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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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헌법은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지만 전과자라는 사회적 신분에 대한 차별은 그가 얼마나 많이 갱생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상관없이 2000년에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횡행하고 있다. 너새니얼 호손의 소설인 '주홍글자'의 주인공 헤스터 프린의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자처럼 설령 그것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찍힌 낙인이라고 해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삶을 새롭게 일으킬 두 번째의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그대로 삶을 박탈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감히 사회적 타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우리들에겐 여형사 히메카와 레이코 시리즈로 유명한 혼다 데쓰야의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그러한 사회적 타살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다키오. 원래 여행사에서 영업을 했던 그는 딱 한 번 했던 각성제 때문에 경찰에 체포되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러다 설상가상으로 집까지 불에 타서 이젠 머물 곳조차 없어져 버렸다. 거의 벼랑 끝에 내몰린 다키오에게 오직 단 하나의 공간이 그에게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내어준다. 그 곳이 바로 제목의 '셰어하우스 플라주'. 준코라는 여인이 운영하는 이 곳은 특이하게도 모든 방에 문이 없다. 찾아온 사람을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플라주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과연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키오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학원 폭력에 휩쓸려 동급생을 살해까지 한 사이코패스 소녀가 있는가 하면 코카인을 판매하는 애인 때문에 전과자가 된 것도 모자라 아직도 도망 중인 애인 때문에 늘 경찰에게 시달리는 여인도 있고 양아치에서 벗어나 간신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가운데 좋아하는 여인까지 만나 데이트를 하다 그만 자신의 과거 모습과도 같은 불량배 학생과 시비가 붙어 사고로 상대방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인생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남자도 있다. 그러나 거기 있는 모두는 현재의 어둠에 그대로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어둠에서 빠져나오려 노력한다. 사이코패스 소녀는 여러 사람을 만나며 자기가 모르는 감정을 배우려 애쓰고 여인은 자신을 인정하고 힘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욱 성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다들 어떻게든 과거 자신의 잘못을 속죄하고 삶이 숨겨둔 두 번째의 기회를 잡으려고 하지만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걸머지고 있는 전과자라는 멍에 때문에...


 "됐어. 할 수 없지... 우리가 전과자인 건 사실이니까.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지는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나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순 없어."(p. 145)


이건 다키오도 마찬가지다. 각성제로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회사도 그를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그 어떤 곳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 밀리고 저리 떠밀리며 마냥 둥둥 떠다니기만 할 뿐인 표류물. 그것이 다키오였고 플라주에 기거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들을 오직 플라주만이 두 팔을 벌려 맞아주었다. 방에 문이 없는 그 곳이. 그래서 어쩌면 셰어하우스의 이름이 플라주인 지도 모른다. 플라주의 뜻에 대해 소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플라주'는 프랑스어로 '해변'. 바다와 육지의 경계선. 모호하게 계속 흔들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점. 남과 여,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 그리고 죄와 용서(p. 278)


 바다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던 표류물들은 해변으로 떠밀려 온다. 해변은 그들을 있는 그대로 모조리 받아들이며 거기서 표류물들은 비로소 안식을 얻는다. 그러나 해변이 딱히 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찾아 온 사람에게 안주할 둥지가 되어준 것 뿐이다. 플라주도 그렇다. 운영자 준코가 상처난 이들을 찾아다니며 살갑게 상담해주거나 하는 건 아니다. 그냥 그들이 서로 보듬어 살아갈 공간을 허락한 것 뿐이다. 그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과거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지 않고 그저 오늘도 힘겹게 삶을 버티고 있는 동료로 인정해 준 것 뿐이다. 그랬는데도 플라주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이 그토록 바랐으나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온기를 얻는다. 더이상 과거의 어둠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제대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활력을 얻는다. 사람은 절대 변할 리가 없다면서 타인에 대해 한 번 심판을 내린 것을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던 이마저 온전히 감화시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참회할 정도로.


 소설은 이러한 과정을 독자가 전혀 과장이라고 느껴지지 않게끔 차분히 납득시켜 나간다. 타인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믿어주면서 그가 다시 걸어갈 수 있게 자신의 손을 기꺼이 내미는, 어쩌면 사소한 행위가 다름아닌 플라주를 유토피아로 만든 근본이었다는 것을. 그랬기에 이 소설은 애틋한 따스함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 지금도 진행 중인 시위를 야기했던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대표하듯이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가 매캐한 연기가 되어 우리의 하늘을 날로 집어삼키고 있는 요즘이기에.


 인간미를 수놓은 서정성이 넘치는 소설이긴 하지만 혼다 데쓰야 작품답게 미스터리와 반전이 없는 건 아니다. 살인범이라 믿는 사람이 유력한 증인의 증언 번복으로 풀려난 것을 듣고 분명 무슨 흑막이 있을 거라 짐작하여 홀로 그를 추적하는 기자가 미스터리의 축을 움직이는데, 바로 이것이 반전과 맞물려 '데쓰야라면 역시 미스터리지!'하고 기대하고 읽었던 사람들 또한 그 바람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준다. 등장 인물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연들을 읽는 재미와 사이코패스 소녀 미와처럼 개성 강한 캐릭터도 있어서 페이지가 빨리 넘어간다.


 처음 읽었을 때, 설정이 다카하시 루미코의 유명한 만화 '메종일각'과 꽤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가 소설에서 그 작품을 언급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분명 플라주의 주인 준코는 메종일각의 주인 교코가 모델일 것이다. 물론 기거하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정반대이지만. 메종일각에 모인 사람들은 플라주에 모인 사람들과 전혀 다르다. 그들은 주인공 고다이의 사생활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사람들이며 짝사랑하는 교코와 가까워지려는 걸 번번이 방해한다. 이런 차이점까지 있어서 더욱 흥미롭게 읽었다. 원래 인류는 다른 포유류 보다 신체 기능이 떨어져 생존을 위해 같은 인간과의 상호 협력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고 한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언어 능력이 발달한 것도 보다 잘 협력하려고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공존과 협력은 인간의 기초적인 생활 방식인 것이다. 우리가 이기적인 사람을 싫어하고 갑질하는 이의 목덜미에 철퇴가 내리치길 원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들이 협력하지 못하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소설,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과도한 경쟁과 무분별한 배척에 내몰리느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인간다움의 근본은 무엇인가를 상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런 말로, 뜬금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글을 마치고 싶다.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더욱 홀로 고립되는 요즘, 누군가와 더불어 함께 나눈다는 것에 그리움이 깊어진다면 얼른 이 '셰어하우스 플라주'를 방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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