. '순분씨네 채소가게'에서 다시금 시장의 매력을 듬뿍 느끼게 된 지금은 더욱 그렇다. '순분씨네 채소가게'는 '일과 사람' 시리즈 중의 하나다. '일과 사람' 시리즈는 세상엔 참으로 다양한 직업들이 있으며 그 직업들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걸 아이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나오고 있다. 그 직업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건 모든 직업이 그 나름대로 타인과 사회에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그만의 고유하고도 소중한 경험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시장이 소중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대형마트에서 우리는 오로지 물건을 사는 경험만 할 뿐이지만 시장에서는 그것뿐 만이 아니라 다양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이라든지 사람과 사람이 서로 나누는 교감 등등 참으로 이런저런 풍성한 경험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물건 밖에는 없지만 시장에서는 사람을 본다. 모두가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함께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시장이 없어진다는 건 그런 소중한 경험을 가져다 줄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 그림에 나오는 많은 목장갑들이 왜 우리가 시장을 보호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저 수 많은 목장갑 하나마다 깃들어 있을 사연과 추억을 생각한다면 시장이란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가 아닌가 싶다. 시장이란 그런 이야기를 듣거나 우리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곳이다.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언젠가 미래에 문득 떠올리게 된다면 내가 정말 많은 이들과 추억을 쌓아왔구나 느껴져서 문득 누군가 아궁이에 불이라도 지핀 것처럼 마음의 아랫목이 따스해지는.

그런 시장이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 목장갑의 몇 백배나 되는 이야기가 쌓일 수 있도록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3-07-22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군요
사람과 사람이 정을 나눌 수 있었던 곳, 사라져가고 있다니 안타깝습니다
모두 없어지지 않으면 좋겠네요
사람들이 안부도 물을 수 있는 곳이라니, 그런 경험은 해 본 적이 없네요
헤르메스 님은 어렸을 때 좋은 경험하셨네요


희선

ICE-9 2013-07-23 23:46   좋아요 0 | URL
예전 어릴때 느꼈던 시장과 지금의 마트를 비교해보면 우리네 인간관계가 얼마나 삭막해져버렸는가를 단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리뷰에도 쓰려다가 빼버렸는데 요즘 아이들이 날이 갈수록 감정이 메말라가는 것도 이런 식으로 친밀한 교류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해요. 좀 더 이런 것을 줄 수 있는 공간으로 시장을 살려나가는 것은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