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독서뿐 - 허균에서 홍길주까지 옛사람 9인의 핵심 독서 전략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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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 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로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면 아무도 없고, 계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천이 책을 저술할 때입니다. 

('오직 독서뿐' p. 228)

 

 정 민 작가의 새로운 책, '오직 독서뿐'을 읽다가 반가운 글을 만났다. 인용한 글이 바로 그것인데 참으로 오래만의 재회였다. 이 글은 본디 연암 박지원의 것으로 아주 오래 전 그의 문장 선집에서 첫 조우를 한 바가 있다. 그 때 이 글을 얼마나 감탄하며 읽었는지 모른다. 사마천이 책을 쓸 때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역시 당대의 최고 문장가답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부터 난 이런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암 박지원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 닥치는 대로 찾아 읽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내공을 내 것으로 만들기란 누구나 다 알다시피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비록 그 문장은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였으나 이 글에 연암 박지원이 스며놓은 그 뜻만은 내 것으로 할 수 있었다. 이 글을 읽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때부터 책을 벗할 때마다 드러난 문장 보다는 왜 하필이면 이렇게 표현했을까를 더 생각하게 되었다. 요 몇년 사이 리뷰를 인터넷 서점에 올리고 있는데 아무래도 만인에게 공개된 곳이다보니 더러 내 리뷰에서 행한 해석을 두고 의문을 표해 오시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굉장히 독특한 관점인데 어떻게 그렇게 읽을 수 있느냐를 비롯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는 질문도 받는다.(물론 자주는 아니고 거의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이지만.) 그 때의 내 대답은 이미 예상하시는대로다. 작가가 하필이면 왜 이런 구성을 취했을까 혹은 왜 이런 표현을 굳이 쓴 것일까에 주로 천착하다보니 그렇게 해석하게 되었다고. 근거 역시 바로 거기에 있을 뿐 다른 건 없다고. 추리 소설을 보면 어떤 탐정들은 어떤 증거를 대할 경우 그 자체 보다는 왜 그게 하필이면 그렇게 놓여 있었는지 그 맥락을 먼저 따지는 경우가 있다. 내 리뷰 스타일이 바로 그와 비슷한데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이 연암 박지원의 이 글이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시 음미해 보아도 여전히 좋은 문장이고 변함없이 좋은 뜻이다. '일침'에 이어 또 한 번의 옛 선조들의 좋은 글들을 모은 '오직 독서뿐'은 이렇게 엄선된 좋은 글들로 읽는 멋과 그 뜻을 음미하는 맛 모두가 좋은 책이다. 이번의 책은 주로 독서와 관련하여 조선 선비들의 글을 모았다. 그렇게 유명한 책벌레라고 소문났었던 '홍길동'의 허균, '성호사설'의 이익, '동사강목'의 안정복, '북학의'의 홍대용, 연암 박지원, 간서치 이덕무를 비롯하여 모두 9명의 내노라 하는 조선의 최고 책벌레들의 글이 여기엔 실려 있다. 책은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글들이 모여 있는 형국인데 그래서 읽노라면 저절로 저마다 다른 책에 대해 중시하는 부분을 느끼게 된다. 이를테면 허균은 주로 독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흥취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이익은 그 자신 학자였던만큼 책을 통해 학문을 닦는 태도를 보다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글로는 처음 만나보는 백수 양응수는 좋은 독서에 대해 굉장히 구체적으로 알려주는데 어째 그 자신의 시행착오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듯한 느낌이 난다. 알아주는 책벌레이자 실학자이기도 한 안정복과 홍대용은 과연 그들답게 '잡서를 경계하라'나 '책 읽기의 못된 버릇'등 아주 실제적인 독서 방법들을 알려주며 박지원은 진짜 책읽기의 고수가 비법들을 들려주는 듯하며 책읽기하면 바로 떠오르는 그야말로 명실상부 책읽기의 대표자 간서치 이덕무는 그야말로 책읽기의 오타쿠만이 할 수 있는 말들을 들려준다. 이렇게 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나, 책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데 있어서나 원칙이든 실제적 방법이든 새겨둘만한 참 좋은 말들도 많지만 이런 식으로 각 존재들의 개성적인 면모마저 드러나기에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요즘은 새삼 독서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어 좋은 독서에 대한 이런 저런 방법들을 알려주는 책이 참 많지만 진정한 책벌레였던 우리의 옛 선조들은 과연 어떻게 했는지 더하여 알아두는 것도 참 좋을 것 같다. 옛 글이지만 거기에 녹아있는 뜻은 전혀 지금 시대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보다 현명하고도 좋은 방법을 얻고자 한다면 오히려 이 책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내 실제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기도 한데, 사실 여기에 실린 글들 중 마음에 든 것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른 이들에게 들려준 적이 있었는데 호응이 꽤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묵독 보다 낭독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주로 글을 읽음으로써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비록 문장들이 한문을 풀이한 것이긴 해도 정 민 작가가 그 쪽도 염두에 두고 번역했음인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풀이를 해서 읽어도 그 맛이 나도록 썼음인지 그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소리 내어 읽는 맛이 제법 크다. 묵독하는 것보다 더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 것도 같고. 아무튼 낭독하기에 어울리는 책이다. 많은 이들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낭독하고 그 뜻을 서로 같이 나누면 더욱 뜻깊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동네 서점은 망하고 출판 시장은 계속해서 불황이다. 사람들이 책을 점점 읽지 않게 된 이유에 대해 어떤 이들은 다른 재밌는 거리가 많아서라고 한다. '오직 독서뿐'에 실려 있는 옛 선인들이 들었다면 참으로 기겁할만한 소리다. 그들이 그토록 책을 많이 읽게 된 것은 당시 별 다른 여흥거리가 없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직 독서뿐'에는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다양한 많은 말들이 나오지만 오직 한 가지만은 나오지 않는다. 그건 '왜 책을 읽는가?'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왜냐하면 그건 그들에게 불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책을 읽음에 있어 '왜?'라는 질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책은 그저 읽는 것이니까, 아니 읽어야만 하는 것이니까. 그렇게 독서란 그들에게 필연이었다. 그러므로 읽었다. 무조건. 그것도 언제나 단정히 의복을 갖추고 바른 자세로. 아침에 일어나서는 가장 먼저 어제 읽은 것을 떠올리고 읽을 때는 그 뜻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만들 때까지 몇 번이나 암송하면서. 그렇게 읽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책이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묻겠지만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일단 읽어보라고. 그러면 언젠가 자연히 알게 된다고. 산이 있으니까 올라간다고 했던 한 산악인의 말과도 같이, '홍씨 맛이 나기에 홍씨라고 대답한 것 뿐이온데'라고 했던 어린 대장금의 말과도 같이 아주 단순하고도 자명하게 왜 '오직 독서뿐'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맞다. 진리는 늘 자명하다. 그 경지를 경험한 자들에게는. 그러니 '왜'라는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그냥 닥치는 대로 읽어보는 건 어떨까? 그렇다고 그냥은 읽지말고 이 책에 실린 원칙과 방법들을 유념하면서.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 독서가 왜 모든 것인지...

 

 독서는 순수한 몰입이다.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행위다. 의도를 가지고, 목적을 전제로 하는 독서로는 거둘 것이 없다. (...) 자발적 독서, 무목적의 몰입, 읽지않을 수 없어서 하는 독서만이 우리 삶을 들어올린다.  업그레이드시켜준다. (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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