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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평점 :
여름은 끝났다. 날들은 온기를 잃었다. 사람들로 가득 붐비던 여름의 해변은 황량하게 버려졌다. 가을이 찾아온 것이다. 가버린 여름의 축제를 아쉬움으로 곱씹게 만드는 계절, 다가올 혹독한 겨울에 대한 예감으로 한층 더 움츠리게 되는 계절이.
75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이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을 때 미국은 그런 계절이었다. 72년 닉슨의 워터게이트와 75년 베트남 전쟁 패배로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고 있었던 자신의 나라와 거기에 투영되었던 이상이나 꿈들은 광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버렸다. '윙윙' 메마른 바람소리만 맴돌고 있는 앙상한 가지들이 그러하듯이 그저 공허와 회한만을 가득 남겨놓았을 뿐이었다. 마치 이것의 반영이기라도 하듯, 이 소설 '가벼운 나날'에서 비극은 모두 가을에 일어난다. 소설의 첫 죽음인, 다리가 하나 밖에 없었던 여자 아이 모니카가 죽은 건 가을이었다. 뒤이어 낙마로 달랜더 부인의 아들 레슬리가 죽었던 것도 가을이었다. 여주인공 네드라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때도 가을이었고 네드라가 자신의 남편 비리를 떠났을 때도 그랬다. 마치 운명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네드라는 아예 가을에 죽기까지 한다. 이와 같은 공교로운 시간의 겹침은 아무래도 우연의 소산이라 보기는 힘들고 그 자체로 분명히 하나의 의도를 드러낸다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즉 70년대의 암울했던 미국의 분위기에 대한 비유이면서 동시에 마르크스의 말을 살짝 인용하자면, 그동안 미국인들이 믿었던 '모든 단단한 것들은 이제 대기 속으로 녹아 흩어져' 버렸으며 이제 다시는 오지 않을 것에 대한 암시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은 58년 가을부터 시작해서 20년 가까운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을 그리고 있는데 소설이 보여주는 그들의 궤적은 마치 이제 곧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질 황혼의 아스라한 마지막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도 같이 그렇게 가버린 미국에 대한 레퀴엠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진혼곡이 사실은 죽은 자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산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듯 이 소설 역시 그저 지나간 것의 씁쓸함만 되새기게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70년대 초반 미국이 그랬듯이 이제 곧 닥쳐올 희망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어둔 밤 가운데 어떻게 삶을 지속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더욱 말해주려 한다고 생각된다. 즉 이 소설은 주로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그것은 갑자기 닥쳐온 밀물에 느닷없이 무너지는 모래성만큼이나 연약하고 불안하다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서도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해변으로 떠 밀려온 유실물들로 생존해 나가듯이 삶이 아무리 산산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그 파편 속에서나마 삶의 지속을 위한 교훈은 없는지 또한 찾아보는 이야기인 것이다. 끝이라고 해서 그냥 닫혀진 채로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마저 포용하면서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라도 그 끝을 계속 열어보려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소설이 나아가고자 하는 진실한 항로이다.
그렇게 소설은 과연 처음엔 참으로 단단하고 완벽한 비리와 네드라 부부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위대함을 믿고 있는' 비리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덕목인 양,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덕목인 양(p.65)' 여기며 '표면에선 보이지 않지만 언젠가 빛나는 영예가 발견될' 나날을 그리며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리라 생각하고 있고 '네드라'는 '식사와 침대 시트 그리고 옷'이라는 오로지 '실존의 핵심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가사와 거기에서 비롯된 허기를 메워줄 뉴욕에서의 사치스러운 쇼핑 사이를 오가고 있다. 이는 정확히 50년대 중산층 백인 부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 그 'WASP'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을 형상화하고 있다. 50년대는 분명 그랬다. 냉전시대 덕분도 있었지만 2차 대전의 승리로 고양되었던 미국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아메리칸 드림'은 미국 중산층 백인 가정들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 없이 그저 가벼운 나날들을 구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와서 그동안 냉전 이데올로기에 가려졌었던 인권과 평등 문제가 불궈지고 거기에 차츰 사람들 눈이 뜨이기 시작하자 이제 그런 미국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인권과 평등 모두에 있어서 사각지대에 있던 흑인과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엄과 권리를 부르짖었고 거기에 대한 미국의 가혹한 대처로 인해 국가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품고 그로부터 개인의 전적인 해방을 주장하는 히피즘도 나타났다. 60년대에 들어와 이제는 전처럼 '파티에서 가장 예쁜 여자가 되고픈 욕망'도 없고 '유명한 사람들을 알고 싶거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마음이' 사라져버린 네드라의 변화는 정확히 이를 나타낸다. 그녀는 아울러 '혼자 있는 것'이나 '나이 드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히피즘이 바로 그랬다. 어떤 모습이더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히피즘의 모토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네드라는 남편이 아닌 남자 지반에 대한 개인적인 욕망에 눈을 뜨고 '행복한 부부란 건 지루해. 더 이상 믿지 않아. 그건 거짓말이야. 행복한 부부란 건 스스로를 속이는 거라고'하면서 남편 비리와의 이혼을 생각한다. 비리 역시 카야란 여성에 대한 욕망에 빠지게 되면서 결혼을 이미 선택한 이상 다른 것은 할 수 없게 만드는 굴레로 여긴다. 균열은 이렇게 찾아왔다. 균열로 두 갈래로 나뉘어버린 흐름이 물과 기름처럼 전혀 만나지 못했던 당시의 미국이 그랬듯이 비리와 네드라의 결혼 역시도 그저 의무감에서 지속되는 것 이상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파국의 가을이 찾아왔고 그토록 완벽하고 견고해 보였던 비르와 네드라의 결혼은 대기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똑같이 60년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케네디는 암살 당하고 그동안 꿈꾸었던 모든 이상에 대한 차가운 마지막 비웃음이기라도 하듯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손에 의해 벌어진다.
여전히 50년대의 미국을 믿는 중산층 백인 가치관을 대표하는 비리는 그제서야 묻는다. 내가 믿고 있던 모든 것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하고. 그 다정하고 쾌활한 웃음이 넘치던 애머갠셋의 집은 이제 비워졌다. 결국 그는 네드라에 대한 기다림의 상징과도 같았던 집을 팔아버린다. 거기서 보냈던 완벽한 여름은 이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 계절에 열여섯의 네르다는 당시에는 감옥과 다를 바 없었던 자신의 집에서 탈출했다. 여름은 그런 계절이었다.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한껏 열린 계절. 하지만 그 여름의 의미는 이제 변질되었다. 네드라는 애머갯센의 집에서 더 이상 행복하지 못하다. 그녀는 또다시 탈출을 꿈꾼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건 자신의 내적인 삶에 충실하기 보다는 비리의 고백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주목만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이다.
인생이 숭배하는 건 열정과 에너지와 거짓말이다. 그래도 인류가 보고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참을 수 있다. 순교자들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주목 속에 산다. 꽃이 해를 향하듯 우리는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p.67)
거기서 환한 햇살은 이제 더 이상 충만한 삶을 누리게 해주지 않는다. 대신 주목을 향한 열망에 가리워져 있었던 삶의 진실을 보게 만든다. 빛 가운데서 은폐는 더 이상 힘을 잃는다. 이는 소설 초반부터 이미 나와있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비리와 네드라의 집을 묘사할 때 부터 말이다.
강가의 집은 온실의 지붕을 따라 철제 장식이 있는 집이다. 강가의 집이라 오후 햇살을 받기에는 지대가 너무 낮았다. (...) 집은 정오가 되면 찬란한 햇살에 잠겼다. 칠이 더러워지거나 벗겨진 곳이 눈에 뛴다.(p. 24)
햇살은 이렇게 완벽한 가정이 사실은 어떤 위장임을 드러낸다. 두번째 문장에서 가정이 환영에 불과한 완벽한 가정의 모습을 할 수 있는 것은 햇살을 충분히 받지 못한 때문이라는 걸 은연중 드러내기도 한다. 햇살의 이러한 의미는 이보다 먼저 소개된 '어젯밤'에 나오는 첫단편인 '혜성'에서도 암시된다. 그 단편의 주제는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당신은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 언제나 놀라게 된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른다'인데 여자주인공은 그걸 알지 못한다. 그러다 환한 곳에서 계단을 올라가다 그만 발을 헛딛는 바람에 몸으로 깨닫게 된다. 빛은 이렇게 진실을 드러내는 창구가 된다. 네드라는 여름의 환한 햇살 속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진실과 진정한 자기 욕망을 깨닫는다. 네드라에 대한 비리의 미련은 그런 빛을 채 누려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리는 마지막에 가서야 환한 봄볕 속에서 자신이 이미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공교롭게도 그 때의 깨달음에 이르게 한 건 거북이다. 사실 그 거북이는 이전에도 한 번 나타났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다.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우리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다. 그런데 빠져나갈 이 모든 것들, 만남과 몸부림과 꿈은 계속 퍼붓고 흘러넘친다.... 우리는 거북이처럼 생각을 없애야 한다. 결의가 굳고 눈이 멀어야 한다. 무엇을 하건, 무엇을 하지 않건 그 반대는 하지 못한다. 행동은 그 대안을 파괴한다. (P. 67)
'완전한 삶이란 없다. 그 조각만이 있을 뿐' 이건 이 소설의 대전제다. 두 번 등장하는 거북이를 통해 이 소설이 말하려 하는 것은 그 전제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거북이와 마지막의 거북이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인용된 문장의 거북이는 먼 눈으로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저 생각없이 걷고만 있다. 한 마디로 이 거북이는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다. 이미 하나의 길을 선택한 순간 그걸 끝까지 밀고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여긴다. 비리가 그랬다. 그는 한 번 가정을 선택했다면 아예 다른 선택은 생각지도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카야에 대한 미련도 아이들을 위해서 접고 이탈리아에서의 다른 여성과의 만남으로 또 한 번 삶의 변화를 맞딱드렸을 때 조차 여전히 네드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지막의 거북이는 이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구슬처럼 맑은, 연한 색의 눈이 불안하게 시선을' 돌리고 '등딱지 속으로 몸을' 숨긴다. 비리가 땅에 내려놓기까지 했으나 움직이지도 않는다. 걷지 않는 거북. 주위의 상황을 가만히 헤아리는 거북이의 모습이다. 그걸 보고 비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은 숨을 쉬는 듯했다. 마치 그를 알아보고 숲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는 변화를 느꼈다. 깊게 감사하듯 감동을 느꼈다. 피가 머리를 빠져나와 온몸에 돌았다.(p. 436)
여기에서는 빛의 변화도 감지된다. 처음 거북이를 떠올렸을 때 비리는 이제 막 비쳐드는 아침 햇살 속에 있었다. 그렇게 충분하지 못한 햇빛이었기 때문에 모처럼 깨닫게 된 삶의 대전제에 대해서도 그릇된 태도를 지향하고 말았다. 덕분에 그는 오래도록 고통을 느낀다. 그가 그 햇살을 '차갑게 느낀'(p.65)것도 당연했다. 제대로 깨닫게 된 것은 포근한 오후의 햇살 속에서였다.
이미 이 소설이 새로이 열려는 시작이 무엇인지는 여기에서 암시되고 말았다. 그렇다. '변화를 받아들임'이다. 손 끝으로 빠져나가려는 것을 쥐려 애쓰지 않는 것. 방생을 하듯 닥쳐온 변화의 흐름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 이것이 제임스 설터가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그마나 이 소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언이었다. 소설에서 햇살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서 햇살은 앞서도 진실을 밝히는 창구가 되었듯 다른 여러가지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인다. 네르다는 사랑스러운 햇살이라 말하기도 하고 그녀의 딸 프랑카와 함께 햇살 속에 있을 때는 성스러운 햇빛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햇살일까? 이는 그저 가을이란 계절(처음에 난 이 소설을 가을의 소설이라 말했다.)이 여름날 그 많았던 햇살을 그리워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다. 그 눈부심, 따스함 보다 사실은 그 충만함 때문이다. 빛은 장소와 사물을 가리지 않는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자신을 나눠주는 것이 바로 햇빛이다. 그만큼 타인에게 열려있고 다른 세계에 열려있는 것. 그것이 바로 햇빛이다. 제임스 설터가 햇빛을 그토록 중요하게 취급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사실은 그 때의 미국이야 말로 필요한 자세였기 때문이다. 비리와 네드라처럼 60년대의 미국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때의 균열은 그때까지의 거짓된 환영을 부수고 새로이 이상적인 미국을 열 수 있는 변화의 계기도 될 수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닥쳐온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끝내 과거의 가치를 고수했고 다른 변화를 이끌었던 이들조차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방을 받아들이기 보단 자신의 주장만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결국 미국은 제멋대로 뻗어나간 앙상한 가지만 있는 나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설터는 거기에 다시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노인 화가처럼 여전히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는 희망의 잎새를 붙이려 한다. '끝이 아니다. 새로이 시작할 수 있다. 걸어야 할 땐 걷고, 웅크릴 땐 웅크리는, 그렇게 세계를 두루 살피고 변화에 나를 열며 타인과 서로 교감하자.'는 잎새를. 때문에 이 소설은 환멸을 딛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세밀화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만큼 환멸도 반복되었다. 미국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반복했다. 90년대 초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릭 루디라는 작가는 그 때 다시 한 번 붕괴된 가치관을 제임스 설터처럼 70년대의 한 부부에게 닥쳐온 가치관의 위기에 빗대어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그게 바로 '라이프 오브 파이'를 만든 이안 감독이 영화로도 만든 바 있었던 '아이스 스톰' 이었다. 어쩌면 릭 루디는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들에서 영감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가정의 위기를 그리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위기를 형상화하는 좋은 통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나날'이 나온 2년 후에 영화 감독 로버트 브레송은 '아마도 악마가' 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제임스 설터가 느꼈던 비슷한 환멸을 드러낸 영화로서 여기엔 어른이 나오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청소년들이며 그들은 그 어떤 이념도 믿을 수 없고 꿈도 가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당황스러워 한다. 더이상 어른들의 가치를 믿지 않게 된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근거를 찾으려 한다. 그렇게 로버트 브레송은 제임스 설터와 우리를 이끌 수 있는 하나의 총체적 꿈은 깨어졌으며 우리는 그 파편들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공유한다. 사족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일부러 언급하는 것은 제임스 설터의 세밀화가 그저 개인만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이고자 함이다. 이는 분명한 동시대에 대한 언급이었고 대안을 위한 노력이었다는 걸 말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소설의 유통기한이 70년대에 머무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나는 반복되는 시대에 대한 환멸만큼이나 이 소설의 생명력 또한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한다. 릭 루디가 '아이스 스톰'에서 다시 한 번 비슷한 세계로 들어간 것과도 같이 2001년의 9.11에서도 그 뒤의 이라크 침공에서도 또 2008년의 미국 금융 위기에서도 늘 다시금 들춰지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또 그만큼의 희망 역시 깃들어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 책을 마지막 잎새에 비유한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그러리라 생각한다. 시대와 삶에 대한 환멸과 절망이 몸을 가위처럼 누를 때마다 소설 속 그녀가 잎새를 보았듯이 그 세밀하고 사려깊은 문장들 틈에서 자신만의 희망 광맥을 분명히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