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팡의 소식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한희선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평점 :
'64'를 읽고 관심이 한껏 높아졌던 작가, 요코야마 히데오.
언제고 한 번은 꼭 읽고 싶었던 데뷔작, '루팡의 소식'이 표지 갈이를 하여 새로 나왔다. 예전 표지는 주요 용의자인 세 사람을 그린 일러스트였는데, 이번 표지는 자정이 얼마남지 않은 벽시계를 전면에 부각했다. 이야기가 사건의 공소 시효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는 지라 그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여하튼, 히데오의 데뷔작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 읽고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대체 산토리 미스터리 대상이 뭐냐?' 라는 것이었다. 대관절 어떤 상이기에 이만한 소설이 고작 가작밖에 못 받는단 말인가 하고 내가 요코야마 히데오도 아닌데 괜스레 억울한 마음까지 들었다. 작가에게 빙의라도 된 듯, 얼른 그 해 산토리 미스터리 대상을 받은 작품까지 검색했다. 이만한 작품이 가작이니, 대상은 얼마나 대단할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미국 작가 돈나 레온의 데뷔작, '라 트라비아타 살인 사건'이 대상작이었다. 산토리 미스터리 대상은 일본과 해외 작품을 가리지 않고 수상한다. 유감스럽게도 읽어보지 못했다. 거기다 품절마저 되었다. 하는 수 없이 그 해의 수상이 정녕 공정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후일을 기약해야겠다. 어쨌든 루팡의 소식이 가작을 받은 것은 좀 너무해 보인다.(그런데 책 날개에 보니, 지금 내가 읽은 것은 작가가 15년 만에 전면 개고한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원래의 것은 이보다 완성도가 훨 떨어지는 것이었던 걸까? 으음, 진실은 저 너머로...)

이야기가 시작되면 서장을 비롯하여 세쿠하라 서의 경찰들이 모여 망년회를 하고 있다. 때는 1990년, 12월 8일 밤.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느긋하게 송년회를 즐기고 있던 서장 고칸에게 갑자기 긴급한 연락이 떨어진다.
십오 년 전 여교사 자살 사안 관련
타살 의혹 농후 유력 정보
신속 복귀 요망.(p. 11)
'억' 하는 소리를 낼 사이도 없이 얼른 경찰서로 돌아와 부랴부랴 수사반을 꾸리면서 내막을 확인해 보니, 15년 전에 여교사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간대에 당시 그 학교에 재학 중이던 세 명의 제자가 학교에 있던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루팡 작전'이라는 것을 한다면서 심야에 학교에 숨어들어와 있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고칸이 더 놀라웠던 것은 첩보의 발원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루트로 들어온 첩보라면 경찰이 이토록 신속하게 수사 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나 빨리 수사반이 꾸려진 것은 그 제보가 본청, 그것도 엄청 고위직에게서 직접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너무나 이례적인 것이라 고칸은 사건도 사건이지만 제보의 당사자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간 얼른 수사를 해야했다. 만일 그 여교사가 자살이 아니라 진짜 살인이라면 공소 시효가 겨우 하루밖에 안 남았기 때문이다. 급히 '루팡 작전'을 했던 세 명 중의 한 명, 기타 요시오가 경찰서로 체포되어 오고 그의 자백을 통해 기타 요시오 자신도 15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기억 속에 단단히 봉인하고 있었던 사건이 일어난 날의 기억들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한다.

예전 '루팡의 소식' 표지.
앞에 서 있는 세 사람이 '루팡 작전'을 펼친 기타 패거리로 보는 방향에서 맨 오른쪽이 바로 기타, 그리고 중간이 조지 마지막이 다치바나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썬글래스를 쓰고 있는 남자가 바로 '루팡 카페'의 사장 우쓰미다.
'루팡 작전'. 그것은 학교에 대한 반항심에서 비롯된 장난이랄 수 있었다. 시험 치기 전 날 밤에 학교에 몰래 잠입해 교장의 금고에 보관되어 있는 시험지를 몰래 빼내오는 것. 그것이 바로 '루팡 작전'이었다. 공부에 별로 뜻이 없는 것 뿐인데 학교로부터 '불량'이라는 낙인을 받은 것에 대한 분풀이였다. 그런데 왜 작전에 루팡이라는 이름을? 절도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들이 작전을 모의했던 장소가 그들의 아지트라고 해도 무방한 '루팡 카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장이라는 사람이 수상하다. 일단 칠 년 전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삼억 엔 강탈 사건의 범인의 몽타주와 너무나 흡사한 용모인데다 범행 수법과 사장의 취미가 비슷하고 범인이 습격할 때 '스가모'란 지명을 입에 올렸는데, 사장이 카페를 연 곳 또한 '스가모'인 것이다. 이런 면들 때문에 사장은 기타패거리에게 '대도 삼 억'이란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데 실제 이 사장을 삼억 엔 강탈 사건의 범인으로 강력하게 의심하는 경찰이 있었다. 그가 바로 현재 수사를 지휘하고 있는 강력범 조사 4계장 '미조로기 요시'다.
공교롭게도 루팡 작전이 거행되고 여교사가 죽었던 날은 삼억 엔 강탈 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나는 날이기도 했다. 미조로기 요시는 그 날,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경찰서로 체포까지 했다가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지 못해 그가 경찰서를 유유히 걸어 나가는 것을 지켜봐야했다. 그런 아픔까지 있어 새로운 증거의 발견으로 다시 그 옛날의 사건 수사에 임하는 미조로기 요시의 각오는 남다르다. 절도 모의 장소가 '카페 루팡'인 지라 미조로기 요시는 사장 우쓰미를 중요 참고인으로 소환한다. 이제는 스가모를 떠나 다른 먼 지역에 살고 있었기에 우쓰미가 소환에 응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예상을 뒤엎고 선뜻 응한다. 경찰서까지 몸소 찾아온 우쓰미를 보고 미조로기 요시는 그 날처럼 다시 한 번 경찰의 무능을 비웃으려고 찾아온 것은 아닌가 의심한다.
그렇게 '루팡의 소식'은 15년 전 루팡 작전을 감행했던 기타와 조지의 고백을 커다란 뼈대로 하여 세부를 붙여가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야기는 한 마디로 꽤나 재미있다. 진행될 수록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과 뒤집어지는 진실들이 속출해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가서 진범이 밝혀지는 장면이 압권이다. 그것이 공소시효가 거의 다 된 시간에 이뤄지기 때문에 긴박감까지 더해져 더욱 카타르시스를 높인다.(이와 비슷한 형식으로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환상의 여인'은 무죄라 주장하는 주인공이 사형당할 시간을 얼마 앞두지 않고 진행된다. 아예 챕터의 제목이 '사형 집행 몇 시간 전'으로 되어 있어 긴박감을 높인다.)
그러면서도 휴머니즘까지 놓치지 않고 가미하고 있어 재미도 재미지만 가슴에 뭔가 촉촉한 여운까지 남긴다. 기타와 다치바나가 누구의 보살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로 마냥 방치되어 있는 소마의 어린 여동생을 위해 놀아주고 같이 라면도 먹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소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기타는 원래 부모의 이혼으로 만나지 못하는 여동생에 대해 언제나 미안하고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소마의 여동생을 위해 뭔가를 해 줌으로써 소마의 여동생 뿐만 아니라 자신도 치유 받는다. 구원은 결국 타인을 향한 이타적인 사랑을 통해 찾아온다는 것일텐데 이것은 죽은 여교사가 갖고 있었던 진실과 당시 어른들의 부정과 범죄의 동기와 대비되어 선명하게 부각된다.
원래 모리스 르블랑의 '루팡'은 비록 범죄를 저지르긴 하나 동기엔 타인을 위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루팡이 독자들에게 정말 전하고 싶었던 '소식'인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