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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페션 - 두 개의 고백 하나의 진실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21년 4월
평점 :
눈부심. 사랑의 시작엔 그런 것이 있다.
갑자기 상대가 환하게 보이고 거기에 내 날개를 접고 앉아 고이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강렬히. 그건 마치 거대한 풍랑 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떠밀리다 간신히 찾아낸 등대 불빛과도 같다. 그 끝모를 고독과 불안에서 헤어나 마침내 안주할 땅을 찾았다는 밝고도 따스한 반가움. 더이상 지치고 아픈 영혼을 받아줄 곳을 찾아 문전 걸식하지 않고 뿌리내릴 곳을 찾았으니 어찌 환희로 눈부시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때로 눈부심이 지나치면 눈이 멀게 된다. 사랑하는 대상에 어떻게든 붙어있으려고 애쓰다 보면 정작 사랑하는 나는 사라진다. 사랑은 빛을 받는만큼 주는 것도 필요로 한다. 두 사람이 대등하게 상대에 대하여 마땅히 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사랑은 불균형으로 삐걱거리다 결국 멈추게 된다. 나라는 주체가 너라는 대상에게 오롯이 함몰되어선 안되는 것이다. 나로 제대로 설 수 있어야 사랑 또한 지속된다. 포함되기 보다는 포용하는 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나가 되어서 늘 상대를 위하여 애쓰는 것. 사랑은 그 여정 전체에 비로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종결의 명사가 아니라 진행의 동사인 것이다. 이런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사랑과 참 많이 닮아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성을 가장 순수한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뜬금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랑, 모성 얘기를 꺼냈던 것은 이번에 나온 영국 작가 제시 버튼의 소설, '컨페션'이 바로 그것에 관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대를 중심으로 번갈아가며 전개된다.
하나는 1980년에서 83년으로, 여기서는 앨리스라는 여성이 주연을 맡는다. 다른 하나는 2017년으로 로즈라는 여성이 주역이 된다. 소설의 처음은 앨리스가 연다. 스무 살의 그녀는 서른 여섯의 작가 콘스턴트 홀든을 우연히 만난다. 첫 눈에 호감을 느낀 앨리스는 도서관에서 홀든이 쓴 '밀랍 심장'을 읽고 선 매혹되어 버린다. 그녀는 코니(콘스턴트 홀든)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건 마치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온 것마냥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모르고 있는 자신과 전혀 다르게 코니는 확고하게 자기 삶이라는 것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색채를 세상에 뚜렷하게 새기면서 뚜벅뚜벅 걸어나가고 있음에서 오는 강함이 눈부신 빛이 되어 그녀를 사로잡고 만 것이다.
여기서 잠시 책의 표지를 본다. 거기엔 초록 토끼가 그려져 있다.
이는 코니가 나중에 쓸 작품, '초록 토끼'를 나타낸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 의미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앨리스라는 이름과 토끼를 통해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바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다. 그 작품에서 앨리스는 갑작스런 토끼의 출현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삶의 모험을 하게 된다. 이 소설의 앨리스도 마찬가지다. 코니가 그 토끼였던 셈이다.
무대는 바뀌어 이제 2017년이다. 두 번째의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그녀는 아주 어릴적부터 부재하고 있는 엄마를 자신만의 허구로 덧칠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덧칠은 엄마를 향한 강렬한 그리움의 또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충족되지 않는 그리움에 지쳐 열네 살에 이르자 엄마라는 존재를 지워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실감이 치유되진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삶이 늘 뭔가 부족하게 여겨졌고 그 탓에 타자에게 더 매달리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행복을 볼 수 있었다. 행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행복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훨씬 더 강렬하게 맛볼 수 있는 느낌이다.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말할 수는 없을 테지만, 끊임없이 발전하려 노력하는 데 지쳤다. 내가 가진 숱한 시시한 자아 사이에서 최고의 자아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도.(...) 나는 내 안에서 실패하는 자아나 잠재적 자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p. 38 ~ 9)
단적으로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정의한다.
내 바위를 찾으면 거기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부류였다.(p. 71)
이건 엘리스가 코니에게 가지는 마음과 비슷하다. 둘은 자신의 허한 부분을 타자에게 매달리는 것으로 채우려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가진다. 닮은 존재였기 때문인지 작가는 로즈에게도 똑같이 초록 토끼를 선사한다. 엘리스가 '밀랍 심장'을 읽고 업힐 대상을 발견했던 것처럼 로즈 역시 딱 두 권밖에 쓰지 않았다는 코니의 마지막 소설 '초록 토끼'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안길 수 있는 엄마를 찾아낼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고백을 통해 '초록 토끼'의 작가가 엄마와 밀접한 관계였으며 실종된 이유도 알고 있을 것이란 걸 알게 된 로즈는 신분을 속여 코니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려고 한다. 이 때, 그녀의 나이는 서른 네살. 앨리스보다 14년은 더 많지만 상황은 별 다를 바가 없다. 9년 동안 사귄 남자 친구가 있고 이미 남자 집에서도 결혼한 것이나 마찬가지로 대접받지만 마음 속의 공허는 지워지지 않는다. 남자 친구 집에서도 자신을 가족이 아니라 손님으로 여긴다. 산다는 느낌 보다는 억지로 잘 살고 있다고 연기만 하고 있을 뿐 실은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인스타그램 스타로 스타일 유행을 선도하는 친구 켈리는 그걸 벗어나기 위해 아이를 가지라고 종용하지만 로즈는 남자 친구 조가 아이의 아빠로 영 미덥지 못하다. 결국 로즈에게 수렁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줄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코니 하나였다. 그녀는 초록 토끼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 ]
이제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밝혀야겠다. 이미 눈치채셨을 지도 모르겠다. 앨리스가 바로 로즈의 엄마라는 사실을(두둥!). 이걸 깨달으면 우리는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된다. 하나는 그토록 열렬히 사랑하던 코니와 앨리스는 어떻게 되었길래 엘리스가 다른 남자 사이에 로즈라는 아이를 낳게 되었나이고 다른 하나는 왜 앨리스는 아이를 두고 사라져버렸는가이다. '컨페션'은 그 미스터리를 1980년대의 앨리스와 2017년의 로즈 이야기로 병행하여 풀어나가며 닮았지만 후반에선 서로 다른 선택을 했던 그녀들의 여정을 통하여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를 시나브로 세공한다.
앨리스와 로즈의 여정은 정말 닮았다. 한 권의 책으로 여정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게 코니라는 삶에 온전히 뛰어든 순간이 한창 코니의 작품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도 그렇다. 물론 앨리스의 얘기에선 코니의 작품이 헐리우드 영화로 만들어지는 중이며 로즈의 얘기에선 코니가 몇 십년만에 새로운 책을 집필 중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둘 다 코니의 주체성이 한껏 발현된 현장이다. 코니에게 소설 쓰기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이다. 그녀는 소설을 쓸 때 홀로 고독하게 작업하며 온전히 자신만으로 채워진 세계를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것이 설령 앨리스라고 해도. 그녀는 집필에 방해가 되기에 아이까지 가지지 않으려는 사람이다.
나는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아, 엘. 그럴 시간이 없어.(p. 114)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그야말로 고유한 주체성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 때문일까? 앨리스와 로즈 둘 다, 그 장소에서 섣불리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지 못한다. 앨리스는 그렇게 하면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앨리스는 자율성이나 자신감, 요구를 조금이라도 표현하면 자기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느꼈다.(p. 161)
로즈는 진정한 자신을 죽이고 어린 시절에 엄마에게 했던 것처럼 아예 로라라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버린다.
내 정체성의 실을 풀어 새로 짜내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나 자신을 버리고 커다란 구멍에 단어와 판타지를 쏟아붓는 일이 어떻게 이토록 쉬울까?(p. 185)
그렇지만 로즈의 이 '허구 만들기'가 서로 닮은 여정을 걸어온 앨리스와 로즈의 운명을 갈라놓는다. 앨리스는 미국에서 영화를 만들어지는 동안 내내 소외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것에 단 한 번도 주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구경꾼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있었다. 이러한 앨리스의 수동성은 코니의 친구 화가 샤라가 그녀를 그릴 때 단적으로 대표된다. 그녀는 영국에 있었을 때와 똑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모델이 되는 것이다. 그 앨리스를 보면서 샤라는 의미심장하게도 인어를 그린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 걸쳐서 사람과 물고기의 어정쩡한 중간 형태로 남아있는 그녀를.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작가가 여기서 인어를 끌어들이는 것은 그녀의 여정이 변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함이다. 여행을 시작할 때 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주체였다. 코니에게 매혹되긴 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와 예전 직장을 정리한 것은 그녀의 결단이었다. 능동적으로 첫발을 내딛었던 여행이 어느새 한없이 수동적인 것으로 변질되고 만 것이다. 인어는 거기에 딱 알맞는 상징이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인어 또한 자신의 언어를 전할 수 있는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존재가 되니까 말이다. 그와 동일하게 앨리스도 자기만의 이야기를 전할 수 없다. 샤라의 붓 앞에 섰을 때처럼 다만 누가 자신을 봐주길 기다릴 뿐이다. 자신이 누군가를 품고 인도하기 보다는 누군가 자신을 안고 데려가주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로즈는 비록 허구이긴 해도 스스로를 구성하고 전달한다. 자기가 직접 쓴 스토리를 자신조차 믿을 정도의 현실로 만든다(그녀는 소설 마지막에서 코스타리카로 떠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거짓으로 꾸몄던 이력인 코스타리카 여행을 진실로 만든다.). 그런 면에서 로즈는 코니와 마찬가지다. 삶을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이다. 그렇게 로즈 또한 주체성을 은은한 수준이긴 해도 확실히 빛내고 있었다. 이는 코니가 새로운 소설, '변심'을 쓰는 과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 앨리스는 소외되어 있었지만 로즈는 코니와 대등하게 대화하는 관계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녀는 코니에게 묻고 대답을 이끌어내며 자신만의 견해를 내놓기까지 한다.
분명 이 차이가 둘의 미래를 갈라놓았을 것이다. 앨리스는 정말로 인어가 되어버린다. 샤라가 그토록 원하는 엄마까지 되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주기 보다는 받는 것을 더 원한 나머지 안데르센 동화 속 인어의 마지막이 그랬던 것처럼 거품이 터지듯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로즈는 다르다. 그녀 역시 아이를 임신했지만 그래도 남자 친구 조와 다시 합치지 않는다. 그녀는 홀로 버티며 낙태를 한 뒤에도 적극적으로 오늘을 살아간다. 앨리스는 아이만 남고 엄마는 사라졌지만, 로즈는 아이가 사라지고 엄마만 남았다. 그렇게 전자는 소멸하고 후자는 항존한다. 앨리스가 인어의 이미지라면 로즈는 로즈버드의 이미지다.(아예 직접적으로 로즈를 '로즈버드'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손 웰즈가 감독한 영화 '시민 케인'에서 '로즈버드'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삶의 자리가 달라졌어요 사라지지 않고 언제까지나 마음 중앙에 변항없이 남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로즈는 그야말로 로즈버드인 것이다.
[영화 '시민케인'에 등장한 '로즈버드'의 모습]
로즈는 어떻게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바로 여기서 작가는 책임을 제시한다. 이것이 수동적인 존재를 능동적인 주체로 만들어주는 뼈대라고.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들 수 있다. '앨리스가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은 것은 주체성을 발휘한 선택이 아닌가?'이다. 대답하자면 아니다. 앨리스가 엄마가 된 것은 주체화(主體化)에서 비롯된 결단이 아니었다. 진실은 도피의 일환이었고 코니가 여배우 바버라와 바람을 핀 것에 대한 복수였다. 앨리스는 코니가 바버라에게 매혹당했다고 여겼는데 그건 바버라가 코니 보다 더 빛나는 존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토록 눈부신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코니에게 그랬듯 코니 역시 바버라에게 홀렸다고 생각했고 샤라가 그토록 바라는 엄마가 되면 자기도 바버라만큼 눈부신 존재가 되어 코니의 마음을 다시 자기에게로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런 식으로 앨리스는 계속 욕망의 수동적인 대상이 되는 걸 택했다. 그것이 어려워지면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보다 그냥 달아나버렸다. 코니의 바람으로 상처를 받자 사랑하지도 않는 샤라의 남편 맷(달아날 때조차 앨리스는 혼자서 못하고 자신을 데려갈 사람을 필요로 한다.)을 유혹하여 멕시코의 해변으로 떠나버렸던 것처럼. 앨리스는 코니의 존재감에 위축되어 자신을 작다고 여기거나 소외되어 있다고 느낄 때마다 수영장이나 바다처럼 언제나 물 가까이 있게 되는데, 아마도 그건 삼켜진다는 이미지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라는 주체가 지워지는. 그러므로 그녀가 다시 한 번 바다로 갔다는 것은 현재 마주한 고난을 스스로 짊어져야 할 책임이 버거워서 회피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코니의 다음과 같은 말 그대로다.
"당신은 책임과 마주하는 족족 달아났어. 가까워지면 달아났지. 아버지에게서, 내게서, 맷에게서 달아났어. 살면서 또 누구에게서 달아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내겐 절대로 말하지 않았으니. 그리고 당신이 또 그럴거라는 예감이 들어."(p.467 ~ 8)
코니의 예언은 적중했다. 앨리스는 아이를 책임져야했을 때 달아나버렸으니까.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왕자가 먼저 자신을 알아봐주기만을 기다리다가 끝내 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앨리스도 그렇게 되었다. 수동적인 예속 상태에 안주하는 한, 기다리는 건 사랑의 상실과 나란 존재의 소멸 뿐이다. 로즈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홀로 자신을 책임지려했고(로즈와 조가 공동 투자한, 그러나 단 한 번도 축제 장소엔 가보지 못하고 내내 부모님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부리토 트럭은 로즈의 상황을 비유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자신이 아닌 조에게 매인 존재였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마냥 녹만 쓸 뿐인 트럭을 조는 로즈가 독립적 주체가 되자 자신의 오랜 망집에서 놓아준다. 처분해버린 것이다. 결국 그 돈은 로즈의 자립을 위한 자본이 된다.) 아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다. 로즈의 중절 수술은 엄마가 되는 두렵고 낯선 모험의 여정을 회피한 것이 아니다. 코니의 고백(컨페션)을 통해 앨리스가 어쩌다 자신을 포기하게 되었는지를 듣고 양육에 있어 자기 역량을 깊이 고려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부족한 자신이 아이에 대해 짊어져야 하는 책임을 다한 것이다. 남자 친구 조가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마냥 부리토 트럭을 붙잡고만 있다가 로즈에게 상처를 입힌 것과 달리 말이다. 그러고보면 앨리스에게 있어 로즈 또한 부리토 트럭인 셈이다. 코니는 로즈가 조와 헤어졌을 때, 이런 조언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날 때 진정한 자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거예요.(p. 276)
하지만 이 말이 사랑과의 결별이 주체로 만든다는 걸 뜻하는 건 아니다. 이건 역량의 문제다.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사랑에 마냥 매달리다 거기에 압도된 나머지 무분별하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일을 하지말라는 조언이다. 앨리스의 패착처럼. 역량은 자기 한계를 아는 것인데 그건 독립적인 주체로 제대로 섰을 때라야 알 수 있다. 그제서야 자신이라는 영역의 경계가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체는 책임을 다하는 것으로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의존으로 매몰되지 않고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며 나도 대등한 버팀목이 되어 관계를 당당히 떠받치는 책임. 로즈가 코니의 집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책임은 주체를 가동시키는 높은 옥탄가의 연료인 것이다.
사랑을 얼마나 오래 지켜낼 수 있는가 또한 주체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위에서 '사랑과 주체의 역학 관계'란 말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것은 정비례 관계다. 타인의 등에 업혀 사랑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랑도 서로의 책임을 통해 항상 충전되어야 하는데 기대거나 매달리기만 하는 사랑은 착취이기 때문이다. 오직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오롯이 자기 두 발로 서서 그것을 위해 내가 먼저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가 하는 역량을 거듭 헤아리는 자만이 사랑 또한 오래 보존한다. 로즈의 마지막 장면은 자못 뭉클하다. 로즈는 어릴 때 자신을 두고 저주라고 말했던 코니의 배웅을 받으며 코스타리카로 떠난다. 소설에서 코니는 단 한 번도 남을 배웅한 적이 없다. 그런 코니가 떠나는 로즈를 오래도록 지켜볼만큼 그녀는 성장했고 앨리스가 그토록 바랐던 눈부신 빛을 얻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알게 된다. 사랑의 눈부심 속에서 눈이 멀지 않으려면 빛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줄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컨페션'이란 초록 토끼가 궁극적으로 우릴 데려가는 곳이다. 거기서 우리는 되새겨야 한다. 독립적인 주체가 되지 않고서는 사랑도 할 수 없으며, 사랑은 향유가 아니라 책임에서 비로소 개화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