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사의 쌍둥이 탐정일지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민경욱 옮김 / ㈜소미미디어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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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커피점 탈레망의 사건 수첩'의 작가 오카가지 다쿠마의 새로운 작품, '도연사 쌍둥이 탐정일지'.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커피점 탈레망의 사건 수첩'을 읽었기 때문도, 작가 때문도, 미스터리 소설이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도연사'라는 절에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죠. 예전부터 일본 절의 생활이 궁금했습니다. 일본 영화도 그렇고, 드라마도 그렇고 만화도 그렇습니다. 보다 보면 꼭 한 번은 절이 나옵니다.

 선남선녀가 밀회를 나누거나 아니면 그와 정반대인 공포의 존재가 도사리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이능력을 가진 이들이 자웅을 겨루는 무대가 되기도 하지요. 일본에서 나오는 미디어를 접하면 접할수록 절만큼 익숙해지는 장소도 또 없습니다. 분명 밤마다 도시를 묘지로 만드는 우리나라의 교회만큼, 사람들의 생활 공간 깊숙이 들어와 있기에 그럴 겁니다. 자주 보다 보니,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일본 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말이죠. 일본 절은 우리나라 절과는 또 다르죠. 일단 일본에서 만들어진 대처승 전통이 강하게 자리잡아, 대대로 절은 종단이 아니라 가문이 소유합니다. 거기다 자식에게 세습도 가능하죠. '쉘 위 댄스'로 유명한 일본의 감독인 수오 마사유키의 예전 영화 중에 '팬시댄스'라는 게 있는데, 거기 주인공이 주지의 외아들이었습니다. 현재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친구들이 여간 그를 부러워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은 힘든 취업 활동을 해야 하는데 그는 아버지의 절만 물려받으면 되기 때문이죠. 실제 일본에서 절을 물려받게 되는 남자는 혼인 시장에서 인기가 높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안정적으로 지낼 수 있으니까요. 뭐, 그런 차이들이 있어서 실제 절에서 사는 삶이 나오는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소설에도 그런 남자가 나오더군요. 구보야마 잇카이라고. 이제 막 서른이 된 남자로 아직 미혼입니다. 현재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절을 잘 맡을 수 있도록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한창 스님의 일을 수행 중입니다. 그에겐 란과 렌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진짜 피붙이는 아닙니다. 란과 렌이 갓난 아기 때 절 앞에 버려져 있는 것을 거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이 바로 잇카이였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보다 란과 렌에게 더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이 셋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역들입니다. 모두 네 개의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다들 잇카이가 장례식이나 13주기 혹은 '미즈코 공양' 같은 스님의 일을 하다가 만나게 되는 사건들이 미스터리가 됩니다. 그리고 이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게 바로 렌과 란이죠. 이제 중학생인 남녀 쌍둥이입니다. 이 소설의 탐정들인 것이죠. 네, 여기엔 두 명의 탐정이 등장합니다. 쌍둥이이지만, 모두 같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극과 극이죠. 남자인 렌은 '절 옆에는 귀신이 산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겐 악의가 가득하다고 여기는 반면, 란은 세상에 있는 모두는 선하다는 '불천인신천인'이란 말을 신조로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이처럼 사람을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른 그들은 미스터리도 다르게 풀어 갑니다. 렌은 악의에 출발점을 두고, 란은 선의에 시작점을 두죠. 재밌는 것은 둘 다 모든 사건을 해결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렌이 왓슨의 역할을 하게 되고, 또 어떤 때는 란이 그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악의로 봤던 사건인데 실은 선의로 봐야 할 사건이었고 또 선의로 해석했던 사건인데 실은 악의로 봤어야 하는 사건이었던 것이죠. 덕분에 잇카이의 걸음만 분주해졌습니다. 렌과 란의 추리를 믿고 그대로 가족들에게 전했다가(렌과 란은 사람들 앞에 잘 나서지 못하는 성격이라 추리를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것은 늘 잇카이의 몫입니다.) 나중에 또 렌과 란이 그것을 뒤집는 추리를 내놓으면 잘못된 추리를 알려준 책임이 있으니 얼른 달려가서 제대로 된 것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죠. 이것이 이 소설의 주된 얼개입니다.



 책의 표지입니다. '도연사' 툇마루에 앉은 란과 렌의 모습을 담고 있네요. 그림에서 란은 앙꼬가 가득 든 과자를 들고 있는데, 사실 란은 도라에몽과 비슷합니다. 왜냐하면 란은 오직 하나 말고는 세상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 그것이 바로 도라에몽처럼 앙꼬가 가득 든 과자거든요. 낯선 사람들이 오면 방에 콕 박혀 나오지도 않을만큼 사람들을 피하는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과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그리고 가녀린 몸으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 먹어대지요. 어쩌다 그렇게 단맛에 푹 빠져 버리게 되었는 지는 나오지 않는데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나중에 밝혀지겠죠. 한편, 렌은 스마트 폰을 들고 있는데 게임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방과 후 시간 대부분을 그는 게임으로 보내니까요. 그렇게 그들은 자신만의 뭔가에 하나씩 빠져 있습니다. 군식구로써 많은 시간을 홀로 보내면서도 보통 아이들처럼 주지 할아버지나 잇카이에게 응석을 부릴 수 없는 탓에 혼자 견뎌오느라 그렇게 된 것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가 의탁할 수 있는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을 테니까요. 사람에 대한 시각 역시 그렇게 형성된 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저는 아직 이 작가의 대표작인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을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스타일이 작가의 주류적 스타일인지는 모릅니다. 이 소설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작가는 '란'에 가까울 듯 합니다. 근본적으로 사람이 선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되거든요. 첫 에피소드엔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이 낸 조의금 봉투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선 아버지를 여윈 딸이 아침마다 가게 앞의 쓰레기를 줍는 게 미스터리가 되며 세 번째 에피소드엔 일본에는 '미즈코 공양'이라고 해서 유산이나 낙태 등의 사정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죽어버린 태아를 기리며 공양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미즈코 공양을 의뢰해 온 여인이 실은 유산이 아니라 임신 중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하루는 잇카이와 란과 렌 모두 긴 머리에 낭창낭창한 몸매를 가진 여인의 꿈을 꾸는데 혹시 란과 렌의 친모가 아닐까 다들 생각하는 참에 마침 그와 비슷한 여인이 사고로 죽은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지만 그 묘사의 속도는 느릿하고 또 차분합니다. 그리고 어느 사건에 있어서도 타인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누군가의 독니 보다는 지키고 보살펴주고자 하는 마음이 더 강합니다. 하여 읽다보면 저 표지처럼 문득 마음 속에 따스한 봄 햇살이 비춰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니, 아무래도 사람을 근본적으로 선하게 보는 이가 썼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도연사의 쌍둥이 탐정 일지'는 그런 소설입니다.

 누군가의 선한 마음이 그립다면 그것을 이 소설에서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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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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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운 비가 온다. 그것도 간만의 폭우다. 

그 소리에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새벽에 이런 시간을 갖게 되면 애수에 젖어들기 쉽다. 기억은 과거로 흐르고 안타깝게 헤어진 이들 혹은 놓치거나 잃어버린 것들이 슬쩍 기억의 툇마루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도진기의 '모래바람'을 읽었다. 도진기 작가에겐 두 개의 대표 시리즈가 있는데 하나는 표면상 백수지만 실은 남의 뒤를 캐는 게 전문인 '진구'고 다른 하나는 법정 보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합의로 마무리 짓는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다.


  '모래바람'은 진구의 이야기다.

 그것도 네 번째의 책. 그런데 이런 날이라면 진구도 나처럼 문득 과거의 시간 속을 거니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늘 인간의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진구였기에, 과거라는 거 역시 그에게 별 의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에게도 보통 사람들처럼 첫 사랑이란 게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진구는 그런 단어 쓰는 것을 싫어할테니 그냥 첫 여자라고 해야할까? 어찌되었든 그녀의 이름은 유연부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싹싹한 미소녀. 중학생 남자라면 누구나 사귀어봤으면 할 만한 존재.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그 영혼은 실은 진구만큼이나 삭막하다. 둘은 아버지들 때문에 알게 되었다. 진구의 아버지와 연부의 아버지가 역사학 교수로 연구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들의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연부의 아버지가 진구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부의 아버지는 진구의 아버지를 한 번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은 그것을 이뤄주지 못했다. 하여 연부의 아버지는 연부를 통해 그 소망을 대리 충족하려 한다. 연부에게 무조건 진구를 이기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진구의 아버지가 연부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인식하지 않았듯, 진구 역시 그런 경쟁에서 초연했다. 연부는 괜한 희생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연부는 진구를 싫어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진구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부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연부와 진구는 좋은 관계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곧 깨져버리는 순간이 닥쳐온다.

 바로 진구와 연부가 아버지들과 함께 동행한 '누란'을 찾아나선 여행에서였다. 그 여정에서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나 그만 진구의 아버지가 죽고 연부의 아버지는 실종되어 버렸다. 진구와 연부는 나란히 커다란 비극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파국은 아니었다. 진짜 붕괴는 같이 여행을 떠났던 한 교수가 쓴 탐사 일지가 책으로 발간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책 때문에 연부와 진구는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된 것이다. 진구가 의뢰인을 찾아간 그 곳에서 사장인 의뢰인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연부를 말이다.


진구 일행이 찾아갔던 실크로드 상의 누란의 폐허. 이런 곳에서 소설처럼 거센 모래바람을 만나게 되면 정말 위기에 처할 듯 하다.

그런데 '누란' 하니, 문득 윤후명 소설, '누란의 사랑'이 떠오른다. '돈황의 사랑'에 뒤이어 나왔던...


 '모래바람'은 이처럼 전작에서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진구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밝힌다.

 그가 어떻게 자라왔고 지금의 성격이 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 지 하는 것을. 진구란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다면 한 번은 궁금했을 것들을 바로 이 작품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인물이 중심이 된 시리즈에서 그의 과거가 밝혀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또 없다. 과거란 오늘의 자신을 형성한 정체성의 역사.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인물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말이다. 뼈대로만 남아있던 존재에 살과 피를 주는 것과 같아서 이러한 입체적인 이해는 캐릭터의 생명을 오래도록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면 필수적 절차이기도 하다. 독자의 뇌리 속에서 캐릭터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연료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진구 시리즈를 접하는 데  있어 '모래바람'은 꼭 거쳐야 할 관문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사실 인간 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

 미스터리 부분은 주로 후반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때까지 소설이 주로 표현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기기 위하여, 다른 하나는 지키기 위하여 모두들 그러한 자신의 욕망에 순수하게 충실한다. 이것이 전작들과 차이가 나는 점이다. 바로 전작 '가족의 탄생'만 해도 상속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작품 전체를 관통했지만, 여기의 미스터리는 욕망의 결과로만 나타나니까 말이다. 욕망, 그것이 소설이 좀 더 비중을 두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제목의 '모래바람' 역시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게 되며, 알면서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욕망을 가리킨다. 아마도 진구의 과거, 그렇게 인간적인 면을 보다 많이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로 보인다.


 여하튼,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막에서의 아버지들의 사망과 실종에 관련된 미스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벌어진 유연부가 모시는 사장의 피살 사건이다. 전자의 미스터리는 진구의 여친 해나가 입수한, 그리고 진구와 연부에게 결정적인 결별을 안겨 준 탐사기 '누란 왕국을 찾아서'의 내용이 책중의 책 형식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전개되고 후자의 미스터리는 연부와 결혼하려는 사장 아들과 그것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사장의 갈등을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데 여기에 유연부가 수상한 분위기를 드리운다.


 비중이 다소 작아지긴 했어도 미스터리가 그냥 소비되기 위하여 들어간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놀랄만한 반전과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랬던 것처럼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번 작품으로 앞으로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악마의 증명'에서 이미 나온 바 있듯이, 사람에 중심을 둘 것이라는 게 보다 확실해졌다.


 다음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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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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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거니는 세상에서 딱 두 사람 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하나는 정말 싫어하고 다른 하나는 정말 좋아한다.

 전자의 거니는 현재 생사를 확실히 모른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본 것은 그가 성매매 한 것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진짜 끝까지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작자였다. 후자의 거니는 전자의 거니가 준 상처를 치유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지리산 공기도 포장하여 만 8천원에 판다고 하던데, 그처럼 현실의 갑갑함을 덜어주는 숨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다. 픽션의 존재다. 풀 네임은 데이브 거니. 뉴욕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형사였다. 많은 이들이 살아있는 전설로 여기는 존재. 그러나 지금은 40대에 돌연 일선에서 물러난 뒤 초야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스릴러 작가, 존 버든 유일하게 쓰고 있는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의 나이가 그렇기도 하지만 확실히 데이브 거니는 중년의 남자에게 특별히 더 살갑게 다가올 캐릭터다. 그가 중년의 위기와 거기서 비롯된 우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는 않으나 그는 눈물이 참 많은 남자다. 가족들이 자기도 잊어버린 생일을 챙겨줄 때, 어느새 장성해 버린 아들의 모습에서 그가 어렸을 때 자신이 해준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을 때, 나날이 커져가는 자신의 무력감을 느낄 때,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자존심이 어느 순간 한없이 처량하게 생각될 때, 그는 눈물을 쏟는다. 그는 결코 통과하기 쉽지 않은 구부러진 길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누구에게나 그 나이라면 한 번은 찾아오는 그런 길을. 2012년에 나온 데이브 거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기꺼이 죽이다'는 바로 그런 시간을 통과한다. 그에게 '착한 양치기 사건'을 의뢰한 킴의 말마따나 '사랑, 상실 고통'의 시간을...



 거니는 2주 전 세 개의 총탄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일을 당했다. '악녀를 위한 밤'에서의 일이다. 첫 번째 총알이 손목을 관통했다. 그 후, 그는 내내 이명을 듣는다. 그것은 신호였다. 자신이 더이상 사람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는 '슈퍼캅'이 아니며 그렇게 능력있기는 커녕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가지도 못한다는 신호. 이명은 이야기 속 네델란드 소년이 들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이라는 둑에서 줄줄 새어 나오고 있는 물소리였다. 곧 둑이 무너지고 삶은 파국이 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 그것은 귀만이 아니라 손의 통증으로도 나타난다. 마치 '너는 예전의 너가 아니야. 넌 이미 내리막 길에 올라탔어.'라고 줄기차게 속삭이는 것처럼.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아침에 마주하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게서 듣는 그 말을. 처음엔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쩌겠어' 하는 정도로 떨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계속 반복되면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점성과 무게를 갖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견디기 어려운 시점이 닥쳐오고 억울한 마음이 북받쳐서 차라리 모든 걸 끝장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악마를 깨우고픈 유혹을 받는다. 얼마 전 작고한 죠엘 슈마허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폴링 다운'의 마이클 더글라스가 분한 백인 중년이 잘 보여주듯이.


 

 이 영화에 비추어 보자면 중년의 위기를 잘 극복하는 것은 언제 뛰쳐나올지 모를 내면의 악마를 잘 재우는 일이기도 하다.  존 버든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공교롭게도 '기꺼이 죽이다'의 원래 제목은 'LET THE DEVIL SLEEP'이다. '악마를 재워라'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말은 거니가 킴의 집 지하실에서 범인에게 듣게 되는 말이지만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설에 이 악마와 마주하는 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 명이나! 


 물론 하나는 앞서도 말했듯 데이브 거니다. 다른 하나는 '착한 양치기'를 추적하다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고 거니처럼 은둔해 살고 있는 전직 형사 맥스. 마지막으로 범인이다. 거니의 악마는 먹이를 노리는 악어처럼 눈만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지만, 맥스의 악마는 이미 한 번 부상해 그것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범인은 벌써 악마에게 먹혀버렸다. 이런 식으로 놓고 보면 거니를 중심으로 맥스와 범인이 하나의 일련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어쩌면 작가는 독자에게 맥스와 범인을 거니에 대한 하나의 가설적 인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만일 그것이 옳다면 그것은 어떤 가설인가? 그것은 거니에게 만일 아내 매들린이 없었다면, 혹은 아들 카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친구 잭 하드니가 없었다면 거니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설이다. 맥스와 범인은 거니만큼 똑똑하고 냉철한 존재였다. 한 가지만 떼어 놓고 보면 거니와 맥스 그리고 범인은 그리 다를 게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거니는 얼마든지 맥스 혹은 더 나쁘게는 범인의 자리에 거할 수 있었다. 딱 하나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족과 친구다. 자신의 불안과 상처를 쉽게 드러낼 수 있고 그 번민과 고통을 자신보다 더 잘 헤아려서 보듬어주는 존재들. 그것이 있었기에 거니는 비틀거리면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굳센 의지로 악마를 다스리고 인간의 삶을 지켜갈 수 있었다. '기꺼이 죽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알려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무엇이 더 크게 소중해지는 것인가에 대해. 하여 갈수록 노쇠에 대한 우울과 자존감 결여로 쉽게 뛰쳐나오는 악마를 단단히 결박할 수 있도록. 적어도 돈 몇 푼에 적폐세력에 영혼을 팔고 태극기를 흔들며 '공주님' 운운하는 노인이 되지 않는 길을.


 바로 그런 여정을 '기꺼이 죽이다'는 공들여 세공하고 있다. 544페이지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으로. 이야기는 모두 세 파트로 나뉘어져, 첫 부분은 거니가 예전에 알았던 기자의 딸이 진행 중인, '착한 양치기 무작위 연쇄 살인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을 다루는 '살인의 고아들'에 참여하여 과거의 그 사건을 알아간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 부분은 미제로 끝난 그 사건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미심쩍은 부분을 거니가 발견하고 그로인해 범인에게 위협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며, 마지막 부분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는 거니의 추적으로 위기를 느낀 범인이 유가족을 거듭 살해하는 범죄를 다시 저지르고 그것을 막기 위해 범인을 잡을 함정을 판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엔 약점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사건과 관계된 미스터리다. 여기의 진실은 식상함을 줄 수 있다. 이미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과 브라운 신부의 '이상한 발걸음 소리'를 비롯하여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런 트릭은 이미 구약 때 다윗이 우리야 장군에게 썼던 것이니까.(스포일러가 되기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른 약점은 풀어나가고 있는 미스터리에 비해 이야기의 분량이 다소 많다는 것이다. 그 여정이 너무 세밀하게 나와있어 어쩌면 군더더기가 많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약점들을 존 버든이 몰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작들에서 그가 얼마나 이야기를 치밀하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와서 다소 식상한 미스터리에다 구성이 느슨해 진 것엔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거니가 현재형으로 보여주는 중년의 우울과 도사린 악마를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란 주제와 관련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건 어쩌면 독자들에게 거기나 쫓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거니를 더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느냐고 대답하고 싶다. 다시 말해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촘촘히 새겨나간 거니의 심리가 이 소설이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착한 양치기'는 그저 '슬램 덩크'의 유명한 대사처럼 거드는 왼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이 소설에 와서야 거니는 비로소 슈퍼캅의 잔영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이 된 것 같다. 그만큼 그 영혼 안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캐릭터를 베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전까진 베갯잇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서야 인간다운 면모를 지닌 솜털이 꽉 채워져선 비로소 누워볼만한 베개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치밀한 관찰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추리에 이제 인간미까지 지니게 된 이 캐릭터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된다. 2012년 작품이 이제 나왔으니 다소 늦은 셈인데, 2014년에 나온 '피터팬은 죽어야 한다'는 부디 빨리 나오길 바란다. 제목에서 이미 또 다른 중년의 고민이 펼쳐질 것이 엿보이는 지라('피터팬 증후군'은 중년에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아니었던가? 프로이트 말에 따르면 유아로의 퇴행은 삶이 힘겹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늘어난다고 한다.)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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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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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소설집 '악마의 증명'이 출간되었다.

 악마의 증명. 그것은 원래 중세에서 토지 소유권 입증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일종의 법률 용어로, 악마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쉬우나(존재하는 것을 데려오기만 하면 되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므로(모든 경우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증명해야 하므로) 이처럼 부재보다 존재를 증명하는 자가 입증의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으로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악마의 증명'은 원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미스터리 단편선'의 게재 되었던 것으로 당시 여자 국선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먼저 출간된 이 단편의 설정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다. 사실 표절 욕구를 일으킬만큼 아이디어가 꽤 좋은 단편인데, 외모로는 얼른 구분되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문제는 범죄를 저지른 쌍둥이 하나가 자신이 일란성 쌍둥이인 것을 이용해 한 번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선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완전범죄를 꾀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범인의 전략을 검사가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법정물이다. 검사가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범인을 다시 법정에 세워 유죄를 받도록 입증해야 하므로 그런 검사의 입장에서 '악마의 증명'이란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역시 부장 판사 출신 작가답게 재판 과정의 묘사가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덤도 있다. 바로 최근 박근혜 뇌물 수수 재판에서 일어난,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삼성 임원진들이 법정에서의 증언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 할텐데 바로 그 이유를 이 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격인 검사가 재판을 거듭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검찰 조서가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이 재판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 그래서 증언을 거부해 버리면 검찰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어 아예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증인으로 나온 삼성 임원진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함구하는 것이다. 이재용을 위해서. 이것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그것이 검찰의 과제가 될 것인데 부디 단편 속 호연정 검사처럼 이재용 변호인단을 제대로 물먹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단편집 '악마의 증명'은 미스터리만 있지 않고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섞여 있는데(문장의 경제를 위해 판타지라고 했지만 단순한 판타지는 아니고 타임 루프나 공포 같은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미스터리와 달리 감성에 호소하는 환상성이 가미된 단편들이기에 편의상 판타지라 명명했다.) 판타지 하나가 나오면 미스터리 하나가 나오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글의 꿈', '외딴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그리고 '죽음이 갈라 놓을 때'는 판타지고 '악마의 증명', '선택', '구석의 노인' 그리고 '킬러퀸의 킬러'는 미스터리다. 또 하나의 특징이 더 있다면 여기엔 도진기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진구'와 '고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스탠드 얼론'만 있다는 것이다.


 그간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어왔지만 미스터리 쪽만 접했었기에 그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썼는 줄은 몰랐는데 이번 단편집으로 만나게 되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폭넓게 접해볼 수 있었다. 단편집 마지막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미스터리 쪽은 작가의 프로페셔널한 면이, 판타지 쪽은 프로페셔널한 면에 가려져 있었던 개인의 취향이 발현된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편집을 통해 작가 도진기가 아닌 개인 도진기도 만나볼 수 있다고나 할까? 특히 '시간의 뫼비우스'는 자전적인 게 한껏 깃들어 있어 더욱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미스터리 한 쪽이 다른 쪽 보다 낫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선택'이다. '악마의 증명'에서 활약했던 호연정 검사가 다시 활약하는데,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이 현재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대표 적폐 세력인 검사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믿고 싶은데 아무튼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어서 경찰이 이미 자살로 종결한 빗길 교통 사고를 죽은 피해자 어머니의 의뢰로 재수사 한다. 읽다보면 문득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설정 같은 것을 따왔다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한 가지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 들고 계속 나타나는 반대 증거 앞에서 이전의 전제를 번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지라 그렇다. 경찰의 판단이 무리가 없을 만큼 자살이 확실한 정황 속에서 주인공이 찾아내는 반대의 진실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건 경찰이 결코 보지 못했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곳을 호연정 변호사가 시선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 단편과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빌려 온 할머니 탐정이 나오는 '구석의 노인(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은 흥미를 끄는 사건의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에 나가 재판을 구경하는 게 취미인데, 이 소설의 할머니도 그렇기 때문이다.)'과 연결하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어디로 이끄는지 드러난다. 바로 '사람'이란 것 말이다. 물리적 단서만 놓고보면 여지 없이 혼란스럽고 그릇된 결론이 도출되지만, 그 중심에 사람을 놓아두고 보면 모든 게 다 매끄럽게 정리되는 것이다. 호연정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의를 가져오려는 법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나타낸다.


 감정 없는 사실만을 불쑥 쌓듯 쌓아올린 거죠. 가드레일을 부수고 달려나간 자동차, 창밖으로 나와 동맥이 잘린 운전자의 왼손, 추락의 흔적, 메스와 지문,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이 요철만 맞게 조합한, '사람'이 빠진 결론이에요'(p. 118)


 그리고 '구석의 노인'에 나오는 김옥선 할머니는 잘못된 판결이 나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지...(p. 175)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바로 법인데, 정작 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제 우리나라 사법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을 정의하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이 처음 나왔던 때는 무려 1988년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우리나라 한 켠엔 그 올림픽을 결코 웃으며 바라볼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계동을 비롯한 서울 각지에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거처를 철거 당해야 했던 가난한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도저에 속절없이 밀려나가야 했던 그들의 눈물과 피를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법도 팔짱을 낀채 모른 척 했다. 이후 내내 그런 모습이다. 봐야 할 사람은 보지 않고 안 봐도 좋을 사람은 당사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이 본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에 따라 그 헤아림의 깊이가 결정되기에 그렇다. 정유라가 두 번이나 영장 기각을 받은 것처럼. 이 소설집에 담긴 호소, 법이 정말 보호해야 할 사람을 보라는 것, 그것은 원래 법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마 제목도 바로 그런 뜻에서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악마의 증명'으로 입증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것,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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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도시 Z
데이비드 그랜 지음, 박지영 옮김 / 홍익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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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마존. 과학 기술이 이처럼 발달한 오늘날에도 그 곳이 여전히 미지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인류가 그렇게 내버려둔 건 아니다. 오랫동안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학자들이 아마존을 완전히 파악하려 노력했지만 인간의 탐구심은 아마존을 겹겹이 싸고 있는 무성한 밀림을 뚫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이토록 인간에게 적대적인 환경을 가지고 있는 아마존에 과연 문명이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토양은 곡물이 자랄 수 없을 만큼 척박하고 치명적인 질병을 불러오는 각종 동식물이 지천에 있으며 인간의 생명을 가차없이 위협하는 육식동물마저 즐비한 아마존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문명을 이룩할 정도로 정착할 수 있었겠느냐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으로 유명한 토머스 홉스는 아마존에 대해 아예 이렇게 단정해버리기도 했다.


 그곳엔 예술도, 학문도, 사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끝없는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다.


 당시만 해도 문명의 성립 여부에 대해서는 환경 결정론이 우세했다. 어떤 문명이 태어나고 번성하려면 환경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금지된 것에 매혹되기 마련이고 주류 입장에 반기를 들고 싶은 충동 역시 생기기 마련이다. 환경 결정론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자신의 꿈과 명성을 위해 문명 불가의 대지로 낙인 찍힌 아마존으로 기꺼이 뛰어들었다. 정말로 많은 이들이 영국이 제국이었던 시절부터 아마존을 탐험하러 떠났다. 거기에 있다는, 아마존에도 문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증거가 될 전설의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서 말이다. 그러나 도시는 발견되지 않았다. 탐험에 성공한 이들보다 실패한 이들이 훨씬 많았고 끝내 아마존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19세기 가장 유명한 탐험가 '퍼시 H 포셋'도 그 중 하나였다. 아니, 그는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자였다. 솔직히 그는 가장 성공이 점쳐지던 탐험가였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린 사건이기도 하다.



  때는 1864년. 당시 라틴 아메리카가 잦은 국경 분쟁을 겪고 있었다. 파라과이,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등 국경을 맞대고 있던 국가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검은 금'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은 자원인 '고무' 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다아마존은 고무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었고 많은 나라들은 아마존 주변으로 국경을 이루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검은 금의 유전과도 같은 아마존을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게 위해 싸우고 있던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수요가 많은 자원이라면 무조건 제 주머니 안에 넣어야 하는 영국이 이것을 가만 내버려 둘 리 없다. 영국은 얼른 분쟁의 원인이 되는 국경을 명확히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아마존에 대한 정보를 상세하게 파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면 발로 답사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바로 그 때, 떠올랐던 사람이 모로코에서 분쟁이 일어났을 때 단신으로 놀라운 활약을 보여준 자신의 정부 스파이이기도 한 유명 탐험가 '퍼시 H 포셋'이었다. 영국 정부는 그를 당장 아마존으로 보냈고, 그는 영국이 부여한 임무를 성공리에 완수했다. 그렇게 한 번 아마존을 무사히 관통한 그였기에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가는 이번의 탐험 역시 성공할 것이라 내다보는 것은 당연하달 수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명성이 워낙에 높았기에 아마존에서의 그의 실종은 탐험 역사에서 전설로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포셋의 생사 여부를 알기 위해 아마존을 찾아 떠났고 원주민에게 죽었다거나 거기에 정착하여 아들을 낳았다거나 하는 온갖 풍문들이 나돌았다. 물론 여전히 그의 최후에 대해선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관심이 많고 주로 그런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미국 여러 유명 잡지에 전문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데이비드 그랜은 2004년, 역사적으로 미스터리한 죽음들을 추적하다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 떠났다가 실종되어 버린 퍼시 해리슨 포셋에 대한 글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글에 매혹된 그는 포셋처럼 정말 아마존에 고대 문명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직접 포셋의 발자취를 따라 아마존을 탐험할 생각을 한다. 그는 결코 탐험가도 아니고 탐험은 커녕 사냥이나 등산조차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잃어버린 도시 Z'는 바로 그렇게 하여 탄생된 책이다. 이 책에는 그가 어떻게 포셋의 발자국을 따라 나서게 되었는지에 대한 자전적인 이야기와 아마존과 포셋의 여정 그리고 실종 후에 일어난 여러 사건들까지 충실히 담겨져 있다.



 소년 시절, 잡지에 간간히 소개되던 탐험 이야기에 매료 당한 바 있거나 아직도 그 때의 로망을 잊지 못하여 코난 도일의 '잃어버린 세계'나 로버트 E 하워드의 '솔로몬 케인' 혹은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솔로몬 왕의 광산'을 뒤적이는 사람들과 아마존 그리고 포셋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이들에겐 아주 즐겁고 흥미로운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아마존에 대한 자세한 정보나 당시 많은 이들이 공포를 느꼈던 아마존 정글 속 식인종 이야기도 흥미로웠지만 정말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거기서 아마존에도 문명이 있었다는 게 밝혀지는 것이다. 더 놀라웠던 것은 그 문명의 흔적이 사람의 발길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는 그런 곳에 있었던 곳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존재했다는 것이다. 분명 '잃어버린 도시 Z'를 찾아 떠났던 많은 이들이 수없이 거쳐갔을 거기, 그런데도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이 이 문명의 흔적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건 바로 굳어진 생각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는 서양의 문명 관습에 너무나 길들어져 있어서 그것과 전혀 다른 자연 환경의 아마존이 서양 문명과 완전히 다른 형태로 문명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조금도 생각해 보지 못하고 그저 서양 문명과 닮은 꼴의 건조물을 찾으려 했기에 늘 다니던 길목에 버젓이 있었던 흔적조차 쉬이 놓쳐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유럽인과 아마존 사람들의 태생적 차이 때문일 것입니다. 유럽은 비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살기 때문에 건축물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 수직적 형태를 띨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존을 비롯한 남미 대륙은 땅이 넓기 때문에 건축물을 굳이 높이 쌓을 필요가 없습니다. 중국의 고대 건축물이 하나같이 수평적 형태인 이유도 남미의 그것과 동일합니다.(p. 313)


 두말 할 것도 없이 적폐의 생각이 만들어낸 사각이었다. 비단 아마존이나 문명만이 아니라 이런 일이 바로 우리 삶에도 비일비재할 것이라 본다. 무조건 옛 것에 집착하고 나만이 옳다는 생각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정작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 조차 어이없이 놓쳐버리는 일이.


 

  이번에 나온 '잃어버린 도시 Z'는 사실 두 번째의 발간이다. 이렇게 책이 다시 나온 것은 이 책을 원작으로 하여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만든 영화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리틀 오뎃사'로 데뷔했는데 그 때부터 내내 한 개인이 낯선 공동체에 적응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2013년에 나온 전작 '이민자'가 대표적이다. '잃어버린 도시 Z' 또한 서양 문명에 깊숙이 침윤된 자가 그의 눈에 한없이 낯선 아마존에 섞여드는 과정이니 그레이가 늘 해왔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는 셈이다. 4년 동안 자신의 작업에 대한 그의 생각이 또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궁금하다. 그래서 영화가 기대된다. 찰리 허냄이 맡아 연기한 포셋은 원래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닥터 스트레인지'를 찍느라 하차하는 바람에 찰리 허냄에게 돌아갔다. 포셋과의 싱크로율은 컴버배치가 높기 때문에 그가 주연을 하지 못한 건 좀 아쉽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그렇게 좋은 영화도 아니었기에 더 커지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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