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탐하다 - 판타스틱 픽션 BLACK 14-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4
마이클 코리타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아버지!

 아버지! 이 씹새끼

 너는 입이 열개라도 말을 못해!

 

 - 이성복, '그해 가을' 중에서 -

 

 

  소설에 나오는 FBI 요원 그레이디는 말한다. 프랭크는 아비저로 부터 '총알과 시체의 유산'을 받았다고.

유산이 있다. 아버지로 부터 물려받게 되는 유산이. 말하자면 하나의 총체적 세계이다. 거기서 아들은 선택해야 한다. 아버지의 복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유로운 나 자신이 될 것인가? 정답은 쉽지만 실제로 행하기엔 어렵다. 이미 선택하는 자신이 아버지의 세계에 깊이 침윤된 까닭이다. 그건 의식의 저 밑바닥에서 '나'란 것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무의식을 지배하는 존재다. 피에르 부르디외의 '아비투스'처럼 결심과 의지로 훌쩍 빠져나올 수 있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불새와도 같이, 진정한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불태워야만 가능하다. 그럴때만 부활은 원하는 만큼의 보상이 된다.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새가 살기 위해서는 껍질을 깨뜨려야 한다고. 껍질이란 자신을 이루고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다. 그런 세계를 깡그리 부술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의 해방은 어렵다. 그러니까 '총알과 시체의 유산'으로 부터 말이다.

 

 마이클 코리타는 흔히 '신성'으로 불린다. 새롭게 나타난 젊은 별이라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데뷔작 '오늘 밤 안녕을'은 미국에서는 아직 법적으로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나이인 만 20살에 나왔다. 스릴러 작가로 치면 아직 주민등록증에 잉크도 마르지 않을 나이에 그는 데뷔를 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젊은 세대에 속하고, 가족적으로 비유하자면 아들 세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소설은 그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이 많다.(난 아직 '숨은 강'을 읽지 못했기에 그건 빼고 하는 말이다.)'오늘 밤 안녕을'에서 주인공 사립 탐정 링컨 페리를 찾아와 아들의 죽음에 관련된 사건을 의뢰하는 이는 '존 웨스턴'이라는 아버지다. 그런데 코리타가 그 아버지를 드러내는 모습이 흥미롭다. 70대 후반의 이 꺽다리 노인은 왕년에는 제법 건장했을지 모르나 지금은 '말라빠지고 배는 쭈글쭈글한'모습이다. 눈빛만은 보이는 건 뭐든지 빨아들이겠다는 듯이 날카롭지만 정작 그야말로 마치 세월이 고압의 흡입기라도 되어 남김없이 빨아들이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다. 그런 그가 링컨 페리에게 2차대전 이야기를 한다. 탑골 공원에 가면 흔히 만날 수 있는 '왕년에 내가'를 노래의 후렴구처럼 반복하는 노인들처럼...

 

 '오늘 밤 안녕을'이 이렇게 첫 시작부터 미이라처럼 되어버린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바로 코리타가 보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버지를 양산해 내었고 또 그런 아버지들이 떠 받쳐온 미국은 코리타에게 지금 그런 모습에 불과한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그 아버지의 이름은 '웨스턴'이다. 그 '서부'야말로 무엇보다 전통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웨스턴을 이어받은 아들은 살해당하고 그 아내와 딸은 실종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충실히 따랐던 아들의 마지막이 파멸인 것이다. 자신만이 아니라 그 가족까지 포함해서. 그게 지금의 미국이 아들 세대에게 물려주고 있는 유산이었다. 2차 대전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던 것처럼 '총알과 시체의 유산'이 물려줄 수 있는 건 파멸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코리타는 그래서 아들 세대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들의 유산에서 벗어나 역사와 미래를 바로 그 자신들의 몸으로 직접 떠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걸어 나오게 된다. '오늘 밤 안녕을'에서는 링컨 페리가 그리고 '밤을 탐하다'에서는 프랭크가. 바로 아들들이. 코리타의 분신들이.

 

 그렇게 '밤을 탐하다'는 스탠드 얼론이지만 '오늘 밤 안녕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코리타가 거기서 천착했던 주제가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밤을 탐하다'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하나는 물론 프랭크고 다른 하나는 '노라'라는 여인이다. 공통점이 있다. 프랭크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살인 기계가 되는 훈련을 받은 자로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게 내내 복수를 꿈꾸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노라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병으로 아버지가 운영하던 자동차 정비소를 스스로 꾸려나가려 한다. 하나는 아버지가 비록 죽고 없어도 그 세계에 강력하게 붙들려 있는 자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대신해 그 세계를 지속해 나가는 자다. 그렇게 다들 아버지의 유산으로 부터 자유롭지 못한 자들이다. 아버지 세계가 감옥과도 같다는 것은 이미 소설의 첫머리에서 부터 제시된다. 소설의 첫 장면이 유치장에 갇혀 있는 프랭크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건 지금 프랭크의 인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비유와도 같다. 그에겐 아버지로 물려받은 길을 걷지 않아도 충분히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만큼의 재능이 있지만 아버지로 부터 각인된 세계로 인해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노라도 마찬가지다. 노라의 첫장면은 같이 일하고 있는 제리라는 남자의 시선 속에서 드러난다. 그 제리의 눈에 노라는 정비소를 꾸려가는 어엿한 경영자라기 보다는 그저 남자를 유혹하려 드는 '암컷'일 뿐이다. 노라는 지금까지 무시된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입증하기 위해 남자들만의 영역인 정비소 일로 들어왔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로만 인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리의 불만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그들은 갇혀있다. 하나는 스스로, 다른 하나는 타인들의 시선에 의해.

 

 이는 정확히 우리 무의식을 그 근저에서 지배하고 있는 아버지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하다. 하나는 아버지가 새겨놓은 언어로 스스로를 번역하게 함으로써 자신을 오로지 아버지의 눈으로만 평가하게 만들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언어가 하나의 질서가 되어 자리잡음으로써 내부적으로는 어떻게 자신의 언어로 스스로를 쓸 수 있게 되었더라도 이제는 외부의 눈으로써 그 언어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들의 진정한 해방은 이 자아와 타자 둘 모두에게 완강히 붙들려 있는 '아버지의 언어'로 부터 자유로울 때만이 가능하다.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유산으로부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찾아나서는 이야기인 '밤을 탐하다'가 프랭크와 노라 둘 모두를 주인공으로 데려온 것은 그 때문이다. 그 둘이 하나인 것은 똑같이 매개자가 있다는 것에서도 드러난다. 즉 아버지가 부재한 가운데서도 계속 아버지의 그림자가 되어 그 아버지의 언어를 지속시키는 매개자들 말이다. 프랭크에게는 아버지 질서가 가장 강력하게 지배하는 공간인 '토마호크'를 지키는 에즈라가 있고 노라에겐 앞서 말한 '제리'가 있다. 그렇게 매개자들이 아버지의 공간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를 공명시킨다. 분명 프랭크와 노라에게 아버지와의 간격은 그만큼의 해방인 것이지만 매개자들의 목소리는 오히려 그 모자람만 부각시키고 그렇게 죄의식을 일깨워 더욱 아버지와 닮아지려 애쓰게 만들 뿐이다. 이런 식으로 내부는 매개자들로 인해 구원을 가져올 곳이 없으니 구원은 전혀 다른 쪽, 그러니까 완전한 외부에서 와야만 했다.

 

 바로, 데빈이다.

 

 데빈은 프랭크에게 아버지를 함정에 빠뜨려 죽게 만든 자신의 원수이다. 그는 그를 끝까지 추적하겠다고 아버지와 굳게 약속했고 지금까지 그의 삶이란 전적으로 데빈을 중심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코리타는 이 기표를 비튼다. 표면적으로만 증오이지만 진실한 의미에선 그 진정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때문에 코리타는 데빈을 그런 존재로 만든 것이다. 원수만큼 스스로에게 외부적인 존재도 또 달리 없을테니까. 이는 데빈이 온 장소에서도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플로리다. 서늘한 아침공기가 솔잎과 장작 연기를 타고 흐르는 울창한 숲과 호수로 가득한 '토마호크'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타자일 수 밖에 없는 땅. 데빈은 바로 그런 땅에서 왔고 그만큼이나 타자인 것이다.

 

 현대 철학의 주류들은 말한다. '구원은 오직 타자로 부터 온다'고. 당연하다. 온갖 매개자들이 들끓기만한 내부는 전혀 다른 언어를 들려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레이디는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알고보면 프랭크는 바로 그 그레이디 때문에 갇히게 된 셈인데 그는 가장 강고한 아버지의 권력의 상징이라 할만한 FBI의 요원이다. 거기다 그가 그토록 프랭크에게 집착하는 것은 자신만은 보다 강력한 아버지의 모습이 되려는 은밀한 욕망 때문이기도 하다. 이만큼이나 아버지가 되려고 애쓰던 자가 사실은 프랭크를 가둔 진정한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FBI가 되어 내부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존재가 말이다.

 

 그러므로 외부를 요청할 수 밖에 없다. 데빈은 바로 그 요청에 응답한 존재인 것이다. 과연 절대적 외부의 존재로써의 데빈은 프랭크와 노라의 세계에 메워질 수 없는 균열을 일으키고 거기다 랭크와 노라에게서 보자면 자신을 가두고 있었던 매개자들마저 제거하여 프랭크와 노라에게 자신들만의 언어를 돌려준다. 이런 존재이기에 데빈의 결말이 우리의 예상과 다른 것도 당연하다. 이게 바로 이 소설에 투영된 코리타의 주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삼 그 주제에 대해서 말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까 싶다. 타자에 대한 전적인 열림만이 현재 미국이 물려준 유산으로 부터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나오는 '파트너'라는 말만으로도 입증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내가 보고 있는 마이클 코리타는 아들 세대에게 밤만 탐하도록 만드는 이제는 집착 밖에는 남지 않은 쭈글쭈글한 주검과도 같은 미국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 달리 말하면 어떻게 우리들만의 언어로 새롭게 생각하고 대안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그 의문을 꾸준히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또한 '신성'이라는 젊은 세대이기에 그런 의문과 스스로 풀어가는 노력에 더욱 주목하게 되기도 한다. 아직 그 결실을 충분한 깊이로서 보여주고 있지는 못하지만 거기까지의 이르는 과정만큼은 위에서 말했듯 충분히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고 또 이야기 역시 흥미롭기에 여전히 그 다음의 여정을 기대하게 만든다. 1982년생인 그는 아직 젊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젊음이라는, 아직 남겨진 그 무한한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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