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도키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아들 도키오'를 읽었다. 

 최근에 발표한 작품은 아니고 200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예전에 창해 출판사에서 발간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비채에서 나온 건 번역자가 다르다. 다시 말해 새로 번역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꽤나 팔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때문에 우린 히가시노 게이고가 미스터리만이 아니라 인간미가 따스하게 흐르는 휴머니즘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들 도키오'는 그 전조(前兆)라고 해도 좋다. 사실 현재의 어떤 존재가 시간 이동을 통해 과거의 누군가를 치유한다는 기본 설정부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유사하다. 분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보여준 기적은 '아들 도키오'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엔 프롤로그가 있다. 주인공 미야모토 다쿠미는 발병하면 뇌신경이 차례차례 죽어버리는 무섭고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레이코와 그 사실을 잘 알면서도 결혼한다. 자신의 유전병을 물려줄 수 없기에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레이코의 말에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는 다쿠미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동의한다. 그러나 레이코는 뜻하지 않게 임신해 버리고 지우려고 하는 그녀에게 미야모토는 과거에 어떤 청년에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라는 말을 떠올리고 어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후회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행복해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설득하여 결국 아들 도키오를 태어난다. 그러나 건강하게 잘 자라나던 도키오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끝내 그 증후군에 걸리고 만다. 시간이 흘러 이제 완전히 의식을 잃어버린 도키오를 보면서 미야모토는 20년도 더 전에 자신이 아들과 만났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걸 마지막으로 프롤로그는 끝나고 우리는 20년 전의 젊은 미야모토 다쿠미를 만난다. 그런데 그의 모습은 현재와 너무나 다르다. 상대방의 어떤 결점도 사랑으로 다 받아들이며 늘 자신보다 남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결국 혼자일 뿐이야'라는 말을 철저히 신봉하며 한없이 타인을 불신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쿠미가 어느 날, 자신의 친척이라 주장하는 한 낯선 청년을 만난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자기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는 그가 당혹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느껴지는 묘한 친근감 때문에 다쿠미는 갈 곳이 없다고 말하는 그와 같이 지내게 된다.


 그 낯선 청년의 진짜 정체는 여기까지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쉽게 눈치챘을 것이다. 맞다. 아들 도키오다. 미래의 다쿠미가 아들을 보면서도 과거에 그와 만났다는 사실을 이내 떠올리지 못했던 것은 과거에 도키오가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다쿠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소설은 도키오에게 의식을 완전히 잃게 되면 유전병의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영혼이 되어 시간을 자유자재로 이동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몸에도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묘사한다. 소설은 다쿠미의 입장에서 진행되기에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정반대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서 아들 도키오가 받은 충격과 실망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든 도키오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낳은 상처를 찾아 치유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다쿠미에겐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생모와 이별하여 양부모 손에서 컸는데 처음엔 사랑을 다해 길러주었던 그 부모도 나중에 가서는 잔뜩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주었던 것이다. '결국 혼자일 뿐이야'는 외간 여자와 바람이나 피고 돈만 밝히는 남자로 전락해 버린 양아버지가 자주 하던 말버릇이었다.


 다쿠미는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을 아주 어릴 때 자신을 버린 생모 탓이라 여기고 가득 원망한다. 마치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에서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원망하던 장국영처럼... 아들 도키오는 그런 다쿠미와 생모를 화해시키려 중한 병으로 누워있다는 그녀, 도조 준코의 집까지 찾아가게 해보았지만 쉽지가 않다. 


 "그렇잖아. 이쪽은 가난한다는 이유로 버려졌다고. 버림받고, 관계없는 집에서 자른 끝에 결국 무엇 하나 남지 않았어. 그런데 버린 쪽은 가난한 다른 사람을 위해 열심히 살았다니. 열심히 살아 감사를 받고 있다니. 하느님 취급이잖아. 아이를 버린 여자가 말이야. (...) 정말 웃기네. 내 생애 최고로 웃기는 일이야."(p. 190)


 그런데 다쿠미의 여자 친구인 지즈루가 갑자기 사라진다. 

 처음엔 그냥 단순히 다쿠미에게 실망하여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으로 알았는데 오카베란 남자와 같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그 둘을 뒤쫓고 있는 수상한 녀석들이 잔뜩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소설 중반은 그렇게 다쿠미와 도키오가 사라진 지즈루를 찾아나서면서 깊이 엮이게 되는 미스터리한 사건과 도조 준코가 헤어질 때 건네준 누군가의 습작인 것 같은 만화책을 단서로 단 한 번도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다쿠미의 생부를 찾아가는 이야기로 이뤄진다. 독자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바라는 장르적 재미는 바로 이 부분에서 충족되는데, 이건 다쿠미 역시 마찬가지다. 다쿠미 또한 그 여정을 통하여 늘 원망했었던 불우한 출생의 사정을 이해하고 거기서 파생된 대충 오늘만 수습하며 무책임하게 살던 현재의 모습에서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나타나는 지는 소설을 통해 직접 확인하시는 게 좋겠다. 아울러 다쿠미가 어떻게 현재의 아내인 레이코와 처음 만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또 거기에 도키오가 어떤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 또한. 이런 식으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정말 마지막까지 독자의 흥미를 지속시킨다.


 이 소설을 통해 히가시노 게이고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도키오가 아버지 다쿠미의 멱살을 잡아 흔들면서 했던 말에 집약해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이 살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으면 죽음 직전까지도 꿈을 꿀 수 있다는 말이라고. 당신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미래였어. 인간은 어떤 때라도 미래를 느낄 수 있어. 아무리 짧은 인생이어도, 설령 한 순간이라 해도 살아 있다는 실감만 있으면 미래는 있어. 잘 들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그건 마음 속에 있어. 그것만 있으면 사람은 행복해질 수 있어. 그걸 알았기에 당신 어머니는 당신을 낳은 거야. 그런데 당신은 뭐야. 불평만 하고. 스스로 무엇 하나 쟁취하려 하지도 않아. 당신이 미래를 느끼지 못하는 건 누구 탓도 아냐. 당신 탓이야. 당신이 바보라서."(p. 396)


 그렇게 말한 뒤, 도키오는 자신은 태어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희귀한 유전병인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려 의식마저 깡그리 잃어버린 도키오가 말이다. 어떤 삶이든 지속할 가치가 있다. 미래라는 빛은 바깥 환경에서 자신에게 비춰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비춰나가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마음 깊이 절로 선명하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아들 도키오'가 발표된 때는 일본이 한창 '잃어버린 10년'이란 말을 외치고 있던 시기였다. 버블 붕괴의 후유증이 일본 사회를 그레고리우스 증후군에 걸린 것마냥 마비시켜 나가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거품에 대한 대비는 전혀 없이 그것이 주는 달콤한 꿀에 대한 탐닉만 존재했던 과거에 대한 원망과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에 대한 불안으로 압살시켜 갔던 다쿠미의 분신이 비일비재하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런 다쿠미들에게 자신의 소설을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위로와 응원을 전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과거의 다쿠미 시간대를 하필이면 제2차 오일쇼크가 터졌던 즈음으로 설정했던 건 아닐까 싶다.(이건 소설에서 스타워즈(그러니까 75년에 처음 발표된 영화말이다.)가 상영된지 4년이 지났다고 한 것에서 유추한 것이다.) 1치 오일쇼크에서 커다란 곤경을 겪었던 일본은 그 때의 교훈으로 2차 오일쇼크는 성공적으로 넘길 수 있었다. 그래서 거품 경제로 이어지는 80년대의 호황까지 이뤄냈다. 비록 붕괴라는 비극으로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젊은 다쿠미의 시간을 그 때로 정한 것은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