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바람 진구 시리즈 4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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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가운 비가 온다. 그것도 간만의 폭우다. 

그 소리에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커피 한 잔을 내린다. 새벽에 이런 시간을 갖게 되면 애수에 젖어들기 쉽다. 기억은 과거로 흐르고 안타깝게 헤어진 이들 혹은 놓치거나 잃어버린 것들이 슬쩍 기억의 툇마루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도진기의 '모래바람'을 읽었다. 도진기 작가에겐 두 개의 대표 시리즈가 있는데 하나는 표면상 백수지만 실은 남의 뒤를 캐는 게 전문인 '진구'고 다른 하나는 법정 보다 상대의 약점을 잡아 합의로 마무리 짓는 것을 좋아하는 '어둠의 변호사', '고진'이다.


  '모래바람'은 진구의 이야기다.

 그것도 네 번째의 책. 그런데 이런 날이라면 진구도 나처럼 문득 과거의 시간 속을 거니게 될 것이란 걸 알았다. 늘 인간의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진구였기에, 과거라는 거 역시 그에게 별 의미가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에게도 보통 사람들처럼 첫 사랑이란 게 있었던 것이다. 아니, 진구는 그런 단어 쓰는 것을 싫어할테니 그냥 첫 여자라고 해야할까? 어찌되었든 그녀의 이름은 유연부다. 누구보다 똑똑하고 싹싹한 미소녀. 중학생 남자라면 누구나 사귀어봤으면 할 만한 존재.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고 그 영혼은 실은 진구만큼이나 삭막하다. 둘은 아버지들 때문에 알게 되었다. 진구의 아버지와 연부의 아버지가 역사학 교수로 연구 동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들의 사이는 그리 원만하지 못했다.

 연부의 아버지가 진구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부의 아버지는 진구의 아버지를 한 번 이겨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은 그것을 이뤄주지 못했다. 하여 연부의 아버지는 연부를 통해 그 소망을 대리 충족하려 한다. 연부에게 무조건 진구를 이기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진구의 아버지가 연부의 아버지를 라이벌로 인식하지 않았듯, 진구 역시 그런 경쟁에서 초연했다. 연부는 괜한 희생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연부는 진구를 싫어하지 않았다. 상식적이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것은 진구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부 아버지의 뜻과는 다르게 연부와 진구는 좋은 관계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곧 깨져버리는 순간이 닥쳐온다.

 바로 진구와 연부가 아버지들과 함께 동행한 '누란'을 찾아나선 여행에서였다. 그 여정에서 뜻하지 않은 변고가 일어나 그만 진구의 아버지가 죽고 연부의 아버지는 실종되어 버렸다. 진구와 연부는 나란히 커다란 비극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파국은 아니었다. 진짜 붕괴는 같이 여행을 떠났던 한 교수가 쓴 탐사 일지가 책으로 발간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 책 때문에 연부와 진구는 소원한 관계가 되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만나게 된 것이다. 진구가 의뢰인을 찾아간 그 곳에서 사장인 의뢰인의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연부를 말이다.


진구 일행이 찾아갔던 실크로드 상의 누란의 폐허. 이런 곳에서 소설처럼 거센 모래바람을 만나게 되면 정말 위기에 처할 듯 하다.

그런데 '누란' 하니, 문득 윤후명 소설, '누란의 사랑'이 떠오른다. '돈황의 사랑'에 뒤이어 나왔던...


 '모래바람'은 이처럼 전작에서 한 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진구의 과거를 본격적으로 밝힌다.

 그가 어떻게 자라왔고 지금의 성격이 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 지 하는 것을. 진구란 캐릭터에 흥미를 느꼈다면 한 번은 궁금했을 것들을 바로 이 작품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인물이 중심이 된 시리즈에서 그의 과거가 밝혀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또 없다. 과거란 오늘의 자신을 형성한 정체성의 역사.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인물을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니까 말이다. 뼈대로만 남아있던 존재에 살과 피를 주는 것과 같아서 이러한 입체적인 이해는 캐릭터의 생명을 오래도록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면 필수적 절차이기도 하다. 독자의 뇌리 속에서 캐릭터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연료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진구 시리즈를 접하는 데  있어 '모래바람'은 꼭 거쳐야 할 관문 같은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사실 인간 드라마의 성격이 강하다.

 미스터리 부분은 주로 후반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때까지 소설이 주로 표현하는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이기기 위하여, 다른 하나는 지키기 위하여 모두들 그러한 자신의 욕망에 순수하게 충실한다. 이것이 전작들과 차이가 나는 점이다. 바로 전작 '가족의 탄생'만 해도 상속을 둘러싼 미스터리가 작품 전체를 관통했지만, 여기의 미스터리는 욕망의 결과로만 나타나니까 말이다. 욕망, 그것이 소설이 좀 더 비중을 두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며 제목의 '모래바람' 역시 자기도 모르게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게 되며, 알면서도 쉽사리 빠져나올 수 없는 욕망을 가리킨다. 아마도 진구의 과거, 그렇게 인간적인 면을 보다 많이 드러내려 했기 때문에 생겨난 변화로 보인다.


 여하튼, 이 소설의 미스터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과거에 일어난 사막에서의 아버지들의 사망과 실종에 관련된 미스터리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벌어진 유연부가 모시는 사장의 피살 사건이다. 전자의 미스터리는 진구의 여친 해나가 입수한, 그리고 진구와 연부에게 결정적인 결별을 안겨 준 탐사기 '누란 왕국을 찾아서'의 내용이 책중의 책 형식으로 소개되는 것으로 전개되고 후자의 미스터리는 연부와 결혼하려는 사장 아들과 그것을 완강하게 반대하는 사장의 갈등을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데 여기에 유연부가 수상한 분위기를 드리운다.


 비중이 다소 작아지긴 했어도 미스터리가 그냥 소비되기 위하여 들어간 것은 아니다.

 여기에도 놀랄만한 반전과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늘 그랬던 것처럼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고 읽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이번 작품으로 앞으로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악마의 증명'에서 이미 나온 바 있듯이, 사람에 중심을 둘 것이라는 게 보다 확실해졌다.


 다음 작품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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