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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터 캐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6
시어도어 드라이저 지음, 송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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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저가 이 소설을 집필할 당시의 제목은 '살(Flesh)과 영혼'이었다고 한다.

 '시스터 캐리'라는 제목은 출간되기 1년 전, 드라이저의 친구인 아서 헨리의 조언으로 바꾼 것이었다. 원래의 제목으로 유추해 보건대, 드라이저는 이 소설을 캐리만의 이야기로 쓸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보다는 대도시의 출현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정착된 당대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초상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소설 자체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증거가 된다. 표면상의 주인공이라 할만한 캐리 못지 않게 이 소설에서 허스트우드가 차지하는 비중도 상당한 까닭이다. 전반부는 캐리가, 후반부는 허스트우드가 주인공이라고 해도 그리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마냥 허튼 소리는 아닌 것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든 윌리엄 와일러 역시도 캐리 보다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분한 허스트우드에 더 비중을 두고 영화 '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황혼'이란 제목으로 개봉되기도 했다.



 분명 허스트우드 말년의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읽어보면 캐리의 이야기보다 허스트우드의 이야기가 좀 더 세밀하고 입체적이다. 드라이저는 출판 계약이 이뤄진 뒤에도 정식으로 출간될 때까지 계속 원고를 수정했다고 하는데 후반에서 보여주는 깊이가 초반에 비해 상당한 것을 보면 역시 허스트우드 부분을 많이 수정, 보완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어쨌든 내게 이 이야기는 캐리와 허스트우드의 양 갈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런데 그렇게 읽다보니 캐리와 허스트우드 사이에 상당히 많은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경로의 유사성.

 캐리가 걷는 길은 나중에 허스트우드가 걷는 길과 같다. 캐리는 처음으로 본 도시의 모습에 넋을 잃고 드루에의 외모가 대변하는 화려한 도시적 삶에 매료된다. 그것은 그녀에게 잠시 장밋빛 미래의 꿈을 선사하지만 이내 비루한 현실 앞에서 쉽게 시든다. 환경을 이루는 살(flesh)는 너무도 비대해서 영혼은 쉽게 초월의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은 타협. 현실과의 부단한 타협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스스로 날개를 쪼아 날 수 없게 된 새 키위와도 같이 욕망의 대가로 자유를 지불한 영혼에게 남은 것은 고독 밖에 없다.


 허스트우드도 다르지 않다. 캐리에 대한 그의 매혹은 언제 찾아왔던가? 연극에서 캐리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였다. 처음 캐리가 본 도시가 실제라기 보다는 환영에 가까운 불빛으로 환한 밤의 도시 모습이었듯이 허스트우드도 실제 캐리가 아닌, 연기로 만들어진 환영인 캐리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다. 캐리와 허스트우드 둘 다,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실제 아닌 환상이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시작이 같았으니 그들이 걷는 길 또한 유사하다. 둘다 그들을 이끄는 것이 환상인 것이다. 캐리는 드루에게서 발현되는 환상을,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서 발현되는 환상에 이끌린다. 물론 그들을 유혹하는 환상은 같지 않다. 캐리를 유혹하는 것은 안정의 환상이고, 허스트우드를 유혹하는 것은 자유의 환상이다. 허스트우드는 보다 자유롭게 되기 위해 캐리라는 환상에 취한다. 그는 이미 캐리가 꿈꾸는 것을 이룬 사람이다. 하지만 드라이저는 캐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른 그조차도 환상의 노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통해 가지게 되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도 없이 노력해야 한다. 자신이 대표하는 계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위, 가정에서의 위치 등등. 그는 자신이 속한 그 어느 자리에서도 타인이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환상에 맞춰 살아야 한다. 즉 연기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허스트우드는 캐리와 똑같다. 캐리가 연기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일궈낸 것과 똑같이 허스트우드도 정교한 연기를 통해 현재의 성공을 이뤄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캐리와 허스트우드는 돌림노래와 같으며 캐리의 미래는 허스트우드의 현재이기도 하다. 이것은 언젠가는 캐리도 더이상 타인을 위한 연기에 지쳐 허스트우드처럼 몰락하게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해피엔딩도 열린 결말도 아닌 것이다.


 환상과 그것을 유지시키기 위한 연기.

 내가 보기에 '시스터 캐리'에서 정말 중요한 키워드는 욕망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다.

 캐리가 하필이면 연기를 통해 자신의 안정을 획득하도록 설정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캐리와 허스트우드 모두 애초에 환상에 대한 매혹이 있다는 말을 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욕망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라캉을 떠올리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주체에게 특정 대상을 욕망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환상이다. 왜냐하면 욕망은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기에게 존재하는 결여를 메우고자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자면 먼저 동일시하려는 자신부터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답은 나온다. 그 때의 우리들에게 거울에 비친 내가 진짜 내 모습이라는 것을 보증해줄 참된 실재는 없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코와 입을 통합한 것이 얼굴이며 팔과 다리가 붙은 것이 신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해 줄 언어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 식으로 언어가 우리의 인식을 어느 정도 구조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주체는 성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재가 아닌 언어라는 허구, 그런 면에서 환상에 기대어 주체를 보정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욕망 또한 환상을 매개로 하지 않고서는 생성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언어가 먼저 있어 모든 것이 거기서 비롯되었듯이 태초에 환상이 있었다. 욕망은 그 빅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정확히 캐리와 허스트우드와 마찬가지로.


 그런데 왜 연기까지 끌어와야 했을까?

 환상의 정체 때문이다. 이 환상은 진실로 누구에게서 온 것인가? 캐리는 도시에게서, 허스트우드는 캐리에게서 얻었다. 하지만 정말은 거기에서 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아까 환상이 이미 주체 성립 그 자체에서부터 기입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환상을 이루는 것은 우리가 배우는 언어다. 언어는 내재의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내 외부의 것이다. 즉 우리의 주체는 이미 성립 당시부터 언어를 매개로 바깥의 시선에 노출되며 그에 맞춰 조형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자동인형처럼 조종하는 외부의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흔히 말하는 '대타자'다. 환상은 거기서 비롯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대타자의 욕망 대로 살게 된다. 남들이 바라는 것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바로 이 곳에서 연기의 숙명 또한 도래한다. 대타자는 주체 성립 당시에만 명령하지 않고 평생 내 옆에서 나를 지속적으로 관리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그의 언질을 기피하거나 시선에서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가진 정체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말이다. 즉 정체성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대타자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 한 번 생각해 보라. 우리는 살면서 자주 이렇게 묻곤 한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나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하지만 좀 전 주체 성립 자체에 이미 대타자가 관여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그대로 '대타자에게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이기도 하다. 즉 나의 정체성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타자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되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대타자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결박이 바로 연기로 나타난다. 허스트우드에게 보듯이 정체성이 확고하면 할수록 우리의 연기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배우들은 자주 배역에 엄청 몰입하다보면 연기가 끝나더라도 그 배역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해 일상마저 힘들어지는 후유증을 겪는다고 고백한다. 헐리우드에서는 이를 위해 따로 정신과 상담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네 삶도 배역이 본질을 압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꾸만 추동시키는 것이 바로 욕망이다. 알고 보면 불안은 욕망의 좌절이 아니라 욕망을 뒷받침하는 틀이라 할 수 있는 환상이 뒤틀릴 때 생겨난다. 캐리의 불안은 도시에서의 삶과 드루에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멋진 곳과 남자가 아니라는 것, 그렇게 환상이 깨어질 때 생겨났고 허스트우드 역시도 가정이 자신이 꿈꾸던 것과 더이상 맞지 않다고 여겼을 때, 즉 환상이 좌초되었을 때 피어 올랐다. 그 때, 캐리는 연기와 허스트우드를 욕망했고 허스트우드는 캐리를 욕망했다. 환상의 틀이 뒤틀리면 은폐된 결여가 드러나고 불안은 거기로 흘러드는 물과 같다. 대타자는 주체가 완전히 물에 삼켜지기 전에 서둘러 그것을 메우려 하고 그럴 때 가장 좋은 효과를 나타내는 욕망의 진흙을 사용한다. 환상과 욕망 그리고 연기는 이렇게 연결되며 때문에 환상에 취하면 취할수록, 욕망에 따른 연기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우리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모두 포식자 대타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스터 캐리'에는 캐리도 허스트우드도 패배자인 것이다. 진정한 승리자는 오직 하나, 그들에게 환상을 주고 연기를 강요한 대타자 밖에 없다. 드루에가 바로 그런 대타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드루에는 단 한 번도 대타자가 원하는 대로 연기를 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루에에겐 진정한 자아라는 게 없다. 자아라는 반대정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타자라는 게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타자란 어디까지나 동일시가 불가능한 대상을 말한다. 때문에 타자는 욕망을 낳지 않는다. 단지 하나의 거울이 되어 대타자가 은폐한 내게 있는 결여를 비출 뿐이다. 진짜 자아는 오로지 그 결여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드루에에겐 복사된 자아, 가짜 자아 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불안 또한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다. 환상의 뒤틀림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은 오히려 그래서 진정한 자아로 향해 가는 해방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니 결국 영화 '매트릭스'에서 환상에 취한 파란 약을 먹을래, 아니면 결여를 가져오는 빨간 약을 먹을래 문제인 것 같다. 허스트우드는 결국 빨간 약을 먹는다. 그는 캐리에게 도움을 구할 수도 있었으나 거부한다. 캐리도 빨간 약을 먹는다. 자신을 매혹시켰던 허스트우드의 세계가 더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한다. 이런 세계에 행복은 더이상 없다고. 


 이렇게 보니, 앞서 내가 한 말과는 달리 허스트우드와 캐리가 승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것은 1900년에 벌써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현대인들을 가장 힘들게 할 것이 바로 욕망을 잉태하는 환상과 그 실현으로써의 연기라는 것을 간파한 드라이저가 매일 캐리와 허스트우드만큼이나 힘든 연기를 해야 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아는 사람만 보라며 슬쩍 내놓는 조언인지도 모르겠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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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6-04-06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보면, 허스트우드나 캐리나 19세기 말의 인물이지만, 이미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보다 한단계 더 나간 인물이군요. 자본주의 사회를 힘겹게 버텨내야하는 우리들은 하루에도 몇번씩 파란 약을 꿀꺽꿀꺽 먹지 않습니까. 헤르메스님의 눈으로 보니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라캉 이전에 이미 라캉 철학에 정통(?)했었는듯 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리(re)뷰군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아..근데 혹시 저 영화 보셨어요? 저는 보고 싶은데...(영화에서는 허스트우드의 비참한 결말보다 그를 더 로맨틱하게 그리는 데 중점을 둔 것 같더군요. 주워들은 바에 의하면..)

ICE-9 2016-04-07 00:26   좋아요 0 | URL
읽다보니 아, 이거 라캉 식으로 읽으면 재밌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무모하다는 걸 알면서도 라캉이라는 주머니에 작품을 마구 우겨 넣어 보았습니다. 그래도 허점이 많죠? 하하^^
영화는 봤습니다. 영화는 정말 허스트우드 관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의 예로 캐리가 배우가 되는 것도 소설과 다르게 허스트우드와 사랑의 도피를 하고 허스트우드가 아직 이혼이 되지 않은 관계로 자신의 결혼이 중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의 충격으로 유산까지 한 뒤, 다시 말해 절망의 절망을 맛 본 끝에 도전하거든요. 거기다 허스트우드 또한 소설과 다르게 자신이 사랑하는 캐리에 대한 책임감으로 어떻게든 먹여 살리려 자존심까지 내던지고 일을 얻으려 정말 발버둥을 칩니다. 영화는 그 과정을 자세히 그리는데 그래서 마지막의 포기가 더욱 납득되죠. 그렇게 캐리 보다는 뒤늦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남자의 사랑과 몰락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식으로 dvd가 나왔습니다. 파라마운트로요. 슬프게도 저는 미소장입니다. 예전에 알라딘 직배 중고로 나온 것을 보고 구매했는데 불법 리핑 dvd가 와서 반품했거든요. ㅠ ㅠ (중국 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곳이 있더군요. 원하시면 주소 알려드릴게요. 화질도 별로고 중국 자막이 거슬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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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감이 오늘이라 시간이 없는 고로각설하고 바로 추천으로 들어간다.


 MOST WANTED


 1. 페터 바이스 - 저항의 미학














 3월의 신간 중 단연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독일 작가 페터 바이스의 대작 '저항의 미학'!

 바이스는 82년에 죽었는데 저항의 미학 3권은 81년에 나왔다. 한 마디로 그의 말년을 불태운 작품으로 사실 그가 82년에 작고한 것도 이 삼부작을 쓰는데 너무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때문에 평가도 아주 높아서 70년대와 80년대를 통틀어 독일어로 쓰여진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주로 유럽을 좀먹어가던 파시즘과 거기에 대한 사회주의 저항을 그리고 있는데 원래 페터 바이스 자체가 그런 단체에 참여해 활동하다 나치 세력이 점점 강해지자 스웨덴으로 달아나 죽을 때까지 평생 거기에 머무른 전력이 있는만큼 더없이 생생한 시대 묘사로 유명하다. 


 소설은 십대에 만난 세 인물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는데 그것은 각각 페터 바이스의 정치와 문학 그리고 예술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만큼 자전적이면서 세 영역에 대한 바이스 자신의 자의식이 깊게 투영된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험난한 시대, 오로지 이상 하나만 믿고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갔던 개인의 투쟁에 대한 초상을 이 소설만큼 역력하게 드러낸 것도 또 없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지금 우리나라도 나치가 한창 창궐한 무렵의 독일만큼이나 어둡고 절망적이다. 달없는 밤, 갈길 몰라 헤매고 있는데 저만치 누군가 조용히 들고가는 초롱불을 보았을 때와 같이 희망과 의지를 얻기 위해 벗해보고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스가 제목으로 '저항의 미학'으로 한 것은 체제가 아무리 강력하게 억압하더라도 예술 안에서 사회에 대한 이해와 정치 행동을 위한 새로운 모델을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의 표현이라 한다. 그도 나만큼이나 희망과 의지를 가져다 줄 뭔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 더욱 함께해 보고 싶다. 


  2. 아머 - 개미전쟁, 존 스타클리


 평생 단 두 작품만 남겼다는 존 스타클리의 작품이라니. 그것만으로도 '아머 - 개미전쟁'이 읽고 싶다.

 엇! 그런데 이 소설 설정이 참 낯익다. 일단 '아머 -개미 전쟁'은 거대 개미의 모습을 한 외계 생명체가 지배하고 있다는 행성 밴시에서 그 행성을 점령하기 위해 신체 능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강화복을 입고 투입된 군인들이 거대 개미와 싸우는 이야기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방영되기도 한 만화 테라포마스가 이와 비슷한 것이다.


 이 만화에서는 인류가 화성 개척을 위하여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먼저 이끼와 바퀴벌레를 풀어 놓는데(이끼는 비슷하게 화성 개척을 소재로 했던 영화 '레드 플레닛'에서도 나온 바 있다.) 그만 바퀴벌레가 이상 진화를 하여 인류만한 크기로 거대해지고 지능마저 겸비해선 신체능력 또한 인간을 넘어서 인류에게 아주 위협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화성에서 건너온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때문에 지구가 위기에 빠진다. 백신을 만들려면 반드시 오염되지 않은 샘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오직 화성에서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화성은 앞서도 얘기했듯이 무시무시한 능력을 가진 바퀴벌레들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백신 수색팀을 투입하는데 1차로 갔던 지구 수색팀은 무참히 살육당하고 만다. 때문에 지구는 전과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다양한 동물의 DNA를 이용하여 그 동물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자들을 육성, 그런 그들로만 구성된 수색대를 2차로 화성에 보낸다. 그리하여 화성에선 지구와 바퀴벌레 간의 처절한 살육전이 펄쳐진다.


 어떻게?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그런데 '아머 - 개미전쟁'은 1984년(그렇다!! 무려 32년 전 작품인 것이다. 한 마디로 고전이랄 수 있겠다.), 테라포마스는 2013년에 나왔다. 그렇다면 테라포마스가 '아머 - 개미전쟁'을 심하게 말하면 창조적 재활용을 했거나 덜 심하게 말하면 커다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솔로몬이 말했듯 정녕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테라포마스'가 얼마나 재활용했는지 알기위해서라도 '아머 - 개미전쟁'이 읽고 싶다. 밀리터리 사이언스 픽션의 걸작이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SO SO ...


 3. 추락하는 모든 것들의 소음 - 후안 가브리엘 바스케스


 20세기 말의 콜롬비아를 그리고 있다고 하니 큰 관심이 생긴다. 바야흐로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잔혹하기 그지 없는 폭력으로 콜롬비아 전체를 지배하던 시대. 문자 그대로 헬 콜롬비아. 한 번은 그 시대를 클로즈 업한 이야기를 보고 싶었다. 이제 그 기회가 온 것 같다.










 4. 크리피 - 마에카와 유타카


  2011년 일본 미스터리 대상 신인상 부문 수상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소설을 정말 읽고 싶게 만드는 것은 그런 사실이 아니다.

 오직 단 하나, 이 소설이 곧 개봉될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 '크리피'의 원작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도 읽고 싶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이다. 그의 공포 영화는 영화감독으로서의 그만의 독특한 자의식이 담겨 있어 좋아한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자신의 공포 영화를 집대성한 2007년 작 '절규'를 끝으로 더이상 공포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정말로 공포영화 세계를 떠나 있었다. 무려 10년 가까이 지나서 그는 다시금 공포영화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 그가 처음 선택한 작품이니 아무래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전에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를 원작으로 드라마로 작업했던 2012년의 동명 작품은 분명히 2011년 3.11 이후, 일본의 속죄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규'의 죄의 기억과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기요시는 기억에서 속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모처럼 돌아와 다시 만든 공포영화 '크리피'에선 또 어디로 나아갔을지 궁금하다. 그 때문에라도 원작을 읽어보고 싶다. 물론 기요시의 공포영화에로의 귀환을 환영하는 의미도 있다. 더구나 먼저 읽어보신 분들이 무섭다고 하시니 더 읽고프다.


 아래는 기요시의 '크리피' 예고편

 

 

 5. 생사의 강 - 차이쥔

 

 그동안 블루오션으로 남아있었던 중국 미스터리들이 연이어 소개되고 있다.

 최근 몇 작품을 읽었는데 마음에 들었기에 기대감이 높아졌다. 차이쥔은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라고 하는데 '생사의 강'은 전생과 윤회 같은 것들을 다룬다고 한다. 소재가 사회파랑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데 중국에서 천만부 넘게 팔렸다고 하니 도대체 어떻게 소재와 주제를 엮었기에 그만한 성공을 거두었을까 심히 궁금해진다.

 거기다 이 작품의 목차를 보니 중국의 저승관이 자세히 펼쳐지는 것 같다. 본디 각 나라의 저승관에 관심이 많았던 터이기도 해서 매우 관심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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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면서, 4월에 아주 핫한 아이템들이 마구 출판되는군요.

 모두의 눈과 귀를 번쩍 뜨게 할 아이템은 단연 이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데아 총서로 나왔다가 어느새 절판되어 많은 이들로 하여금 헌책방을 전전하게 만들었던 그것!

 그렇습니다. 토머스 핀천의 '브이를 찾아서'가 드디어 간행된다는군요.




 간행된다, 안된다 그동안 참 설왕설래 하더니 민음사가 드디어 작정한 모양입니다.

 이 작품을 바라기 하느라 한없이 늘어나기만 하는 독자들의 목을 보호 차원으로다가...

 이제 더이상 애태우지 않아도 되겠군요. 고마워요, 민음사^^


 이에 질세라 문학동네도 사건 하나 크게 터뜨렸습니다.

 타임지가 가장 선정적인 문학 베스트 10중 하나로 꼽기도 했던 존 업다이크의 커플들이 나오네요.



 와우~! 

 이 작품까지 나오면 그렇지 않아도 봄바람에 더욱 죽어나가는 솔로들의 폐가 한층 더 타들어가겠군요.

 아니, 그 반대일까요?^^ 하하.


 그러나 당신이 SF의 팬이라면 이것은 그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드디어... 5년만에 그 작품이 찾아옵니다.

 열린책들, SF, 5년 하면 딱 하나밖에 없죠.

 맞습니다. 그것!! 댄 시먼스의 엔디미온이 마침내 우리 앞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얼마나 기다렸던가요?

 그 기다림에 보상이라도 하듯, 우와아아아!! 엔디미온의 각성까지 다 나온다네요. 대에에에에바아아악!!!!!!!

 이렇게 하여 우리는 드디어 히페리온 사가의 완전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4월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설마 세상이 종말하기라도 하나요?

 어떻게 단번에 이런 대박 아이템들이 주루루...


 네?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난다구요?

 정말? 진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거죠?


 그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보면 안다구요?


 아... 네, 그렇군요...

 오늘...


 여러분은 이미 아시고 계셨죠?

 하하, 만우절이라 책 가지고 한 번 장난쳐 봤습니다. 알라딘에 어울리는 농담으로...^^

 정말 속아셨더래도 돌은 던지지 마세요. 심장이 약하답니다.

 하지만 다음엔 이 거짓말들이 진짜가 되길 빌며, 양치기 소년은 이제 그만 물러가렵니다.

 그런데 문학동네 세계문학 시리즈에 제5 도살장이 발간 예정이라고 되어 있던데..

 커트 보네것이 새로 번역되어 나오나 봅니다. 그렇다면 '제일 버드' 좀 꼭 내어주세요.

 제가 읽은 커트 보네것 소설 중에 가장 웃긴 작품이었는데 꼭 다시 보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데뷔작인 자동피아노도... 굽신굽신...

 (문학동네 관계자 분이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거 기승전구걸이군요.


 세상에 왜 이리 읽고 싶은 책이 많은 거죠?

 책에는 정녕 불혹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하아...


 아, 그리고 표지 출처는 바로 여기입니다. http://bookcover.github.io/index.html

 여러분도 재미로 여러분만의 표지 만들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오늘에 어울릴만한 노래 하나 첨부합니다.


 신데렐라의 Nobody's Fool ^^



I'm not your fool
Nobody's fool
Nobody's foooool
I'm no fooool
Nobody's fool
Nobody's fool
Never again no no!!!


여러분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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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5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5 23: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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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프레드 바르가스. 그녀를 나는 감히 이렇게 부르고 싶다. 프랑스 미스터리의 여제(女帝)라고.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프랑스 미스터리계에서 자신의 작품이 가장 많이 팔리는 여성 작가이고 미스터리 계에서 명망 높은 대거상도 세 번이나 수상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바르가스에게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역시 아담스베르그 형사 시리즈고 그 시리즈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한다면(물론 시리즈가 계속 중이기에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나온 것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단연 '트라이던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일단 매혹적인 플롯부터.

 주인공 아담스베르크는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빠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마치 자기 내부에 자신이 알 수 없는 낯선 타자가 있어 돌연 거기에 정신을 사로잡히는 느낌이다. 곤혹스러워 하는 그 앞에 불현듯 포스터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트라이던트'의 원래 제목인 '넵툰의 바람 아래서'의 바로 그 넵툰이 그려진 포스터다. 마치 반복적으로 찾아왔던 그 이질감이 여기로 인도한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포스터엔 어린 시절 이후,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리고 평생을 두고 추적했었던 살인마의 서명과도 같은 흉기가 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넵튠이 든 트라이던트, 즉 삼지창이다. 때문에 아담스베르그는 그를 '세발작살'로 부른다. 그 존재는 자신의 동생을 파멸시켰고 그 때문에 아담스베르그는 평생 자책해야했다. 살인마는 자신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희미하게 깨닫는다. 최근 찾아왔던 기묘한 느낌은 경고였으며 그것은 그 살인마가 다시 활동하고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곧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한 여성이 살해되고, 근처에서 범행의 기억을 잃어버린 노숙자가 살인자로 체포된다. 겉으로는 사건이 완벽하게 해결된 듯 보였으나 아담스베르그는 안다. 16년만에 범인이 다시 돌아왔음을.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른 근처에 그것의 누명을 씌운 무고한 자를 놓아두고 체포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의 범죄 패턴이었으니까.


  비록 그 범인은 16년 전에 죽었지만.


 분명 그는 죽었다. 아담스베르그는 무덤까지 찾아가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목도하는 이 살인사건은 분명히 그 자의 짓이다. 카피캣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수사했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령의 범행인 것일까?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담스베르그는 진실을 아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그를 쫓는다. 사람들이 아담스베르그를 불신하고 비웃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고립된다. 하지만 어려움은 그게 다가 아니다. 연수를 떠난 캐나다에서 그는 일대 위기를 겪는다. 우연히 만나 정사마저 치뤘던 여인 노엘라가 '세발작살'에게 살해당하고 자신이 '누명을 쓴 무고한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스베르그조차 과연 자신이 무고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살인이 일어났던 밤의 기억이 없는 탓이다. 과연 함정인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인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는 이제 캐나다와 프랑스 경찰 모두에게 쫓긴다.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진범인 '세발작살'을 잡는 것. 30년동안 자신의 범죄를 완벽하게 감춰왔으며, 이미 16년 전에 죽은 범인을 그는 과연 체포할 수 있을까?


 매력적인 설정이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황당할 정도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결국 아귀가 다 맞아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뛰어남을 증명한다. JJ 애이브럼스 감독처럼 떡밥을 이리저리 많이 뿌려놓지만 회수되지 않는 떡밥은 하나도 없다. 왜 범인이 그런 패턴의 범죄를 저지르고 그토록 트라이던트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모조리 설명된다.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setting)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소설의 장점은 아니다. 솔직히 아담스베르그의 진짜배기 매력은 이야기에 있지 않다. 바로 캐릭터에 있다. 그것도 아담스베르그 하나만이 아니다. 조연이라고 할 수 있는 박학다식으로 자신의 모자란 외모를 커버하는 당글라르, 능력으로 남자들을 일당백하는 여성 르탕쿠르, 조직을 넘어 그리고 국경을 넘어 아담스베르그에게 인간적인 우애를 드러내는 트라벨만 그리고 아담스베르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 때마다 의지하는 할머니들까지. 소설엔 개성적인 매력으로 충만한 생생한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이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앙상블, 다양한 인간들의 드라마가 바로 이 아담스베르그 시리즈의 진짜 매력이며 그 매력을 최고로 발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트라이던트'다.


 이것만으로 낚이지 않는다면 이제 내용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하면서.


 도대체 '트라이던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아담스베르그는 사무실에 있다. 사무실에서 그는 벌벌 떨고 있다. 보일러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그는 곧 가게 될 캐나다 연수를 걱정한다. 그것은 당글라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편하게 있던 공간이 결코 편하지 않다. 그는 점점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입부는 독자에게 이것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사실 그것이 바르가스의 목적이기도 하다. '트라이던트'는 2004년에 나왔다. 그것은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진 뒤, 바로 다음에 나온 작품이었다. 9.11이 일어난 뒤 부시는 이라크를 상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생화학 무기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부시는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UN 차원의 참전을 원했으나 안보리에서 부결되었다. 그 안보리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 입장에 대한 찬반양론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한 나라의 안전 확보를 빌미로 타자의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쟁은 정당한 것인가? 무고한 타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프랑스는 반대했다. '트라이던트'도 그 입장에 선다. 아담스베르그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타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타인의 관할지로, 경찰에서 군인의 영역으로, 자신의 나라에서 캐나다로. 공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그렇다. 현재라는 시간에서 자신의 동생이 얽힌 과거의 시간으로 섞여든다. 시간만도 아니다. 신분도 옮겨간다. 범죄자를 체포하는 경찰에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그렇게 아담스베르그는 타자의 영역에서 타자가 된다. 그것도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프레카리아트'로.


 프레카리아트. 이것은 사회적 약자다. 불안속에 끊임없이 동요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정의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의 일차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호의나 의향에 의해 지탱되는, 따라서 불확실한" 것이다. 불안정'이라는 이름의 불확실은 행동할 수 있는 힘의 이미 운명 지워지고 이미 결정된 비대칭을 시사한다. 그들은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것은 그들의 은혜 덕분이다'(도덕적 불감증, p.118)


 아담스베르그가 프레카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비대칭이 소설에도 있기 때문이다. 범인 '세발작살'과 아담스베르그 사이엔 사실 엄청난 기울기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세발작살'은 고명한 판사 출신의 인물로 프랑스 사법체계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그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도 30년 넘게 완벽에 가깝도록 범죄를 감출 수 있었던 것은 그 권력 덕분이었다. 그가 누명 씌웠던 인물들이 모두 손쉽게 진범이 되어 형기를 살았던 것도 권력 때문이었다, 즉 '세발작살'은 자신이 누명 씌웠던 인물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쓴 흉기의 소유자이기도 한 신 넵튠과 같은 신분이다. 그런 신 앞에서 누명을 쓴 인물들은 신에게 버려져 오로지 신의 자비에만 의존해야 하는 프레카리아트고 같은 운명에 처한 아담스베르그 역시도 마찬가지다.


 '트라이던트'는 바로 이런 프레카리아트의 존재를 보여주고 그들의 대변자가 된 아담스베르그를 통해 비대칭을 전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은 당시 초유의 관심사였던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이기도 하다. 미국의 무력 앞에 이라크는 프레카리아트였고 그런 이라크 앞에서 미국은 그야말로 넵튠이었다. 미국의 침공도 이라크에게 누명을 씌워 감행되었다. '세발작살'의 누명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조작과 허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넵튠이 살인마라는 것은 그대로 미국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프레카리아트라는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유린하는, 미국에 동조하는 자들에 대한 비난인 셈이다. 그리고 비대칭의 전복은 결코 그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의 예언이기도 하다.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트라이던트'는 당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윤리적 입장을 진하게 우러낸 작품이었다.


 이런 지점이 '갑툭튀'가 아니라 이야기와 절묘하게 조합되어 드러난다는 점에서 나는 더욱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이야기의 재미, 캐릭터 묘사 그리고 내용의 깊이가 완벽에 가까운 삼위일체(trinity)를 이룬다. 아직도 이 정도의 높은 순도를 보여주는 작품은 못 만났다. 그렇기에 주저없이 아담스베르그 시리즈 최고작으로 꼽는다. 프레드 바르가스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실망한 적이 없기에 모르신다면 기꺼이 권해드리고 싶다. 그런 분들에게 '트라이던트'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물론 시작을 이렇게 최고작으로 하는 것은 다음을 생각하면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작가의 매력을 알리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다. 감히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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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5: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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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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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석, 안철수 때문에 마냥 갑갑하기만 했었는데

 이런 후보가 있었구나.

 저번에 안심번호로 후보 경선 투표 왔을 때 이 사람을 잘 몰라서 난 이동학을 찍었었는데...

 한 사람의 인격이라는 건, 원래 사소한 것에서 그 진실이 드러나는 법...

 하여, 나는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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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0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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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01: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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