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N. K. 제미신 지음, 이나경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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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세대 SF 작가들 중 가장 신뢰하고 기대하고 있는 작가인 N. K 제미신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

 놀랍게도 이번엔 단편집이다.

 제목은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 

이 단편집은 현재 그녀의 유일한 단편집으로 서른 살에 이르러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그녀가 거의 초기 시절이라고 할만한 2004년부터 2018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한 22개의 단편이 실려있다. 한 마디로 그녀가 작가로 첫 발자국을 떼고나서 오늘에 이르는 전 여정이 한 권의 책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장편에 있어서 그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난가 하는 것은 이전에 나온 <부서진 대지 3부작> 중 두 편을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이기에(그녀는 이 3부작으로 한 편도 받기 힘들다는 SF계에 있어서 가장 유명한 상인 휴고 상을 3년 연속 수상했다.) 단편도 과연 잘 쓸까 궁금했던 터이기에 특별히 더 반가웠던 단편집이었다. 더구나 그녀는 책머리에서 이 단편집에 특별한 의미까지 부여하고 있었다. '작가로서 그리고 운동가로서 성장한 과정을 기록한 연대기'라고 말이다. 말하자면 이 단편집은 작가인 그녀에게 있어 성장 과정을 낱낱이 보여주는 나무의 나이테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니 N. K 제미신을 좋아하는 이로써 어떻게 부푼 기대를 안고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난 당장 저마다 독특한 색채로 빛나고 있는 22개 단편들의 성운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작을 여는 것은 2018년에 발표한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이다. 

 이 단편이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제미신이 이 단편집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단편에 집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편은 여성 SF 작가로 너무나 유명한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작가 자신의 '모방이자 반응(p.12)'인 작품인데 여기엔 두 세계를 굳건하게 가르고 있는 장벽을 허물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한 남자와 그의 딸이 등장한다. 남자를 처형한 이들은 사회복지사로 불리는데, 그들은 그렇게 장벽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기 세계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죽은 남자의 딸은 그 사실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녀는 사회복지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내가 복수할 거야.(...) 당신들이 아빠를 죽인 것처럼, 내가 당신들을 죽일 거야. (...) 감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감히 어떻게."(p. 29)


 특별히 이 부분을 인용하는 것은 이러한 설정, 즉 한 쪽엔 보호 혹은 진보란 이름으로 나누고 가두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 쪽엔 그들이 설정한 벽을 뛰어넘어 어떻게든 가로지르고 서로 연결하려는 이들이라는 양분된 구도가 여기에 실린 거의 모든 단편에 걸쳐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단편집,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구획과 횡단의 투쟁 연대기다.


 어느 도시에서나 그러하듯이 적은 자연에 없어서는 안 될 본질이다. 우리가 겪는 변화의 과정을 막을 수 없듯, 적도 완전히 종식시킬 수 없다. 나는 적의 아주 작은 일부만 다치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부분을 망가진 채 돌려보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좋다. 최후의 결전 때가 온다면 놈은 다시 내게 달려들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다.

내게. 우리에게. 그렇다.(p. 59)


 그렇다고 해서 이 투쟁이 승패를 가르고자 함은 아니다.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 하는 건 작가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있어 적은 변화를 통해 성장하기 위한 계기의 제공자일 뿐, 근절의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로 고정된 정체성에 머무르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성장하는 것이다. 식물처럼 하나의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 것, 늘 구획된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이야 말로 작가가 이 단편집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정체성이다. 


 이것을 위해 작가는 두 가지 모티브를 특별히 많이 사용한다.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조리하는 것이다.

 꿈은 두 번재 단편인 '위대한 도시의 탄생'을 비롯하여 '수면 마법사'까지 자주 등장한다.(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트로이 소녀(세계관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작가가 장편으로도 만들어주길 바랐지만 책머리에서 작가는 단편으로 끝내겠다고 해놓아서 참 아쉬웠다.)'는 이러한 꿈의 테마가 가장 한껏 재현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편은 가상 현실 같은 곳에서 오직 생각이란 형태로 존재하는 프로그램들의 추격전을 그리고 있는데, 이들은 흔히 말하는 전뇌 공간 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현실 인간에게 다운로드 되어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오로지 자신을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던 이 프로그램들은 한 어린 소녀 프로그램을 통하여 변화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궁극의 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단편집에서 꿈은 한 마디로 대지와 정반대에 있는 영토이다. 현실과 비현실, 중력과 무중력으로 대비되는 장소인 것이다. 그렇기에 꿈은 무엇이든 하나로 고정시키려는 지상이 허락하지 않은 정체성의 추구를 가능하게 한다. 자신이 정말 되고 싶은 정체성을 찾거나 현실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타자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기도 한다. 끌어당기는 중력도, 고정시키는 영토도 없어서 오로지 물 흐르듯 부유하거나 유영할 수밖에 없는 꿈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오직 변화만이 존재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꿈을 통해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구현해 나간다는 점에서 작가는 변화 속에 주어지는 다양한 경험 속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길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리(요리)의 의미는 무엇인가? 꿈이 내적인 차원의 것이라면 조리는 외적인 차원의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연금술사'는 조리사의 이야기다. 그는 처음에 기이한 고객의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들지만 후반에 가선 자기만의 레시피를 개발하여 음식을 만든다. 이러한 주제는 나중에 '퀴진 드 메므아'라는 단편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남이 만든 레시피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레시피 대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을 그대로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작가가 왜 하필 조리라는 소재를 가지고 왔는가 하는데 있다. 바로 거기서 난 이 조리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외적인 차원에 속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리란 각각 개별적인 재료들을 훌륭한 맛을 위해 서로 공존하는 가운데 가장 조화를 이루도록 만드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어느 하나도 쉽게 배척되지 않는다. 또한 재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가장 뛰어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작은 재료 하나에도 나를 헤아리는 것만큼의 깊은 헤아림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조리사의 자세가 작가는 타자를 대하는 나의 기본적인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건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SF 소설계에서 쉽게 지워졌었던 자전적 경험의 반영이기도 하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이 소설을 쓸 때조차 암묵적으로 백인 남성 주인공을 상정하고 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쉽게 무시된다는 건 우리 역시 익히 보아왔던 바다. 그것이 최근 미국에서 'BLACK LIVES MATTER' 시위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작가는 여러 단편을 통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조리를 할 때와 같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재료에 대해서도 존중하는 마음과 세심하게 배려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이처럼 구획과 횡단의 투쟁기는 종반엔 변화와 공존에 이르는 여정이었다.


 제미신의 역량은 단편에서도 여전했다. 어떤 단편들은 장편보다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가 더 농밀하게 구현되어 있기도 했다. 그녀가 차례대로 세워 놓은 22개의 표지판을 통과하면서 왜 이 단편집을 그녀가 성장의 연대기로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었고 '부서진 대지 3부작'의 성공 역시 그냥 나무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 제미신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듯하다. 그러고 보니 부서진 대지 3부작도 이제 '석조 하늘' 하나만 남은 상황. 얼른 그 작품과 만나게 되기를 바라는 한편, 과연 이 다음의 성장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진다. 부디 빨리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참 제목인 '검은 미래의 달까지 얼마나 걸릴까'는 이 단편집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이 제목은 단편이 아니라 2013년에 발표한 에세이의 것이라고 한다. 검은 미래의 달은 흑인이자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반영한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검은 미래가 하얀 미래와 동등하고 달이 태양과 대등하게 되는 공존과 조화의 시대에 다다르는 것이 부디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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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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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들 도키오'를 읽었다. 

 최근에 발표한 작품은 아니고 200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예전에 창해 출판사에서 발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나온 건 번역자가 다르다. 다시 말해 새로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꽤나 팔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때문에 우린 히가시노 게이고가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인간미가 따스하게 흐르는 휴머니즘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 도키오'는 그 전조(前兆)라고 해도 좋다. 사실 현재의 어떤 존재가 시간 이동을 통해 과거의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기본 설정부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유사하다. 분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보여준 기적은 '아들 도키오'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주인공 미야모토 다쿠미는 발병하면 뇌신경이 차례차례 죽어버리는 무섭고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레이코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결혼한다. 자신의 유전병을 물려줄 수 없기에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레이코의 말에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다쿠미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동의한다. 그러나 레이코는 뜻하지 않게 임신해 버리고 지우려고 하는 그녀에게 미야모토는 과거에 어떤 청년에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라는 말을 떠올리고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설득하여 결국 아들 도키오를 태어난다. 그러나 건강하게 잘 자라나던 도키오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끝내 그 증후군에 걸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 이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도키오를 보면서 미야모토는 20년도 더 전에 자신이 아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걸 마지막으로 프롤로그는 끝나고 우리는 20년 전의 젊은 미야모토 다쿠미를 만난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현재와 너무나 다르다. 상대방의 어떤 결점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이며 늘 자신보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혼자일 뿐이야'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며 한없이 타인을 불신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쿠미가 어느 날, 자신의 친척이라 주장하는 한 낯선 청년을 만난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자기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그가 당혹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느껴지는 묘한 친근감 때문에 다쿠미는 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그와 같이 지내게 된다.


 그 낯선 청년의 진짜 정체는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아들 도키오다. 미래의 다쿠미가 아들을 보면서도 과거에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이내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과거에 도키오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다쿠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은 도키오에게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면 유전병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혼이 되어 시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몸에도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묘사한다. 소설은 다쿠미의 입장에서 진행되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아들 도키오가 받은 충격과 실망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든 도키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낳은 상처를 찾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다쿠미에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생모와 이별하여 양부모 손에서 컸는데 처음엔 사랑을 다해 길러주었던 그 부모도 나중에 가서는 잔뜩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일 뿐이야'는 외간 여자와 바람이나 피고 돈만 밝히는 남자로 전락해 버린 양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버릇이었다.


 다쿠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을 아주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생모 탓이라 여기고 가득 원망한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원망하던 장국영처럼... 아들 도키오는 그런 다쿠미와 생모를 화해시키려 중한 병으로 누워있다는 그녀, 도조 준코의 집까지 찾아가게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렇잖아. 이쪽은 가난한다는 이유로 버려졌다고. 버림받고, 관계없는 집에서 자른 끝에 결국 무엇 하나 남지 않았어. 그런데 버린 쪽은 가난한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니. 열심히 살아 감사를 받고 있다니. 하느님 취급이잖아. 아이를 버린 여자가 말이야. (...) 정말 웃기네. 내 생애 최고로 웃기는 일이야."(p. 190)


 그런데 다쿠미의 여자 친구인 지즈루가 갑자기 사라진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다쿠미에게 실망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알았는데 오카베란 남자와 같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을 뒤쫓고 있는 수상한 녀석들이 잔뜩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소설 중반은 그렇게 다쿠미와 도키오가 사라진 지즈루를 찾아나서면서 깊이 엮이게 되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도조 준코가 헤어질 때 건네준 누군가의 습작인 것 같은 만화책을 단서로 단 한 번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다쿠미의 생부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뤄진다. 독자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바라는 장르적 재미는 바로 이 부분에서 충족되는데, 이건 다쿠미 역시 마찬가지다. 다쿠미 또한 그 여정을 통하여 늘 원망했었던 불우한 출생의 사정을 이해하고 거기서 파생된 대충 오늘만 수습하며 무책임하게 살던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지는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다. 아울러 다쿠미가 어떻게 현재의 아내인 레이코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또 거기에 도키오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또한. 이런 식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킨다.


 이 소설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도키오가 아버지 다쿠미의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했던 말에 집약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 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 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뭐야. 불평만 하고. 스스로 무엇 하나 쟁취하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미래를 느끼지 못하는 건 누구 탓도 아냐. 당신 탓이야. 당신이 바보라서."(p. 396)


 그렇게 말한 뒤, 도키오는 자신은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려 의식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도키오가 말이다. 어떤 삶이든 지속할 가치가 있다. 미래라는 빛은 바깥 환경에서 자신에게 비춰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춰나가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마음 깊이 절로 선명하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아들 도키오'가 발표된 때는 일본이 한창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외치고 있던 시기였다.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일본 사회를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것마냥 마비시켜 나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그것이 주는 달콤한 꿀에 대한 탐닉만 존재했던 과거에 대한 원망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에 대한 불안으로 압살시켜 갔던 다쿠미의 분신이 비일비재하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다쿠미들에게 자신의 소설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다쿠미 시간대를 하필이면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던 즈음으로 설정했던 건 아닐까 싶다.(이건 소설에서 스타워즈(그러니까 75년에 처음 발표된 영화말이다.)가 상영된지 4년이 지났다고 한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1치 오일쇼크에서 커다란 곤경을 겪었던 일본은 그 때의 교훈으로 2차 오일쇼크는 성공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거품 경제로 이어지는 80년대의 호황까지 이뤄냈다. 비록 붕괴라는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젊은 다쿠미의 시간을 그 때로 정한 것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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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에 대하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비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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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금색 공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이 고양이에 대하여 쓴 책이다. 발표된 해는 2002년.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거쳐갔던 고양이들에 대해 직접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아주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양이 집사 7년 차로 동반자에 대한 예의랄까 호기심이랄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고양이에 대한 책을 이것 저것 많이 읽어보았는데, 그런 내게 있어 이 책은 단언컨대 고양이에 대한 책 중에 최고다. 이토록 고양이에 대해 인격적으로 다루면서 또 어느 순간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책이 또 있을까 싶다. 감히 고양이 집사라면 꼭 읽어야 할 필독서가 아닌가 한다.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고양이와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일련된 서사가 있는 건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 기록이다. 책의 대부분은 '금색 공책'을 세상에 막 발표했던 1962년. 런던에서 살 때 길렀던 두 마리의 암컷 고양이, 회색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에 할애되어 있다. 시작의 포문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서 길렀던 고양이들이 연다. 이 부분엔 고양이 집사에게 참 충격적인 게 많다. 야생 고양이가 집 주위의 언덕을 차지할까봐 어린 도리스 레싱이 고양이만 보면 총을 쏘아대는 것이라든지, 집 안에 고양이가 너무 불어나 고양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어머니가 집을 비운 사이에 아버지가 무려 40마리에 이르는 고양이를 살육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나온다. 여기서는 야생 고양이의 존재가 강조되고 그것을 통제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가 은연 중 배여있는데 이것이 당시의 짐바브웨가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과 연결되면서 단순히 고양이에 대한 얘기만은 아니라는 걸 느끼게 만든다. 문득 그녀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 알렸던 데뷔작 '풀잎은 노래한다'와 두 번째 작품인 '마사 퀘스트'가 떠오르는 것이다.


 문명과 야만(어디까지나 관습대로 편의상 구분한 것이다.)의 경계인 식민지에서 살았던 자전적 경험 때문에 도리스 레싱은 문명과 야만은 충돌하며 서로 도저히 융합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문명은 통제에 대한 강박으로 자주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것도. 문명이 겉으로는 폭력을 배척하고 있지만 사실 그 폭력이야말로 유일하게 문명의 존립 수단이라는 것도. 이런 구도가 고양이와 인간 사이에도 그대로 통용된다. 그러니까 고양이란 문명의 타자, 야만 혹은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인 것이다. 어린 시절의 도리스 레싱은 집이라는 문명의 안전을 위하여 야생 고양이가 나타나면 바로 22구경 엽총을 들고 쏘았다. 그건 레싱의 어머니가 집에 기어들면 닥치는 대로 잡았던 뱀이나 흰개미와 마찬가지였다. 수가 너무 불어나 안정이 위험해질 것 같으면 새끼 고양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물에 빠뜨려 죽였다. 그녀 자신이 말한다. 그 때는 고양이가 들어설 자리가 전혀 없었다고.


 그녀가 고양이를 자기 곁에 거둘 수 있게 된 것은 작가가 되고 나서 였다. 자신이 어떻게 하여 작가가 되기로 하였는가에 대한 자전적인 경험이 물씬 배인 '마사 퀘스트'에 따르면 도리스 레싱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위선을 깨달은 후,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문명이 허용하지 않는 자신이 내부에 간직한 타자성을 문명의 폭력에 순응하여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여 양성시키기 위해 그녀는 작가가 되었던 것이다. 문명에 식민화된 자아가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영토인 자아를 지향하기 위하여.


 겨우 20여 페이지에 이르는 첫 단락을 설명하느라 말이 너무 길어졌는데 그건 단순하게 말한다면 이걸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에 대한 책이기도 하지만 도리스 레싱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여기에 담긴 고양이에 대한 얘기들은 자신이 지금껏 써온 작품들의 세계와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그 세계를 보다 깊이 혹은 색다르게 헤아리는 하나의 통로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첫 단락을 읽으면서 '풀잎은 노래한다'와 '마사 퀘스트'를 떠올렸듯이, 암컷 고양이에 대한 중성화 수술의 필요와 새끼를 낳지 않은 회색 고양이와 낳은 검은 고양이의 대비를 보면서 완전히 낯선 타자인 아이를 낳은 공포를 그린 '다섯째 아이'나 다섯 공책 속에서 서로 다르게 존재했던 안나 울프를 그린 '금색 공책'을 떠올릴지 모른다. 너무 나간 판단일지 모르지만 내게 자연이 부여한 모성과 회색 고양이보다 열등한 위치라는 한계 속에서 새끼를 키우고 가르치는 암컷 고양이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검은 고양이는 네 권의 공책 속 안나 울프로 보였고 도도하게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며 주체성을 뽐내는 회색 고양이는 '금색 공책'의 안나 울프로 보였다. 이 정도의 설명만으로 만족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설령 고양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더라도 작가로서의 도리스 레싱이 궁금하다면 꼭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이라고. 물론 그 전에 그녀의 대표작들을 읽어보았다면 말이지만.


 '고양이에 대하여'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도, 고양이는 좋아하지는 않지만 도리스 레싱에겐 관심이 많은 사람도 놓칠 수 없는 책임엔 틀림없다. 30km나 되는 낯선 땅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오직 생존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갖가지 고난을 넘어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고양이라든가 자신의 새끼들을 구하고자 작가의 집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찾아왔으며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몰살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그래도 작가에게 간신히 목숨을 구한 고양이라든가 또 커다란 아픔을 겪은 뒤, 불편한 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두 번째의 기회를 잡기 위해 새로이 세계에 편입되려 노력하는 루퍼스의 이야기처럼 때로는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고 또 때로는 내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것들이 스며들어 있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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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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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헌법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전과자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차별은 그가 얼마나 많이 갱생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2000년에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인 '주홍글자'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자처럼 설령 그것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찍힌 낙인이라고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삶을 새롭게 일으킬 두 번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그대로 삶을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감히 사회적 타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들에겐 여형사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로 유명한 혼다 데쓰야의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그러한 사회적 타살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다키오. 원래 여행사에서 영업을 했던 그는 딱 한 번 했던 각성제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러다 설상가상으로 집까지 불에 타서 이젠 머물 곳조차 없어져 버렸다. 거의 벼랑 끝에 내몰린 다키오에게 오직 단 하나의 공간이 그에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 그 곳이 바로 제목의 '셰어하우스 플라주'. 준코라는 여인이 운영하는 이 곳은 특이하게도 모든 방에 문이 없다. 찾아온 사람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플라주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과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키오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학원 폭력에 휩쓸려 동급생을 살해까지 한 사이코패스 소녀가 있는가 하면 코카인을 판매하는 애인 때문에 전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아직도 도망 중인 애인 때문에 늘 경찰에게 시달리는 여인도 있고 양아치에서 벗어나 간신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가운데 좋아하는 여인까지 만나 데이트를 하다 그만 자신의 과거 모습과도 같은 불량배 학생과 시비가 붙어 사고로 상대방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인생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남자도 있다. 그러나 거기 있는 모두는 현재의 어둠에 그대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어둠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한다. 사이코패스 소녀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기가 모르는 감정을 배우려 애쓰고 여인은 자신을 인정하고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성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다들 어떻게든 과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삶이 숨겨둔 두 번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만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걸머지고 있는 전과자라는 멍에 때문에...


 "됐어. 할 수 없지... 우리가 전과자인 건 사실이니까.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지는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나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순 없어."(p. 145)


이건 다키오도 마찬가지다. 각성제로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회사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 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마냥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인 표류물. 그것이 다키오였고 플라주에 기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들을 오직 플라주만이 두 팔을 벌려 맞아주었다. 방에 문이 없는 그 곳이. 그래서 어쩌면 셰어하우스의 이름이 플라주인 지도 모른다. 플라주의 뜻에 대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라주'는 프랑스어로 '해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모호하게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 남과 여,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죄와 용서(p. 278)


 바다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던 표류물들은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해변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모조리 받아들이며 거기서 표류물들은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그러나 해변이 딱히 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찾아 온 사람에게 안주할 둥지가 되어준 것 뿐이다. 플라주도 그렇다. 운영자 준코가 상처난 이들을 찾아다니며 살갑게 상담해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들이 서로 보듬어 살아갈 공간을 허락한 것 뿐이다. 그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과거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그저 오늘도 힘겹게 삶을 버티고 있는 동료로 인정해 준 것 뿐이다. 그랬는데도 플라주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토록 바랐으나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온기를 얻는다. 더이상 과거의 어둠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제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활력을 얻는다. 사람은 절대 변할 리가 없다면서 타인에 대해 한 번 심판을 내린 것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이마저 온전히 감화시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참회할 정도로.


 소설은 이러한 과정을 독자가 전혀 과장이라고 느껴지지 않게끔 차분히 납득시켜 나간다. 타인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믿어주면서 그가 다시 걸어갈 수 있게 자신의 손을 기꺼이 내미는, 어쩌면 사소한 행위가 다름아닌 플라주를 유토피아로 만든 근본이었다는 것을. 그랬기에 이 소설은 애틋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시위를 야기했던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대표하듯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가 매캐한 연기가 되어 우리의 하늘을 날로 집어삼키고 있는 요즘이기에.


 인간미를 수놓은 서정성이 넘치는 소설이긴 하지만 혼다 데쓰야 작품답게 미스터리와 반전이 없는 건 아니다. 살인범이라 믿는 사람이 유력한 증인의 증언 번복으로 풀려난 것을 듣고 분명 무슨 흑막이 있을 거라 짐작하여 홀로 그를 추적하는 기자가 미스터리의 축을 움직이는데, 바로 이것이 반전과 맞물려 '데쓰야라면 역시 미스터리지!'하고 기대하고 읽었던 사람들 또한 그 바람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준다. 등장 인물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들을 읽는 재미와 사이코패스 소녀 미와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도 있어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간다.


 처음 읽었을 때, 설정이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메종일각'과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소설에서 그 작품을 언급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분명 플라주의 주인 준코는 메종일각의 주인 교코가 모델일 것이다. 물론 기거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정반대이지만. 메종일각에 모인 사람들은 플라주에 모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그들은 주인공 고다이의 사생활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짝사랑하는 교코와 가까워지려는 걸 번번이 방해한다. 이런 차이점까지 있어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원래 인류는 다른 포유류 보다 신체 기능이 떨어져 생존을 위해 같은 인간과의 상호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언어 능력이 발달한 것도 보다 잘 협력하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공존과 협력은 인간의 기초적인 생활 방식인 것이다.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갑질하는 이의 목덜미에 철퇴가 내리치길 원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이 협력하지 못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과도한 경쟁과 무분별한 배척에 내몰리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다움의 근본은 무엇인가를 상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말로, 뜬금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더욱 홀로 고립되는 요즘,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 나눈다는 것에 그리움이 깊어진다면 얼른 이 '셰어하우스 플라주'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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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미녀들 1
스티븐 킹.오언 킹 지음, 이은선 외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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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에서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제럴드의 게임'을 본 적이 있다.



 그 영화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스티븐 킹의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원래 난 스티븐 킹을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작가로 생각했다. 아무래도 주로 다르고 있는 장르가 공포이고 더러 피와 살이 튀는 폭력이 난무한데다 흔히 레드넥이라고 불리는 미국 남부의 마초적인 남성들이 많이 주역도 맡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제럴드의 게임'은 그런 것과 너무나 거리가 먼, 한 마디로 페미니즘 소설이었다. 거기서 남편 때문에 뜻하지 않게 침대 위에서 갇힌 채로 며칠을 보내는 여 주인공은 알고보니 지금만 갇힌 상태가 아니었다. 실은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로 내내 영혼이 갇힌 상태였다. 남성의 편향된 폭력과 억압 아래에서 한없이 결박된 여성의 내면을 작품은 아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나는 '제럴드의 게임'을 통해 스티븐 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어쩌면 초기작 '캐리'에서 이미 대두되고 있었을지도 모를 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말이다. 그것이 단지 일시적인 게 아니었다는 건 이내 증명되었다. 여기 또 한 편의 페미니즘적 모습을 한껏 보여주는 작품이 우리에게 도착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둘째 아들 오언 킹과 함께 쓴 '잠자는 미녀들'이다.




 소설은 오직 여성들만 걸리고, 걸리면 깊은 잠에 빠져드는 수면병이 전 세계적으로 횡행하는 때를 배경으로 한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판 '잠자는 숲속의 공주'의 이름인 '오로라 병'(샤를 페로의 원작에선 사실 그녀의 아들 이름이다.)으로 불리기도 한다. 주요 무대는 미국의 둘링 카운티. 소설은 오로라 병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차츰 잠식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1권의 주된 내용이다. 둘링 카운티에는 둘링 여자 교도소가 있다. 둘링 카운티 주민의 생계는 이 둘링 여자 교도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바로 이곳에서 소설은 시작한다. '제럴드의 게임'에서 갇힌 여자들이 나왔듯이, 이 소설에서도 갇힌 여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깊은 잠에 들게 만드는 수면병은 그야말로 여성들을 가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옥과 수면병은 그렇게 직결되고 그 직선은 그대로 여성들을 '갇힌 존재'로 만드는 남성 중심 사회의 폭력과 억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어째서 폭력과 억압이라고 말하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소설 처음에 등장하는 저넷과 리가 교도소에 오게 된 사연에서 잘 나타나듯이, 그녀들이 감옥에 온 것은 자신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에게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려 한 결과 공권력이라는 남성 중심 사회의 더 커다란 폭력에 의해 갇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더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은 교도소에서도 교도관에 의해 똑같이 성폭행이 자행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이유다. 그리고 그런 짓을 저지르는 사람은 피터라는 교도관이다. 이처럼 여성 죄수들의 사연과 어디에 있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남성들의 성폭행들을 보노라면 '억압과 폭력'이란 말을 쓰는 게 그리 무리로 보이진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소설은 계속해서 남성의 억압과 폭력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여성들을 여럿 선보인다. 마약을 만드는 트레일러에서 헌신짝처럼 취급받는 여성과 십대 남자 아이들에게 거의 학대 수준으로 괴롭힘 당하는 노파가 대표적이다. 수면병을 몰고 다니는 것으로 추정되는 신비한 여성 '이비'(이름에서 우리는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여성인 '이브'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이름처럼 이비는 가장 원초적인 여성으로 아담이 지배하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가장 대척점에 서 있는 존재이다.)가 둘링 카운티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것도 바로 이들이다. 이비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여성을 비인간적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에게 죽음을 내리고 그녀들을 해방시킨다. 깊은 잠으로써...


 이런 의미에서 잠은 그저 '갇힘'의 의미만 있지 않다.

 보다 정확한 의미에서 여성들만 빠지게 되는 잠은 정지다. 남성 중심 사회의 가동을 마치 일시 정지(pause) 버튼을 눌러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정지인 것이다.

나는 분명 수면병이 그런 의미로 소설에서 쓰여지고 있다고 믿는다. 무엇보다도 오로라 병에 걸린 여성들이 잠들 때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하얀 고치가 증거다. 다들 알듯이, 고치는 변태를 위한 과정이다. 나비는 번데기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봄에 화려한 날개를 뽐내는 자신이 될 수 있다. 나방 또한 지금 자신의 모습이 되려면 하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 마디로 고치는 더 많은 자유를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 지금의 갇힘은 영원한 유폐가 아니라 더 높은 도약을 위한 잠시의 움츠림인 것이다. 

잠이 보다 나은 몸과 마음의 상태로 깨어나기 위한 과정이듯이.

 

 스티븐 킹은 정말 그런 의미로 수면병을 썼다. 그 뚜렷한 증거가 소설에 나와 있다. 미케일라 '미키' 모건이란 여성이다.

빼어난 미모를 가진 그녀는 리포터다. 아주 매력적인 다리를 가진 그녀는 보도 방송을 할 때 짧은 치마를 즐겨 입는다. 물론 그녀가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것이다. 자신의 몸이 그런 식으로 시선의 착취를 당하는 것이 싫지만 성공을 위해서라면 남성 중심 사회의 권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둘링 여성 교도소에 갇힌 여자들이나 트레일러의 여자가 오래도록 그러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랬던 미케일라가 1권 후반에 수면병이 더욱 확대되자, 그러고 있는 자신이 너무 어리석게 보여 그 일을 자의로 그만둬 버린다. 시선에 착취 당하는 걸 그만두고 본래 자신의 모습으로,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엄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수면병은 단순히 여성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본연의 모습으로 돌려놓기 위한 일시 정지의 과정이다.(물론 난 1권만 봤기 때문에 2권에서 어떻게 되는진 모른다.)

 이것은 잠이 든 여성들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하얀 고치를 억지로 떼어냈을 때, 그로인해 깨어난 여성들이 하는 행동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난다. 소설은 고치의 제거와 함께 갑작스럽게 깨어난 여성들이 자신을 깨운 이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여 살인까지 하는 것을 묘사한다. 이 때 스티븐 킹이 두드러지게 묘사하는 게 바로 엄마가 아들을 죽이는 장면이다. 당연히 이 장면들은 섬뜩하고 공포스럽다. 그러나 스티븐 킹은 왜 이 장면을 독자에게 보여주려했을까 의문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여성에게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가장 많이 희생할 것을 요구받는 자리이다. 엄마라서, 엄마이기 때문에, 엄마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거나 바라는 것을 포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오랜 세월동안 남성 중심 사회는 엄마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다. 모성은 사회가 여성의 자의식을 가장 많이 억제한 갑주였던 셈이다. 이처럼 여성은 자기 본연의 모습보다는 열악한 자신의 지위 때문에 사회가 더 많이 덧씌운 옷들을 보다 더 자신으로 여기고 살았다. 수면병은 그 옷들을 벗겨 여성 본래의 정체성으로 되돌리는 매개체라 할 수 있다. 이건 이비를 따라다니는 나방이 가지는 의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나방 관찰자를 모서라고 불렀어요. 어머니를 뜻하는 마더와 철자는 같지만 발음은 다르죠.(p. 101)


 남성 중신 사회가 규정한 모성이 아닌, 거기에 오염되지 않은 천연의 모성. 수면병은 비유하자면, 귀향의 행로인 것이다. 


 물론 이건 1권까지의 이야기다. 2권에선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권만으로 스티븐 킹이 아주 선명한 주제로 무장한 페미니즘 소설을 썼다는 건 명백하게 보인다. 이런 면에서 '잠자는 미녀들'은 독자에겐 그간 잘 볼 수 없었던 스티븐 킹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스탠드'와 '셀' 혹은 '미스트'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스티븐 킹의 묵시록 묘사의 재능이 다시 한 번 잘 발휘되어 있어서 이런 쪽을 좋아하는 분들에게도 더욱 권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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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4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