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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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장판사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도진기 작가의 소설집 '악마의 증명'이 출간되었다.

 악마의 증명. 그것은 원래 중세에서 토지 소유권 입증과 관련하여 사용되던 일종의 법률 용어로, 악마라는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쉬우나(존재하는 것을 데려오기만 하면 되니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어려우므로(모든 경우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증명해야 하므로) 이처럼 부재보다 존재를 증명하는 자가 입증의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으로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하여 모두 여덟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악마의 증명'은 원래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한국 미스터리 단편선'의 게재 되었던 것으로 당시 여자 국선변호사가 주인공으로 나왔던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의 한 에피소드가 먼저 출간된 이 단편의 설정과 유사하여 표절 논란이 일어나 본의 아니게 유명세를 탔다. 사실 표절 욕구를 일으킬만큼 아이디어가 꽤 좋은 단편인데, 외모로는 얼른 구분되지 않는 일란성 쌍둥이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문제는 범죄를 저지른 쌍둥이 하나가 자신이 일란성 쌍둥이인 것을 이용해 한 번 판결이 내려진 사건에 대해선 두 번 재판하지 않는다는, '일사부재리의 원칙'으로 완전범죄를 꾀한다는 것인데 이 같은 범인의 전략을 검사가 보기 좋게 무너뜨리는 것을 볼 수 있는 아주 흥미로운 법정물이다. 검사가 이미 무죄 판결을 받은 범인을 다시 법정에 세워 유죄를 받도록 입증해야 하므로 그런 검사의 입장에서 '악마의 증명'이란 제목을 붙인 것 같다. 


 역시 부장 판사 출신 작가답게 재판 과정의 묘사가 치밀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그래서 얻게 되는 덤도 있다. 바로 최근 박근혜 뇌물 수수 재판에서 일어난, 증인으로 불려 나온 삼성 임원진들이 법정에서의 증언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한 일 말이다. 많은 이들이 왜 그러는지 궁금 할텐데 바로 그 이유를 이 단편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주인공 격인 검사가 재판을 거듭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검찰 조서가 아니라 법정에서의 진술이 재판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된다는 것. 그래서 증언을 거부해 버리면 검찰 조서가 무용지물이 되어 아예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것.' 증인으로 나온 삼성 임원진도 이와 똑같은 이유로 함구하는 것이다. 이재용을 위해서. 이것을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그것이 검찰의 과제가 될 것인데 부디 단편 속 호연정 검사처럼 이재용 변호인단을 제대로 물먹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단편집 '악마의 증명'은 미스터리만 있지 않고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섞여 있는데(문장의 경제를 위해 판타지라고 했지만 단순한 판타지는 아니고 타임 루프나 공포 같은 것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성에 호소하는 미스터리와 달리 감성에 호소하는 환상성이 가미된 단편들이기에 편의상 판타지라 명명했다.) 판타지 하나가 나오면 미스터리 하나가 나오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글의 꿈', '외딴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그리고 '죽음이 갈라 놓을 때'는 판타지고 '악마의 증명', '선택', '구석의 노인' 그리고 '킬러퀸의 킬러'는 미스터리다. 또 하나의 특징이 더 있다면 여기엔 도진기 작가의 대표 시리즈인 '진구'와 '고진'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스탠드 얼론'만 있다는 것이다.


 그간 작가의 많은 작품을 읽어왔지만 미스터리 쪽만 접했었기에 그가 다른 장르의 작품들을 썼는 줄은 몰랐는데 이번 단편집으로 만나게 되어 그의 작품 세계를 더욱 폭넓게 접해볼 수 있었다. 단편집 마지막엔 작가의 말이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유추해 보면 미스터리 쪽은 작가의 프로페셔널한 면이, 판타지 쪽은 프로페셔널한 면에 가려져 있었던 개인의 취향이 발현된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이 단편집을 통해 작가 도진기가 아닌 개인 도진기도 만나볼 수 있다고나 할까? 특히 '시간의 뫼비우스'는 자전적인 게 한껏 깃들어 있어 더욱 개인으로서의 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쯤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묻는다면, 역시 미스터리 한 쪽이 다른 쪽 보다 낫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상 깊게 다가오는 것은 '선택'이다. '악마의 증명'에서 활약했던 호연정 검사가 다시 활약하는데, 인간미 넘치는 주인공이 현재 가장 신뢰받지 못하는 대표 적폐 세력인 검사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고 나는 믿고 싶은데 아무튼 이번에는 변호사가 되어서 경찰이 이미 자살로 종결한 빗길 교통 사고를 죽은 피해자 어머니의 의뢰로 재수사 한다. 읽다보면 문득 기시 유스케의 '유리망치'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설정 같은 것을 따왔다는 게 아니라 주인공이 한 가지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 들고 계속 나타나는 반대 증거 앞에서 이전의 전제를 번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지라 그렇다. 경찰의 판단이 무리가 없을 만큼 자살이 확실한 정황 속에서 주인공이 찾아내는 반대의 진실이 꽤나 인상적이다. 그건 경찰이 결코 보지 못했고 또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곳을 호연정 변호사가 시선을 주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 단편과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빌려 온 할머니 탐정이 나오는 '구석의 노인(에마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에 대한 오마쥬로 보인다. 오르치의 '구석의 노인'은 흥미를 끄는 사건의 재판이 벌어지는 법정에 나가 재판을 구경하는 게 취미인데, 이 소설의 할머니도 그렇기 때문이다.)'과 연결하면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의 시선을 어디로 이끄는지 드러난다. 바로 '사람'이란 것 말이다. 물리적 단서만 놓고보면 여지 없이 혼란스럽고 그릇된 결론이 도출되지만, 그 중심에 사람을 놓아두고 보면 모든 게 다 매끄럽게 정리되는 것이다. 호연정의 다음과 같은 말은 정의를 가져오려는 법의 시선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분명하게 나타낸다.


 감정 없는 사실만을 불쑥 쌓듯 쌓아올린 거죠. 가드레일을 부수고 달려나간 자동차, 창밖으로 나와 동맥이 잘린 운전자의 왼손, 추락의 흔적, 메스와 지문, 이런 것들이 의미 없이 요철만 맞게 조합한, '사람'이 빠진 결론이에요'(p. 118)


 그리고 '구석의 노인'에 나오는 김옥선 할머니는 잘못된 판결이 나자 이렇게 말하며 혀를 찬다.


 '사람'을 모르니 저런 판결이 나지...(p. 175)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바로 법인데, 정작 법에서 사람이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이제 우리나라 사법 현실의 적나라한 진실을 정의하는 말이 되었다. 그 말이 처음 나왔던 때는 무려 1988년이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우리나라 한 켠엔 그 올림픽을 결코 웃으며 바라볼 수 없었던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외국인들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상계동을 비롯한 서울 각지에서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거처를 철거 당해야 했던 가난한 이들이. 쇠파이프와 불도저에 속절없이 밀려나가야 했던 그들의 눈물과 피를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았다. 법도 팔짱을 낀채 모른 척 했다. 이후 내내 그런 모습이다. 봐야 할 사람은 보지 않고 안 봐도 좋을 사람은 당사자가 바라는 것보다 더 깊이 본다. 가지고 있는 돈과 권력에 따라 그 헤아림의 깊이가 결정되기에 그렇다. 정유라가 두 번이나 영장 기각을 받은 것처럼. 이 소설집에 담긴 호소, 법이 정말 보호해야 할 사람을 보라는 것, 그것은 원래 법이 지녀야 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는 말이다.


 아마 제목도 바로 그런 뜻에서 붙인 것은 아니었을까?

 '악마의 증명'으로 입증해야 할 대상은 바로 이것, '여기에 사람이 있다!'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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