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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아이들 1부 : 동굴곰족 1 ㅣ 대지의 아이들 1
진 M. 아우얼 지음, 정서진 옮김 / 검은숲 / 2016년 3월
평점 :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은 내게 '응답하라'와 같은 소설이다.
어렸을 때,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ACE 88'이라는 것이 있었다. 서양의 아동문학을 번역한 시리즈로 책 좀 읽는다는 아이들에게 나름 유명했던 것으로 아는데 그 중, '100만년'이란 제목으로 6권의 연속된 소설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진 M 아우러의 '대지의 아이들'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도 백과사전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선사 시대의 모습이 너무나 상세하면서도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는 지라 무지 신기해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과연 어떻게 이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던걸까 참 많이 궁금했었다. 어쨌든 너무나 좋았던 소설로 내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이렇게 다시금 만나게 된 것이다. 감개무량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지?
다시 읽어 본 '대지의 아이들'은 어릴 때 느꼈던 감상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시켰다. 내가 읽은 것은 그 중 첫 권인 '동굴곰족'의 1권이다. ACE 88로 치자면 '100만년 동굴'과 '100만년 사냥'의 어디쯤 될 것 같다. 3권이 합쳐서 동굴곰족의 이야기였으니까. 번역이 훨씬 더 좋아져서 그런가, 선사 시대의 묘사가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대지의 아이들'은 작가가 선사 시대 소설을 쓰기로 하고 40세에 회사를 그만둔 뒤, 집필에 전념. 30년 동안 모두 6부가 나온 작품이다. 굉장히 방대한 양의 소설로, 1부가 '동굴곰족'이다. ACE88로는 2부인 '말들의 계곡'까지 읽었는데 부디 6부가 다 나와주었으면 좋겠다.
'대지의 아이들'이 담는 시기는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이 세대 교체를 할 무렵이다. 정확히 2,5000년 전이라고 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여성 에일라가 바로 크로마뇽인이다. 최근에 나온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 따르면 크로마뇽인(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라 부른다. 사실은 같은 뜻. '크로마뇽'이란 이름은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발견된 동굴의 이름으로, 가장 먼저 발견되어 호모 사피엔스의 존재를 알렸기에 호모 사피엔스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자리잡게 되었다.)이 아라비아 반도로 건너와 유라시아 전체로 퍼져나간 것이 대략 7만년 전이라고 한다. 당시 유라시아엔 네안데르탈인이 이미 정착해 살고 있었으므로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실제 마주쳤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이 진 M 아우얼이 이 대작을 쓰게 된 출발점이었다. 그녀는 그 상상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생각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자료를 모으고 수차례 현지 답사까지 한 노력 끝에 결국 에일라의 이야기를 완성시켰다.
그런데 소설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이 마주침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유발 하라리는 과학자들도 아직 정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대략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고 있는데 하나는 서로 배척하지 않고 무리없이 섞였을 것이라는 '교배 이론'이고 다른 하나는 서로에게 반감을 가져 상대편 인종을 마구 죽였을 것이라는 '상충 이론'이다. 아우얼은 '교배 이론'을 따른다. 동굴곰족 1부의 시작은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지진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다섯 살 에일라는 며칠 낮밤을 헤매다 그만 동굴 사자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다. 그러다 같은 지진으로 예전의 거처를 잃고 새로운 거처를 찾아 방황 중이던 네안데르탈인 씨족에게 발견된다. 씨족들은 자신과 전혀 다른 골격을 가진 에일라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데 아마도 이미 크로마뇽인이라는 존재에 익숙했던 것 같다. 쓰러진 에일라를 본 씨족의 치료사 여성 '이자'는 그녀를 거두고 싶어한다. 하지만 엄격한 남성 가부장제 사회인 그 씨족에선 여성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족장 브룬은 거부하지만 다행히 주술사 크렙의 도움으로 에일라는 이자에게 거둬져 목숨을 건지게 되고 결국 같이 살게 된다. 이렇게 공존이 가능했다는 '교배 이론'을 소설이 따르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이자는 에일라를 거둔 뒤, 그녀와 함께 씨족이 거주할만한 동굴을 우연히 찾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 동굴은 씨족이 가장 숭배하는 동굴곰족의 터전으로 밝혀져 그 때문에 이자와 크렙은 에일라가 범상치 않은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동굴에서의 삶이 시작되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짜 매력, 다시 말해 선사 시대의 아주 상세하면서도 충실한 복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동굴을 그냥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냥을 통해 동굴의 정령이 과연 그들이 그 곳에 살 것을 인정하는지 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든지, 남성과 여성이 사냥과 채집으로 바깥에서의 활동이 엄격하게 나눠져 있는 점이라든지, 네안데르탈인 사회가 이미 종교적이었으며 놀랍도록 동식물에 대한 정보를 축적하고 있었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가득 알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 때의 삶을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선사 시대의 삶이 궁금했다면 단연 이 책을 추천드리고 싶다.
네안데르탈인 씨족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로 채집을 맡았다. 물론 아이들도 참여했다. 노동에 있어선 아이들이라고 해서 열외가 없었다. 여성들은 각종 식물들에 대한 지식을 대를 이어 전달했고 당시는 식물이 의약품 역할을 했기에 치료사의 역할도 여성들이 맡았다. 기독교에 의해 악의적으로 왜곡되기 전의 중세 마녀의 이미지는 알고보면 선사 시대 여성이 그 근원이다. 아우얼은 소설에서 네안데르탈인 여성에게 방대한 식물 지식은 유전자 정보로 각인되어 별다른 학습 없이도 후대 여성들이 알 수 있는 반면 크로마뇽인은 새롭게 얻은 능력인 기억과 학습으로 그것을 익힌다고 묘사한다.
성역할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사냥은 전적으로 남성만 참여할 수 있었다. 사냥을 성공해야 무리에서 남성의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았다. 여성은 사냥 도구를 만지기만 해도 처벌을 받았고 심하면 축출될 수도 있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늑대의 사냥 방식을 모방해 무리 지어 사냥했으며 도구도 많이 발달시켰다. 적은 힘을 이용해 멀리 날릴 수 있는 줄팔매도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에일라의 무기가 된다. 줄팔매는 돌을 날리지만 줄팔매와 똑같은 원리로 창을 멀리 날리는 도구도 있었다.
동굴에서의 밤은 온갖 전설과 신화가 태어나고 활동하는 밤이기도 했다. 여기서 그들은 자연을 다양한 정령들이 살아 움직이는 장소로 해석했고 그들의 가호가 없이는 생존도 어렵다는 인식이 자리잡아갔다. 그것을 전승하는 역할은 주로 주술사가 맡았는데 아이들은 밤마다 그에게 몰려들어 그의 입에서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허구를 진실로 받아들였다. 씨족을 묶는 사회화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고 종교는 그렇게 태어났다.
실제 선사 시대 거주 동굴에서 발견된 아마도 주술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을 세 마리 들소 상. 동굴을 발견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그 동굴을 이전에 누가 사용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동굴이 씨족이 신성하게 섬기는 존재였을 경우 동굴은 은총의 대상이 되어 바로 거주지로 확정되었다. 그들에겐 각종 토템이 있었고 씨족의 번영을 위하여 항상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드리는 장소는 주로 동굴 가장 깊숙한 곳에 마련되었는데 이 들소 상 또한 그런 곳에서 발견되었다. 제사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였고 그래서 제사를 주관하는 주술사 또한 족장만큼이나 존중 받았다. 에일라는 목우르 주술사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난다.
[인용한 사진들은 모두 이 책에서 가져왔다. 이 책의 내용으로 소설의 내용을 검증해 보았는데 일치하는 것이 많았다. 고증은 어느 정도 확실한 것 같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이 소설에 대해 하나 더 깨닫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 소설이 페미니즘에 있어서도 꽤나 풍성한 해석 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2권을 읽고 거기서 리뷰하려 한다.
'대지의 아이들'은 미국의 FOX에서 드라마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첫 영상화는 아니다. 이미 1986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바 있다. 미국에선 3부인 '매머드 사냥꾼'까지 나온 시점이다. 영화는 시리즈 중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1부인 '동굴곰족'만 다룬다. 참여한 인물의 면면을 보면 제작사 워너브라더스가 이 작품에 꽤 높은 기대를 걸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연인 에일라는 당시 '스플래시'의 인어 역으로 인기 몰이를 하고 있었던 다릴 한나가 맡았고 각본은 무려 미국 인디영화계의 거장 존 세일즈다. '메이트원'의 감독 말이다. 이 당시 그는 시나리오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바로 다음 작품이었던 '메이트원(1987)'을 통해 그것이 결코 헛된 명성이 아니었음을 당당히 입증했다. 촬영은 또 폴 베호벤의 영화들을 통해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얀 드봉이다. 그리고 음악은 헉! 알란 실베스트리. 거기다 감독은 이럴수가! 마이클 채프먼.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성난 황소'를 찍은 그 사람. 감독으로 전업한 후 두 번째 작품이다. 크레딧을 보면 어찌나 화려한 지, 다리오 아르젠토의 데뷔작, '수정 깃털의 새'의 크레딧을 다시 보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만한 인물들의 협업에도 불과하고 영화는 폭망. 이 영화의 성공으로 대지의 아이들 시리즈를 계속 영화로 만들려했던 워너브라더스의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리즈를 좌초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 '배트맨 대 슈퍼맨'의 40년 선배인 것이다. 물론 워너브라더스는 저스티스 리그 유니버스를 포기하지 않고 있지만.
[사진은 영화의 OST, OST 커버는 영화 포스터를 그대로 사용했다. 포스터의 여성은 에일라로 분한 다릴 한나. '블레이드 러너'의 안드로이드 연기로 캐스팅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화의 실패야 어쨌든 소설만큼은 뛰어나다. 아직 이 소설을 만나보지 못했다면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