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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이름이 진정한 정체성을 뜻한다면 그녀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나비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을 감추려 한다.
사카즈키 조코란 이름을 감추려 하고 긴 앞머리에 둥근 안경이라는 순정만화 속 안경녀의 모습으로 미모를 감춘다. 왠지 필사적이란 느낌도 드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과거 전국적으로 유명한 아역 배우였던 자신을 숨기고 싶은 탓이다. 배우로 한창 잘 나갈 무렵, 그녀는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했고 아직까지도 진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역으로서의 역할은 끝났고, 여배우에 미련은 없었으며, 가업을 이을 생각도 없는 지금의 나는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런 자문에 대한 대답은 아직 내지 못한 채였다.(p. 19)
[ 표지에 홀로 있는 안경 쓴 소녀가 바로 주인공 조코다.]
그랬던 그녀가 재수까지 해서 굳이 도야마 대학에 들어온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얼른 결혼해서 주조장 일을 물려받으라는 아버지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유서 깊은 추리 동호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스터리는 아직 이름을 갖지 못한 그녀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것이다. 그녀는 주로 본격 미스터리를 선호하는데 그 이유를 그녀는 로직(logic)에 취해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로직에 대한 갈망은 진짜 자신을 찾고 싶은 바람에서 비롯되었다. 미스터리에서 로직은 선험적으로 존재한다. 미리 자리잡고 있다가 탐정의 추리로 비로소 발견된다. 그렇게 조코도 진짜 자신을 언제 어디서 찾게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그녀의 생각 대로 되지 않는다. 일단 추리 동호회에 들어가려는 계획조차 어긋났다. 취리를 추리로 잘못보는 바람에 그만 술만 주구장창 마셔대는 취리 동호회에 들어가버린 것이다. 취리는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뜻이다. 명료한 로직을 원했던 그녀는 이제 혼미와 무념의 나날을 보내야 한다.
추리와 취리.
여기서 작가 모리 아키마로가 이 소설,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를 통해 말하고 싶은 주제가 드러난다.
일단 소설의 처음. 조코는 이렇게 고백한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은 그저 마구 달리는 이름 없는 영혼인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 대답을 찾아내지 못한 채로 자신이라는 존재의 불명확함과, 또한 그렇기 때문에 있는 자유를 끌어안고 어둠 속을 질주하는 영혼.(p. 9)
추리는 터널의 바깥을 의미한다. 바깥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밝은 빛. 그건 자신이 찾아야 할 진짜 자아였고 그렇게 청춘이라는 긴 터널을 통과하면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로직이 그러하듯이.
하지만 취리는 전혀 다른 진리를 설파한다. 삶에 그런 로직은 없다는 것이다. 취하면 멋진 이치가 보인다는 말은 정체성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뛰어든 경험 속에서 조성되는 것을 뜻한다. 모리 아키마로가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보낸 것은 그러니까 이런 말을 독자에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조코처럼 스스로 불확실함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고 여기는 독자라면 더더욱.
'아직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너무 걱정은 마.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걸음들이 다 진짜 너니까. 넌 이미 너로서 완전해. 너무 불안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어.'
다섯 개의 단편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정돈된 이 소설은 조코가 바로 그런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그 깨달음은 사랑이라는 형태로 다가오는데 그 대상이 되고 그녀를 거기로 데려가는 멘토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미키지마다. 그녀보다 두 학년 선배로 조코를 취리 동호회로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3년째 1학년이며 강의실보다 취리 동호회 아지트에서 숙취에 찌든 모습으로 더 많이 발견된다. 어디에 확실히 안착하지 못했다는 점에선 조코와 처지가 별 반 다를 바 없으나 미키지마는 불안도, 두려움도 없다. 자신이 취해 있는 모든 순간을 사랑하며 깨어 있을 때는 착실하게 자신의 꿈을 쫓는다. 미키지마는 한 마디로 이 소설에 투영된 모리 아키마로의 주제를 형상화한 모델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므로 조코와 연인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화사한 벚꽃을 보면서 맛좋은 사케를 들이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소설이다. 이야기는 먼 산을 바라보는 것처럼 잔잔한데 사이사이 숨어 있는 경구와 같은 문장이 안주로 두툼한 참치회를 먹는 것처럼 담백하여 끝까지 흥취를 돋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입맛이 깔끔하게 마무리되면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정말 하고 싶은지 고민하기 보다는 마주 다가오는 삶에 무작정 부딪혀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취리에 전염되는 것이다. 그것도 짧게. 하기사 삶도 취하기엔 너무 짧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