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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미녀들 1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넷플릭스에서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제럴드의 게임'을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스티븐 킹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원래 난 스티븐 킹을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작가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주로 다르고 있는 장르가 공포이고 더러 피와 살이 튀는 폭력이 난무한데다 흔히 레드넥이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의 마초적인 남성들이 많이 주역도 맡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제럴드의 게임'은 그런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한 마디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거기서 남편 때문에 뜻하지 않게 침대 위에서 갇힌 채로 며칠을 보내는 여 주인공은 알고보니 지금만 갇힌 상태가 아니었다. 실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로 내내 영혼이 갇힌 상태였다. 남성의 편향된 폭력과 억압 아래에서 한없이 결박된 여성의 내면을 작품은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는 '제럴드의 게임'을 통해 스티븐 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쩌면 초기작 '캐리'에서 이미 대두되고 있었을지도 모를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말이다.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게 아니었다는 건 이내 증명되었다. 여기 또 한 편의 페미니즘적 모습을 한껏 보여주는 작품이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둘째 아들 오언 킹과 함께 쓴 '잠자는 미녀들'이다.
소설은 오직 여성들만 걸리고, 걸리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수면병이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때를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이름인 '오로라 병'(샤를 페로의 원작에선 사실 그녀의 아들 이름이다.)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요 무대는 미국의 둘링 카운티. 소설은 오로라 병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차츰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1권의 주된 내용이다. 둘링 카운티에는 둘링 여자 교도소가 있다. 둘링 카운티 주민의 생계는 이 둘링 여자 교도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바로 이곳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제럴드의 게임'에서 갇힌 여자들이 나왔듯이, 이 소설에서도 갇힌 여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깊은 잠에 들게 만드는 수면병은 그야말로 여성들을 가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옥과 수면병은 그렇게 직결되고 그 직선은 그대로 여성들을 '갇힌 존재'로 만드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과 억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째서 폭력과 억압이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저넷과 리가 교도소에 오게 된 사연에서 잘 나타나듯이, 그녀들이 감옥에 온 것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려 한 결과 공권력이라는 남성 중심 사회의 더 커다란 폭력에 의해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더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은 교도소에서도 교도관에 의해 똑같이 성폭행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다.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피터라는 교도관이다. 이처럼 여성 죄수들의 사연과 어디에 있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성폭행들을 보노라면 '억압과 폭력'이란 말을 쓰는 게 그리 무리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계속해서 남성의 억압과 폭력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여성들을 여럿 선보인다. 마약을 만드는 트레일러에서 헌신짝처럼 취급받는 여성과 십대 남자 아이들에게 거의 학대 수준으로 괴롭힘 당하는 노파가 대표적이다. 수면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한 여성 '이비'(이름에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인 '이브'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처럼 이비는 가장 원초적인 여성으로 아담이 지배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이다.)가 둘링 카운티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다. 이비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성을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에게 죽음을 내리고 그녀들을 해방시킨다. 깊은 잠으로써...
이런 의미에서 잠은 그저 '갇힘'의 의미만 있지 않다.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 여성들만 빠지게 되는 잠은 정지다. 남성 중심 사회의 가동을 마치 일시 정지(pause) 버튼을 눌러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정지인 것이다.
나는 분명 수면병이 그런 의미로 소설에서 쓰여지고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오로라 병에 걸린 여성들이 잠들 때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하얀 고치가 증거다. 다들 알듯이, 고치는 변태를 위한 과정이다. 나비는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봄에 화려한 날개를 뽐내는 자신이 될 수 있다. 나방 또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되려면 하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마디로 고치는 더 많은 자유를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 지금의 갇힘은 영원한 유폐가 아니라 더 높은 도약을 위한 잠시의 움츠림인 것이다.
잠이 보다 나은 몸과 마음의 상태로 깨어나기 위한 과정이듯이.
스티븐 킹은 정말 그런 의미로 수면병을 썼다. 그 뚜렷한 증거가 소설에 나와 있다. 미케일라 '미키' 모건이란 여성이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리포터다. 아주 매력적인 다리를 가진 그녀는 보도 방송을 할 때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다. 물론 그녀가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몸이 그런 식으로 시선의 착취를 당하는 것이 싫지만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둘링 여성 교도소에 갇힌 여자들이나 트레일러의 여자가 오래도록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랬던 미케일라가 1권 후반에 수면병이 더욱 확대되자, 그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보여 그 일을 자의로 그만둬 버린다. 시선에 착취 당하는 걸 그만두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면병은 단순히 여성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물론 난 1권만 봤기 때문에 2권에서 어떻게 되는진 모른다.)
이것은 잠이 든 여성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하얀 고치를 억지로 떼어냈을 때, 그로인해 깨어난 여성들이 하는 행동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소설은 고치의 제거와 함께 갑작스럽게 깨어난 여성들이 자신을 깨운 이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살인까지 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 때 스티븐 킹이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게 바로 엄마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이 장면들은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그러나 스티븐 킹은 왜 이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려했을까 의문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여성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가장 많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엄마라서,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바라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오랜 세월동안 남성 중심 사회는 엄마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모성은 사회가 여성의 자의식을 가장 많이 억제한 갑주였던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는 열악한 자신의 지위 때문에 사회가 더 많이 덧씌운 옷들을 보다 더 자신으로 여기고 살았다. 수면병은 그 옷들을 벗겨 여성 본래의 정체성으로 되돌리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이건 이비를 따라다니는 나방이 가지는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나방 관찰자를 모서라고 불렀어요. 어머니를 뜻하는 마더와 철자는 같지만 발음은 다르죠.(p. 101)
남성 중신 사회가 규정한 모성이 아닌, 거기에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모성. 수면병은 비유하자면, 귀향의 행로인 것이다.
물론 이건 1권까지의 이야기다. 2권에선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권만으로 스티븐 킹이 아주 선명한 주제로 무장한 페미니즘 소설을 썼다는 건 명백하게 보인다. 이런 면에서 '잠자는 미녀들'은 독자에겐 그간 잘 볼 수 없었던 스티븐 킹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스탠드'와 '셀' 혹은 '미스트'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스티븐 킹의 묵시록 묘사의 재능이 다시 한 번 잘 발휘되어 있어서 이런 쪽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더욱 권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