맙소사!

 영화를 본 뒤 내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공각기동대'를 만드는 줄 알았는데, 이거야 원 '토탈 리콜'을 만들어 놓았잖아!


 안다. 모든 작품들은 개별적이다. 설사 원본이 있다고 해도 거기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내가 '맙소사'를 느낀 건 원본이 되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의 주제와 달라서가 아니다.

 영화 자체의 문제다.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모두 보신 분은 이 영화가 애니메이션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따왔는지 아실 것이다.

 영화 초반 장면부터 시작해서 건물 습격 장면을 비롯하여 참 많다. 공간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하물며 건물 위로 비행기 지나가는 것까지

 애니메이션에서 가져왔다. 영화 마지막은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유명한 소령이 광학미채로 사라지는 장면이다.

 그리고 애니메이션 크레딧 화면에서 흘렀던 카와이 켄지의 음악이 영화 크레딧에도 그대로 흐른다.

 그러니 '맙소사!'다.


 애니메이션에서 관객을 매혹시켰던 장면들을 이렇게나 많이 가져와 놓았지만

 정작 그 장면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전혀 헤아리지 않아 이번 영화에서는 아주 엉뚱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본에 대한 수많은 인용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쓰여 이 영화 내부의 정합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하하하!

 헛웃음이 나오는 것을 그칠 수 없다.

 오시이 마모루가 왜 초반에 광학미채 장면을 썼는지, 후반의 스파이더 탱크와 소령이 싸우는 의미가 무엇인지?

 인형사가 그 영화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쿠제 히데오와는 왜 맞지 않는지?

 정말 자신이 그 장면들을 가져 오면서도 그것이 지금 자기가 말하는 것과 어울리는 것인지 전혀(영화를 보니 이렇게 단정지을 수밖에 없다.)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광학미채 자장면을 마지막에 마치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서비스 하듯 넣었겠지.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막대한 제작비, 그것에 돈을 준 중국의 두 회사 때문일까?

 아무래도 원본의 이야기는 많은 관객들이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을테니(원본은 일본에 개봉했을 때조차 흥행 참패했다. 그래서 공각기동대 속편은 제작사가 공각기동대라는 이름을 붙이면 저번처럼 흥행이 안되니까 그냥 '이노센스'로 하자고 했을 정도다.) 관객들이 보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방향을 틀어버리는 바람에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일까?


 모르겠다. 내겐 너무나도 그리운(난 공각기동대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상영했던 96년, SICAF에서 봤다. 아직도 그 날 '공각기동대' 애니메이션을 봤을 때의 충격이 생생하다. 너무나 경이로워서 포스터가 그려지 티셔츠를 구입했고 그것을 한동안 입고 다녔다.) 작품이라 실사로 만들어진다기에 잔뜩 기대하고 봤는데 주제는 그렇다쳐도 영상과 이야기가 이렇게 따로 노는 건 납득하기 어려웠기에 보지 말 것을 후회하는 중이다.


 이런 글을 쓰는 건, 이런 말을 할 사람이 가까이에 없기 때문이다. 보고나서 정말 이 영화에 대해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그런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것이구나 처음 느꼈다. 그만큼 애정하는 작품이라 그런가 보다.

 어쨌든 어디다 쏟아낼 길이 없기에 여기다 내지른다.

 영화 리뷰는 언제든 쓸 것이다.

 조목조목 말하지 않고 냅다 이런 말만 싸질러 놓는 건 그래도 열심히 만든 이에게 예의가 아닐테니.

 지금은 감상 소감만 말해 둔다.


 '맙소사'라고...


 그건 그렇고 요즘 누가 원본 따위에 신경 쓰나?

 필립 K 딕의 '토탈리콜' 같은 건 이미 한 물간 이야기다.

 더구나 순종을 찾고 원본을 고집해서 자꾸만 사람들 불안과 혈압 상승을 부추기는 트럼프 시대에...

 

 스칼렛 요한슨은 괜찮았다. 바트도 좋았고...(원본에는 없는 바트가 눈을 잃게 되는 연유를 영화는 보여준다.)

 쿠제(맞다. TV판 2기에 나온 그 쿠제다. 영화엔 인형사가 나오지 않는다. 그 쿠제의 카리스마를 이 영화에서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영화에는 그 쿠제를 이용했던 고다 카즌도도 나온다. 정확히 이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굴 모습이 고다와 많이 닮았기에 하는 말이다. 쿠제가 있는 곳으로 알려진 바에서 요한슨에게 춤추라고 명령하는 사람을 말한다.)는 화면이 어두워 잘 보지 못했다. 마지막 장면의 표정조차 잘 볼 수 없었다.

 키타노 다케시가 또 헐리우드 사이버펑크 영화에 캐스팅 되었다.

 로버트 롱고가 필립 K 딕의 원작으로 만든 '조니 메모닉(우리나라 개봉명이 뭔지 기억이 갑자기 안 난다.)'에 이은 두 번째다.

 그 때는 야쿠사였는데 이번엔 야쿠사를 잡는 공안이다.

 사고로 얼굴의 표정이 없어졌기에 사이버펑크 분위기에 어울려서 캐스팅 되는 것일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qualia 2017-03-31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다시피 《공각기동대》는 원작 만화가 1989년~1997년에 걸쳐 나왔고, 만화 영화는 1995년에 나왔죠. 지금으로부터 28년 전부터 태동했다고 할 수 있는데요. 1996~1997년 당시 《공각기동대》를 보고 한국 영화에서는 거의 접해볼 수 없었던 cyborg, cyberpunk, cyberbrain(電腦) 등등의 개념이라든가 사유 세계, 상상력의 전개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받고 놀라워하고 열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충격받고 놀라워하고 열광하는 데서 그쳤을 뿐 그것을 심층적으로 분석 · 탐구 · 연구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죠. 해서 한국은 그런 장르를 창작하거나 영화로 제작하는 문화의 단계까지 나아가는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고 봅니다. 일본은 적어도 1980년대 말~1990년대 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저런 개념들과 사유 세계를 폭넓게 상상하고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반면 한국은 지금 21세기 초에서야 알파고 충격을 경험하고 나서부터 저런 비슷한 개념들과 사유 세계에 겨우 눈을 뜨게 된 것은 아닌가 합니다(사회 전반적인 측면에서). 일제 식민지 노예 상태에서 풀려난 것이 194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겨우 72년 전이니까 한국은 모든 측면에서 늦을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2017년 할리우드판 《공각기동대》는 과연 저런 조건에 놓인 한국인들한테 어떤 사유를 던져줄지 궁금합니다.

ICE-9 2017-03-31 23:07   좋아요 0 | URL
qualia님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공각기동대가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 봐서 그 때 분위기를 조금은 잘 알고 있는데요. SICAF 상영 전에 키노에서 먼저 공각기동대가 나왔을 당시 똑같이 많은 관심을 받고 평가가 좋은 애니메이션이 ‘마크로스 플러스‘를 포함하여 두 편 더 있어 함께 소개했었죠. 물론 비평 탑은 공각기동대였습니다. 키노 때문인지 입소문인지 SICAF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공각기동대를 보러 왔었습니다. 코엑스 광장에 꽤 긴 줄이 있었을 정도로 말이죠. 아마도 이번 영화판 보고 실망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때 봤던 이들이 아닐가 해요. 그 뒤로, 그 때는 아직 인터넷이라는 게 발달하지 않아서 공식적인 팬덤의 존재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각기동대는 무조건 필수 관람작이었습니다. 대부분 영화 동아리에서도 함께 보고 많이 토론한 것으로 알고 있고 ‘공각기동대‘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 성인 취향 SF 애니메이션이 나오기도 했었죠. 말씀하신대로 일본은 이미 그 쪽에 충분한 토양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우리나라는 그 때 비로소 본격적으로 사이버펑크가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싶긴 합니다. 물론 그 전에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라든가 ‘토탈 리콜‘ 같은 것이 어느정도 사이버 펑크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만. 사이버 펑크를 주제로 한 sf 단편집도 나왔던 걸로 압니다. 제 생각에 저변에선 사이버펑크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분명 있었지만 그 수가 너무도 일천했기에 주류로 나아가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sf의 영토란 지극히 협소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개인들간의 관심이 있었기에 영화 ‘매트릭스‘도 쉽게 받아들여지고 인기를 얻은 게 아닐까 싶어요. 그 ‘매트릭스‘는 공각기동대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죠. 스칼렛 요한슨이 주연한 ‘루시‘가 ‘아키라‘에서 영향을 받은 것과 똑같이 말이죠. 아마도 영화판으로썬 우리들에게 별로 사유할 거리를 던져주진 못할 것 같습니다. 영화판 주제는 철지난 것들이기 때문이죠. ‘공각기동대‘ 때는 정말로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 영화판이 좀 더 사이버펑크 적으로 존재론적 주제를 지녔다면 그 때의 논의들이 좀 더 발전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네요. 쓴다고 쓰긴 했는데 과연 제대로 된 댓글일지 모르겠습니다. 두서가 많이 없을텐데 널리 양해하시고 읽어주세요. 그리고 qualia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는 1926년 9월 22일. 3. 1 운동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통치 기조를 문화 정책으로 바꾸고 조선인에게 언론 소유와 각종 공직의 진출을 허용한 시기에 주로 취미와 풍속 기사를 다루는 잡지 '별세계'의 기자 류경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육당 최남선의 부름을 받는다. 최남선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광화문에 있는 조선 총독부 건축 현장. 어제 아침 거기서 조선인으로 조선 총독부 건축에 참여하고 있는 설계사 이인도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팔, 다리, 머리와 몸이 모조리 토막난 상태로. 하지만 그게 류경호를 데리고 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시신의 부위들이 꼭 대한제국을뜻하는 한자 큰 대자로 배열되어 그렇지 않아도 공직에 있는 조선인들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것이 하나의 빌미가 되어 조선인 축출이 본격적으로 거행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최남선은 그런 움직임을 획책하고 있는 일본인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하여 '일동회'로 이념이나 신념이 아닌, 오로지 이익만 쫓는 집단으로 그들은 문화 정책에 따라 조선인의 공직과 사업 진출로 자신의 이익이 줄어들자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내쫓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류경호로 하여금 얼른 사건을 해결하도록 할 작정으로 부른 것이었다. 류경호가 실은 아주 뛰어난 탐정이라는 것을 최남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최남선의 걱정대로 일동회가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그 바람에 이인도와 친했던 또 한 명의 조선인 설계사 박길룡이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것을 시작으로 일동회는 언론과 경찰의 인맥을 동원하고 압력을 행사하여 박길룡을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항일 무장 조직이던 의열단과 연계시켜 조선인 축출 명분을 만든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가 완공되는 날 모든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지지 여론을 만들고 조선인 배제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 완공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3일. 그 안에 류경호는 이인도 토막 살해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과연 진범은 누구이며 류경호는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정명섭 작가의 '별세계 사건부'의 주된 줄거리다. 제목 때문에 얼른 판타지가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보시다시피 미스터리다. '별세계'는 당시 실제로 있었던 잡지 '별건곤'을 픽션화한 이름이다. 소설은 작가가 우연히 '별건곤'을 본 게 계기가 되어 태어나게 되었다. 이 소설이 가진 커다란 미덕 중의 하나는 1926년 당시의 경성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역시 '별건곤'의 덕택이다. 작가가 밤문화를 비롯하여 경성 곳곳의 묘사를 바로 '별건곤'의 기사를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와 별개로 이것이 꽤 읽는 재미를 준다. 나는 사실 이 시대에 관심이 많아서 더욱 즐겁게 읽은 것 같다. 살인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셜록 홈즈의 어떤 소설을 오마쥬 하고 있기도 하여 셜로키언이라면 보다 더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실제 '별건곤'의 모습. 책의 표지 디자인은 여기서 따온 듯 하다.


 한 편, 일동회의 음모 때문에 이 소설은 1920년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은 바로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빗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동회가 획책하는 일이 기실 김기춘이 주도했던 '블랙리스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은 조선 사람, 특히 자네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거야. 관리도 될 수 없고, 높은 자리로 승진할 기회도 사라지게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관심 없어할 거야. 당장 먹고 사는 문제랑 상관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일세. 사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무관심이지.(p. 279)


 블랙리스트가 오로지 자기들에게 아무 이익이 되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예술가나 지식인들 위주로 작성되었듯, 일동회의 음모도 자기들 이익에 방해가 되는 조선인 그것도 특히 지식인이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 당장 내가 먹고 사는 일과는 그리 관련이 없다보니 블랙리스트라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사람들에게 얼른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까놓고 보면 민주주의와 관계된 문제 중에 내 삶과 별개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가깝거나 멀게 다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하나라도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결국 내게도 커다란 피해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바로 그것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을 idiot, 즉 바보로 규정했는지 모른다. 탄핵 정국을 힘겹게 넘긴 지금, 이제 우리도 바보의 의미를 원래 의미에 맞게 정의내려야 할 듯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독재자'는  '칸다하르'와 '가베'로 유명한 이란 출신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2014년에 발표한 영화다.

 원제는 대통령을 뜻하는 'PRESIDENT'. 원래는 2014년에 개봉했어야 할 영화가 지금에서야 개봉한 것은 어쩌면 지금은 전직이 된 당시의 대통령 박근혜 때문일 지도 모른다. 제목이 '대통령이라서가 아니라 전화 한 통화로 수도의 불 전체를 끌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독재자가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손자와 함께 유리걸식 하다 민중들에게 잡혀선 곤욕을 치르는 영화이니 개봉이 되었다면 그렇지 않아도 유리멘탈인 그녀의 분명 심기를 많이 건드렸을 터. 안 그래도 세월호 참사로 골치가 아픈 대통령의 심기를 경호하느라 바쁜 이들이 알아서 긴다고 아예 대통령 눈에서 치워버리려 했을 수도 있을테니. 그 때는 영화 '변호인' 때문에 CJ가 가뜩이나 청와대에 찍혀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고.



 어쨌든 영화를 보고나니 지금이라도 개봉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거의 독재에 가깝게 권력을 휘둘렀던 대통령이 국민의 촛불로 탄핵을 당해 파면된 지금엔 우리나라 상황이 영화 속 내용과도 얼추 겹쳐 이야기를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독재자인데 제목이 'PRESIDENT'인 것은 현재 이란이 대통령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기에 이 영화가 2014년에 발표된 것을 고려하면 이 영화가 한창 만들어지던 당시인 2013년에 이란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의 영향도 있어 보인다. 그 때 이란의 대통령 선거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2011년의 재스민 혁명이 과연 이란에도 번질 것인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당시 이란 정권은 보수 강경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항할 개혁파 진영은 약체였다. 싸움의 결과는 보나마나다 하는 말들이 곧잘 회자되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예상을 뒤엎고 변화를 바라는 세력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영화 '어느 독재자'는 바로 이 변화를 직접 반영하고 있다. 영화 초반 민중들의 거센 저항으로 위기에 몰리는 독재자의 모습이 바로 그 증거가 아닐런지. 또한 영화 속 독재자는 어디로 보나 강경 보수파로 보이고 라디오에선 계속 야당이 집권당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이란만이 아니라 모흐센 마흐말바프에게 자못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도 직접 영향을 받는 일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동안 만은 이란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영화 때문에 이란 정부와 강경 보수파로 부터 테러 위협을 끊임없이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딸이 영화를 만드는 현장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는 더이상 이란에 머물 수 없었다. 무려 2005년부터 계속 테러를 피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다. 부산영화제는 그런 그를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영화 '어느 독재자'가 로드 무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이런 그의 자전적 경험과도 연관 있을 것이다. 영화 후반으로 가면 주인공 독재자에 의해 정치범으로 수감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다가 혁명을 맞아 풀려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독재가가 도망하느라 자신들 처럼 정치범으로 위장하여 바로 곁에 있는 줄도 모르고 독재자를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어떤 이는 독재자를 무조건 죽일 것이라 선언하는데 옆에 있는 어떤 이는 그것에 반대하며 용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한 정치범은 영화 마지막에 독재자가 민중들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자 이렇게 증오와 폭력으로 그에게 복수할 거라면 차라리 자기부터 죽여달라고 기꺼이 목을 내어놓는다. 폭력이 가져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폭력 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리고 민중들에게도 말한다. 이 독재가가 권력을 휘두르는 동안 당신들은 무얼 했느냐고. 그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당신들이 실은 거기에 기생하고 있었던 게 아니냐고? 그런 그의 모습은 신약 성경의 예수 모습을 떠올린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죄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쳐라고 말했던. 독재자가 독재할 수 있도록 방기한 우리들의 책임을 폭력과 제거로 무마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뜻을 내비치는 그의 말은 그대로 감독이 재스민 혁명 이후의 중동 민중들에 대한 발언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정치범이 내겐 모흐센 마흐발파프의 분신으로 보인다. 10년이 넘도록 정치범 아닌 정치범으로 조국과 먼 이국의 땅을 방랑했기에 그는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재스민 혁명 후의 이란과 중동 국가들의 상황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이런 말을 했을 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가 복수 보다 용서, 폭력 보다 노래나 춤을 부르짖는 것은 영화에서 줄기차게 반복적으로 재현되고 있는 권력의 속성 때문이다.

 영화는 처음에 권력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자신에게 저항했던 이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는 독재자의 모습이 나오는데, 손자가 계속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조른다. 독재자는 그러는 손자에게 자기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준다고 하면서 발 아래에 펼쳐진 도시의 눈부신 야경을 보라고 말한다. 손자가 그것을 바라보자, 독재자는 전화를 걸어 도시의 불을 당장 끄라고 말한다. 그러자 마법처럼 도시가 암흑으로 돌변한다. 그 광경으로 손자는 권력의 힘을 알게 되고 매혹된다. 



 독재자는 다시 전화를 걸어 손자의 명령이 곧 자신의 명령이라 말하며 손자에게 수화기를 건네 이번엔 네가 명령해 보라 한다. 손자가 불을 켜라고 명령하자 도시가 다시 눈부시게 변한다. 재미가 들린 손자가 다시 끄라고 하자 도시는 이내 어둠에 잠긴다. 손자와 독재자는 웃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의 힘을 한동안 맛보다가 손자가 다시 불을 켜라고 전화로 명령한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불은 들어오지 않는다. 이 때 카메라는 방향을 바꿔 도시가 아니라 손자와 독재자를 담는다. 그들이 아무리 명령 해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는 도시처럼 이제 그들이 어둠 속에 있게 된다. 마치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빛을 이제는 자신들이 허락받지 못하게 된 것처럼. 그런 가운데 그들은 어둠 속에서 수상한 총소리와 폭음을 듣게 된다. 그들은 위협하는 자였으나 이제 위협을 받는 것은 그들이다. 이렇게 자리 바꿈이 일어났다.



 

이 장면에 영감을 준 아프카니스탄에 있는 다룰 아만 궁전

소련 침공과 반복된 내전으로 점철된 아프카니스탄의 아픈 역사를 그 자체로 증거하는 공간이다.

모흐센 감독은 2005년 이 곳을 방문했는데, 이 궁전에서 독재자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에게

 절대 권력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영화 속 장면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어느 독재자'는 그렇게 해서 태어났다. 시나리오 작업 도중 재스민 혁명이 2011년에 일어났고

 그 때문에 시나리오를 다시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바로 이것, 언제든 누구의 자리든 정반대로 바꿔질 수 있다는 것이 감독으로 하여금 복수 보다는 용서, 폭력 보다는 노래나 춤을 강조하게 만든다. 영화는 내내 이런 자리 바꿈이 일어난다. 손자는 자신의 장난감과도 같았던(마리아가 손자의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영화 초반 그들이 공항으로 달아나려 할 때 누나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손자가 마리아를 데려가고 싶다고 하자, 누나는 차 안을 네 장난감으로 넘치게 할 셈이야 하고 나무란다.) 마리아가 된다. 독재자는 자신과 손자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손자를 여자로 변장시키는데 그 모습은 꼭 손자가 마리아로 잘못 알고 따라간 소녀의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그렇게 손자는 자기가 가진 권력의 대상이던 마리아가 된다. 이것은 군인들에 의해 이제 막 결혼한 신부가 겁탈 당하고 총살 당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그 때 군인들이 신부를 겁탈하기 위해 스크럼을 짜서 신랑과 그 가족을 막는 모습은 그대로 손자가 마리아를 공항으로 데려가겠다고 고집을 피울 때 집사들이 스크럼을 짜서 손자를 차 안으로 넣는 것과 정확히 겹친다. 이런 반복은 군인과 신부의 관계가 손자와 마리아의 관계가 동일하다는 것을 뜻한다.



 독재자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변장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자신이 위해를 가하거나 박해를 한 인물들이다. 그는 변장을 위해 양치기와 이발사의 옷을 빼앗는데 그렇게 그들과 아주 비슷한 모습이 된다. 정치범과 함께 있을 때는 스스로 정치범인 척 연기한다. 그는 거리의 악사로도 변장하는데 그 모습은 단지 노래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정치범인 된 인물과 판박이다. 이렇게 그는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자리 바꿈을 한다. 이렇게 연속적인 자리 바꿈은 누구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언젠가는 자신이 배척했던 바로 그 자리로 가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권력까지 포함하여 사람의 일에 있어 항상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구든 언제든 자신이 피해 입힌 자의 위치에 설 수 있다. 오늘 내가 가한 증오와 폭력을 내일 내가 받을 수 있다. 그 악순환과 무상성을 알기에 모흐센 마흐발바프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의 입을 통하여 '춤을 추게 합시다!'라고 외치게 만든 게 아닐까 싶다.



 왜 하필 춤일까? 사실 춤은 이 영화에서 '자리바꿈' 만큼이나 아주 중요한 키워드다. 춤은 마리아를 그리워하는 손자의 회상 장면을 통해 영화에서 아주 많이 반복될 뿐만 아니라 독재자는 거리의 악사로 변장하기 위해 자신이 기타를 치고 손자에겐 여장을 시켜 춤을 추도록 만든다. 손자가 회상 장면 속에서 마리아와 같이 추는 사교 댄스와 실제로 혼자 추는 춤은 여러 면에서 아주 대조적이다. 여기 또 하나 인상적인 장면이 둘 있다. 하나는 독재자가 민중의 저항에 위험을 느껴 국외로 망명하러 공항으로 가자 그 전까지 독재자를 위해 연주하던 악대가 독재자가 공항에 나타나자마자 군복으로 갈아입고 독재자에게 총질을 하기 시작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혁명 후 검문을 하던 군인들이 자신들이 3개월치나 월급을 못 받았다면서 검문에 걸린 사람들의 물건을 강탈하는 장면이다. 그 때 그는 독재자에게 노래를 시키고 모두 따라 부르게 하면서 물건을 갈취한다. 이제 막 결혼한 신부를 강간할  때도 모두에게 노래와 춤을 시킨다. 춤은 이렇게나 많이 나오고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감독은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기도 영화 감독으로서 속해 있는 예술의 의미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춤은 예술의 상징이다. 독재자 체제에서의 예술은 손자의 회상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이 오로지 체제의 지속을 위해서만 기능하는 존재였다. 한 사람의 쾌락을 위해서만 부역하는 것에 불과했다. 



 군인들이 하게 만들었던 노래와 춤도 마찬가지다. 모두 현실에 존재하는 시대의 어둠을 가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불법에 조용히 순응하거나 참여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예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예술은 권력의 시녀였고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민중을 길들이는 아편일 뿐이었다. 감독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 갇혀 있다 이제 막 풀려난 악사의 반주에 맞춰 바다를 향해 혼자 춤을 추고 있는 손자의 모습을 통해 그런 예술과 대비되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 때 손자는 할아버지 독재자와 죽을 운명이었다. 독재자와 같이 자기도 죽여달라며 목을 내놓던 정치범의 호소 때문에 겨우 목숨을 구한 참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 시간이 계속될 지 장담할 수 없다. 할아버지가 처형되면 손자 역시 처형될 가능성이 높다. 손자는 그 때 있었던 사람들 중 가장 약한 존재였다. 악사는 바로 그 손자를 위해서만 연주하며 손자는 춤을 춘다. 이것이 바로 감독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의 모습이다. 바로 사회의 가장 한없는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예술.



 조르조 아감벤의 용어를 빌리자면 사회의 호모 사케르들을 위한. 예술이 강자가 아니라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마지막 장면에서의 무언의 외침은 폭력이 아니라 용서(폭력도 끝내는 강자가 되어 보려는 욕망의 굴절된 표현일 지 모른다.)가 결국은 진정한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꽤 묵직한 울림을 준다. 감독은 이렇게 예술가로서의 책임을 자각한다. 물론 이 예술엔 언론도 포함된다. 시대의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부역하지 않으며 오로지 약자를 위해서 그들의 고통과 목소리를 대변하며 거대 권력에 주눅들지 않고 맞서 싸우는 예술의 모습은 우리들에게도 매우 절실한 것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다. 이런 면 때문에라도 '어느 독재자'는 우리가 꼭 한 번은 봐야할 영화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암살자닷컴
소네 케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96년 통계이긴 합니다만, 일본에는 고로시야, 즉 청부살인업자가 약 800명 있다고 합니다. 1년에 일거리는 제아무리 뛰어난 능력자 고로시야라고 해도 두 세건 정도. 당연히 경쟁은 치열하고 전업만으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하는군요. 하여 대부분 고로시야들은 투잡을 뛴다고 합니다. 음식 배달, 편의점 알바, 택시 운전 같은 것들. 그러면서도 고로시야로서의 육체와 감각을 어느 정도 조련시켜 놓는 것이 필요하기에(그렇지 않으면 암살자들과의 경쟁에서 쉽게 도태되고 마니까요.) 일상적인 일을 하는 동시에 죽이는 훈련도 병행해야 한다네요. 예를 들면 음식을 배달시킨 집에 소리없이 들어가 주인에게 들키지 않고 놓아두고 온다든지. 그래서 고로시야에게 라면 배달은 금기 직종이라고 합니다. 불어 터졌다고 손님에게 항의 받는 경우가 많아서 말이죠. 고로시야로 사는 것은 이렇듯 힘듭니다. 자칫 운이 없어 야쿠자 두목 같은 이를 죽이려다 들키기라도 하면 속절없이 혼과 살이 분리되는 경험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웬만한 경력이 있는 고로야시들은 그들을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에이전시 회사들이 있다고 하는군요. 일정한 수수료만 내면 일감을 가져다 주고 신변 보호도 해주며 필요한 암살 도구도 마련해 주는. 이 모든 사실이 얼른 믿기지 않는다구요? 100% 리얼입니다. 믿기지 않으시면, 사부 감독이 만든 96년도 영화 '포스트맨 블루스'를 보세요. 거기 그대로 다 나오니까.


 이렇게 몸이 힘들고 벌이가 적은 직업인데도 고로시야가 점점 더 많아지는 사회란 도대체 어떤 사회일까요? 그만큼 경제적으로 어렵고 희망이 없는 사회라고 보아도 좋겠죠. 이것이 바로 소네 케이스케가 그의 소설 '암살자닷컴'에서 그리는 2012년의 세계입니다. 작가가 보는 후쿠시마 원전 대참사가 일어난 1년 후의 일본 모습인 것이죠. 그저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다만 돈을 받고 타인을 죽이는 것밖에는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진 사회. 에이전시로도 그들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었는지 이제 그들은 온라인 경매를 통해 고객의 의뢰를 받습니다. 경매를 주관하는 회사가 의뢰 받은 암살 건을 올리면 하고 싶은 암살자 즉 고로시야들이 원하는 수고료를 말하고 가장 적은 금액을 말하는 고로시야에게 낙찰되는 방식이죠. 그런 일이 이뤄지는 곳이 바로 '암살자닷컴' 입니다. 암살자들은 오로지 아이디로만 접속하기 때문에 실제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회사는 오직 암살자 조직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암살자가 암살을 실패 또는 하지 않아서 암살자에게 응분의 처벌을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신원을 확인합니다. 이 처벌 역시 회사가 특별히 선임한 고로시야에 의해 수행되는데 꽤 잔인하고 그것은 모조리 촬영되어 모든 고로시야들에게 배포됩니다. 한 마디로 니들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이죠. 이런 위험까지 감수하고서 그것도 아주 적은 이익을 감내해야 하는 게 고로시야 일인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여기에 뛰어든다는 것은 확실히 사회가 지옥이 된 것이나 다름없겠죠. 그들에게 96년 상황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암살 의뢰 건수가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일 년에 고작 두 세 건이었는데 지금은 하루가 멀다하고 몇 건씩 의뢰가 들어오니까요. 뭐랄까, 만인에 대한 만인의 살해가 된 것만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후쿠시마 원전 대참사 1년 후의 일본인 것입니다.



 소네 게이스케. 저는 그를 살풍경의 작가라 부릅니다. 단 두 작품만 가지고 그를 이렇게 불러서 좀 그렇긴 합니다만 아무튼 2009년에 나온 그의 단편집 '열대야'와 이번의 '암살자닷컴'을 보니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네요. 하긴 그의 데뷔작 '침저어'부터 좀 그런 경향이 있긴 했습니다. 일단 작품의 제목만 봐도 이 작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답답함을 느끼는지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침저어'는 바다 가장 밑바닥에 있는 물고기고, '열대야'는 답답한 더위로 잠을 자지 못하는 상황이며 '암살자닷컴' 역시 오직 죽음만이 해결책으로 그 어떤 희망도 구원도 없는 상태이니까요. 그는 늘 이렇게 현재 일본 사회에 대한 낙담과 절망을 자신의 작품 속에 누벼왔습니다. '열대야'와 '암살자닷컴'은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소설은 편의상 연작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암살자닷컴'에 소속되거나 그것에 관련된 이들이 돌아가면서 각자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네 개의 단편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반전에 관련된 진실이 명확히 밝혀지는 하나의 에필로그로 이뤄져 있지요. 이 사회에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은 첫 단편부터 드러납니다. 거기서 암살자로 나오는 인물은 원래 경찰이니까요. 그러니까 낮에는 법과 질서를 수호하는 경찰로 밤에는 그것을 위반하여 함부로 사람을 해치는 암살자로 살아가는 인물인 것입니다. 꼭 반전된 배트맨의 모습 같네요. 무너지는 사회의 최후 보루라 할만한 경찰이 이 모양이니 이 사회가 어떤 지는 충분히 감이 잡히시겠죠?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아직 경악할만한 일이 두 번 더 남아 있습니다. 첫 단편 안에서만 말이죠. 이러니 더욱 달리 볼 수 없겠죠? 소네 게이스케는 일본을 한 마디로 'PAINT IT BLACK' 해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소설의 모든 이야기는 한 인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처음 그 인물은 언뜻 일말의 희망 같은 존재로 보이는데 소설이 진행될 수록 우리는 그와 반대되는 진실을 확인합니다. 유일하게 앞에서 길을 비추던 반딧불이 홀연히 사라지고 마주하는 것은 막막한 어둠. 광기가 아니고서는 그 진실을 버텨낼 수 없는 상황. 저는 이것이 바로 '암살자닷컴'이 우리들에게 재현하는 세계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후쿠시마 대참사 이후의 일본의 모습으로 말이죠. 이것은 지금도 여전히 일본의 현재와 미래는 밝다면서 온갖 매체들을 통하여 긍정과 '간바레~'를 주입하려는 일본 정부와 얼마나 다른 모습인가요? 정직하게 응시하고 용감하게 발언한다는 점에서 전 높은 점수를 주고 싶군요. 이야기 자체도 재밌어서 더욱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대야'과 같이 읽어보시면 소네 게이스케가 어떤 작가인가 하는 게 보다 더 감이 잡히실 듯 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04-05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06 0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갇힌 소녀'한 소녀가 갇혀 있다. 지금 그녀의 나이 열 여덟. 열 다섯 살에 친구와 함께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현재 3년째 감금 중이다. 그 일로 그들의 고향 빙엄은 완전히 뒤집혀졌다. 부모와 경찰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그들을 찾았으나 행방이 묘연했다. 자식의 생사를 몰라 애타는 부모의 마음을 뒤로 하고 그들은 '빙엄의 소녀들'로 불리며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다. 범인이 빛이 없는 곳에 물도 먹을 것도 거의 없이 방치하여 갖은 학대를 다 했으나 그들은 조금도 삶의 의지를 버리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 분투했다. 사회는 죽었다며 포기하고 서둘러 잊었으나 그들은 자신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들에 대한 사회의 무시와 망각이 천벌을 받는 것일까? 우리의 주인공, 파킨슨 병을 앓는 임상 심리학자 조지프 올로클린은 영하 26도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다. 지금 런던은 남극 대륙을 횡단하는 스콧의 기분을 느낄 수 있을만큼 극지의 공간이다. 그리고 공항마저 폐쇠된 고립의 장소다. 거기서 조지프는 자신의 딸, 찰리와 함께 한다. 갇힌 소녀들 역시 누군가의 딸이듯 찰리는 그들과 비슷한 입장을 공유한다. 비록 육체는 아빠와 함께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빠에게서 이탈하려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조지프는 그 상황이 혼란스럽다. 그는 기드온 때문에 한 번 딸을 잃어본 적이 있다. 그 격심한 공포 속에서 괴물로 넘쳐 나는 이 사회에 딸을 내보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치 그 마음을 대변한 것처럼, 조지프는 찰리를 마중나온 플랫폼에서 우연히 낯선 청년이 찰리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뒤, 다시 말해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찰리의 모습을 목격한 후, 찰리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다 호수에서 얼어죽은 찰리와 비슷한 연령의 여성 시체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찰리와 그 청년이 했을 지도 모를 한 커플이 열차 안에서 낯뜨거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것을 본 직후에 말이다. 그 광경은 분명 조지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잘 봐! 찰리가 네 경계를 벗어나면 어떻게 되는지? 이렇게 되길 원해?' 그렇지 않아도 찰리가 지금 사귀는 남자 친구 제이콥 때문에 조지프의 심기는 영 좋지 않다. 나이도 훨씬 많은 데다 사는 꼴도 영 신뢰가 가지 않기 때문이다. 헤어진 아내 줄리아는 조지프에게 찰리가 제이콥과 헤어지도록 하라고 종용 중이다. 그와 별도로 조지프는 찰리가 이대로 세상에 정착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급적이면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더 많은 삶에 깃든 기회를 누리길 바란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품에 두고 보호하고 싶은 욕망과 충돌한다. 조지프는 한 마디로 혼란스럽다. 우리에게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으로는 네 번째로 소개되는 '미안하다고 말해'는 바로 이런 조지프의 혼란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즉 소설의 주된 미스터리가 되는 '빙엄의 소녀들'이 바로 조지프의 찰리에 대한 복잡한 감정의 투영인 것이다.




 때문에 나는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형식에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갇힌 소녀중 하나인 파이퍼 해들리의 고백 혹은 기록과 조지프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파이퍼의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배턴을 주고 받듯 조지프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구성이 처음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겐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비롯하여 이미 익숙한 미스터리 플롯이다. 거기서 피해자의 고백 혹은 기록은 어디까지나 미스터리에 충실한 플롯의 한 부분으로써 기능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다르다. 물론 여기서도 미스터리 플롯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보다 더 큰 역할이 있다. 바로 특히 찰리에 대한 조지프의 태도에 대한 반향의 기능도 한다는 것이다. 주의해서 읽어 보면 파이퍼의 이야기와 다음에 이어지는 조지프의 이야기는 어떤 연속성이 있다. 다시 말해 파이퍼의 이야기는 조지프가 찰리에게 취했던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읽힐 수 있다는 얘기다. 마치 조지프와 찰리가 속내를 모조리 털어놓는 무언의 대화라도 하듯이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소설을 더욱 흥미롭게 만든다. 우리는 조지프가 임상 심리학자라는 것을 안다. 그는 사람의 심리를 정확히 분석하는 게 일이다. 하지만 조지프의 심리를, 그것의 진짜 의미를 밝혀내는 눈은 소설에 없다. 조지프는 모두를 보지만 조지프의 내면의 진실은 아무도 보지 못한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게 파이퍼의 이야기다. 즉 파이퍼에 의해 조지프의 찰리에 대한 모든 태도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을 인정한다면 이런 말도 가능하다. 파이퍼의 고백을 통해 비난 받고 단죄되는 것은 비단 범인만이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 범인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조지프도 그 대상이라고. 놀랍지 않은가? 다른 텍스트를 통해 지금 진행 중인 주인공의 행위나 태도에 대한 비난과 단죄가 즉시 이뤄지다니. 범인과 조지프가 실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은 결말에서 더욱 드러난다. 즉 결말이 그렇게 된 것은 오직 하나 범인과 조지프가 실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빙엄의 소녀들'을 납치한 범인이 소녀들에게 '조지'라 불리워지는 이유도 그가 조지 클루니를 닮아서가 아니라 주인공 '조지프'와 비슷한 이름으로 만들어 범인이 주인공의 분신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미안하다고 말해'는 두 가지 층위의 이야기가 한 소설에 통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 층위에선 여느 스릴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기승전결로 촘촘히 꽉 짜인 플롯이 독자를 이끌고 간다. 그러나 심층적 층위에선 플롯 보다 아빠와 딸의 대화처럼 구성된 과정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거기서는 모든 게 독자에게 레퍼런스가 된다. 어쩌면 실제 삶에서 조우하게 될 지도 모를 문제들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 이런 저런 사유의 도우미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야기이니만큼 아무래도 주로 부모와 자식 관계의 일이 되겠지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하실 분들이 계실 것 같다. 그래서 소설에서 실제 예를 하나 들어보려 한다. 조지프가 경찰의 부탁 때문에 부부 강간 살해 사건의 주요 용의자인 오기 쇼를 심문하기 위해 먼저 범죄 현장부터 들르는 장면이다. 거기서 조지프는 이런 말을 한다.


 심리학자는 형사와 다른 관점에서 범죄현장을 바라본다. 경찰은 물리적 단서와 목격자를 찾아 수색한다. 나는 전체 그림을 보려 노력한다. 주요 지형지물의 특징들을. 예를 들어, 어떤 도로들은 심리적 장벽 역할을 수행한다. 그 한쪽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반대쪽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철도선과 강들도 마찬가지다. 경계는 행동을 바꾼다.(p. 49)


 이 말을 할 때 그는 범죄로 불타버린 집을 보고 있다. 그가 경계 운운 한 것은 경계를 확실히 해 놓지 않아서 집에 있었으면서도 희생되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구나 이 현장은 유괴된 소녀가 원래 살았던 집이기도 하다. 그 역시 경계가 허물어졌기에 생긴 일이었다. 경계를 지키는 개가 없어졌다는 게 이것의 단서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현장에서 조지프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경계를 더욱 확고히 해야겠다는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조지프가 스스로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그저 경찰이 원하는 대로 오기 쇼를 분석해 주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는 그저 귀찮고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 뿐이다. 딸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파이퍼는 이런 말을 한다. 자기가 사는 빙엄 마을 역사상 최악의 사건은 2차 대전 때 독일 폭격기가 마을 회관을 폭격한 일인데, 그 때 가장 안전하다고 여겼던 마을 회관으로 피신해 있었던 21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고 말이다. 그들은 조지프와 똑같이 자신이 가장 안전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했는데 오히려 그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파이퍼는 과연 조지프가 생각하는대로 확고한 경계가 쓸모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것이다. 심층적 차원의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지금 조지프가 취하는 태도는 바른 것인가?', '그것에 문제는 없는가?' 하는 것이 파이퍼의 진술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이 눈에 들어오면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하나의 이야기 속에 이런 다층적 국면을 조형한 마이클 로보텀의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아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아니,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어떻게 이리도 성공적으로 해낼 수 있었을까? 더구나 표면의 이야기는 심층의 이야기로 인해 전복되기도 한다. 표면의 이야기는 조지프가 빙엄의 소녀를 구하지만, 심층에선 오히려 빙엄의 소녀가 조지프를 구하는 것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미안하다고 말해'는 경계가 테마다. 경계를 벗어나거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이렇게 보자면 작품 전체가 합심하여 그 어떤 경계도 내부에 허용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조지프가 파이퍼를 구하는 것과 동시에 파이퍼가 조지프를 구하듯, 표면의 이야기와 별개로 진행되는 심층의 이야기가 있듯, 딱히 어느 하나로 정해지는 게 없는 작품이니까 말이다. 마이클 로보텀은 소설을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렇게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완수했다. 정녕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왜 마이클 로보텀의 대표작이라 평가받는지 알겠다. 다음 작품엔 그가 과연 어떤 성취를 할지 자못 궁금하다. 얼른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