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의 아이들 1부 : 동굴곰족 1 대지의 아이들 1
진 M. 아우얼 지음, 정서진 옮김 / 검은숲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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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은 내게 '응답하라'와 같은 소설이다.



 어렸을 때,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ACE 88'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양의 아동문학을 번역한 시리즈로 책 좀 읽는다는 아이들에게 나름 유명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중, '100만년'이란 제목으로 6권의 연속된 소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백과사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선사 시대의 모습이 너무나 상세하면서도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는 지라 무지 신기해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던걸까 참 많이 궁금했었다. 어쨌든 너무나 좋았던 소설로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이렇게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감개무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다시 읽어 본 '대지의 아이들'은 어릴 때 느꼈던 감상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시켰다. 내가 읽은 것은 그 중 첫 권인 '동굴곰족'의 1권이다. ACE 88로 치자면 '100만년 동굴'과 '100만년 사냥'의 어디쯤 될 것 같다. 3권이 합쳐서 동굴곰족의 이야기였으니까. 번역이 훨씬 더 좋아져서 그런가, 선사 시대의 묘사가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대지의 아이들'은 작가가 선사 시대 소설을 쓰기로 하고 40세에 회사를 그만둔 뒤, 집필에 전념. 30년 동안 모두 6부가 나온 작품이다. 굉장히 방대한 양의 소설로, 1부가 '동굴곰족'이다. ACE88로는 2부인 '말들의 계곡'까지 읽었는데 부디 6부가 다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대지의 아이들'이 담는 시기는 네안데르탈인크로마뇽인이 세대 교체를 할 무렵이다. 정확히 2,5000년 전이라고 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여성 에일라가 바로 크로마뇽인이다. 최근에 나온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따르면 크로마뇽인(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라 부른다. 사실은 같은 뜻. '크로마뇽'이란 이름은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발견되어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를 알렸기에 호모 사피엔스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와 유라시아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 대략 7만년 전이라고 한다. 당시 유라시아엔 네안데르탈인이 이미 정착해 살고 있었으므로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마주쳤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이 진 M 아우얼이 이 대작을 쓰게 된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그 상상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료를 모으고 수차례 현지 답사까지 한 노력 끝에 결국 에일라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이 마주침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유발 하라리는 과학자들도 아직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략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데 하나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무리없이 섞였을 것이라는 '교배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에게 반감을 가져 상대편 인종을 마구 죽였을 것이라는 '상충 이론'이다. 아우얼은 '교배 이론'을  따른다. 동굴곰족 1부의 시작은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다섯 살 에일라는 며칠 낮밤을 헤매다 그만 동굴 사자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다. 그러다 같은 지진으로 예전의 거처를 잃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방황 중이던 네안데르탈인 씨족에게 발견된다. 씨족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골격을 가진 에일라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데 아마도 이미 크로마뇽인이라는 존재에 익숙했던 것 같다. 쓰러진 에일라를 본 씨족의 치료사 여성 '이자'는 그녀를 거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엄격한 남성 가부장제 사회인 그 씨족에선 여성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족장 브룬은 거부하지만 다행히 주술사 크렙의 도움으로 에일라는 이자에게 거둬져 목숨을 건지게 되고 결국 같이 살게 된다. 이렇게 공존이 가능했다는 '교배 이론'을 소설이 따르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자는 에일라를 거둔 뒤, 그녀와 함께 씨족이 거주할만한 동굴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동굴은 씨족이 가장 숭배하는 동굴곰족의 터전으로 밝혀져 그 때문에 이자와 크렙은 에일라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동굴에서의 삶이 시작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짜 매력, 다시 말해 선사 시대의 아주 상세하면서도 충실한 복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동굴을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냥을 통해 동굴의 정령이 과연 그들이 그 곳에 살 것을 인정하는지 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든지, 남성과 여성이 사냥과 채집으로 바깥에서의 활동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는 점이라든지, 네안데르탈인 사회가 이미 종교적이었으며 놀랍도록 동식물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가득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 때의 삶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선사 시대의 삶이 궁금했다면 단연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다.



  네안데르탈인 씨족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로 채집을 맡았다. 물론 아이들도 참여했다. 노동에 있어선 아이들이라고 해서 열외가 없었다. 여성들은 각종 식물들에 대한 지식을 대를 이어 전달했고 당시는 식물이 의약품 역할을 했기에 치료사의 역할도 여성들이 맡았다. 기독교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기 전의 중세 마녀의 이미지는 알고보면 선사 시대 여성이 그 근원이다. 아우얼은 소설에서 네안데르탈인 여성에게 방대한 식물 지식은 유전자 정보로 각인되어 별다른 학습 없이도 후대 여성들이 알 수 있는 반면 크로마뇽인은 새롭게 얻은 능력인 기억과 학습으로 그것을 익힌다고 묘사한다.



 성역할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냥은 전적으로 남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사냥을 성공해야 무리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여성은 사냥 도구를 만지기만 해도 처벌을 받았고 심하면 축출될 수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늑대의 사냥 방식을 모방해 무리 지어 사냥했으며 도구도 많이 발달시켰다. 적은 힘을 이용해 멀리 날릴 수 있는 줄팔매도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에일라의 무기가 된다. 줄팔매는 돌을 날리지만 줄팔매와 똑같은 원리로 창을 멀리 날리는 도구도 있었다.



 동굴에서의 밤은 온갖 전설과 신화가 태어나고 활동하는 밤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들은 자연을 다양한 정령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로 해석했고 그들의 가호가 없이는 생존도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갔다. 그것을 전승하는 역할은 주로 주술사가 맡았는데 아이들은 밤마다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입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씨족을 묶는 사회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종교는 그렇게 태어났다.



 실제 선사 시대 거주 동굴에서 발견된 아마도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세 마리 들소 상. 동굴을 발견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동굴을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동굴이 씨족이 신성하게 섬기는 존재였을 경우 동굴은 은총의 대상이 되어 바로 거주지로 확정되었다. 그들에겐 각종 토템이 있었고 씨족의 번영을 위하여 항상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드리는 장소는 주로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었는데 이 들소 상 또한 그런 곳에서 발견되었다. 제사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주술사 또한 족장만큼이나 존중 받았다. 에일라는 목우르 주술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난다.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 이 책의 내용으로 소설의 내용을 검증해 보았는데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고증은 어느 정도 확실한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에 대해 하나 더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소설이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꽤나 풍성한 해석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2권을 읽고 거기서 리뷰하려 한다.


 '대지의 아이들'은 미국의 FOX에서 드라마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첫 영상화는 아니다. 이미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미국에선 3부인 '매머드 사냥꾼'까지 나온 시점이다. 영화는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1부인 '동굴곰족'만 다룬다. 참여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제작사 워너브라더스가 이 작품에 꽤 높은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연인 에일라는 당시 '스플래시'의 인어 역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던 다릴 한나가 맡았고 각본은 무려 미국 인디영화계의 거장 존 세일즈다. '메이트원'의 감독 말이다. 이 당시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메이트원(1987)'을 통해 그것이 결코 헛된 명성이 아니었음을 당당히 입증했다. 촬영은 또 폴 베호벤의 영화들을 통해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얀 드봉이다. 그리고 음악은 헉! 알란 실베스트리. 거기다 감독은 이럴수가! 마이클 채프먼.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를 찍은 그 사람. 감독으로 전업한 후 두 번째 작품이다. 크레딧을 보면 어찌나 화려한 지, 다리오 아르젠토의 데뷔작, '수정 깃털의 새'의 크레딧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만한 인물들의 협업에도 불과하고 영화는 폭망. 이 영화의 성공으로 대지의 아이들 시리즈를 계속 영화로 만들려했던 워너브라더스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리즈를 좌초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배트맨 대 슈퍼맨'의 40년 선배인 것이다. 물론 워너브라더스는 저스티스 리그 유니버스를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사진은 영화의 OST, OST 커버는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사용했다. 포스터의 여성은 에일라로 분한 다릴 한나.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연기로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의 실패야 어쨌든 소설만큼은 뛰어나다. 아직 이 소설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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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4-19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 이런 책도 있었군요.
네안다르탈인의 유전자 변화로 남아를 낳지 못해서 멸망했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으면서
설마, 하고 갸웃했던 기억이 나네요. 반응이 좋지 못하면 끝까지 나오지 않을건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되는군요.

야심차게 뱀파이어의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하고, 뱀파이어 아르망에서 끝낸 기억이 털어지지 않아요. ㅠ

ICE-9 2016-04-20 13:21   좋아요 0 | URL
오옷! 반가운 마녀고양이님의 댓글을 만나니, 식곤증을 단번에 날아가버리는데요^^
아, 저는 이 책 나름 유명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는 않은가 보군요. 저는 다시 나온다길래 꽤 호들갑을 떨었거든요^^ 네안데르탈인이 유전자 변화로 남아를 더이상 생산하지 못했다니, 그 변화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선사 시대 이 쪽에 관심이 많아서 몹시 궁금해지네요. 계약은 다 되어 있는 것 같던데 그래서 다 나오지 않을까 섣불리 추측해 봅니다. 책 날개엔 매머드 사냥꾼만 근간으로 나와 있어 좀 불안하긴 해요^^;

아,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시리즈 딱 절반까지만 나왔었죠. 도서정가제 하기 전에 11권짜리 세트를 떨이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봤는데도 중간에 끝날 것을 생각하니 왠지 안 사게 되더라구요 ㅠ ㅠ 출판시장이 열악해서 시리즈 구매는 확실히 모험하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요. 메그레도 75권에서 20권으로 끝나고 ㅠ ㅠ 찾아보면 그런 게 한 두 개가 아니겠죠ㅠ ㅠ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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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름이 진정한 정체성을 뜻한다면 그녀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나비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감추려 한다.

 사카즈키 조코란 이름을 감추려 하고 긴 앞머리에 둥근 안경이라는 순정만화 속 안경녀의 모습으로 미모를 감춘다. 왠지 필사적이란 느낌도 드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과거 전국적으로 유명한 아역 배우였던 자신을 숨기고 싶은 탓이다. 배우로 한창 잘 나갈 무렵, 그녀는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했고  아직까지도 진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역으로서의 역할은 끝났고, 여배우에 미련은 없었으며, 가업을 이을 생각도 없는 지금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런 자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내지 못한 채였다.(p. 19)


[ 표지에 홀로 있는 안경  쓴 소녀가 바로 주인공 조코다.]


 그랬던 그녀가 재수까지 해서 굳이 도야마 대학에 들어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얼른 결혼해서 주조장 일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유서 깊은 추리 동호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리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로 본격 미스터리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를 그녀는 로직(logic)에 취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직에 대한 갈망은 진짜 자신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미스터리에서 로직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미리 자리잡고 있다가 탐정의 추리로 비로소 발견된다. 그렇게 조코도 진짜 자신을 언제 어디서 찾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그녀의 생각 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 추리 동호회에 들어가려는 계획조차 어긋났다. 취리를 추리로 잘못보는 바람에 그만 술만 주구장창 마셔대는 취리 동호회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취리는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뜻이다. 명료한 로직을 원했던 그녀는 이제 혼미와 무념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추리와 취리.

 여기서 작가 모리 아키마로가 이 소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를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드러난다.


 일단 소설의 처음. 조코는 이렇게 고백한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 대답을 찾아내지 못한 채로 자신이라는 존재의 불명확함과,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있는 자유를 끌어안고 어둠 속을 질주하는 영혼.(p. 9)


 추리는 터널의 바깥을 의미한다.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밝은 빛. 그건 자신이 찾아야 할 진짜 자아였고 그렇게 청춘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면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로직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취리는 전혀 다른 진리를 설파한다. 삶에 그런 로직은 없다는 것이다.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말은 정체성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뛰어든 경험 속에서 조성되는 것을 뜻한다. 모리 아키마로가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보낸 것은 그러니까 이런 말을 독자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조코처럼 스스로 불확실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너무 걱정은 마.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걸음들이 다 진짜 너니까. 넌 이미 너로서 완전해. 너무 불안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다섯 개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정돈된 이 소설은 조코가 바로 그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 깨달음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그 대상이 되고 그녀를 거기로 데려가는 멘토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미키지마다. 그녀보다 두 학년 선배로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3년째 1학년이며 강의실보다 취리 동호회 아지트에서 숙취에 찌든 모습으로 더 많이 발견된다. 어디에 확실히 안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조코와 처지가 별 반 다를 바 없으나 미키지마는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 자신이 취해 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깨어 있을 때는 착실하게 자신의 꿈을 쫓는다. 미키지마는 한 마디로 이 소설에 투영된 모리 아키마로의 주제를 형상화한 모델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조코와 연인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 맛좋은 사케를 들이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먼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잔잔한데 사이사이 숨어 있는 경구와 같은 문장이 안주로 두툼한 참치회를 먹는 것처럼 담백하여 끝까지 흥취를 돋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맛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보다는 마주 다가오는 삶에 무작정 부딪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취리에 전염되는 것이다. 그것도 짧게. 하기사 삶도 취하기엔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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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6-04-17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하나를 빼는 것은 아무리 주제를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지, 마키지마가 너무 맨스플레인을 하기 때문이다. 고작 한 살 차이인데 조코가 미키지마 말을 잘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도 얼른 납득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은 일본 영화나 드라마에서 또는 소설에서 한 남자와 여자가 커플로 나올 때 흔히 보게되는 것이기도 하다. 남자는 과장되게 이상화 되어 있고 여성은 거기에 비례하여 수동적이다. 같은 경우 미국 드라마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셜록이나 엑스파일처럼 꼭 어딘가 부족한 점을 강조해 여성 캐릭터와 균형을 맞춘다. 일본과 미국의 이 차이는 어디에서 근본적으로 비롯되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개정증보판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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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아나 굶주림이란 말을 들을 때, 얼른 떠오르는 것은 노르웨이 작가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청년 시절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전망도 없이 아주 혹독한 빈곤을 경험했다. '굶주림'은 그 기억을 있는 그대로 토로한 자전적 소설이었다. 읽노라면 너무나 굶주렸기에 뼈다귀에 달라 붙은 살점이라도 먹으려고 주인에게 뼈다귀를 간절히 구걸하는 장면도 나오는 등 정말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묘사가 하도 생생했기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작품은 1890년에 나왔다. 무려 120년도 더 된 소설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과거의 일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된 사건이 있었다. 그것도 바로 우리나라에서.


 2011년, 전도유망했던 한 시나리오 작가가 죽었다. 그녀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가 있었다. 아랫집 문에 꽂혀 있던 삼단으로 곱게 접은 쪽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 아랫집 주인은 그 쪽지를 보고 쌀과 김치를 들고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가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그녀를 발견했다. 크누트 함순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지병이 악화되어 숨진 것이었다. 크누트 함순의 고통이 자신이 가진 품성이나 능력과 무관했듯이, 그녀의 비극 또한 원인이 자신에게 있지 않았다. 영화사의 계약을 깡그리 무시한 상습적인 임금 체불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런 불합리한 처사에도 당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가중되는 구조적 모순이 불러온 죽음이었던 것이다.


 구조. 난 이것을 주목하게 된다. 사는 곳이 다르고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여전히 닮은 꼴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역시 개인이 아니라 구조 탓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비단 개인만이 아니었다. 1999년만 놓고 보아도 심각한 기아 상태와 만성적인 영양실조를 다 합쳐 무려 8억 2,800만명이나 되는 세계적 규모의 기아에 있어서도 구조가 져야 하는 책임은 막중했다. 그것을 나는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는 장 지글러의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다. 이 책은 얇고, 초등학생인 자신의 아이에게 설명하고 있는 형식이라서 이해하기에도 더없이 쉽다. 그러나 품고 있는 내용은 만만치 않다. 기아의 세계적 규모와 원인, 그 실태와 구호가 이루어지는 실제 방식 그리고 기아 사태에 대한 선진국들의 행태와 거기서 비롯되는 국제 기구의 한계와 문제까지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현장에 있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라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사실이 참 많고 놀라게 되는 것도 허다했다. 일례로 아시아의 기아 인구가 5억 5천만명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1억 7천만명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은 처음 알았고 난민 캠프에서 한정된 식량과 의약품 때문에 이뤄질 수밖에 없는 피난민 아이들의 선별 작업은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기아의 규모든, 비극의 반복이든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지구가 현재보다 두 배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p.37) 데도 상황이 이러한 것은 역시 구조적인 부조리가 깊이 침윤되어 있는 탓이다.


 굶주림은 비극적인 방식으로 더 심해지고 있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p. 36~37)


 장 지글러는 기아를 경제적 기아와 구조적 기아로 나눈다. 경제적 기아는 '돌발적이고 급격한 일과성의 경제적 위기로 발생'하지만 구조적 기아는 '한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사회구조로 인해 빚어지는 필연적인 결과'(p. 49)라고 그는 설명한다. 경제적 기아는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 비록 한계가 있긴 해도 원조와 구호를 통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구조적 기아는 경계도 모호하고 징후도 뚜렷하지 않아 해결이 지난하다.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은 그것이 한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선진국을 포함해 세계 경제와도 긴밀히 연결된 문제라는 의미에서고, 징후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부실한 식생활과 부족한 영양 상태로 인해 여러가지 질환에 만성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로 아무래도 구조적으로 열악한 그들의 환경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치유가 어렵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기아를 정녕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바로 여기서 태동한다. 선진국들은 자신들의 풍족한 육류 소비를 위해 후진국들에게 설령 제아무리 기아에 허덕여도 사료용 작물만을 재배할 것을 강요하거나 더러는 '부르키나파소'의 빈곤을 타파하려했던 상카라를 암살했듯이 자신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이용하기 쉽도록 항상적인 기아 상태에 일부러 빠뜨리기도 한다. 거기다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다국적 기업은 자주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후진국들을 곡물 가격 조작의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세계 경제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한 나라만 바꿔서는 해결이 어렵다. 그래서 점진적 상황 개선을 위해 유엔식량농업기구(FAO)를 비롯한 여러 국제기구들이 있지만 그들의 역할 역시도 재정에 있어서 선진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만큼 수혜자들 보다는 시혜자들 중심으로 돌아간다. 선진국들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좀 더 이끌어내기 위해 기아에 허덕이는 현실을 투명하게 보고하지 않고 잘 포장해선 조금만 더 힘을 보태주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로 장밋빛 전망만을 내어놓거나 원조한 것들이 수혜지의 권력층에 의해 횡령되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게 바로 그것이다. 국제기구가 자주 후진국 권력층의 비리를 눈감아 주는 것은 그런 권력층으로 후진국을 쉽게 통제하려는 선진국의 바람 때문이다. 이렇게 한 나라의 기아는 결코 원인과 책임이 그 나라에만 있지 않다. 사실은 그들을 이용해 이익을 보려는 보다 더 힘있는 자들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요, 전 세계가 이해관계를 초월한 협력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기아는 내게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을 환기시켰다. 우리가 거기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들의 문제는 실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모두는 살바도르에 있는 '캄파 산토라는 묘지'(p. 39)에 있는 것과도 같았다. 그 묘지는 죽은 자들의 사회적 계층에 따라 위계적으로 배치되었다. 그들의 자리는 그들의 자의가 아니라 그들의 주검을 옮긴 자들의 타의로 결정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얼마든지 구조적인 모순의 희생자가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것이 장 지글러의 책이 내게 주는 가장 커다란 깨달음이었다. 솔직히 지금까지 다른 나라의 빈곤이나 기아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저급한 생각으로 그런 문제는 모두 그들 자신이 초래했다고 여겼다. '얼마나 못났으면 저런 상황이 되도록 마냥 내버려두고만 있었을까?'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야말로 지글러 자신이 특히 선진국의 권력층과 부자들을 기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드는 진정한 원인이라고 보았던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자연도태설을 입에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지글러 말마따나 '자신들은 절대로 굶어죽지 않는다'(p. 38)는 확신 때문이었다.


 양심의 가책을 진정시키고, 불합리한 세계에 대한 분노를 몰아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맬서스의 신화를 신봉하고 있어. 끔찍한 사태를 외면하고 무관심하게 만드는 사이비 이론을 말이다.(p. 43)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생각이 자기보다 약자인 자들의 고통과 죽음마저도 태연히 용인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글러가 이 책에서 잘 보여준 바와도 같이 나와 그들의 문제는 결코 별개가 아니다. 크누트 함순도, 최고은 작가도, 그들의 힘겨움이 결코 그들 탓이 아니었던 것만큼 나도 얼마든지 그들의 자리로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온전히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오진 않는다. 사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생각이 팽배해 추락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더욱 만연해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그 불안과 공포에서 달아나기 위해 한층 더 권력과 자본에 대한 욕망을 키우고 이기적이 되려 하고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런 상황을 두고 '불안이라는 유령으로부터 해방되려 자유를 포기하는 징후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나만의 꿈과 신념으로 나답게 되기 보다는 힘있고 돈많은 사람을 닮으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불안과 공포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배려와 협력으로 이끌 수 있는 지가 중요해진다. 지글러는 여기까지 나아가진 않는다. 다만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 태도를 보여줄 뿐이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연대라는 매듭까지 나아가려면 다른 이의 것을 좀 빌려와야 할 것 같다. 여기에 일본의 유명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한 오구마 에이지의 책, '사회를 바꾸려면'이 유용해 보인다. 현대인의 불안한 상황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바로 그 지점에서 연대가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는 오구마 에이지는 그 시작점을 이렇게 정초한다.


 그렇다면 내 생각에 답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을 디딤돌 삼아 행동에 나선다. 거기에서 대화와 참가를 독려하며 사회구조를 바꿔 '우리'를 만드는 운동으로 연결시켜 나가는 것이다.(오구마 에이지, '사회를 바꾸려면' p. 375)


 오구마 에이지는 우리를 비관하도록 만드는 그것을 오히려 우리 모두가 실은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확인하는 '그라운드 제로'로 여긴다. 다 같은 출발점에서 2인3각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되려면 먼저 비관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야 한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비관의 진짜 이유는 우리가 뒤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있다. 남들이 원하는 것과 바라는 지위를 얻는데 실패했다는 마음에 있는 것이다. 결국 나만의 시선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에 길들어진 눈으로 보고 있기에 '나와 타인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마저도 불안과 공포의 불길한 그림자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불안이라는 유령에 지배당하여 자유를 포기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에서 더욱 자유롭게 되어 자기 본연의 시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안으로부터 진정 자유롭게 되는 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나와 너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우리'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오구마 에이지는 지속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 치켜드는 불안을 억누르고 내일의 일은 어찌되었든 언제 내가 될지도 모를 어려운 이들을 계속해서 도우라고 말이다. 그렇게 실천으로 꾸준히 보강되다 보면 의혹은 지워지고 신념이 자연스런 태도가 되어 타인 역시도 그것을 보고 응답해 줄 것이라고.


 문득 이번 선거에서 활약한 '시민의 날개'가 생각난다.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선거 부정을 막기 위해 사전투표함을 지키려고 며칠 밤을 뜬 눈으로 감시했던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나와 다를 것 없는 일반인이었고 누가 알아주거나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않고 밤새 자지 않고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투표함을 지켰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오직 하나, 강자만의 세상이 아닌, 자신도 얼마든지 될 수 있는 약자가 강자만큼이나 존중받으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16년만의 여소야대 보다 이런 이들의 움직임 속에서 더 큰 희망을 느꼈다. 아니, 이런 그들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기에 숙원이었던 여소야대가 이뤄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 속에서 오구마 에이지의 말이 한낱 몽상은 아니며 우리 서로가 모두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는 생각으로 약자를 돕는 연대에 기꺼이 참여한다면 정말로 언젠가는 지글러가 바라마지 않는, 더이상 기아에 고통받는 이가 없는 세상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는 믿음마저 가지게 된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지금도 세계 각지의 난민 캠프에서 온갖 어려움과 싸우며 헌신하고 있는 구호단체 사람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지글러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구호단체는 극단적인 조건에서 활동하고, 갖가지 모순들과 싸워야 해. 그러나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면 그 모든 손해를 보상받게 되는 것이지.(p. 93)


 지글러가 이 책을 쓴 마음도 이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닌 그들의 생명이었기에 방기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용서받지 못할 참사가 된 세월호 2주기인 오늘. 그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고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마음 중심에다 단단히 결박해두어야 할 말이 아닐까 싶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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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유럽, 핀란드 - 따루와 연희의 사적이고 주관적인 핀란드 길라잡이
따루 살미넨, 이연희 지음 / 비아북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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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에 대체 뭐가 있어?” 윗사람이 물었다.

“시벨리우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마리메꼬, 노키아, 무민.” 쓰쿠루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중에서 (p. 279) -




  핀란드에 가고 싶었다. 물론 나 역시 시벨리우스와 아키 카우리스 마키 감독 그리고 무민을 좋아하지만 결정적으로 그런 바람을 가지게 만든 것은 한 편의 소설이었다. 바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거기서 삶에 커다란 구멍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쓰쿠루는 그 근본적인 균열을 메우기 위하여 핀란드로 간다. 핀란드. 그 곳은 무엇보다 늘 잘못되어 있다고 여겼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곳이었고 느리면 느린대로 부족하면 또 부족한 대로 언제나 나다운 것을 사랑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미셸 옹프레는 ‘철학자의 여행법’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자아를 치유하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더 익숙해지기 위해, 더 강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고.


 내겐 핀란드가 그런 곳으로 보였다. 하루키가 그려놓은 핀란드는 미셸 옹프레의 말을 현실로 구현시켜 놓은 것과 같았던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다. 진정한 나를 만나고 그런 나를 보듬어 안아주는 것. 기피와 혐오의 시선이 아니라 직시와 이해의 시선으로 나를 찬찬히 돌이켜볼 수 있는 곳, 핀란드. 그 곳에 가면 일상에 너무 함몰되어 있느라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던 나 자신의 가장 그늘진 통증들까지도 시간을 들여 가까이 임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가고 싶었다. 고독의 시간이 약속된 그 곳으로. 마주한 풍경이 전해주는 위안과 치유 속에서 내 자화상을 새로이 빚어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핀란드 현지인 따루 살미넨과 이연희가 같이 쓴가장 가까운 유럽, 핀란드’는 그런 마음으로 벗하게 된 책이었다. 


 사실 핀란드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이 책말고는 달리 선택권이 없다. 그건 당장 검색만 해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지와 교육 그리고 디자인에 관한 핀란드 책은 많아도 여행에 대한 핀란드 책은 얼마 없다. 설령 있더라도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세 나라와 묶어서 이야기하는 게 고작이고 이 책처럼 한 권 전체를 온전히 핀란드 여행에 바치지는 않는다. 물론 분량의 많고 적음이 좋은 책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여행서에 있어서만큼은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할애된 분량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확실히 더 상세하고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핀란드 여행만 생각한다면 이 책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공동 저자 중 하나인 따루는 핀란드 사람이다. 한 지역의 볼거리와 먹거리에 있어서 현지인만큼 정통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따루는 한국에서 오래 생활하여 거의 한국 사람이 되다시피 한 사람이라(하나의 예로 따루는 막걸리와 깔깔이 예찬론자라고 한다.) 한국인 정서와 취향에도 능통하다. 다시 말해 따루는 자신이 속속들이 알고 있는 핀란드의 이모저모를 한국인의 정서와 취향으로 검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의 취향과 정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현지인의 추천은 실제 가봤을 경우 때로 너무 낯설어 곤혹스럽기만 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따루의 추천은 바로 그런 위험을 피하도록 만든다. 물론 이런 역할은 또 한 명의 저자인 이연희도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한국인에게만 맞추다 보면 여행지에서만 맛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매력인 이국적인 면모를 놓치게 되기 쉽다.


 역시 여행은 낯선 것을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익숙한 일상의 눈이 아니라 그 일상의 중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선과 생각으로 나를 관조하고 음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우리는 여행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는 말을 듣는데 이런 것이 바로 여행을 통해 얻는 자유의 진짜 정체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낯선 것을 마냥 추구할 수만은 없다. 적절한 수준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망과 혐오만 동반하여 벗어나야할 일상의 틀을 오히려 더 두텁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여행의 자유는 매혹적인 낯선 것으로부터 온다. 매혹을 통한 동경과 경탄이 어느새 나를 무장해제 시키고 낯선 것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혹은 ‘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란 말도 있듯이 바라보는 자의 정서와 취향이 투영된 결과다. 정서와 취향을 잘 알면 알수록 더 커다란 매혹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핀란드는 핀란드대로, 우리의 정서와 취향은 또 그것대로 골고루 다 잘 아는 따루 살미넨이 핀란드 여행 추천에 있어 적임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설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핀란드의 볼거리와 먹거리 그리고 놀거리 추천을 현지인인 따루 살미넨이 일임하고 다음에 그것을 한국인 저자가 실제 체험해 본다는 설정이다.


 말이 나온 김에, 여기서 이 책의 형식을 간단히 말해 보려 한다.

 먼저, 아래의 사진은 이 책의 목차다.



 차례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 책은 핀란드의 가볼만한 곳들을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 설명하고 있다. 각 지역의 위치는 표지에 그려진 핀란드 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도는 각 지역에 들어갈 때 가장 첫 머리에 해당 지역만 표기되어 따로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각 지역으로 들어가보면 아래에서 보듯, 양면을 다 채워서 눈을 즐겁게 만드는 각 지역의 사진으로 시작하고 있다.


 특별히 뚜르꾸를 가져온 곳은 내가 핀란드에 가면 꼭 찾아가보고 싶은 곳이 바로 쓰쿠루가 에리를 찾아갔던 '하메린나'인데 그 곳이 바로 뚜르꾸로 가는 길에 있기 때문이다.하메린나는 우리들에겐 '핀란디아'라는 교향시로 유명한 얀 시벨리우스(그러고 보니 작년이 시벨리우스 탄생 150주년이었다.)의 고향이기도 한데 그는 그 곳에 있는 바나야베시 호수를 떠올리며 핀란디아를 작곡했다고 한다. 쓰쿠루도 에리와 함께 호수를 찾아가 자신의 오랜 망집을 비로소 던져버리게 되는데 그 호수가 아마도 바나야베시가 아닐까 싶다.

 사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는데, 뚜르꾸는 헬싱키가 핀란드 수도가 되기 전의 수도로 중세 이후 내내 핀란드의 중심이었다고 한다. 여기엔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 뚜르꾸성이 있는데 1280년에 세워진 그 성은 핀란드가 스웨덴의 지배를 받을 때엔 총독이 거처하던 곳이기도 해서 핀란드의 아프고 굴곡진 역사를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곳에 있는 '야르벤뻬'는 시벨리우스가 가정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으로 시벨리우스 박물관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우라'란 이름의 강으로 우리나라 돈으로 6,500원을 내면 이 강을 운행하는 유람선을 탈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뚜르꾸에는 '난딸리'란 곳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 이제 핀란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중의 하나가 된 무민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무민월드가 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이 하나 있다. 무민월드는 1년 내내 늘 개방되지 않으며 여름에만 잠깐 문을 연다고 한다.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인기는 아주 많은데 핀란드에 인구가 너무 작아서 상시 개방이 어려운 것이라 한다. 이런 사실들은 모두 뒷페이지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연희 작가의 글에서 얻게 된 것들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이렇게 이연희 작가의 글이 나오고 나서 '따루의 핀란드 ON AIR'란 제목으로 따로 코너를 마련하여 따루 살미넨이 직접 핀란드를 여행할 때 꼭 보고, 먹고, 놀고, 쇼핑하면 좋을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핀란드의 국립공원은 모두 입장료가 무료라고 한다. 사진은 핀란드의 가장 유명한 국립공원이기도 한, 레뽀베시 국립공원의 호수 풍경이다. 레뽀베시는 호수 지역에 있다고 하는데 핀란드엔 무려 약 18만 8,000개의 호수가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핀란드를 '숲과 호수의 국가'라고 하는데 레뽀베시 국립공원은 그러한 핀란드의 면도를 한껏 느끼게 해 줄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작나무의 길은 사진만으로도 멋져 보여 나도 꼭 걸어보고 싶어진다.

 이렇게 이연희 작가의 글이 끝나면 '따루의 핀란드 ON AIR'가 시작된다.
 차례는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그리고 쇼핑할만한 곳 순이다.


 볼거리엔 장소에 대한 설명만이 아니라 개장시간과 입장료, 주소와 전화까지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놀거리, 먹거리 그리고 추천 쇼핑지도 같다.




 그리고 여러가지 거리들에 대한 소개가 끝나면 이렇게 따루의 핀란드 요점 정리가 마지막에 나온다.


 여행에서 가장 신경쓰이는 것이 바로 여행하려는 지역의 물가인데 특히 유럽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물가가 높다는 선입관이 있어서 여행할 때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대해 따루는 핀란드 물가가 싼 것은 아니나 모든 것이 비싸기만 한 것은 아니니 싸고 비싼 것을 잘 알고 있으면 알뜰한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핀란드에서 비교적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을 설명한다. 이렇게 '핀란드의 요점 정리'는 여행을 하면서 아무래도 신경쓰게 되는 날씨나 물가 혹은 음식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때로는 술문화나 자연 그리고 사우나에 이르기까지 알아두면 더 살뜰하게 핀란드를 여행할 수 있는 지식들을 일러주기도 한다.

 이상으로, 이 책의 구성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이채로은 것은 역시나 마치 서로 캐치볼을 하는 것처럼 이연희 작가가 먼저 공을 던지면 그것을 따루가 받아 다시 던지는 것 같은 형식의 글 배치다. 나는 이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는데, 왜냐하면 핀란드가 가지고 있는 이국적인 매력은 매력대로 한껏 살리면서 동시에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은 한국인 저자의 실제 체험을 통해서 잘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덕분에 핀란드는 내 마음속에 정말로 '매혹될만한 것은 많고, 실망과 두려움은 적다!'는 문장으로 깊이 각인되어 버렸다. 그러니 가고 싶다는 열망이 더욱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핀란드의 새로운 매력을 많이 깨닫게 된 탓이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핀란드를 교육과 복지로 한껏 앞서나간 나라로만 생각했지 핀란드의 문화 그리고 역사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았었다. 그런데 핀란드는 중세 이후 스웨덴과 러시아의 오랜 지배를 받은, 그렇게 우리나라만큼이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핀란드에 존재하는 오래된 건물마다 수 차례 타버렸다가 다시 재건된 과거가 있었고 그것은 그대로 핀란드의 역사적으로 누적된 상흔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란드는 국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니 비슷한 역사를 가졌으나 전혀 반대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놀랍지 않을 수 없고 그 비결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비결의 대략적인 모습을 나는 이연희 작가의 글에서 어설프게나마 볼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겸허가 아닐까 싶다.

 핀란드하면 얼른 떠오르는 것은 역시 울창한 숲과 많은 호수로 대변되는 거대한 자연이다. 경작지가 전 국토의 6% 밖에 안된다고 하던가? 그만큼 생존하기에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핀란드 사람들은 겸허히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롭게 지냈다. 내게 이익이 안된다고 해서 함부로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겸허하게 자연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것들만 받아들였다. 숲에서 버섯이나 베리를 채집하는 장면이 내겐 참 인상적이었는데 핀란드에서 누구라도 숲에 들어가서 버섯이나 베리를 자유롭게 채집할 수 있으며 설령 시장에 내다 판다고 해도 일절 세금을 매기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허용해도 핀란드 사람들은 가족들이 먹을만큼만 채집한다고 한다. 상업적으로 판매하는 사람들은 외국인 밖에 없다고(p. 178) 분명 이 채집은 핀란드인들의 오랜 생존 방식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핀란드인들의 모습에서 보듯, 그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내가 필요한 것 이상을 절대 채집하지 않았다. 오직 생존에 필요한 양만 자연에게서 가져왔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대한 핀란드인들의 태도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싶다. 내게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가져오지 않겠다는 마음은 그것들이 내 노력의 대가가 아니라 자연이 특별히 허락한 은총이라는 깨달음이 선행되지 않고선 불가능하다. 그리고 은총이라는 생각은 자연 앞에서 겸허한 태도를 가질 때 자리잡는다.

 바로 이 겸허가 오늘의 핀란드를 만든 궁극적 원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태도가 결국 사람들에 대한 태도로 자리잡아 오늘날의 핀란드 교육이 어디까지나 뒤처지는 아이들을 더 중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볼 때(p. 194) 나보다 못한 이들에 대한 배려를 통해 더 성숙한 조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 속 채집의 태도가 사람에 대한 태도가 되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축제'인 바뿌가 되고,

 그동안 핀란드 사람들은 조용하고 말수가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바뿌를 직접 경험해보니 그러한 생각은 오해였다. 역시 선입견이란 무섭다. 내가 보기에 핀란드 사람들은 그 어떤 국가의 사람들보다 정이 많다. 단지 표현에 서투를뿐이다. 따라서 예의를 갖추어 서서히 말을 걸고 진심을 다해 나의 감정을 표현하다 보면 그들도 다정하고 수다스러운 면모를 보여줄 지 모른다.(p. 20)

 생활 속 물건에 대한 태도까지 확장되어 비록 나는 사용하지 않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남은 사용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도시 전체가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들고 나와 서로 교환하거나 팔고 사는 행사인 '시보우스빠이바'를 낳았을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참 많이 달랐던 대학도서관의 모습 역시도 그 근본엔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겸허가 있었을 것이다.

 도서관 안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 외에도 어린이와 노인 등 외부인이 많았다. 학생과 교직원 외에는 입장이 불가능한 대부분의 한국 대학 도서관을 생각하면 참 반갑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한술 더 떠 다들 여기가 마치 제집 안방인 듯 편안한 자세였다. 푹신한 의자에 눕다시피 파묻혀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네를 타고 노는 아이들,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감상하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도서관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열린 공간인 덕에 핀란드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국민이 된 걸까? 경직된 분위기에서 똑같은 자세로 책만 들여다보는 한국의 대학 도서관과 대비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p 83 ~ 84)

 무엇보다 산타 마을이 있는 라플란드에서의 코티지 체험은 더욱 핀란드 사람들에게 겸허가 근본적인 태도로 자리잡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핀란드 북쪽에 있는 라플란드. 겨울의 라플란드는 말 그대로 눈으로 뒤덮힌 곳이다. 따루와 이연희 작가는 여기서 코티지 체험을 한다. 하지만 거기서는 문명의 이기를 일체 누리지 않는다. 아무리 추워도 장작으로 불을 떼고 촛불로 전깃불을 대신한다. 아무리 바깥 상황이 혹독해도 오로지 자연적인 것에만 의존해서 살아가는 모습은 내게 핀란드 사람들에게 겸허의 태도가 얼마나 뿌리 깊이 내리고 있는지 똑똑히 보게 했다. 그들은 설사 내가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내 편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더 타자인 자연에 순응하고 그것을 포용하려 애썼다. 물론 그것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뿌도, 시보우스빠이바도, 도서관의 풍경도, 라플란드의 코티지 체험도 모두 그런 겸허에서 태동한 포용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렇기에 핀란드는 국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된 것이다. 또한 자신을 인정받지 못해 내내 죽음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쓰쿠루가 핀란드에서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을 품을 수 있게 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한 마디로 핀란드는 내게 왜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지 일깨우고 있었다. 겸허는 무엇보다 긍정에서 발현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모습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먼저 겸허하게 수용하는 것. 그것이 앞으로 더 멀리 한발짝을 내딛기 위해 지금 내가 놓아야 할 징검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생각만으로는 어렵다. 구체적인 현실의 충전이 없으면 생각은 쉽사리 에너지가 소진되어 실천으로 나오지 못하고 만다. 현실에서 그 겸허를 그리고 포용을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역시 핀란드로 가야 한다. 이 책으로 확인한 바, 핀란드가 바로 그런 것들로 더없이 가득한 땅이라는 것은 틀림없으니. 이렇게 가려는 열망이 한층 더 깊어진 나는 이제 쓰쿠루가 했던 고백을 똑같이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밤의 새다. 조용히 뭔가를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일직선으로 그쪽을 향해 날아간다.

 진정, 지금 내 마음은 핀란드를 일직선으로 향해 있다. 얼른 날아가고 싶다.

 마지막으로, 핀란드로 더욱 가고 싶게 만드는 곳들을 사족처럼 붙여 본다. 


 아래에 보이는 CD는 시벨리우스 말고 내가 아는 유일한 핀란드 뮤지션인 'TABULA RASA'다. 록밴드이나 다른 록밴드들과 차별되는 그들만이 독특한 매력이 있는데 그건 청아한 느낌의 기타 선율을 바탕으로 꽤나 명상적인 분위기의 연주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이 앨범의 'RAKASTAA'를 듣고 있으면 때로 하얀 자작 나무 숲길을 홀로 조용히 산책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말 핀란드에 가게 되면 꼭 가지고 가서 숲에서 들어보고 싶다. '땀뻬레'는 바로 이 밴드가 결성된 곳이다. 땀뻬레가 핀란드 최고의 공업 도시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라는 유명한 책이 있다. 레닌을 비롯한 근대 이후 혁명가들을 다룬 책으로 제목의 핀란드 역은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결심하며 내렸던 역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의 역이름은 출발지로 정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핀란드 역은 핀란드에서 출발한 열차 노선의 종착지였다. 그 열차가 출발하는 곳이 바로 땀뻬레다. 실제로 여기서 레닌은 오래도록 러시아 혁명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것을 기념하여 레닌 박물관도 땀뻬레에 있다고 한다.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 중앙 박물관이 문을 닫은 현재, 레닌의 자료를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고 한다. 겸사겸사 둘러보면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여기, 뽀리에 있다는 끼르유린루오또 공원.


 재즈를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을 지도 모를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해마다 여름이면 뽀리 재즈 페시티벌이 열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뽀리 재즈 페스티벌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재즈 페스티벌로 유명한 재즈 뮤지션은 다 모이는만큼 재즈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꼭 한 번 가고픈 페스티벌이다. 물론 입장료는 없다.


 사진은 2013년 뽀리 재즈 페스티벌의 모습. 이 엄청난 인파를 보라. 언젠가는 나도 이들 틈에 낄 수 있게 되기를 정말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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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사육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21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승애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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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를 단념한 인간이다. 나와 오에를 처음 만나게 했던 문장이다. 매미들조차 더위에 짓눌러 침묵하던 여름날. 더위를 피하러 들어갔던 서점에서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에의 책을 처음 만났다. 제목은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 핵의 위험이 결코 몽상만은 아니던 시절을 배경으로 집필된 이 소설은 내게 너무나 낯선 것이었고 그랬기에 매혹되었다. 그렇게 오에를 만났고 물론 늘 그랬던 것은 아니나 참 오랜 시간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자선 단편집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 현대문학에서 나오고 있는 세계문학단편선으로 나온 오에 겐자부로 단편선엔 1957년과 1992년 사이에 발표한 단편들 가운데 오에 자신이 직접 뽑은 23편이 초기, 중기 그리고 후기로 나누어 실려있다. 당연하게도 이미 만난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다. 오에를 생각할 때 언제나 떠오르는 단어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변신, 다른 하나는 타자다. 변신은 그의 소설들은 자주 경계에 서 있는 인물이 있으며 그 인물이 예전과 다른 모습이 되기를 원한다는 측면에서 떠오른 단어다. 타자는 오에의 아들 때문이다. 그의 아들은 자폐아이다. 여기에도 실린 '조용한 생활'에 등장하는 자폐아 이요는 오에의 아들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지속적으로 그의 아들을 소설에 기입하는데 그것은 그대로 오에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와 같다. 실은 변신의 욕망도 그와 관련있다. 타자가 다름아닌 아들로서 기입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리라 보는데, 소설에서 타자는 절대 자신에게로 올 수 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탓이다. 나는 그를 내 의지로 규정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이것이 오에의 타자다. 그런데 그 타자는 혈연인 아들처럼 임의로 지워버릴 수도, 배척할 수도 없는 존재다. 한 마디로 공존이 자신에게 불가항력적인 운명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다. 오에는 그렇게 여긴다. 그러므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상생하는 길을 찾는 것밖에는 없고 변신은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타자와 합일하려는 바람의 표현이다. 물론 여기의 타자엔 타인만이 있지 않다. 자연을 포함한 모든 세계가 그 대상이다. 초기의 단편들은 그가 작가로서 첫 발을 뗄 때부터 이미 타자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묘한 아르바이트'의 개나 '사자의 잘난 척'의 해부용 시체가 그러하다. 하나는 동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하나는 이미 죽었다는 점에서 소설가의 전부라 할만한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대상들이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그는 커다란 당혹감을 안는다. 그는 자신 앞에 갑자기 출현한 이 정체불명의 세상을 두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그는 낯선 세계에 억지로 의미를 붙이거나 해석하지 않으며 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결말에서 주인공이 바꾸려고 참여했던 세계가 결국 변하지 않는 것은 그런 결의의 표현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점점 그것을 어렵게 한다. 일본 내에서는 전공투가 일어나고, 프랑스에선 68혁명이, 베트남에선 전쟁이 발발한다. 그리고 자폐아인 장남 히카리가 태어난다. 이제 그는 관찰자만을 자임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72년에 발표된 '공중괴물 이구이'에서 그런 위치는 주인공에게 우연히 날아온 돌맹이와 함께 끝장난다. 그 단편에서 주인공은 한쪽 눈을 실명하게 되는데 그는 더이상 예전처럼 세계를 보지 못한다. 그것을 가져온 것이 이구이라는 타자임을 생각한다면 이것은 그대로 이제 타자에게로 먼저 참여해야 한다는 표명으로 보인다.


 중기의 단편들은 타자와의 윤리학을 정초하는 것과 같다. 때문에 타자는 한 세계를 대표하기 보다는 한 개인으로 집약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표정과 목소리를 가지고 작가에게 말을 걸어온다. 더구나 그들은 작가와 개인적인 인연까지 가지고 있다. 기피가 불가능한 상황. 그렇게 타인과의 연대는 더욱 끈끈해지고 그 타인에 대해 내가 어떤 태도를 표명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무조건적이면서 불가항력적인 참여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중기의 단편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타인과의 나, 그 의무와 책임을 조명한다. 물론 이 모든 이야기엔 아들과 오에의 관계가 깊게 침윤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뒤따르는 태도의 변화는 어쩌면 아들의 성장에 따른 아버지로서의 오에 자신의 변화가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중기에서 오에는 세계에서 개인으로 들어간다. 그에게 소설은 거창한 세계를 담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삶과 결부된 것들만 말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이것은 타자와의 윤리라는 것이 쉽게 뭐라고 치부하기가 어려운 탓이요, 심해만큼이나 깊이를 가지고 있어 모든 측면에서 성실히 탐색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보다 정밀한 관측을 통해 혜안을 찾고자 그는 소실점을 오로지 자기에게로 좁히는 것이다.


 더욱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는만큼 한층 더 내면적이 된 그의 글은 이제 글마저 타자가 된다. 중기까지 오에가 있던 자리에 후기에 가선 이제 독자를 거기로 불러 앉히는 것이다. 중기의 오에가 자신을 곤혹스럽게 만든 타자를 만났듯이 후기에선 독자가 그만큼 당황스러운 오에를 대면해야 한다. 결국 이 끝엔 뭐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지극히 낯선 것과의 대면이 자신을 무엇으로 변신시킬지 그 누구도 확언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오에는 낯선 것을 낯선 것 그대로 놓아두길 원하며 불안과 불가해를 지향한다. 그의 언어는 분리와 균열을 일으키길 욕망한다. 전체가 될 수 없는 파편, 종합할 수 없는 산포. 우리가 마주하는 오에의 세계다. 오에는 후기에서 자크 마리탱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전인격이 참가하는 행위다.' 독자도 그렇게 참여하기를 후기의 오에는 원하는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초기와 중기 그리고 후기의 오에를 한 권으로 주욱 만나고 보니 변신과 타자라는 말이 더욱 또렷해진다. 내가 이렇게 확인했듯이, 이 책은 오에에게 관심 있던 분들이라면 오에가 무엇을 추구하며 그것을 위해 어떤 경로를 걸어왔는지 확인해 보는 좋은 경험이 되어줄 것 같다. 추천드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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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6 15: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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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7 0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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