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이던트 모중석 스릴러 클럽 39
프레드 바르가스 지음, 양영란 옮김 / 비채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프레드 바르가스. 그녀를 나는 감히 이렇게 부르고 싶다. 프랑스 미스터리의 여제(女帝)라고. 사실 그리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을까? 프랑스 미스터리계에서 자신의 작품이 가장 많이 팔리는 여성 작가이고 미스터리 계에서 명망 높은 대거상도 세 번이나 수상했으니까 말이다. 이런 바르가스에게 대표작이라고 한다면 역시 아담스베르그 형사 시리즈고 그 시리즈 중 최고 걸작이라고 한다면(물론 시리즈가 계속 중이기에 어디까지나 지금까지 나온 것에 한정해서 하는 말이지만) 단연 '트라이던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일단 매혹적인 플롯부터.

 주인공 아담스베르크는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빠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마치 자기 내부에 자신이 알 수 없는 낯선 타자가 있어 돌연 거기에 정신을 사로잡히는 느낌이다. 곤혹스러워 하는 그 앞에 불현듯 포스터 하나가 나타난다. 바로 '트라이던트'의 원래 제목인 '넵툰의 바람 아래서'의 바로 그 넵툰이 그려진 포스터다. 마치 반복적으로 찾아왔던 그 이질감이 여기로 인도한 것만 같다. 그도 그럴 것이 그 포스터엔 어린 시절 이후,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리고 평생을 두고 추적했었던 살인마의 서명과도 같은 흉기가 그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넵튠이 든 트라이던트, 즉 삼지창이다. 때문에 아담스베르그는 그를 '세발작살'로 부른다. 그 존재는 자신의 동생을 파멸시켰고 그 때문에 아담스베르그는 평생 자책해야했다. 살인마는 자신의 트라우마였다. 그는 희미하게 깨닫는다. 최근 찾아왔던 기묘한 느낌은 경고였으며 그것은 그 살인마가 다시 활동하고 있음을 알려주려 한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곧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한 여성이 살해되고, 근처에서 범행의 기억을 잃어버린 노숙자가 살인자로 체포된다. 겉으로는 사건이 완벽하게 해결된 듯 보였으나 아담스베르그는 안다. 16년만에 범인이 다시 돌아왔음을. 왜냐하면 살인을 저지른 근처에 그것의 누명을 씌운 무고한 자를 놓아두고 체포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의 범죄 패턴이었으니까.


  비록 그 범인은 16년 전에 죽었지만.


 분명 그는 죽었다. 아담스베르그는 무덤까지 찾아가 확인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목도하는 이 살인사건은 분명히 그 자의 짓이다. 카피캣은 아니다. 평생에 걸쳐 수사했기에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유령의 범행인 것일까? 죽은 자가 다시 돌아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일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담스베르그는 진실을 아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그를 쫓는다. 사람들이 아담스베르그를 불신하고 비웃어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고립된다. 하지만 어려움은 그게 다가 아니다. 연수를 떠난 캐나다에서 그는 일대 위기를 겪는다. 우연히 만나 정사마저 치뤘던 여인 노엘라가 '세발작살'에게 살해당하고 자신이 '누명을 쓴 무고한 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담스베르그조차 과연 자신이 무고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살인이 일어났던 밤의 기억이 없는 탓이다. 과연 함정인지, 자신이 저지른 범죄인지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는 이제 캐나다와 프랑스 경찰 모두에게 쫓긴다.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진범인 '세발작살'을 잡는 것. 30년동안 자신의 범죄를 완벽하게 감춰왔으며, 이미 16년 전에 죽은 범인을 그는 과연 체포할 수 있을까?


 매력적인 설정이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황당할 정도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결국 아귀가 다 맞아떨어지게 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뛰어남을 증명한다. JJ 애이브럼스 감독처럼 떡밥을 이리저리 많이 뿌려놓지만 회수되지 않는 떡밥은 하나도 없다. 왜 범인이 그런 패턴의 범죄를 저지르고 그토록 트라이던트에 집착하는 것까지도 모조리 설명된다.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세팅(setting)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것만이 소설의 장점은 아니다. 솔직히 아담스베르그의 진짜배기 매력은 이야기에 있지 않다. 바로 캐릭터에 있다. 그것도 아담스베르그 하나만이 아니다. 조연이라고 할 수 있는 박학다식으로 자신의 모자란 외모를 커버하는 당글라르, 능력으로 남자들을 일당백하는 여성 르탕쿠르, 조직을 넘어 그리고 국경을 넘어 아담스베르그에게 인간적인 우애를 드러내는 트라벨만 그리고 아담스베르그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들 때마다 의지하는 할머니들까지. 소설엔 개성적인 매력으로 충만한 생생한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이런 캐릭터들이 엮어내는 앙상블, 다양한 인간들의 드라마가 바로 이 아담스베르그 시리즈의 진짜 매력이며 그 매력을 최고로 발산하고 있는 것이 바로 '트라이던트'다.


 이것만으로 낚이지 않는다면 이제 내용 이야기를 해보자. 물론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하면서.


 도대체 '트라이던트'는 무슨 이야기인가?

 도입부가 인상적이다. 아담스베르그는 사무실에 있다. 사무실에서 그는 벌벌 떨고 있다. 보일러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그는 곧 가게 될 캐나다 연수를 걱정한다. 그것은 당글라르도 마찬가지다. 그는 비행기 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편하게 있던 공간이 결코 편하지 않다. 그는 점점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도입부는 독자에게 이것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사실 그것이 바르가스의 목적이기도 하다. '트라이던트'는 2004년에 나왔다. 그것은 2001년 9.11 사태가 벌어진 뒤, 바로 다음에 나온 작품이었다. 9.11이 일어난 뒤 부시는 이라크를 상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생화학 무기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부시는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UN 차원의 참전을 원했으나 안보리에서 부결되었다. 그 안보리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나라가 프랑스였다. 프랑스 입장에 대한 찬반양론이 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한 나라의 안전 확보를 빌미로 타자의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쟁은 정당한 것인가? 무고한 타자를 만들어낼 수 없다고 프랑스는 반대했다. '트라이던트'도 그 입장에 선다. 아담스베르그는 소설이 진행될수록 타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사무실에서 타인의 관할지로, 경찰에서 군인의 영역으로, 자신의 나라에서 캐나다로. 공간만이 아니다. 시간도 그렇다. 현재라는 시간에서 자신의 동생이 얽힌 과거의 시간으로 섞여든다. 시간만도 아니다. 신분도 옮겨간다. 범죄자를 체포하는 경찰에서 범죄자의 신분으로. 그렇게 아담스베르그는 타자의 영역에서 타자가 된다. 그것도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프레카리아트'로.


 프레카리아트. 이것은 사회적 약자다. 불안속에 끊임없이 동요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렇게 정의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불안정한(precarious)' 상태의 일차적 의미는 "다른 사람의 호의나 의향에 의해 지탱되는, 따라서 불확실한" 것이다. 불안정'이라는 이름의 불확실은 행동할 수 있는 힘의 이미 운명 지워지고 이미 결정된 비대칭을 시사한다. 그들은 할 수 있다. 우리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삶을 이어가는 것은 그들의 은혜 덕분이다'(도덕적 불감증, p.118)


 아담스베르그가 프레카리아트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비대칭이 소설에도 있기 때문이다. 범인 '세발작살'과 아담스베르그 사이엔 사실 엄청난 기울기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세발작살'은 고명한 판사 출신의 인물로 프랑스 사법체계에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그가 연쇄살인을 저지르고도 30년 넘게 완벽에 가깝도록 범죄를 감출 수 있었던 것은 그 권력 덕분이었다. 그가 누명 씌웠던 인물들이 모두 손쉽게 진범이 되어 형기를 살았던 것도 권력 때문이었다, 즉 '세발작살'은 자신이 누명 씌웠던 인물들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이 쓴 흉기의 소유자이기도 한 신 넵튠과 같은 신분이다. 그런 신 앞에서 누명을 쓴 인물들은 신에게 버려져 오로지 신의 자비에만 의존해야 하는 프레카리아트고 같은 운명에 처한 아담스베르그 역시도 마찬가지다.


 '트라이던트'는 바로 이런 프레카리아트의 존재를 보여주고 그들의 대변자가 된 아담스베르그를 통해 비대칭을 전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대립은 당시 초유의 관심사였던 미국과 이라크의 관계이기도 하다. 미국의 무력 앞에 이라크는 프레카리아트였고 그런 이라크 앞에서 미국은 그야말로 넵튠이었다. 미국의 침공도 이라크에게 누명을 씌워 감행되었다. '세발작살'의 누명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조작과 허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넵튠이 살인마라는 것은 그대로 미국에 대한 비판이며 동시에 프레카리아트라는 타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는 커녕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 유린하는, 미국에 동조하는 자들에 대한 비난인 셈이다. 그리고 비대칭의 전복은 결코 그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의 예언이기도 하다. 예언은 맞아떨어졌다. 이렇게 '트라이던트'는 당대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윤리적 입장을 진하게 우러낸 작품이었다.


 이런 지점이 '갑툭튀'가 아니라 이야기와 절묘하게 조합되어 드러난다는 점에서 나는 더욱 이 작품을 높게 평가한다. 이야기의 재미, 캐릭터 묘사 그리고 내용의 깊이가 완벽에 가까운 삼위일체(trinity)를 이룬다. 아직도 이 정도의 높은 순도를 보여주는 작품은 못 만났다. 그렇기에 주저없이 아담스베르그 시리즈 최고작으로 꼽는다. 프레드 바르가스는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실망한 적이 없기에 모르신다면 기꺼이 권해드리고 싶다. 그런 분들에게 '트라이던트'는 최적의 선택이 될 것이다. 물론 시작을 이렇게 최고작으로 하는 것은 다음을 생각하면 별로 좋지 않은 선택이다. 하지만 작가의 매력을 알리기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기에 어쩔 수 없다. 감히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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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4-07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