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계 사건부 - 조선총독부 토막살인
정명섭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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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는 1926년 9월 22일. 3. 1 운동으로 인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통치 기조를 문화 정책으로 바꾸고 조선인에게 언론 소유와 각종 공직의 진출을 허용한 시기에 주로 취미와 풍속 기사를 다루는 잡지 '별세계'의 기자 류경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육당 최남선의 부름을 받는다. 최남선이 그를 데리고 간 곳은 광화문에 있는 조선 총독부 건축 현장. 어제 아침 거기서 조선인으로 조선 총독부 건축에 참여하고 있는 설계사 이인도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팔, 다리, 머리와 몸이 모조리 토막난 상태로. 하지만 그게 류경호를 데리고 온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시신의 부위들이 꼭 대한제국을뜻하는 한자 큰 대자로 배열되어 그렇지 않아도 공직에 있는 조선인들을 못마땅히 여기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것이 하나의 빌미가 되어 조선인 축출이 본격적으로 거행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사실 최남선은 그런 움직임을 획책하고 있는 일본인 조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름하여 '일동회'로 이념이나 신념이 아닌, 오로지 이익만 쫓는 집단으로 그들은 문화 정책에 따라 조선인의 공직과 사업 진출로 자신의 이익이 줄어들자 어떻게든 조선인들을 내쫓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전에 류경호로 하여금 얼른 사건을 해결하도록 할 작정으로 부른 것이었다. 류경호가 실은 아주 뛰어난 탐정이라는 것을 최남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최남선의 걱정대로 일동회가 본격적으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고 그 바람에 이인도와 친했던 또 한 명의 조선인 설계사 박길룡이 용의자로 체포된다. 그것을 시작으로 일동회는 언론과 경찰의 인맥을 동원하고 압력을 행사하여 박길룡을 당시 일본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항일 무장 조직이던 의열단과 연계시켜 조선인 축출 명분을 만든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가 완공되는 날 모든 언론을 통해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지지 여론을 만들고 조선인 배제 정책을 시행하려 한다. 완공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3일. 그 안에 류경호는 이인도 토막 살해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어야 한다. 과연 진범은 누구이며 류경호는 그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정명섭 작가의 '별세계 사건부'의 주된 줄거리다. 제목 때문에 얼른 판타지가 아닌가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보시다시피 미스터리다. '별세계'는 당시 실제로 있었던 잡지 '별건곤'을 픽션화한 이름이다. 소설은 작가가 우연히 '별건곤'을 본 게 계기가 되어 태어나게 되었다. 이 소설이 가진 커다란 미덕 중의 하나는 1926년 당시의 경성 분위기를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역시 '별건곤'의 덕택이다. 작가가 밤문화를 비롯하여 경성 곳곳의 묘사를 바로 '별건곤'의 기사를 바탕으로 썼기 때문이다. 미스터리와 별개로 이것이 꽤 읽는 재미를 준다. 나는 사실 이 시대에 관심이 많아서 더욱 즐겁게 읽은 것 같다. 살인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셜록 홈즈의 어떤 소설을 오마쥬 하고 있기도 하여 셜로키언이라면 보다 더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싶다.


 실제 '별건곤'의 모습. 책의 표지 디자인은 여기서 따온 듯 하다.


 한 편, 일동회의 음모 때문에 이 소설은 1920년대의 조선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은 바로 지금 우리나라 상황을 빗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일동회가 획책하는 일이 기실 김기춘이 주도했던 '블랙리스트'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일은 조선 사람, 특히 자네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거야. 관리도 될 수 없고, 높은 자리로 승진할 기회도 사라지게 되니까 말이야. 하지만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관심 없어할 거야. 당장 먹고 사는 문제랑 상관이 없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말일세. 사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무관심이지.(p. 279)


 블랙리스트가 오로지 자기들에게 아무 이익이 되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예술가나 지식인들 위주로 작성되었듯, 일동회의 음모도 자기들 이익에 방해가 되는 조선인 그것도 특히 지식인이 대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듯 당장 내가 먹고 사는 일과는 그리 관련이 없다보니 블랙리스트라는 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사람들에게 얼른 피부로 와 닿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까놓고 보면 민주주의와 관계된 문제 중에 내 삶과 별개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가깝거나 멀게 다 연결되어 있고 어느 하나라도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결국 내게도 커다란 피해로 돌아온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바로 그것에 대한 살아 있는 증거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정치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이들을 idiot, 즉 바보로 규정했는지 모른다. 탄핵 정국을 힘겹게 넘긴 지금, 이제 우리도 바보의 의미를 원래 의미에 맞게 정의내려야 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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