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꺼이 죽이다 데이브 거니 시리즈 3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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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거니는 세상에서 딱 두 사람 밖에 없다. 공교롭게도 하나는 정말 싫어하고 다른 하나는 정말 좋아한다.

 전자의 거니는 현재 생사를 확실히 모른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본 것은 그가 성매매 한 것을 몰래 촬영한 동영상이었다. 진짜 끝까지 더러운 기분을 느끼게 하는 작자였다. 후자의 거니는 전자의 거니가 준 상처를 치유해주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요즘은 지리산 공기도 포장하여 만 8천원에 판다고 하던데, 그처럼 현실의 갑갑함을 덜어주는 숨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는 현실의 존재가 아니다. 픽션의 존재다. 풀 네임은 데이브 거니. 뉴욕 역사상 가장 뛰어난 형사였다. 많은 이들이 살아있는 전설로 여기는 존재. 그러나 지금은 40대에 돌연 일선에서 물러난 뒤 초야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미국의 스릴러 작가, 존 버든 유일하게 쓰고 있는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그의 나이가 그렇기도 하지만 확실히 데이브 거니는 중년의 남자에게 특별히 더 살갑게 다가올 캐릭터다. 그가 중년의 위기와 거기서 비롯된 우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는 않으나 그는 눈물이 참 많은 남자다. 가족들이 자기도 잊어버린 생일을 챙겨줄 때, 어느새 장성해 버린 아들의 모습에서 그가 어렸을 때 자신이 해준 게 거의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을 때, 나날이 커져가는 자신의 무력감을 느낄 때,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는 자신의 자존심이 어느 순간 한없이 처량하게 생각될 때, 그는 눈물을 쏟는다. 그는 결코 통과하기 쉽지 않은 구부러진 길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누구에게나 그 나이라면 한 번은 찾아오는 그런 길을. 2012년에 나온 데이브 거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기꺼이 죽이다'는 바로 그런 시간을 통과한다. 그에게 '착한 양치기 사건'을 의뢰한 킴의 말마따나 '사랑, 상실 고통'의 시간을...



 거니는 2주 전 세 개의 총탄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일을 당했다. '악녀를 위한 밤'에서의 일이다. 첫 번째 총알이 손목을 관통했다. 그 후, 그는 내내 이명을 듣는다. 그것은 신호였다. 자신이 더이상 사람들의 경탄과 찬사를 받는 '슈퍼캅'이 아니며 그렇게 능력있기는 커녕 자신의 삶을 제대로 꾸려가지도 못한다는 신호. 이명은 이야기 속 네델란드 소년이 들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이라는 둑에서 줄줄 새어 나오고 있는 물소리였다. 곧 둑이 무너지고 삶은 파국이 되고 말 것이라는 불길한 조짐. 그것은 귀만이 아니라 손의 통증으로도 나타난다. 마치 '너는 예전의 너가 아니야. 넌 이미 내리막 길에 올라탔어.'라고 줄기차게 속삭이는 것처럼.


 중년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은 아침에 마주하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게서 듣는 그 말을. 처음엔 어깨를 으쓱하며 '뭐, 어쩌겠어' 하는 정도로 떨칠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계속 반복되면 쉽사리 떼어낼 수 없는 점성과 무게를 갖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 견디기 어려운 시점이 닥쳐오고 억울한 마음이 북받쳐서 차라리 모든 걸 끝장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악마를 깨우고픈 유혹을 받는다. 얼마 전 작고한 죠엘 슈마허 감독의 이름을 널리 알린 영화 '폴링 다운'의 마이클 더글라스가 분한 백인 중년이 잘 보여주듯이.


 

 이 영화에 비추어 보자면 중년의 위기를 잘 극복하는 것은 언제 뛰쳐나올지 모를 내면의 악마를 잘 재우는 일이기도 하다.  존 버든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공교롭게도 '기꺼이 죽이다'의 원래 제목은 'LET THE DEVIL SLEEP'이다. '악마를 재워라'인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말은 거니가 킴의 집 지하실에서 범인에게 듣게 되는 말이지만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소설에 이 악마와 마주하는 이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 명이나! 


 물론 하나는 앞서도 말했듯 데이브 거니다. 다른 하나는 '착한 양치기'를 추적하다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고 거니처럼 은둔해 살고 있는 전직 형사 맥스. 마지막으로 범인이다. 거니의 악마는 먹이를 노리는 악어처럼 눈만 수면 위로 떠오른 상태지만, 맥스의 악마는 이미 한 번 부상해 그것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범인은 벌써 악마에게 먹혀버렸다. 이런 식으로 놓고 보면 거니를 중심으로 맥스와 범인이 하나의 일련된 흐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어쩌면 작가는 독자에게 맥스와 범인을 거니에 대한 하나의 가설적 인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만일 그것이 옳다면 그것은 어떤 가설인가? 그것은 거니에게 만일 아내 매들린이 없었다면, 혹은 아들 카일이 없었다면, 그리고 친구 잭 하드니가 없었다면 거니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가설이다. 맥스와 범인은 거니만큼 똑똑하고 냉철한 존재였다. 한 가지만 떼어 놓고 보면 거니와 맥스 그리고 범인은 그리 다를 게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거니는 얼마든지 맥스 혹은 더 나쁘게는 범인의 자리에 거할 수 있었다. 딱 하나만 없었다면 말이다. 그것이 바로 가족과 친구다. 자신의 불안과 상처를 쉽게 드러낼 수 있고 그 번민과 고통을 자신보다 더 잘 헤아려서 보듬어주는 존재들. 그것이 있었기에 거니는 비틀거리면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 가족을 지키기 위하여 굳센 의지로 악마를 다스리고 인간의 삶을 지켜갈 수 있었다. '기꺼이 죽이다'는 바로 그런 것을 알려 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에게 무엇이 더 크게 소중해지는 것인가에 대해. 하여 갈수록 노쇠에 대한 우울과 자존감 결여로 쉽게 뛰쳐나오는 악마를 단단히 결박할 수 있도록. 적어도 돈 몇 푼에 적폐세력에 영혼을 팔고 태극기를 흔들며 '공주님' 운운하는 노인이 되지 않는 길을.


 바로 그런 여정을 '기꺼이 죽이다'는 공들여 세공하고 있다. 544페이지에 이르는 상당한 분량으로. 이야기는 모두 세 파트로 나뉘어져, 첫 부분은 거니가 예전에 알았던 기자의 딸이 진행 중인, '착한 양치기 무작위 연쇄 살인 사건'의 희생자 유가족을 다루는 '살인의 고아들'에 참여하여 과거의 그 사건을 알아간다는 이야기고, 두 번째 부분은 미제로 끝난 그 사건에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미심쩍은 부분을 거니가 발견하고 그로인해 범인에게 위협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며, 마지막 부분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는 거니의 추적으로 위기를 느낀 범인이 유가족을 거듭 살해하는 범죄를 다시 저지르고 그것을 막기 위해 범인을 잡을 함정을 판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엔 약점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사건과 관계된 미스터리다. 여기의 진실은 식상함을 줄 수 있다. 이미 애거서 크리스티의 'ABC 살인사건'과 브라운 신부의 '이상한 발걸음 소리'를 비롯하여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오리지널은 아니다. 그런 트릭은 이미 구약 때 다윗이 우리야 장군에게 썼던 것이니까.(스포일러가 되기에 여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한다.) 다른 약점은 풀어나가고 있는 미스터리에 비해 이야기의 분량이 다소 많다는 것이다. 그 여정이 너무 세밀하게 나와있어 어쩌면 군더더기가 많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 약점들을 존 버든이 몰랐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전작들에서 그가 얼마나 이야기를 치밀하게 구성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 와서 다소 식상한 미스터리에다 구성이 느슨해 진 것엔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거니가 현재형으로 보여주는 중년의 우울과 도사린 악마를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란 주제와 관련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그건 어쩌면 독자들에게 거기나 쫓는 미스터리가 아니라 거니를 더 주목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느냐고 대답하고 싶다. 다시 말해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촘촘히 새겨나간 거니의 심리가 이 소설이 진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며 '착한 양치기'는 그저 '슬램 덩크'의 유명한 대사처럼 거드는 왼손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실 이 소설에 와서야 거니는 비로소 슈퍼캅의 잔영에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이 된 것 같다. 그만큼 그 영혼 안에 무엇이 웅크리고 있는지 더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 때문에 나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캐릭터를 베개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전까진 베갯잇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서야 인간다운 면모를 지닌 솜털이 꽉 채워져선 비로소 누워볼만한 베개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치밀한 관찰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추리에 이제 인간미까지 지니게 된 이 캐릭터가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된다. 2012년 작품이 이제 나왔으니 다소 늦은 셈인데, 2014년에 나온 '피터팬은 죽어야 한다'는 부디 빨리 나오길 바란다. 제목에서 이미 또 다른 중년의 고민이 펼쳐질 것이 엿보이는 지라('피터팬 증후군'은 중년에게 나타나는 또 다른 현상이 아니었던가? 프로이트 말에 따르면 유아로의 퇴행은 삶이 힘겹고 자신에 대한 신뢰가 낮아질수록 늘어난다고 한다.)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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