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파스트의 망령들
스튜어트 네빌 지음, 이훈 옮김 / 네버모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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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직하고 우직하다. 아일랜드 작가 스튜어트 네빌의 데뷔작, '벨파스트의 망령들'을 읽은 첫 느낌이다. 2009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화려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데 읽어보니 그럴만 한 것 같다.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1998년 4월 10일에 영국과 아일랜드 그리고 북아일랜드 사이에 이뤄진 벨파스트 협정 이후를 다룬다. 그 협정은 수 십년 간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아일랜드에서의 갈등을 일단 종식시키긴 했지만 작가가 이 소설에서 밝히고 있는 바에 따르자면 그저 단순한 봉합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동안 대의와 미래를 위한다는 미명 하에 아무 이유 없이 삶을 희생당한 이들을 모르쇠했기 때문이다. 목숨을 어이없이 빼앗기고 피눈물을 흘린 사람들은 존재하는데, 가해자들은 아무런 죄책도 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자신들의 범죄를 발판 삼아 더 큰 권력과 재력을 가져버렸다. 스튜어트 네빌은 이러한 상황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협정이라는 장막 아래에서 손쉽게 지워져 버린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자신의 소설을 통해서라도 전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소설의 주인공이자 사라져버린 목소리들의 복수자인 제리 피건을 작가의 대변자로 삼고서.




 제리 피건은 북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의 테러리스트였다. 19세 때 아이가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죽이는 첫 살인을 한 그는 북아일랜드에서 영국 왕립주의자들과 치열한 갈등을 겪는 동안 내내 그런 일을 해왔다. 조직이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하면 찾아가서 가차없이 죽였다. 협정 이후, 더이상 그런 일을 할 수 없게 된 피건은 괴롭다. 그건 살인을 못 해서가 아니다. 열두 명의 유령이 자신을 따라다니면 조금의 안식조차 허락하지 않는 탓이다. 제목이 '벨파스트의 망령들'인 것은 그래서다. 그는 유령들에게 잠깐이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유령들은 자신의 복수를 해주지 않으면 결단코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결국 피건은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한다. 열두 명의 유령들 죽음에 책임 있는 자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모조리 '렉스 탈리오니스'의 법에 따라 처단하는 것이다. 예전의 동료 모두를.


  "대답을 안 했잖나, 제리. 왜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다니까. 말해 봐." (...)

  "해야만 했으니까요."

  "해야만 했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뭐에 대한 유일한 방법?"

  "그들이 날 내버려두게 할 방법." (p. 382)

 

  오래만에 아주 눅진한 느와르를 만끽할 수 있는 '벨파스트의 망령들'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좋아한다면 얼마든지 추천해 줄 수 있는 작품이다. 주연, 조연을 막론하고 모두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으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몰입감에다 무분별한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북아일랜드 분쟁이 남겼던 상흔이 협정이 이뤄진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와 따로 놀지 않고 유기적으로 잘 엮어 자연스럽게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많은 아픔과 비극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 없이 미래로만 나아간다는 게 얼마나 부질 없는 젓인지 피건의 행보를 통해 물씬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재미와 깊이 모두 잘 챙긴 명작. 마리 맥케나와 엘렌 모녀 곁에서 피건이 묵묵히 그리고 헌신적으로 그들을 지켜주는 모습에선 라이언 고슬링이 주인공을 맡았던 영화 '드라이브'가 떠오르기도 해서 '벨파스트의 망령들 역시 영화로 만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언젠가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게 피건의 신념이자 이 책의 메세지인데, 요즘처럼 검사와 판사들이 한통속이 되어 벌을 받지 않아야 되는 사람에겐 큰 벌을 주고 정작 벌을 줘야 할 이들에겐 한없이 관대한 꼴을 보고 있노라니 더욱 마음에 들어오게 된다. 여하튼 데뷔작이 이런 수준이라니 스튜어트 네빌이라는 작가 자체가 몹시 궁금해진다. 작가는 '벨파스트의 망령들'을 시작으로 벨파스트 누아르 시리즈란 이름아래 여섯 작품까지 발표한 상태인데 후속작들도 아울러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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