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탐하다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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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아버지! 이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 이성복, '그해 가을' 중에서 -

 

 

  소설에 나오는 FBI 요원 그레이디는 말한다. 프랭크는 아비저로 부터 '총알과 시체의 유산'을 받았다고.

유산이 있다.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게 되는 유산이. 말하자면 하나의 총체적 세계이다. 거기서 아들은 선택해야 한다. 아버지의 복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나 자신이 될 것인가? 정답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엔 어렵다. 이미 선택하는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에 깊이 침윤된 까닭이다. 그건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나'란 것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존재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처럼 결심과 의지로 훌쩍 빠져나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새와도 같이, 진정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불태워야만 가능하다. 그럴때만 부활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된다.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새가 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고. 껍질이란 자신을 이루고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깡그리 부술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의 해방은 어렵다. 그러니까 '총알과 시체의 유산'으로 부터 말이다.

 

 마이클 코리타는 흔히 '신성'으로 불린다. 새롭게 나타난 젊은 별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데뷔작 '오늘 밤 안녕을'은 미국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나이인 만 20살에 나왔다. 스릴러 작가로 치면 아직 주민등록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을 나이에 그는 데뷔를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젊은 세대에 속하고, 가족적으로 비유하자면 아들 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그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많다.(난 아직 '숨은 강'을 읽지 못했기에 그건 빼고 하는 말이다.)'오늘 밤 안녕을'에서 주인공 사립 탐정 링컨 페리를 찾아와 아들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의뢰하는 이는 '존 웨스턴'이라는 아버지다. 그런데 코리타가 그 아버지를 드러내는 모습이 흥미롭다. 70대 후반의 이 꺽다리 노인은 왕년에는 제법 건장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말라빠지고 배는 쭈글쭈글한'모습이다. 눈빛만은 보이는 건 뭐든지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날카롭지만 정작 그야말로 마치 세월이 고압의 흡입기라도 되어 남김없이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 그가 링컨 페리에게 2차대전 이야기를 한다. 탑골 공원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왕년에 내가'를 노래의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노인들처럼...

 

 '오늘 밤 안녕을'이 이렇게 첫 시작부터 미이라처럼 되어버린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코리타가 보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버지를 양산해 내었고 또 그런 아버지들이 떠 받쳐온 미국은 코리타에게 지금 그런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아버지의 이름은 '웨스턴'이다. 그 '서부'야말로 무엇보다 전통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웨스턴을 이어받은 아들은 살해당하고 그 아내와 딸은 실종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충실히 따랐던 아들의 마지막이 파멸인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 가족까지 포함해서. 그게 지금의 미국이 아들 세대에게 물려주고 있는 유산이었다. 2차 대전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던 것처럼 '총알과 시체의 유산'이 물려줄 수 있는 건 파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코리타는 그래서 아들 세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들의 유산에서 벗어나 역사와 미래를 바로 그 자신들의 몸으로 직접 떠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걸어 나오게 된다. '오늘 밤 안녕을'에서는 링컨 페리가 그리고 '밤을 탐하다'에서는 프랭크가. 바로 아들들이. 코리타의 분신들이.

 

 그렇게 '밤을 탐하다'는 스탠드 얼론이지만 '오늘 밤 안녕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코리타가 거기서 천착했던 주제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밤을 탐하다'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물론 프랭크고 다른 하나는 '노라'라는 여인이다. 공통점이 있다. 프랭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살인 기계가 되는 훈련을 받은 자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게 내내 복수를 꿈꾸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노라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소를 스스로 꾸려나가려 한다. 하나는 아버지가 비록 죽고 없어도 그 세계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자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 세계를 지속해 나가는 자다. 그렇게 다들 아버지의 유산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다. 아버지 세계가 감옥과도 같다는 것은 이미 소설의 첫머리에서 부터 제시된다. 소설의 첫 장면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프랭크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지금 프랭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유와도 같다. 그에겐 아버지로 물려받은 길을 걷지 않아도 충분히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만큼의 재능이 있지만 아버지로 부터 각인된 세계로 인해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노라도 마찬가지다. 노라의 첫장면은 같이 일하고 있는 제리라는 남자의 시선 속에서 드러난다. 그 제리의 눈에 노라는 정비소를 꾸려가는 어엿한 경영자라기 보다는 그저 남자를 유혹하려 드는 '암컷'일 뿐이다. 노라는 지금까지 무시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남자들만의 영역인 정비소 일로 들어왔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로만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리의 불만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그들은 갇혀있다. 하나는 스스로, 다른 하나는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이는 정확히 우리 무의식을 그 근저에서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언어로 스스로를 번역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오로지 아버지의 눈으로만 평가하게 만들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언어가 하나의 질서가 되어 자리잡음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쓸 수 있게 되었더라도 이제는 외부의 눈으로써 그 언어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들의 진정한 해방은 이 자아와 타자 둘 모두에게 완강히 붙들려 있는 '아버지의 언어'로 부터 자유로울 때만이 가능하다.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 '밤을 탐하다'가 프랭크와 노라 둘 모두를 주인공으로 데려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둘이 하나인 것은 똑같이 매개자가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즉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서도 계속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그 아버지의 언어를 지속시키는 매개자들 말이다. 프랭크에게는 아버지 질서가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공간인 '토마호크'를 지키는 에즈라가 있고 노라에겐 앞서 말한 '제리'가 있다. 그렇게 매개자들이 아버지의 공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공명시킨다. 분명 프랭크와 노라에게 아버지와의 간격은 그만큼의 해방인 것이지만 매개자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그 모자람만 부각시키고 그렇게 죄의식을 일깨워 더욱 아버지와 닮아지려 애쓰게 만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내부는 매개자들로 인해 구원을 가져올 곳이 없으니 구원은 전혀 다른 쪽, 그러니까 완전한 외부에서 와야만 했다.

 

 바로, 데빈이다.

 

 데빈은 프랭크에게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려 죽게 만든 자신의 원수이다. 그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아버지와 굳게 약속했고 지금까지 그의 삶이란 전적으로 데빈을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코리타는 이 기표를 비튼다. 표면적으로만 증오이지만 진실한 의미에선 그 진정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때문에 코리타는 데빈을 그런 존재로 만든 것이다. 원수만큼 스스로에게 외부적인 존재도 또 달리 없을테니까. 이는 데빈이 온 장소에서도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플로리다. 서늘한 아침공기가 솔잎과 장작 연기를 타고 흐르는 울창한 숲과 호수로 가득한 '토마호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땅. 데빈은 바로 그런 땅에서 왔고 그만큼이나 타자인 것이다.

 

 현대 철학의 주류들은 말한다. '구원은 오직 타자로 부터 온다'고. 당연하다. 온갖 매개자들이 들끓기만한 내부는 전혀 다른 언어를 들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디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알고보면 프랭크는 바로 그 그레이디 때문에 갇히게 된 셈인데 그는 가장 강고한 아버지의 권력의 상징이라 할만한 FBI의 요원이다. 거기다 그가 그토록 프랭크에게 집착하는 것은 자신만은 보다 강력한 아버지의 모습이 되려는 은밀한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만큼이나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던 자가 사실은 프랭크를 가둔 진정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FBI가 되어 내부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존재가 말이다.

 

 그러므로 외부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데빈은 바로 그 요청에 응답한 존재인 것이다. 과연 절대적 외부의 존재로써의 데빈은 프랭크와 노라의 세계에 메워질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다 랭크와 노라에게서 보자면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매개자들마저 제거하여 프랭크와 노라에게 자신들만의 언어를 돌려준다. 이런 존재이기에 데빈의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것도 당연하다. 이게 바로 이 소설에 투영된 코리타의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삼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타자에 대한 전적인 열림만이 현재 미국이 물려준 유산으로 부터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너'라는 말만으로도 입증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마이클 코리타는 아들 세대에게 밤만 탐하도록 만드는 이제는 집착 밖에는 남지 않은 쭈글쭈글한 주검과도 같은 미국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달리 말하면 어떻게 우리들만의 언어로 새롭게 생각하고 대안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그 의문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신성'이라는 젊은 세대이기에 그런 의문과 스스로 풀어가는 노력에 더욱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그 결실을 충분한 깊이로서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기까지의 이르는 과정만큼은 위에서 말했듯 충분히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고 또 이야기 역시 흥미롭기에 여전히 그 다음의 여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1982년생인 그는 아직 젊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젊음이라는, 아직 남겨진 그 무한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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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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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가 이미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오히려 미지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비한 힘이 있다. 비유하자면 자기 땅에 대해서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 막상 자기 땅을 거닐어 보고는 그 다양함과 다채로운 풍요로움에 놀라 사실은 자기 땅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고 있었구나 여기게 만드는 그런 힘이 말이다. '정의'라는 게 그랬다. 그건 아주 익숙한 말이었고 그만큼 자명한 단어였다. 하지만 이번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니 내가 생각외로 정의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정의란 게 정말은 무엇인지 몰랐으니 그만큼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 책 앞부분에는 마이클 센델이 과연 이게 정의로운 상황일까 하고 예로 드는 상황이 나오는데 난 그 중 어느 것도 분명히 정의롭지 못하다 말할 수 없었다. 다 정의로워 보였고 또 그렇지 않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혼란이었다. 알고보니 그게 내가 정의에 대한 엄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결과였다. 수박의 겉껍질만 핥고는 이게 수박의 맛이구나 하고 느낀 것과 같았다. 그 안에 있을 달콤한 붉은 속살은 생각하지도 않고 말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러한 표면밖에는 모르는 우리에게 정말 정의가 무엇인지 그 진정한 맛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럼으로써 어느 것이 진정으로 정의로운 상황인지 스스로 가늠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그를 위해 무엇보다 이 책은 사유의 엄밀함을 강조한다. 잇달은 사례로 계속 우리가 생각한 것의 반전된 사례를 내놓는 것도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그 진정한 의미가 드러날 때까지 계속 생각하라고 촉구하는 것과 같다. 흔히 도저히 사유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아포리아'라고 한다. 마이클 센델이 든 사례를 보면 이러한 아포리아에 자주 직면하게 되는 게 바로 정의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특히나 현대 사회는 이익 사회다. 여러 많은 집단들이 서로의 이익 추구를 위해 노력하는 사회인 것이다. 그런 사회인만큼 정의가 필요하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정의'의 가치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추구하고 있는 이익을 포기하지 않으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을 제대로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말해지는 정의가 제기 가능한 모든 반론들을 포용하면서 거기에 설득을 위한 합리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의란 모든 수준에서 더욱 엄밀하게 사유되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아포리아'라고 해서 정의에 대한 사유를 그만둘 수 없는 이유다. 마이클 센델이 모든 관점에서의 정의를 이토록 세세한 사례들로 단계적으로 접근시키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먼저 그는 정의가 궁극적으로 일종의 분배 원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한정된 자원을 가진 사회가 그 구성원 각자에게 어떻게 나누는가에 있어 그 기초가 되는 원리가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우리는 정의로움을 얼른 '의(義)'의 문제로 생각하지만 서양에 있어 정의란 어디까지나 분배란 관계된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게 정의에 관한 모든 현대 논의에 있어 원초적 출발점이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 역시도 시민들에게 부와 명예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정의를 다룬 것이었다. 결국 여기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나눠야 한다’는 유명한 분배적 정의가 도출되었다.

 그리하여 이 분배에 있어 지금까지 대체적으로 세 가지 입장의 주요한 정의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일종의 정의론의 '본류(本流)'들이다. 대체로 이 본류들은 자신이 가장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그 분배에 대한 정의조차 달라지는데 그 추구하는 각각이 무엇이냐 하면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이다.  그렇게 행복을 지상과제로 추구하는 것이 공리주의이고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자유지상주의이며 마지막으로 미덕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미덕' 주의인 것이다.(얼른 와닿지 않는 용어일텐데 마이클 센델 자신이 그렇게 써놓고 있으므로 할 수 없이 그대로 쓴다. 사실 이 이름은 보다 '공정하게'에 맞춰진 이름이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와 미덕이론의 차이점은 앞의 두 입장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미덕이론은 오히려 그것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사회적 약자 입장에 먼저 서서 그들 스스로 충분히 살 수 있는 기반을 먼저 배려해주고 그 다음 분배를 생각하자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것이 옳기 때문에 하는 것임으로 그래서 '미덕'이란 이름이 붙는 것이다.)

 마이클 센댈은 이 세가지 본류의 의미와 한계들을 조목조목 짚어준다. 물론 독자 머리로 먼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 놓치지 않고서 말이다. 그렇게 공리주의는 재화의 효용성 측면에서 정의를 가늠하지만 사람이 느끼는 행복이란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법이기 때문에 과연 효용성이란 잣대 하나로 뭉뚱그려 계량화시킬 수 있는지 의문이 들며 자유 지상주의란 무엇보다 이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기여로 결정된다고 여겨 그들이 획득한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과연 그 노고를 순전한 개인의 노고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서 모든 조건이 초기화 된 순수한 의미에서 공정한 출발선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두 친구가 있었다. 하나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이 둘은 공무원 시험 준비에 투여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압도적으로 달랐다. 전자쪽은 부모의 돈 때문에 마음껏 공부를 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는 학비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집안 형편 때문에 학비를 위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기거할 방도 잘 구하지 못해 편안히 공부를 할 시간조차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다. 들이는 시간이 다른만큼 그 결과도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건 불문가지다. 자유지상주의는 이런 차이를 무화시킨다. 이미 사회경제적으로 개인들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자유지상주의의 정당화는 마치 이런 것이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덕 이론은 바로 이것을 공격한다. 그런 자유 지상주의의 말은 눈가리고 아웅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개인들의 차이 때문에 정말 공정성이라는 정의 관념에 투철하고자 한다면 사회가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때부터 뒤에서 따라잡아야 하는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해 가진자들과 같은 자리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자유지상주의자들은 얼굴을 찌푸린다. 그리고 항변한다. 내가 어렵게 노력해서 얻은 것들인데 왜 나눠주어야 하냐고 말이다. 요즘 사회 복지를 위해 부유층 증세를 말할 때마다 듣게 되는 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미덕 이론은 그 전제 자체가 틀렸다고 한다. 그들은 이미 사회로 부터 혜택을 받은 상태에서 출발했으니 그건 사회로 부터 나눠받은 것일뿐 온전한 자기 것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내 것'의 정당화로 자신이 투자한 노력, 비용을 내세우지만 센델이 예로 든 마이클 조던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노력이 의미가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성공했을 때 뿐이므로 결국 결과에 의해서 좌우될 뿐인 노력의 가치에 대해서 미리 선험적으로 모두 인정되는 보편의 가치인양 주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사 그 노력이라고 하는 것도 요즘 금융 투기에서 보듯이 결코 얻는 대가가 노력과 정비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  미덕 이론은 이렇게 사회가 나서서 분배가 해주어야 하는 정당성을 한껏 드높여 주지만 그렇다고 '전가의 보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센델에 따르자면, 일단 사회가 전면에 나섰을 때에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모두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이미 그 극단의 사례를 파시즘과 공산주의라는 형태로 목도한 바 있다. 사회에 보다 많은 권한을 몰아주는 것은 합리적인 견제와 균형을 가져다주는 장치가 없을 경우 늘 그렇게 억압적인 사회로 변질할 우려가 있었다. 미덕 이론이 말하는 대로 바람직한 사회적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과도한 힘을 사용하려 할 때마다 적절히 견제하고 균형을 잡아주는 장치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하지만 미덕 이론은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사유를 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회가 나서서 이익을 조정하려들면 덜 받은 자들과는 분명히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견제와 균형은 그러한 갈등을 잘 조절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데 이만큼 미덕 이론이 원하는 분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장치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직 원칙론만 고수하고 있는 형편이니 문제라는 것이다. 즉 센델은 이 미덕이론이 사회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론에 그칠 위험을 늘 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보다 현실적인 한계를 고려한 차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그런 차원에서 하트가 말했듯 개인이란 태어났을 때 부터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를 완전히 무지의 베일로 가리기엔 불가능하며 되도록 갈등의 소지를 줄이려면 무엇보다 한 개인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가 속한 그 공동체의 다양성을 고려하면서 최대한 그를 존중해주는 쪽으로 분배하는 게 나을 것이라 말한다. 그는 서사적 정의론을 주장한 찰스 테일러와 함께 그러한 '공동체적 정의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그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이렇게 세 가지 본류가 가진 의미와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게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정의론에는 왕도가 없음을. 어디까지나 지금도 계속해서 사유로써 채워 나가야 하는 빈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 여기에 마이클 센델이 이 책을 쓴 진정한 목적이 있었다. 해서 그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사례로서 우리의 사유를 유도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정의론이란 우리 모두와 직결된 문제이니만큼 먼저 우리 스스로 올바른 정의를 위한 사유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야 함을 말해주기 위해서 말이다. 다시 말해,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를 위한 하나의 초대장인 것이다.

 그리고 촉발이었다. 이 책이 바탕이 되어 스스로 생각한 정의에 대한 사유들을 서로 나눌 수 있게 만드는. 그러한 사유들이 서로 활발하게 오고가는 광장으로 이끄는 손길이었다. 과연 그 바람대로 '정의란 무엇인가'는 발간되자마자 우리나라에 거센 돌풍을 일으켰고 사람들은 그 책에 자극받아 자신이 생각한 정의론들을 서로 나누기 시작했다. 이 책의 진정한 의의는 바로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던 이들에게 자신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그것에.

 정의론이 늘 부단히 채워나가야 하는 사유의 빈자리인만큼 그보다 더 우리에게 요청되는 태도는 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 책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다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의에 관해 생각하기를 넘어 기꺼이 나 자신의 말로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정의가 변절될 때는 언제나 다수의 침묵 속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이들이 거기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고 말하기를 그만 둘 때 언제나 소수는 자신의 뜻대로 정의를 왜곡시키고 그 뜻을 우리마저 따르도록 강요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기를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정의의 왜곡과 변질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그 질문 자체로 정의의 순수한 이념을 지키는 일이다. 그 물음이 부단히 이어져야 하는 것처럼 센델의 이 책 역시도 늘 그렇게 읽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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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다큐프라임 퍼펙트 베이비 - 완벽한 아이를 위한 결정적 조건
EBS <퍼펙트 베이비> 제작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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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솔직히 말해 현실적으로 육아와 그다지 관계가 없는 나인데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무엇보다 1부에 나오는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체질이 다르다.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어도 어떤 이들은 전혀 살이 찌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면 한 편으론 아주 적게 음식을 먹는데도 오히려 살이 부적 찌는 사람들도 있다. 뭐,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다. 진짜 말하려는 것은 바로 다음에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유에 대해 과학은 지금까지 대체로 두 가지 이유를 말해왔다. 하나는 유전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이렇게 저마다 다르게 된 이유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다 다르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자라온 환경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퍼펙트 베이비'는 여기에 대해 '제3의 길'을 제시한다. 유전도 환경도 결정적인 인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퍼펙트 베이비'가 내세우는 새로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게 바로 '태아 프로그래밍' 이다. 여기서 태아 프로그래밍이란 말은 임신 중 태아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가 태아로 그치지 않고 그 이후의 삶에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즉 사람들이 저마다 달라진 데는 바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가 어떤 상황에 놓여있었고 거기서 무엇을 경험했으냐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 이론은 어떻게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여기엔 역사적 경험이 단단히 한몫했다. 그러니까 세계 제2차 대전 중 네델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1940년 겨울, 독일은 네델란드를 침공한다. 하지만 네델란드의 완강한 저항으로 침공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마침 겨울이라 식량이 부족할 것을 예상한 독일은 침공에 힘을 쏟지 않고 네델란드 주위로 단단한 포위망을 형성하여 고립시키고는 그대로 네델란드 굶주리기 작전에 돌입한다. 독일의 계산대로 혹한의 겨울 속에서 네델란드 국민들은 튤립 뿌리까지 먹어가면서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을 당하게 되고 무려 만여명의 네델란드 사람들이 아사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 참혹한 역사적 현실이 어떻게 태아 프로그래밍으로 연결된 것일까? 훗날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메디컬센터의 한 여성학자가 당시의 출생 기록들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어떻게 되어있을까?'란 호기심에 추적해보니 이 때 태어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만이나 당뇨, 심장질환등 성인병 비율이 유독 높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부모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때 태어난 이들은 부모에게는 없었던 병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어도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유독 그 때 태어난 이들만이 성인병에 쉽게 걸렸다. 그러므로 그 이유를 유전이라 할 수 없었다. 자녀들이 보여준 차이는 자라온 환경이 동일했으므로 환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그건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태아로서 경험한 극심한 굶주림이 이후의 삶에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태아 프로그래밍은 그렇게 해서 세상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는 실험으로도 밝혀졌다. 임신한 생쥐를 네델란드 굶주리기 작전 상황과 똑같은 조건에 놓고 출산할 때까지 관찰한 것이다. 대조를 위해 역시나 임신한 생쥐를 보통의 상황 속에 놓아두고 서로 비교한 결과 굶주린 상황에 처했던 임신한 생쥐가 낳은 새끼수는 그렇지 않은 생쥐 보다 훨씬 적었고 그 새끼들의 체중 역시도 보통 새끼 생쥐들 보다 적었다. 즉 임신 중 어떤 상태에 있었으냐가 그 이후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보통 굶주린 가운데 태아 시기를 보내면 저체중으로 출산된다고 한다. 하지만 자라면서부터는 이러한 차이가 없어지는데 그렇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오히려 이 상황이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체중으로 태어난 개체는 그렇지 않은 개체에 비해 콜레스트롤은 1,3배, 중성 지방은 1,5배 그리고 내장 지방은 무려 2배나 더 높았다. 즉 그들이 평범하게 태어난 이들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은 것은 오로지 살찌우기 덕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저체중은 쉽게 비만으로 이어지기 마련인데 왜냐하면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태아는 오로지 그 배고픔을 면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장기에 대해서만 집중할 뿐 그것과 상관없는 장기는 그냥 내버려두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아가 내버려두는 가장 대표적인 장기가 바로 '췌장'이다. 췌장은 인슐린을 생산한다. 인슐린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몸에 미처 소화되지 않은 영양소들은 포도당이 되어 미래를 위해 혈액 속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 포도당을 분해하여 세포 속으로 잘 스며들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인슐린이기 때문이다. 췌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이 인슐린 분비가 어렵게 되고 그렇게 되면 혈액 속에 포도당이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이게 된다. 그러면 포도당이 넘쳐서 소변으로까지 흘러나오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당뇨'다. 태아적 경험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비만과 당뇨를 불러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사실은 바로 그렇게 되도록 선택한 것이 상황이 아니라 태아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태아가 어떤 장기를 더 활발하게 가동시킬 것인가 선택한 것이다. 이는 장기만이 아니다. 여기엔 유전자도 해당된다. POMC란 유전자가 있다. 주로 체내의 지방 세포를 분해하는 유전자다. 이 유전자가 제 역할을 하지 않으면 지방이 분해되지 않고 쌓여 비만에 이르게 된다. 열악한 임신 상황으로 태어난 저체중의 아이들을 조사해보면 공통적으로 바로 이 POMC 유전자 기능이 꺼져있음을 알게 된다. 놀랍게도 굶주린 상황에 처했던 태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때는 필요없었던 POMC 기능을 꺼버린 탓이다. '아니, 어떻게 그럴수가? 유전자는 어디까지나 타고나는 것인데 어떻게 후천적으로 태아 마음대로 꺼버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당연히 들 것이다. '퍼펙트 베이비'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게 가능하다고 한다. 유전자의 DNA 정보는 주로 'GATC'라는 네 개의 기호로 코드화 되어 저장되는데, 훗날 이 'C'에서 'CH3', 즉 '메탈기'라는 게 붙어 있는 것과 붙어 있지 않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태어날 때 부터 그리된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처한 환경에 따라 붙어 있거나 떨어지거나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지금까지 우리는 부모로 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는 죽을 때까지 절대 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 CH3 존재 덕분에 상황에 따라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변형 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의 발견으로 유전자 기능 또한 개체가 얼마든지 임의적으로 스위치를 껐다 켜듯 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리하여 '후성 유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또한 나타나게 되었다. 태아 프로그래밍은 이 후성 유전학의 도움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부모에게 전혀 그런 유전 인자가 없더라도 태아가 어떤 후천적인 상황에 처함에 따라 새로이 유전 인자를 가지게 되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전혀 그런 병력이 없더라도 태아는 걸릴 수 있다. 이렇게 '퍼펙트 베이비'는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다.

 

 그 뿐 아니라, 태아적 경험이 이후의 삶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비록 지금이 극심한 저출산 시대이긴 하지만 정부가 하는대로 그저 무턱대고 출산의 양만 늘릴 것이 아니라 출산의 질을 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임을 요청한다. 임신한 여성과 가정에 대한 정책으로 배려되지 아니하면 열악한 상황에서 태어난 아이들의 증가로 인한 장차 높은 성인병 환자의 급증으로 국가의 의료 부담마저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의 부담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국가는 이제라도 임부와 그 가정들이 보다 편안하고 풍족한 임신 환경이 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지고 정책적으로 배려해야 되지 않나 생각된다. '퍼펙트 베이비'는 생각 이상으로 부모와 자식이 끈끈한 연대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한 자녀를 '퍼펙트 베이비'로 만드는 데 있어 그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인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요즘은 점점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을 소홀히하는 추세가 늘어난다고 하는데 이 책을 통해서라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자각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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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데 아파트 관리소에서 긴급 방송이 흘러나온다.

  "아파트 전기 관리부입니다. 지금 당장 에어콘 사용을 중지해 주세요. 전력이 과부하 상태입니다. 위험합니다. 당장 에어콘을 꺼주세요."

  몇 번이나 말한다. 에어콘을 꺼달라고...

 

  오늘의 현실도 이런 절박한 경고가 필요한 것 같다.

  특히나 UPPER CLASS들에게...

  그들의 탐욕, 독선, 거짓과 협잡 그리고 오만으로

  시스템이 잔뜩 과부하되고 있으니...

 

  사람들은 들끓고

  과부화된 시스템은 그 하중을 견뎌낼 여력이 없다.

  이러다 곧 블랙 아웃이 올지 모른다.

 

  이번의 신간 추천은 특히나 그런 경고를 담은 작품들을 골라본다.

 

 

 

 피에르 르메트르가 돌아왔다. 

 이미 신간평가단으로 두 번이나 만나본 작가이기도 하다.

 그간 소개된 '알렉스'와 '그 남자의 웨딩드레스'는

 그가 현재 생존하는 유럽 스릴러 작가들 중에서 재미와 깊이

 두 마리 토끼를 가장 잘 잡고 있는 작가로 여기게 해 주었다.

 그는 특히 동시대의 현안들을 스릴러로 잘 버무려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그래서 더욱 이번에 나온

 '실업자'에게 기대가 크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현재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가장 불길한 그림자는 '실업자'이다.

 해마다 높아지는 실업률, 그만큼 더 벌어지는 빈부의 격차는

곳곳에서 갈등의 폭발을 불러 일으키는 뇌관이 되고 있다.

피에르 르메트르의 '실업자'는 바로 그 시한 폭탄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그것도 정면으로.

이 소설은 유럽미스터리소설대상을 수상했다고 하는데 그 심사평이 인상적이다.

"직장인들이 겪는 절망과 위기감, 그리고 그들의 삶을 잔혹하고 지독하게 묘사해냈다" "소름끼치는 것은 주인공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라는데 앞서 만났던 두 작품에서 르메트르의 심리 묘사가 얼마나 치밀한지 여실히 맛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은 이 작품에 더욱 큰 기대를 가지게 한다.

 어쩌면 피에르 르메트르가 보내는 절박한 경고일지도 모를 이 소설을 다시금 만나고 싶다.

 

 

 신간평가단 파트장이 하는 일중 하나는 월초에 이루어지는 신간 추천을 집계하는 일이다. 이 페이퍼를 쓰기 전에 이미 한 번 집계를 내봤는데 한국 문학쪽에선 유독 두 작품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하나는 구병모 작가의 '파과'이고

 다른 하나는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두 소설엔 공통점이 있다. '파과'는 60대의 여성 청부살인업자를 다룬 이야기이고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은퇴한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구나 그 처지 역시 비슷하다. '파과'의 여성 청부살인업자는 한 때 킬러계의 대모라고 불리었으나 지금은 제목 그래도 남들에게 팔 수 없는 '파과'의 존재이고 '살인자의 기억법'의 주인공 역시 알츠하이머로 전성기 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다. 노쇠와 결함으로 전성기 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어쩌면 한국 자체의 알레고리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 편으론 이건 이번 대선으로 전면에 드러난 이 땅의 50대 이상에 대한 조롱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얼핏 스친다. 아무튼 동시에 이렇게 연쇄살인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는게 내겐 심상치 않게 보인다. 딱히 팔릴만한 이야기라서 나온 건 결코 아니다. 생각해보면 징후는 이미 예전부터 있어왔다. 그러니까 MB 이후로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맹공으로 부터 우리의 살이가 심각하게 격침당한 뒤로 한국 문학은 과격한 경향을 때때로 노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이제 여유롭게 사회의 현실을 담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 때부터 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의 단면을 문학이 예리하게 포착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왔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현 시대의 소통법이란 폭력이고 생존법은 살인이니까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두 작품 모두가 다 내 관심 대상이다. 이미 '파과'는 가지고 있기에 이번 신간 추천에는 '살인자의 기억법'을 올린다. 

 

 

 새로나온 책 리스트에서 '개의 심장'을 봤을 때,

 난 이 책이 가장 압도적인 추천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헌책방을 뒤지면서 오매불망 찾았던 책,

 그토록 새로 발간되기를 기다렸던 책 중 하나였으니까.

 (설마, 나만 목빠지게 기다린 건 아니겠지?...)

 

 예상만큼의 추천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현재 순위가 4위니

 역시나 나만큼 이 책을 기다린다는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아무튼 미하일 불가꼬프의 이 걸작은 개에게 사람의 생식기와 뇌를 이식한다는 기상천외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개가 점점 사람으로 각성하는가 싶더니 나중에 가서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갈등을 일으킨다.

 

 개에게 사람의 생식기와 두뇌를 이식한다는 것은 이념 주입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고 그 개가 사람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서 대립관계가 되는 것은 혁명에 대한 은유로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작품을 통해 늘 소비에트 사회를 풍자함으로써 독재로 나아가는 사회에 경고를 보냈던 그이니만큼 이 작품엔 어떤 그의 목소리가 투영되어 있을지 궁금해진다. 그렇지 않아도 오래전부터 가장 보고 싶었던 책이니 당연 추천이다.

 

 

 현재 집계에서 외국문학쪽 선두는 바로 이 책이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여름, 거짓말'

 시공사에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들을 꾸준히 발간하고 있는데 이 책은 '사랑의 도피'에 이은 두번째 단편집이다. 개인적으로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장편보다 단편을 더 좋아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를 두고 '감정의 고고학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만큼 오랜 시간 내재해온 인간 보편의 감정들을 잘 파헤치고 복원해낸다는 의미다. 난 그런 섬세한 발굴과 복원의 붓 터치가 단편에서 더 잘 드러난다고 느낀다.

 그래서 단편을 더 좋아한다. 아직 국내에 한번도 소개되지 않은 단편들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러므로 당연히 관심 대상이다. 앞서 말한 그 인간 보편의 감정들 중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이 대표적으로 형상화하는 건 죄와 책임에 대한 것이다. 사실 그의 소설들은 바로 그것을 중심으로 늘 공전하는 궤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아주 어릴 때 소포클레스의 '오디이푸스'를 감명깊게 읽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그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전범 국가 독일인이라면 죄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예민해질 수 밖에 없는 감각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시점에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작품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이 좀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시대란 죄는 있으나 책임을 지지 않으려 하는 무리들로 가득한 시대가 아닌가.

 일본의 아베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저 UPPER CLASS들 하며...

 남들에겐 준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자신만 예외가 되려는 존재들을 칸트는 '악마'라고 단적으로 정의내렸다. 정말 그런 악마들이 너무나도 많이 출몰하는 세상이다. 참으로 진저리날 정도로...

 이런 시대적 상황이 다시 한 번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들을 호출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읽고 싶다.

 

 여기까지 저녁에 썼고

 지금은,

 

 새벽 세시가 좀 넘었다.

 덥고 덥고 더워서 잠이 오지 않는다.

 내가 앉은 의자의 절반을 고양이가 누워서 차지하고 있다.

 지금 난 엉덩이를 거의 의자에 살짝 걸친 채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아까부터 계속 자판 위로 돌아다녀서 쓸 수 없게 만들더니

 (제발 손가락은 깨물지마! 발가락도!...)

 이제는 이렇게 아슬아슬한 포즈로 글을 쓰게 하는구나...

 

 다시 신간평가단 활동이 시작되었다.

 늘 시작할 땐 이번엔 진짜 제대로 활동해보자 마음먹는데

 끝날 때 되새겨보면 항상 도루묵이었던 것 같다.

 이번엔 그렇게 안되도록 좀 채찍질을 매섭게 가해봐야겠다.

 

 

 아무튼 13기 소설 신간평가단 여러분들 정말 반갑고 환영합니다.

 앞으로 더불어 좋은 추억들을 많이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런 마음으로 노래 하나를 선물할까 합니다.

 좀 오래된 밴드인 RENAISSANCE의 'CLOSER THAN YESTERDAY'란 노래입니다.

 

 

 

As morning leaves the night
Opening my eyes
I feel that you are close to me
And yet your heart is time away
But I can't hold a dream
That sleeps within my yesterdays
And so coming very close now
I see my destiny
Is to make you part of me
And to hope that you might be
Pure and free

[Chorus:]
Leave memories on the wind
To spend moments in endless flight
Held over by all you mean
I feel you nearer the darkest night
Closer now, than yesterday

Hoping for a chance
To find you loving me
In the distance searching there I'll be
In time

you may come to me
To fall into the world
That once we left so far behind
To learn

with each passing moment
As tomorrow comes for me
In the shadow of my life
For eternity to find
The light I see

 

[Refrain]

Make believe, Life is just a story.

you may live in wonder,

Of all that's been before

You are all, all that I believe in,

All I really need,

Inside for ever more.

 

 가사에 나오듯이

 이 신간평가단 활동을 통해 인생의 그늘에서 영원히 찾아 다니던

 그 빛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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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 - 내가 그린 일러스트로 그림엽서와 카드 만들기 행복한 손놀이
아키쿠사 아이, 고이즈미 사요 지음, 허앵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요즘은 손으로 손수 만든 카드 참 만나보기가 힘들죠?

어릴때만 해도 겨울방학만 되면 크리스마스 카드다 신년 카드다 해서 이것저것 손수 만들던 기억이 참 새록새록한데...

수채색연필의 느낌 참 좋아합니다.

요즘은 디지털로 뭐든 다 매끄럽게 잘 나와서 오돌토돌한 손 맛이 느껴지는 그림들이 오히려 더 그립더군요. 아카쿠사 아이와 고이즈미 사요가 함께 지은 '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이란 책을 만났을 때 제 두 눈이 '하트 뿅뿅'이 되었던 것도 그런 아날로그한 카드에 대한 추억과 손맛 가득 느껴지는 수채색연필의 느낌 때문이었죠.


이렇게 만든 사람의 정이 듬뿍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카드들 만들어 보내고 싶지 않으신가요?

'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은 그림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이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이런 카드를 직접 만들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입니다.

첫 장을 열면 저렇게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종류의 수채색연필과 함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24가지의 색깔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습니다. 왼쪽 위 모퉁이에 있는 빨간 색연필 통은 제가 가지고 있는 수채 색연필입니다. 대표 수채색연필중 하나로 파버카스텔사의 24색 세트가 소개되어 있어 제가 가지고 있는 12색 세트를 한번 슬쩍 넣어봤어요^ ^



수채색연필은 무엇보다 색의 배합이 가능하다는 점이 장점이죠. 그래서 24색이라 하더라도 배합에 따라 얼마든지 무궁무진한 색깔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병아리들처럼 말이죠^ ^


굵기도 다양하게 해서 선 터치의 느낌을 다변화시킬 수 있고 수채물감과 무리없이 어울리기 때문에 배경은 붓을 통해 칠하는 게 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죠. 또한 종이의 질감들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종이를 통한 효과도 노릴 수 있기도 하구요. 뭐, 그야말로 수채색연필은 손수 만든 카드에는 더없이 적합한 도구인 셈이죠.



책은 사계절 어느 때라도 계절에 맞는 카드를 만들 수 있도록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로 나눠 수채색연필로 일러스트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벗꽃 풍경을 수채 색연필로 나타내는 과정입니다. 봄하면 벗꽃이겠죠^ ^

보시다시피 단계별로 나누어 그림 그리는 과정을 자세히 나타내고 있기에 그림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고 쉽게 따라할 수 있게끔 되어 있습니다.


이번엔 여름.
여름하면 뭐니뭐니해도 역시 바다의 풍경이겠죠. 바다색을 나타내는 게 멋지네요. 이런 카드를 여름에 받게 되면 왠지 시원한 파도소리가 들려올 것 같아요.

이번엔 가을. 도토리와 귀여운 다람쥐만큼 정감있는 가을을 전해주는 그림도 없을 것 같아요.

오른쪽 윗 부분의 수채색연필로 다람쥐를 그리는 방법 독특하네요. 이렇게 또 한 수 배웁니다.


겨울엔 역시 크리스마스 카드와 신년 카드겠죠. 이건 십이지신을 모델로 해서 만든 카드입니다. 매년 그 해에 해당되는 동물로 손수 그려진 카드를 보내면 그냥 사서 보내는 것보다 더욱 도타운 정이 쌓일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각 계절마다 어울리는 카드를 그려 보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데다가 그 과정 역시 친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더욱 쉽게 그릴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수채색연필의 매력이 더욱 살아나는 쪽은 카드 보다는 역시 여행할 때 스케치라고 생각됩니다. 저 역시 여행할 때마다 자주 그렇게 스케치를 하곤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이 책 역시도 그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더군요.


여행할 때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이렇게 수채색연필로 남기는 것은 어떨까요?

훗날 그 풍경을 보았을 때의 기억이 사진보다 더욱 잘 살아날 것 같은데요. 저는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작은 스케치북 같은 걸 자주 들고다니곤 합니다. 이 책으로 풍경 그리는 법을 익혀두셔서 여행할 때 직접 본 풍경을 그려보시면 더욱 알찬 여행이 되실거에요.


이렇게 말이죠. 확실히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죠.

이런 그림은 풍경과의 내밀한 교감에서 우러나온 것과 같으니 사진보다 더욱 진하게 그 때 본 풍경의 느낌을 진하게 되살려 줄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고 말이죠.


수채 색연필에 익숙해지시면 보다 난이도가 있는 꽃그림에도 이렇게 도전이 가능합니다. 꽃그림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수채색연필로 직접 자기가 좋아하는 꽃그림을 그려볼 수 있으실겁니다.



'처음 만나는 수채색연필'은 이렇게 부드러우면서 아기자기한 정감이 넘치며 그리는 이의 마음 또한 그 결마다 한껏 드러날 수 있는 그림을 직접 그려볼 수 있도록 쉽고도 친절하게 설명해줍니다. 아마도 별 무리없이 흠뻑 그림의 세계에 빠져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러니 그동안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던 분들은 이 책을 통해 한 번 도전해보는 것도 어떨까 싶어요.


이토록 다양한 수채색연필의 세계에!

여기에 있는 그림들을 모두 이 책을 통해 다 그려볼 수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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