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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13
존 맥그리거 지음, 김현우 옮김 / 미디어창비 / 2020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으로 존 맥그리거의 소설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느낌을 감히 추정해 본다. 한 마디로 낯설 것이다. 대화는 있지만 그걸 나타내는 인용 부호도 없고 단락도 별로 없이 문장만 줄줄 이어질 뿐이니까. 흡사 호세 사마라구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그렇다고 특별한 주인공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작가가 묘사하는 시선은 다양하게 옮겨다니고 이 인물, 저 인물이 교직하는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예고 없이 무던히 끼어든다. '개들조차도'에 이어 무려 8년만에 나온 존 맥그리거의 신작인 '저수지 13'에서 당신이 보게 될 것은 개인이 아닌 거대한 세상이다.
첫 눈엔 스릴러 같을 것이다. 갑자기 사라진 13세 소녀가 나오고 경찰과 마을 주민들의 장기간에 걸친 대대적인 수색에도 불구하고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마도 이 다음엔 거기에 얽힌 미스터리를 푸는 것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겠지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전작 '개들조차도'를 읽은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저수지 13'은 다르다. 홀연히 기대를 벗어난다. 작가의 눈은 소녀의 사건을 훌쩍 벗어나 배회하는 유령처럼 마을 여기저기를 떠돌며 이 인물, 저 인물의 일화를 마구 끌어들인다. 두서도 없고 개연성도 없다. 우린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난 풍경과 인물을 마주해야만 한다. '여기서 형이 왜 나와?'란 질문은 애시당초 불필요하다.
소설은 크레타의 미궁이고 당신은 테세우스다. 하지만 당신에게 올바른 길을 인도할 아리아드네의 실은 없다.
8년 사이에 뭔가가 일어났다.
'저수지 13'은 전작 '개들조차도'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둘 다, 어떤 인물의 부재를 시작점에 놓는 것은 같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실종이라는 점에선 다르지만. 그러나 전개 방식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개들조차도'에서는 사회에서 마치 버려진 개처럼 살아 생전 아무 관심도 받지 못했던 이의 죽음이 시발점이 되어 그를 아는 자들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는지 추적한다. 고고학자가 자기 앞에 던져진 유물에 집중하듯 사회가 쉽게 지워버린 한 개인의 삶에 천착한다. 그래서 발굴이란 표현이 '개들조차도'엔 어울린다. 하지만 '저수지 13'은 독자들이 한 소녀의 실종에 관심을 가질 것을 알지만 연연해 하지 않는다. 작가는 마치 민들레 홀씨를 입으로 훅 벌어버리듯 그걸 사건이 일어난 마을 전체로 광범위하게 산포시킬 뿐이다. '개들조차도'에선 우리 역시 살면서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더 나아가서 기피해버렸을지도 모를 인물의 삶을 발굴해 그것을 보고 듣고 헤아리게 만들어 그 삶 역시 우리가 부둥켜 안아야 하는 것임을 체득하게 한다면 '저수지 13'은 문득 일어난 커다란 비극의 여파 속에서 그걸 껴안고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파노라마로 펼쳐 목도하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처음 받는 느낌은 어떤 냉혹함이다.
우연히 마을로 여행 온 한 소녀가 사라졌고 영영 발견되지 않는다. 처음엔 마을 사람 모두가 아파하고 제 일인 것처럼 찾아 나섰지만 시간이 흐르면 더이상 그만한 무게를 갖지 못한다. 그녀는 새해가 되기 바로 전날 실종되었지만 새해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의 축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벌어진다. 계절이 그렇게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사람들의 일상은 계속되고 모두들 소녀가 아닌 자기만의 관심과 근삼에 빠져 살아간다. 때때로 아직 소녀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게 생각은 나지만 아침 햇살 아래 놓인 풀잎의 이슬처럼 잠깐 머물다 사라질 뿐이다. 내 삶엔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소설은 그렇게 실종된 소녀를 벗어나 마을의 자연과 사람들 모두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섬세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모두 13장으로 이뤄져 있다. 각 장은 1년의 시간을 다룬다. 그렇게 소설은 소녀의 실종 후, 모두 13년의 세월을 다루는 것이다. 제목의 13은 소설이 담고 있는 세월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소설은 첫 장을 제외하곤 모두 같은 문장으로 각 장을 시작한다.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자정이 지나고 해가 바뀌었을 때'
균일한 시간이다.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하게 반복된다. 여기서 무엇이 떠오르는가? 고인물과도 같은 시간. 제목의 저수지는 그렇게 커다란 비극이 있어도 쉽사리 변화를 줄 수 없는 우리네 삶을 비유하는 것일 수도 있다. 브뤼겔의 그림이 문득 떠오른다. 이카루스가 태양에 너무 가까이 다가갔다가 밀랍으로 만든 날개가 녹아서 바다로 추락하는 걸 그린. 유명한 그리스 신화 속 사건을 다루지만 그러나 브뤼겔은 그 사건을 사소하게 취급한다. 거대한 화폭에서 이카루스의 추락이 가지는 비중은 미미하다. 브뤼겔은 이카루스보다 거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언덕에서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더 크게 그린다. 그는 고개를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쪽으로 돌리고 있지 않다. 눈 앞에 놓인 밭 가는 일에만 집중한다. 자신의 삶에만.
지속성의 의무를 엄중하고 부과하고 있는 삶은 그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무지와 방관은 필수적이라는 걸 그림은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적당히 관심을 끊고 잊는 것도 필요한 것이다. 삶은 그렇게 굴러간다. 누구나 각 자의 삶이 있으므로. 그것도 단 하나밖에 없는.
너무나 아픈 이별을 겪어서 이제 살아갈 의욕을 모조리 잃고 그저 하염없이 울기만 하는데도 때가 되면 어김없이 꼬르륵 하며 허기의 신호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허탈한 서늘함을 우리 역시 느껴보지 않았던가. 내일은 이부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걸어가야 한다는 것을. 삶이란 저수지의 무정함. 아이러니하게도 그 무정함의 힘을 빌어 우리는 살고 미래를 열어간다.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비극이 자아낸 공백 속에서. 그렇다고 그 비극 때문에 우리가 더 현명해지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저수지에 아무리 커다란 바위가 떨어져도 그 경계를 조금도 허물지 못하고 마냥 잠겨 버리듯이. 삶은 그냥 어제의 고만고만한 그대로 늘 똑같은 고민을 부여 잡으면서 똑같은 수준으로 해결할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아리아드네의 실이 없는 불운한 테세우스인 것이다.
13.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가질 때 모인 사도들의 숫자. 구원의 종결.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제자의 손에 죽었다. 설교는 사라졌다. 뱃사람에게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던 별자리는 까만 밤에 가려져 버렸다. '저수지 13'에서 존 맥그리거가 그리는 냉혹한 세계를 유랑하다보면 그가 어느 시점에선 이런 삶을 견딜만한 혜안을 던져주겠거니 기대하게 된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바랐던 것처럼. 그러나 소설에서 내내 사라져 있던 소녀처럼 그런 건 주어지지 않는다. 맥그리거는 문학이 감히 그런 존재는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나마 문학이 줄 수 있는 건, 살면서 쉽사리 체험하지 못하는 걸 대리 충족해 주는 것 뿐이라고.
그렇게 다시 그의 첫 소설,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으로 돌아간다. 알베르 카뮈가 살면서 하나의 육체밖에 소유하지 못하는 인간을 두고 유배에 처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던 것처럼 맥그리거도 개체성이 가지는 한계에 유념한다. 그 한계는 숙명으로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도 나를 벗어나 '너'가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 광막한 세상에서 겨우 '나'만의 삶을 경험하다 갈 뿐이다. 맥그리거는 '저수지 13'과 비슷하게 하나의 비극적 사건에서 출발했던 첫 작품부터 '유폐된 나'를 벗어나는데 몰두했다. 개체성의 한계를 넘어 고루 확산되어 다양하게 얽히는 것을 추구했다. '저수지 13'은 그 걸음의 정점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소상하게 담고 있으니. 그렇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나를 벗어나 우리가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다양한 일원이 될 수 있다. 사실 문학만큼 깊이 타자가 되어볼 수 있는 매체는 없다. 맥그리거는 문학으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딱 거기까지라고 여긴다. 평소에는 잘 할 수 없는 다채로운 타자들의 삶에 아주 흠뻑 젖게하는 것. 하나의 눈이 아닌 수많은 눈으로 나와 세상을 보는 것. 어쩌면 그 교차와 얽힘 속에서 우리는 저수지에서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 삶을 직조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디어창비에서 책을 제공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