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변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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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으로 글을 시작해 보고 싶다. 나라는 정체성은 정말 어떻게 결정되는 것일까?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이들을 보면 뇌가 그것을 결정하는 것 같다. 지인도 잊고, 가족도 잊고, 끝내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리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뇌를 다른 사람에게 이식한다면, 이식된 그 사람 또한 뇌로 인해 뇌가 가진 정체성을 가져버리게 되는 것일까? 모든 장기 이식이 가능해진 이 시대에 뇌 또한 언젠가 이식되지 말란 법은 없기에 이런 호기심을 품어보는 것도 그리 몽상만은 아니리라. 그렇지 않아도 예전 어떤 책에서 심장을 이식 당한 이가 그 심장을 기증한 이의 부모에게 마치 자기 부모를 만나는 것만 같은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다. 기억과 사유가 불가능한 심장마저 그러하다면 뇌가 이식되었을 경우 정체성의 혼란 혹은 변화는 아무래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갑작스레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최근 이런 소재를 다루고 있는 소설 하나를 만났기 때문이다. 바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소한 변화'다.원래는 91년에 발표된 '변신'이라고 한다. 그것을 완전히 새롭게 번역하고 저자와 협의를 거쳐 '사소한 변화'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발간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주인공 나루세 준이치가 부동산 중개사 사무실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에게서 창문으로 도망치는 소녀를 구하려다 머리에 총을 맞고 사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나루세는 죽지 않았다. 도겐 박사가 세계 최초로 성인 뇌이식 수술을 성공하여 다른 이의 뇌를 이식한 채, 멀쩡하게 살아난다. 이대로 기적처럼 두번 째로 주어진 새로운 삶을 사랑하는 메구미와 함께 살아가나 했는데 살다보니 차츰 자신에게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나루세는 원래 그림을 좋아하고 메구미의 초상화를 즐겨 그렸었는데, 어느새 그림에게 관심이 없어지고 예전만큼 그림도 잘 그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예전에 아주 즐기며 보았던 영화들조차 이젠 아무런 재미를 느낄 수 없고 눈물을 흘리며 보았던 영화조차 따분하게 생각될 뿐이다. 변한 건, 취향과 능력만이 아니다. 성격까지 변해서 주위 사람과 별 트러블 없이 잘 지내던 그가 곧잘 타인들을 비난하고 폭력까지 휘두르게 된다. 자꾸만 예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자신에게 혼란을 느끼면서도 죽을 뻔했던 사건의 후유증이라 여기며 넘겼지만 더이상 그럴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메구미에 대한 마음이 변하여 이제 더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옆 방에 살고 있는 대학생이 하도 한심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 분노가 치밀어오른 커다란 살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칼까지 거머쥐고 들어가서 죽여버릴까 문 앞에서 서성일 정도로.


 제목처럼 더이상 사소한 변화로 치부할 수 없게 된 나루세는 이렇게 된 이유가 뇌 이식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이식된 뇌가 누구의 것인지 알아내려고 한다. 그러나 도겐 박사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것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한 도겐 박사의 반응에 더욱 의혹을 가지게 된 나루세는 혼자 힘으로 뇌를 기증한 자를 찾아나선다. 그리고 아주 충격적인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나루세 준이치는 뇌를 통째로 이식당한 것은 아니다. 그저 회생시킬 수 없는 일부를 이식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이치는 변화를 느낀다. 점점 더 기증자의 취향과 성격이 되고 기증차럼 행동하고 생각하게 된다. 육체는 온전히 준이치의 것이지만, 그는 사라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뇌는 그냥 뇌일 뿐이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도 10만 분의 1이라는 기적의 확률로 다시 얻게 된 삶이니만큼 그냥 삶의 새로운 출발이라고 받아들이면 안되겠느냐고 말하는 도겐 박사에게 준이치가 이렇게 절규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당신은 몰라. 뇌를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지껄이는 당신은 말이야. 뇌는 특별한 거야. 당신이 상상이나 할 수 있어? 오늘의 나와 어제의 내가 달라. 내일 눈을 뜨면 거기 있는 건 오늘의 내가 아니지. 먼 과거의 추억은 전혀 다른 사람 것이 되고 말지.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아. 오랜 시간을 들여 남겨온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려. 그게 어떤 건지 아나? 가르쳐줄까? 그건... (...) 그건 죽음이야. 살아 있다는 건 그저 숨이나 쉬고 심장이 뛰는 게 아니야. 뇌파가 나온다고 살아 있는 게 아니라고. 산다는 건 발자국을 남기는 거지. 뒤에 남은 발자국을 보며 저건 분명 내가 낸 거라고 알 수 있어야 살아 있는 거야. 하지만 지금 나는 예전에 남긴 발자국을 봐도 내 것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 이십 년 이상 살아온 나루세 준이치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고."(p. 270)


 자신은 사라져버릴 것이라며 준이치가 예견한 그대로 준이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다. 원래 제목 그대로 '변신'하는 것이다. 파리 하나 죽이지 못했던 그가 단지 시끄럽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개의 목을 자르고 끝내 살인까지 저지르게 된다. 운명은 가혹하게도 10만 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난 기적을 그대로 저주로 바꿔버린 것이다. 도대체 누구의 뇌이기에 준이치를 차가운 살인마로 만들어버린 것일까? 과연 준이치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러는 가운데 이제 준이치의 살의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인 히무라 메구미에게로 향한다.


 일본에서 100쇄나 찍고 무려 125만 부나 팔린 작품답게 꽤 흥미롭고 재밌는 작품이다. 뇌 이식이라는, 다소 공상과학적인 설정이지만 탄탄한 리얼리티로 독자를 무리없이 그 세계에 안착하도록 하고 있으며 타인의 뇌 이식과 관련된 정체성 혼란의 문제도 나루세 준이치를 둘러싼 일상의 변화와 심리의 세세한 묘사를 통해 독자 피부에 와 닿도록 만들고 있다. 때문에 후반에 가서 이뤄지는 나루세 준이치의 청천벽력 같은 변화도 그리 허황되게 여겨지지 않는다. 뇌 이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정체성 때문에 여러모로 조던 필의 영화 '겟 아웃'이 연상되는데, '사소한 변화' 또한 그 영화만큼 흥미로운 텍스트이니 그 영화가 마음에 들었다면 이 소설 또한 만나볼 것을 권한다.


 그리고 도겐 박사의 이름 때문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혹시 이 소설을 오마쥬 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하게 되었다. 바로 '양서류 인간'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SF 작가인 알렉산더 벨라예프의 '도웰교수의 머리'라는 소설이다. 


 우리나라엔 70년대에 아동용 SF로 이렇게 소개된 적이 있다.

그 때의 홍보 문구가 '죽었어야 할 도웰 박사가 머리만 살아 있다니!'였다.


 벨라예프의 데뷔작으로 러시아에서 영화까지 만들어진 바 있다. 거기서 죽은 인간을 되살리기 위해 뇌를 연구하는 학자가 바로 도웰 교수다. 뇌를 통해 죽은 자를 되살린다는 점에서 둘이 하고 있는 일도 유사하므로 '도겐'이란 이름은 이 '도웰'에서 따오지 않았을까 한다.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이다. 그런데 비슷한 건 이 하나만은 아니다. 그 소설에서 권총에 맞아 숨져 나중에 머리만 다시 살아있게 되는 카페의 댄서, 빌케는 나루세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과정과 비슷하고 또한 그 빌케는 나중에 다른 어떤 여성의 신체와 접합하여 온전한 육체를 소유하게 되는데 그 원래 신체의 주인은 화가였고 빌케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도 '사소한 변화'의 설정과 닮아 보인다. 이 정도라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 작품을 쓰면서 벨라예프 작품에 영감을 받았다고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 같다. 그렇다고 이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말길 바란다. 그저 '사소한 변화'를 좀 더 재밌게 즐기기 위한 조미료 같은 거라 생각해주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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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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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명 역사에는 골방이 존재한다. 누군가로부터 헤아림의 빛이 단 하나도 들지 않았던 곳이 말이다. 거기에 은둔하는 자들이 있다. 그 어떤 기록에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지 못하고 마냥 잊혀져버린 존재들이. 영국의 작가 세라 워터스는 그러한 골방의 문을 열어젖히는 사람이다. 손전등을 그 안에 비추는 사람이다. 가려졌던 그들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잊혀졌던 그들의 삶을 주시하기 위하여. 그렇게 빅토리아 시대에 쉽게 무시되었던 남장한 여성 배우의 삶을 훑었고(벨벳 애무하기) 금기시 되었던 레즈비언의 삶을 세밀히 복원하였다.(핑거스미스)


 이번에 나온 ‘나이트 워치’는 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다. 1941년과 44년 그리고 47년의 일들이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된다. 해롤드 핀터의 희곡인 ‘배신(Betrayal)’처럼 말이다. 우리는 주요한 등장인물인 케이와 헬렌 그리고 비브와 덩컨의 미래를 먼저 보고 나중에 그들의 과거를 본다. 이건 케이의 말로 시작되는 첫문장인 ‘결국. 이런 인간이 되었단 말이지.’의 연원을 찾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케이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했던 말, “영화 중간쯤에 들어가 후반부를 먼저 볼 때도 있고. 뒤를 먼저 보는 편이 더 좋더라. 보통 사람들의 미래보다는 과거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잖아.(p. 145)”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2차 세계 대전이란 전쟁을 다루지만 우리가 다른 전쟁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았던 것은 이 소설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라 워터스는 이전에 전쟁을 다룬 작품들이 잘 시선을 던지지 않았던 곳으로 독자를 인도한다. 전쟁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사회가 죄악시 하는 탓에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공공연하게 드러낼 수 없었던 존재들에게로. 그리하여 우리는 남 앞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나타낼 수 없는 동성애자 케이와 헬렌을 만나고 유부남과의 불륜으로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비브와 남자라면 누구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전쟁터로 가야 한다고 당연하게 여기는 당시 상황 속에서 병역을 거부한 덩컨을 만나게 된다.

 다름 아닌 골방의 존재들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쟁 상황에서 예외가 된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전쟁 중심에 있는 자와 다를 바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성향과 신념에서 촉발된 오직 자신만의 전쟁을 말이다. 정녕 그건 전쟁이었다. 언제든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는 타인의 시선은 날아오는 총탄과 똑같았으며 그 비밀이 밝혀질 경우 타인의 돌변으로 인간 관계가 깡그리 깨어지는 것은 갑자기 터지는 폭탄과 다름없었다. 그들은 결코 전쟁을 피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더 혹독하게 전쟁을 치뤄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생각이 미쳤기에 빅토리아 3부작을 끝낸 세라 워터스가 돌연 2차 세계 대전의 시간 속으로 들어와 그들이 움트고 있었던 골방의 문을 열어젖혔던 것은 아니었을까? 


 골방은 고립의 장소다. 사회가 찍은 낙인 때문에 자신의 성향과 신념을 비밀로 간직해야 하는 사람은 무연의 고립 속으로 자신을 밀어넣지 않을 수 없다. 



 ‘그건 단지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고, 느껴서는 안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과 같은 거야.’(p. 568)



 비밀이 드러났을 경우 다른 이들로부터 받게 되는 고통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연히 타인의 시선과 소리에 예민하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 속 인물들도 자기 주위의 상황과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들은 늘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살펴보고 지금 어쩌고 있는지 소리를 통해 추정한다. 


 그런 면에서 야간 순찰을 뜻하는 제목인 ‘나이트 워치’는 그들의 처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야간 순찰을 하는 자는 주위를 꼼꼼히 주시하고 들려오는 모든 소음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자기가 아니라 그 외부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살피는 존재다. 그만큼 바깥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자이기도 하다. 야간 순찰은 자신이 정주하는 곳을 지키기 위하여 도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솔직히 내보여도 안심할 수 있는 곳을 만들거나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순찰만 돌다보면 그런 곳을 마련할 여지가 없다. 타인이 가져올 잠재적인 위협에 불안하여 늘 그것만 살피다간 언제까지나 맴돌기만 할 뿐인 것이다.

 정작 자신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알지도 못한 채.


 1947년의 케이와 헬렌, 비브와 덩컨 모두가 그와 같았다.


 골방에 있다는 건 그들이 '온전한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뜻도 된다. 케이는 레너드 선생이 일하는 라벤더 힐의 방 하나를 빌려 지내고 있으며 과거 케이의 연인이었던 헬렌은 지금은 줄리아와 셋방에서 지내고 있다. 이 방들은 모두 방음이 전혀 안되어 옆방의 소리를 훤히 들을 수 있는 장소다. 그러므로 이쪽에서도 당연히 들리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드러낼 수 없는 비밀을 알게 만드는 소리라면 더더욱. 방이 방이 아닌 것이다.


 비브는 집에 있는 모습을 거의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그녀의 모습이란 마치 집이 아예 없는 듯,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게 대부분이다. 


 비브는 그게 재밌으면서도 한편으론 짜증스러웠다. 아마도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아 더 의식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레지와는 이렇게 어딜 돌아다닌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이트클럽이나 레스토랑에 가본 적도 없고 그저 외진 곳만 줄기차게 찾아다녔다.(p. 181)



 덩컨은 병역 거부로 인해 교도소에 있었을 때, 가장 친절한 교도관이었던 먼디의 집에 얹혀 살고 있다. 세라 워터스는 이들에게 왜 이런 상황을 가져다 주었을까? 그 이유를 우리는 헬렌의 말에서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동성애 때문에 사랑으로 인한 고민과 상처를 늘 숨기고 안 그런 척 연기를 해야 하는 헬렌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는 순간을 애타게 바라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마치 전처와 후처 사이처럼 한 사람에 대한 비밀을 공유하고 싶었다. 이런 얘기는 그 누구한테도 한 적이 없었다. 케이와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옛 친구들과는 멀어졌다. 아니면 케이에 관해서는 비밀로 했다.’(p. 362)



 소설에서 이란 바로 그런 장소다.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나타내는. 일종의 해방구라고도 할 수 있다. 케이도, 비브도, 덩컨도 그걸 바란다. 그들은 그걸 찾기 위해 야간 순찰을 계속 하지만 케이의 이 말 그대로 현실은 부정적인 결과만 보여줄 뿐이다. 47년의 케이가 여성을 유혹할 때마다 거부를 당하는 것처럼.


 “무너지는 중이야.” 케이가 말했다. “진짜로 바람이 세게 분다 싶으면 집이 흔들리는 게 느껴져. 집이 신음하는 소리도 들리고. 곡 바다 한가운데 있는 것 같아. 그게 용케도 버티고 서 있는 건 전적으로 선생 덕분이야. 순전히 정신력으로 그 집을 떠받치고 있는 거지.”(p. 146 ~ 147)



 그들은 모두 집을 잃었다. 44년의 케이가 구급대원으로 가장 많이 목격했던 것도 독일의 폭격으로 파괴되어 버린 집의 잔해였다. 사회의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들을 받아들이면서 인간다운 연민과 진솔한 유대를 나눌 수 있는 장소들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을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하필이면 44년의 줄리아와 헬렌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한다. 거기서 줄리아는 아버지와 함께 이제는 더이상 집이 될 수 없는, 그저 잔영에 불과한 빈집들을 살피러 돌아다니고 헬렌은 집이 무너져 살 곳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그들이 삶을 다소나마 복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을 한다. 줄리아의 일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여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줄리아는 오히려 가득한 허무와 통렬한 슬픔을 확인할 뿐이다.


 나는 이 전쟁이 아름다움 보다는 야만성에 대한 애호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세인트폴 대성당으로 대변되는 그 정신은 희미해졌어요. 이젠 금박처럼 다 들떠서 벗어져나간 거죠. 지난번 전쟁에서 세인트폴이 우릴 지켜주지 못했다면,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도 우릴 지켜주지 못한다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우리가 성당을 지키기 위해 죽어라 싸워야 한다면 이게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져야 하는 거죠?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 얼마나 크게 자리해야 하는 건데요?(p. 473)


 헬렌 역시 집을 잃은 이들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해 주는 게 일이었으나, 상담하러왔던 여성의 이 말처럼 헬렌이 하고 있는 일은 사실 그들을 늘 여기저기로 떠도는 불쏘시개로 만들 뿐이다.


  그래도 여자는 자기 손에 든 서류 쪼가리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난 불쏘시개인가봐요.” 여자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냥 불쏘시개 같아서.”(p. 372)


 이 둘이 치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건 모두 자기 내부에 구원할만한 힘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이 더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이다. 헬렌의 이와 같은 고백처럼.


 첫 대공습 때는 사람들을 일일이 다 도와주려 애썼다. 어떨 땐 자기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을 무심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약한 자들을 돕는 영웅이라도 된 양 일에 덤벼들었는데, 하고 헬렌은 씁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에 대한 생각밖에 남지 않는다.(p. 472)


 나중에 이 둘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장소가 많은 교회(지켜야 할 성스런 가치의 상징으로써)가 무너진 폐허이며 빛이 거의 없는 어둔 장소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줄리아는 거기서 자신들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는데, 자기 내부에 상황을 개선할 아무 동력도 만들어낼 수 없는 자신들에게 참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그러고 있을 때, 케이는 부지런히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다. 줄리아와 헬렌은 전쟁을 핑계로 점점 자기가 싫어하는 모습이 되는 걸 정당화했지만 케이는 전쟁을 핑계대지 않았다. 줄리아와 헬렌은 바깥의 작은 소음에도 긴장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바짝 죽였지만 오히려 케이는 바깥의 소란을 찾아 다녔다.


 나는 그냥 집에 들어앉아 소란을 듣는 것보다 이렇게 그 소란통에 나와 있는 게 더 편할 뿐이에요.(p. 655)


 결정적으로 케이는 레지조차 버리고 달아났던 비브의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레지라는 거짓의 집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던 그녀에게 거기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가 되어 주었다. 그 때의 케이는 구원을 만들어내는 발전기를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헬렌의 생일날 헬렌에게 선물했던 진줏빛 새틴 잠옷은 그것의 총화라 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헬렌 또한 그 잠옷에서 비로소 집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47년의 헬렌이 점점 더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줄리아 때문에 번민할 때 그것이 문득 자신이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잠옷으로 떠올랐던 것을 보면.


 그 진줏빛 새틴 잠옷이 떠올랐다. 줄리아의 옆에서 손가락 하나 닿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홀로 누워 돌이켜보니, 그게 지금까지 그녀가 본 중에 가장 아름다운 잠옷이었다.(p. 213)



 이런 대비는 교도소에서 같은 방을 썼던 덩컨과 프레이저 사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둘은 서로가 속한 계층도 하류와 상류로 전혀 다르고 하루를 보내는 모습 또한 아주 차이가 난다. 덩컨은 말없이 한 곳에 우두커니 정지해 있을 때가 많지만 프레이저는 끊임없이 떠들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사회 측에서 보자면 보통 뭐든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상류계급(교도관들도 그가 왜 이 곳에 와 있는지 알 수 없어 한다.)에다 많이 말하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쪽을 존재감이 더 크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그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덩컨은 아무래도 존재감이 엷다고 여긴다. 교도소의 다른 이들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덩컨은 겁이 많고 허약하다고. 하지만 독일이 교도소를 폭격했을 때, 사실 겁이 많고 존재감이 약했던 것은 프레이저였다.


  나는 진심으로 내 신념을 믿는 걸까? 아니면 그냥… 단지 한심한 겁쟁이일까?

 하지만 병역거부자들도 알아. 피어스 우리도 두려움을 느껴… 한 편에는 씩씩하게 싸우러 나가는 제일 흔한 타입의 남자들이 있지. 그들이 바보라서 덜 용감한 건 아니잖아? 전쟁이 끝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내가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 같아? 그런 사내들 덕분에 내가 여전히 살아 있을 거라는 걸 알면서? (p. 575)


 누구보다 약해 보였던 덩컨은 오히려 아무런 동요 없이 프레이저를 위로하고 안심시킨다. 덩컨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자신을 얽매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묵묵히 충실했기 때문이다. 비웃는 프레이저에게 자신이 열심히 변호한, 30년 째 같은 자리를 지키며 똑같은 일을 수행하고 있는 교도관 먼디처럼.


 그렇게 케이와 덩컨은 자기 안에서 지탱할 힘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런 이들만이 자신과 비슷한 존재와 같은 집에 살게 한 설정도 의미심장해 보인다. 케이는 레너드 선생과 덩컨은 먼디와 함께 산다. 레너드와 먼디 모두 바깥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자리를 꾸준히 지키며 제 할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케이는 레너드만이 다 무너진 집을 유일하게 지탱하고 있다고 말하며 별 건 없지만서도 찾아오는 이들에게 가장 집 다운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것도 오직 먼디 뿐이다. 그런 레너드는 헬렌을 잃은 뒤, 자신이 가진 내부의 힘을 상실하고 좌절의 야간 순찰을 계속하고 있는 케이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제가 보기에 랭그리시 양도 그런 영혼 중 하나입니다. 당신은 무언가를 찾는 중이지만, 아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요. 그건 당신이 눈을 내리깔고 찾기 때문입니다. 흙먼지밖에 안 보이잖아요. 눈을 들어야 합니다. 이내 사라질 것들로부터 눈을 들어 멀리 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p. 228)



 이건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현혹되어 비관하거나 주눅들지 말고 언제나 눈을 들어 멀리 있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었던 과거의 케이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다. 먼디 또한 상황에 대해 똑같은 조언을 한다.


 어떠한 생각도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몸에 이상이 있다는 생각이 당신을 잠식하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장애는 존재하지 않아요. 조화의 힘이 당신과 당신의 모든 장기에 퍼져 있다고 단언합니다.(p. 23)

 

 상황에 굴하지 마라.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과 마주하여 스스로 한없이 무력해보여도 그것에 널 쉽게 휩쓸리게 해선 안된다. 내가 보기에 레너드와 먼디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는 케이와 덩컨 모두에게 과거의 자신을 회복시키는 주문과 같았다. 그랬기에 케이는 불현듯 비브가 넣어 준 반지를 통해 이처럼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반지는 어스레하게 반짝거렸다. 담뱃재 틈에서도 자꾸 시선을 끄는 통에, 얼마 안 있어 케이는 다시 반지를 잿더미에서 꺼내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앙상한 손가락에 끼운 뒤 빠지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p. 229)


 덩컨 또한 어느새 사회에 길들어져 타인의 시선에 휩쓸려 오도가도 못한 상황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바라는 쪽을 선택하는 결단을 순식간에 내릴 수 있었다. 그 밤의 산책을 통해 덩컨은 '보여지는 자'에서 '보는 자'로 나아간다. 그러자 오로지 위협적인 것만 가득했던 세상이 어느새  새롭고 놀라운 것으로 가득차(p. 221) 있는 것을 보게 되며 드디어 프레이저가 암막을 걷고 열어준 창문을 통해 새로운 집으로 들어가게 된다. 세라 워터스는 마치 덩컨이 비로소 집을 찾았다는 듯이 여기서 그들을 찍는 카메라를 멈춘다. 이와 같이 자신을 자꾸만 불안한 야간 순찰꾼으로 만드는 상황을 타개할 힘은 나의 바깥 어딘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내부에 있다.


 41년의 비브를 보라. 그 때의 비브 또한 케이, 덩컨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을 만들 수 있는 힘을 내부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지를 달리는 열차의 화장실에서 처음 만났다. 아주 좁은 화장실이었지만 그조차 사랑을 나누는 집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이 그녀에겐 있었다. 물론 그 즉흥적이며 사소한 결정이 훗날 자신의 삶을 여지없이 칭칭 얽어매긴 했지만. 


 아무튼 좁은 화장실과 둘이 열정적으로 나누는 사랑의 대비는 마치 원효 대사의 '일체유심조'처럼 상황이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리 강하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누나와는 반대로 알렉이라는 집을 잃게 되는 덩컨은 이를 더욱 명확하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일은 덩컨의 집에서 일어났다. 덩컨의 가족만이 사는 온전한 집이다. 하지만 그 일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덩컨이 집을 잃었던 이유와 비브가 찾았던 집이 훗날 변질된 이유는 많이 다르지 않다. 모두 상대에게 자신을 너무 매여두고 있었던 탓이다. 영원히 자신의 집을 찾지 못해 늘 불안한 헬렌이 그러하듯. 


 그 어떤 상황에 있다고 하여도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말고 나를 위한 그가 아니라 그를 위한 나를 더 많이 보도록 하는 것. 내게 '나이트 워치'는 바로 이 말을 우리 심장 깊이 새겨두기 위한 여정으로 보인다. 사실 인간은 그리 강하지 않기에 환경의 영향을 참 많이 받는다. 자주 우리는 자신의 힘을 넘어선 상황을 핑계대며 무력한 스스로를 정당화 하기도 한다. '남들은 다 하고 있는데, 나 하나 달라진다고 해서 표가 나겠어?'라는 생각으로 옳은 선택을 하려는 우리의 발목을 스스로 얼마나 많이 잡아왔던가?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이트 워치'가 하고자 하는 말이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처지가 가져다 주는 한계로 날 정당화하며 타인을 이용하여 나의 안전 확보를 도모하면 할수록 우리는 정주할 집을 얻기는 커녕 한없이 계속되는 불안한 야간 순찰 속에서 스스로를 더욱 좁디 좁은 골방으로 내몰 뿐이다. 세라 워터스는 우리가 자신을 골방 속에 가두는 존재가 아니라 케이처럼 골방에 갇혀 있는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는 자가 되길 원한다. 자신이 역사에서 그러했듯이. 


 이것이 오직 소설의 인물들처럼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사실 우리 모두는 무한 경쟁 사회 속에서 때로는 남에게 뒤쳐질까 혹은 나도 모르게 조직에서 낙오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어느 정도는 야간 순찰을 하고 있는 형편이 아니던가. 이런 현실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다면 그 사슬을 끊는 시작을 '나이트 워치'로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어느새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마저 광장으로 이끌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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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등산일기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1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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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을 오르는 일은 자주 삶에 비유되어 왔다. 아마도 그 여정이 인생만큼 힘들고 정상이라는 종착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백'으로 유명한 미나토 가나에의 새 소설을 만났다. 제목이 '여자들의 등산일기'다. 갑자기 그녀의 소설 '백설공주 살인사건'이 생각난 건, 혹시 이 소설도 그 소설처럼 인터넷 네트워크가 무대가 벌어지는 살인극이 아닐까 생각되어서였다.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내게는 미나토 가나에와 살인을 떼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살인은 나오지 않았다. 소설은 제목처럼 정말 여자들이 등산하는 이야기였다. 제목의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일본에서 등산 붐이 일어나자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등산 정보들을 공유하는 인터넷 네트워크가 하나 생겨났는데, 그 이름이 바로 '여자들의 등산일기'였다. 소설은 모두 8장에 걸쳐 각각 다른 사람의 등산 여정을 그리고 있다. 일본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주로 일본 100대 명산에 속하는 산 중의 하나가 무대로 때로 그것은 영화 '반지의 제왕' 로케이션 장소로도 유명한 뉴질랜드의 '통가리로'까지 확장된다. 이 쪽이 꽤 유명한 트래킹 장소이기도 해서 나도 꽤 관심이 있었는데 이번에 소설로 만날 수 있어 반가웠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산들은 이렇게 목차에 지도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의 무대가 되는 산의 위치를 확인하고 읽으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시작을 여는 것은 묘코 산을 올라가는 에토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백화점 매장 일을 하는데 하루는 그 백화점에서 최근 거세게 일어난 등산 붐을 노리고 주최한 '아웃도어 페어'에서 '대너 등산화'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 등산화로 인해 생전 처음 등산까지 감행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직장 동료이자 해마다 한 번은 산에 오른다는 마키노의 권유로 100대 명산 중 하나인 묘코 산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등산은 본의 아니게 가장 짝을 이루고 싶지 않은 직장 동료 유미와 단 둘이 가게 됨으로써 먹구름이 일어난다. 에토가 유미를 꺼리는 이유는 그녀가 직장 상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 역시 지금 남자 친구와의 결혼 문제 때문에 고민이 깊다. 그녀는 지금 누리는 삶의 모습을 결혼으로 그다지 바꾸고 싶지 않은데 남자 친구가 하는 걸 가만히 지켜 보니 아무래도 많은 변화가 초래될 것 같은 것이다. 첫 단편은 앞으로 '여자들의 등산일기'가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지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단편들 역시 이 단편처럼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깊은 고민이 함께 엮여져 나오는 것이다. 


 두번 째 단편에서 히우치 산을 맞선 파티에서 만난 남자, 간자키와 함께 오르는 미쓰코 역시 그러하다.

 하고 다니는 스타일 때문에 자주 '거품 경제의 잔재'란 말을 듣는 그녀는 사실 거품 경제가 한창일 때 대형 증권 회사에 근무하여 그 거품의 혜택을 누린 바 있다. 그러나 그 때 그녀는 회사가 원하는 모습에 맞춰 진짜 자기 자신을 잃어야했다. 이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자기 외모에 아직 남아 있는 과거의 자신을 어떻게 해야할까 고민에 빠진다. 


 세번 째 산인 야리다타케를 오르는 건, 첫번 째 단편에서 에토에게 등산을 권유한 마키노다.

 그녀는 등산 취미를 가진 아버지에 의해 어릴 때부터 등산을 해 왔고 지금도 꽤 중요한 취미가 되어 있다. 그런 그녀에게 늘 남는 아쉬움이 있으니 그게 바로 야리가타케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일이다. 지금까지 두 번 도전했는데, 번번이 타인 때문에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내려와야했다. 때문에 더욱 혼자만의 산행을 제일이라고 여기게 되었는데 모처럼 일어난 등산붐을 타고 그녀는 다시 세번 째로 정상에 도전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산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타인들이 발목을 붙잡으려 하는데, 과연 그녀는 다시 한 번 혼자만의 산행을 최고로 여기게 될까?


 네번 째는 성격이랑 사고 방식이 자신과 정반대인 언니와 함께 리시리 산을 오르는 노조미가 주인공이다. 가족 이벤트를 열 때마다 늘 비가와서 '비를 부르는 일가'에 속한 그들답게 이번 산행 역시 비가 온다. 우천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등산에서 노조미와 언니는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러나 그 내면의 진심은 어떠한지를 서서히 산에서 느끼는 자유로움 속에서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다. 이렇다하게 내세울만한 직업 없이 살아가는 노조미는 의사 아내로서 자기 보다 훨씬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던 언니가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마지막에 가서 알게 된다. 형부가 이혼해 달라고 했던 것이다.




 다섯 번째는 그 언니의 입장에서 진행된다. 이번엔 딸 나나코까지 가세하여 시로우마다케를 오르는 등산에서 언니는 어떻게 이혼에 이르게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온전히 깨닫게 된다. 상황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자기 곁에 누가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네번 째 마지막의 문장들 그대로...


 "맑은 날은 누구랑 함께 있어도 즐겁지. 하지만..."

 끝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비가 내려도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p. 189)


 여섯번 째, 긴토키 산은 첫번 째 단편에서 에토와 함께 오르기로 해놓고 개인 사정으로 빠져 버린 리쓰코가 주인공이다.

 원래 그녀는 우수한 배구 선수로 일본 제일을 노렸지만 발목 부상으로 그 꿈을 접어야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어느새 삶을 게임의 미션을 치르듯 영위하면서 늘 자신의 삶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져버렸고 그건 산마저 일본 제일을 고집하는 것으로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왜 에토와 유미가 일본 제일인 후지산을 가지 않는지 그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리쓰코는 남자 친구 다이스케에 의해 삶은 정상을 추구하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누리는 데 의미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일곱번 째는 드디어 뉴질랜드 통가리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 네번 째 단편에서 노조미가 자기 친구라고 언급했던 유즈키가 주인공인데, 거기서 잠깐 언급되었던 여행사를 다니다 갑자기 관두고 모자 만드는 일을 하게 된 연유가 여기서 밝혀진다. 사실 그녀에게 있어 이번 통가리아 트래킹은 두번 째인데, 처음엔 남자 친구와 같이 왔었다. 삶이 선사하는 예측 불허의 상황을 한껏 껴안고 변화를 즐겼던 그가 끝내 그런 자신의 모습을 접어야 했던 상황과 새로운 삶에 도전하게 된 그녀의 모습이 과거와 현재로 교차하며 전개된다. 그러면서 두번 째에 등장했던 미쓰코와 간자키, 세번 째 등장했던 마키노 또한 같이 출연하여 그들의 달라진 모습을 통해 올라갈 때마다 달라지는 산의 풍경과도 같은 삶의 변화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은 다시 노조미가 등장한다. 늘 누군가와 함께 등산했던 그녀는 이번에는 혼자 가라페스에 오른다. 거기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 앞에선 얼마든지 혼자 잘 지낼 수 있다고 선언했던 그녀가 사실은 혼자 잘 있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 앞에 놓인 외로운 길은 앞으로 가게 될 고독하고 불안한 미래의 삶이었고 그런 그녀의 산행은 우려와 고민을 곱씹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산행을 하면서 우연히 만난 이들이 나눠주는 '맑음' 속에서 삶은 결과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순간의 과정 속에서, 자신이 기르는 양파 밭처럼, 늘 새롭게 일구어가는 것이라는 걸 체감한다.


 이처럼 '여자들의 등산일기'는 우리와 그리 멀리 있지 않은 삶과 관계에 대한 고민을 등산을 소재로 풀어나간 작품이다. 

 주인공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등산하는 과정을 거의 실시간으로 전하는 것 같은 형식이라서 이야기에 더욱 몰입토록 만든다. 거기다 현장 취재를 세밀히 하는 미나토 가나에답게 산의 묘사 또한 디테일하게 잘 살아나 있어 마치 주인공 곁에서 함께 등산하는 기분도 맛볼 수 있다. 아마도 이 책을 읽으면 분명 등산이 하고 싶어질 것이다. 마침 바깥 나들이 하기 딱 좋다는 5월이 아닌가. 읽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책을 덮고 멀리 있는 산을 바라보거나 당장 거기로 발길을 옮길지 모른다.


 솔직히 등산을 그리 즐겨하지 않는다. 그래도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2박 3일에 걸쳐 지리산을 종주했던 기억은 각별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도 나오던데, 진짜 등산은 산을 오르는 게 아니라 능선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지리산 종주할  때가 딱 그랬다. 하루 종일 발 아래로 아득하게 펼쳐진 풍경을 보며 걷는 건 정말 진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8월인데도 너무나 추워서 바들바들 떨면서 올려다 보았던 세석 밤하늘의 별들도. 어쩌면 그러한, 일상에서도 도저히 만날 수 없는 낯선 풍경의 파노라마가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삶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원동력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조미와 언니를 하나되게 했던 그 풍경처럼. 

 두 번이나 도전했는데도 나 역시 마키노처럼 천왕봉 일출을 보지 못했다. 언젠가 나 역시 마키노처럼 그걸 이룰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삶의 변화를 앞두고 고민 중인 분들에게 이 소설을 기꺼이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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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마 탄두리
에르네스트 판 데르 크바스트 지음, 지명숙 옮김 / 비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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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만들고 싶어한다. 

 무대 중앙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길 원하지 그 바깥 어둠에 가려진 채로 조용히 박수만 치는 관객은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네델란드 작가 에른스트 환데르 크봐스트의 소설, '마마 탄두리'는 이런 존재감에 대한 소설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여긴다. '마마 탄두리'는 작가의 엄마를 가리킨다. 이 소설은 실제 엄마를 그대로 형상화한 자전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는 인도 사람이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간호사로 네델란드에 왔다가 작가의 아빠가 첫 눈에 반하여 오랫동안 구애를 한 끝에 결혼하여 네델란드에 머무르게 되었다. 보통 이방인은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다른 이보다 더 타인에 대해 신경쓰며 그 사회에 잘 섞여들기 위해 가급적 자신의 존재감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편인데, 우리의 마마 탄두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디에 있든 자신의 고향 땅이나 다름없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존재감을 마치 확성기를 입에 대고 부는 것처럼 마음껏 과시하는 것이다. 주로 인도 전통 요리를 만들 때 사용하는 화덕을 가리키는 '탄두리'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단적으로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작 두 개의 여행 가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네델란드로 왔으면서도 온 동네 사람들이 죄다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탄두라 화덕에 닭고기를 구워대는 게 바로 그녀인 것이다. 소설은 아들인 작가가 듣거나 보았던, 엄마가 자신의 존재감을 남들에겐 민폐가 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한껏 발산하는 모습을 다양한 에피소드로 담아낸다. 실제로 만난다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것이지만 소설이 가져다 주는 적당한 거리가 유머를 자아내기도 한다.




 어쨌든 마마 탄두리는 그런 식으로 평생 자신의 존재감을 가감없이 나타내며 살아왔다.

 네델란드인 아버지는 전립선 암의 권위자로 저명한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엄마 앞에서 꼼짝 못하며 거의 그림자처럼 살아왔다. 작가는 그렇게 존재감 강한 엄마와 별로 없는 아빠 사이에 있었다. 이건 지적 장애 탓으로 어디로 가든 엄마와 똑같이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큰 형, 아쉬르바트와 얌전하여 아빠만큼 자신의 존재감을 그닥 드러내지 않는 둘째 형 요한 사이이기도 했다. 작가는 원래 아주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시도 때도 없이 고래고래 울부짖어 인도 가족들이 '투투 베이비'라는 별명마저 지어줄 만큼. 그렇게 그 또한 원래는 엄마의 궤도 위에 있을 존재였으나 두 사람을 통해 점점 거기서 이탈해 나간다. 하나는 볼리우드 배우인 샤르마 이모부고 다른 하나는 헤르버르트 삼촌이다. 샤르마 이모부는 수없이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진 못했지만 그 배후에 있더라도 누구보다 더 크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휘한 인물이다. 그것을 통해 작가는 굳이 자신이 내세우지 않아도 그렇게 누군가의 등 뒤에서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존재감을 보란듯이 내세우는 사람 이상으로 크게 나타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건 아빠를 다시 보게 되는 길이 되기도 했다. 엄마에 가려 한없이 작은 존재감을 가진 아빠였지만 사실 엄마가 일으킨 모든 소동과 분란의 뒷감당을 중재하고 해결한 사람은 정작 아빠였던 것이다.


 아버지가 테오에게 임금을 계산해주었다. 그동안 많은 인부들에게 그렇게 뒷손질을 해온 것처럼. 그는 노상 어머니와 칠공들, 배관공들, 목수들 그리고 청부업자들 사이에 끼어들어 쌍방을 화해시키곤 했다. 법정 소송으로까지 끌고 간 사건도 있었다. 아버지는 전립선암 연구의 많은 시간을 이런 일들에 허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p. 250 ~ 251)


 존재감은 그렇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성과가 아닌 역사로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란 걸, 작가는 깨달은 것이다. 헤르버트르 삼촌 또한 존재감은 타인의 인정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나다워질 때 형성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누가 정해준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구축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나갈 때 자기 존재감이란 영토는 제국이 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이 두 사람이 열어준 문을 통해 엄마의 식민지에서 나올 수 있었고 작가라는, 그의 입장에선 독립국 선언이라고 해도 좋을, 정체성을 드디어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스스로 그토록 자신의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지만 그 끝에 결국 무엇이 있는지 엄마보다 더 강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스린 이모를 통해 적나라하게 목격한 탓이기도 했다. 그건 바로 슬픔이다. 우리가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는 동기의 궁극엔 상대방의 인정을 통한 타인과의 연결에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일방적 드러냄을 연결은 커녕 오히려 고립만 심화시킬 뿐이었다. 고독의 우리에 유폐시켜서 나날이 자기가 바라는 것과 전혀 다르게 자꾸만 줄어드는 자신의 존재감을 마주하게 할 따름이었다. 남는 것은 처량한 기만이었다. 빈 주머니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마치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양 더욱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에서 진하게 풍겨 오는...


 나는 침대로 가서 그녀 곁에 앉아 그녀의 얼굴을 본다. 눈 아래 거무스름한 반점들, 그녀에게도 있는 솜털들. 그 순간, 나는 내가 느낀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깨닫는다. 슬픔. 마치 우리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아버지도 자식들도 없는 외톨이 어머니를. 마무리되지 않은 텅 빈 집에서의 고독. 그녀의 무한대에 가까운 자존심이 파놓은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누구도 그녀를 위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들 속으로 점점 더 깊게 가라앉는 일.(p. 256)


 작가는 그 애처로움을 확인하고 '마마 탄두리'의 세계에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마마 탄두리'는 어쩌면 우리도 늘 하고 있을 고민과 맞닿아 있다. 사실 '마마 탄두리'와 같은 유혹을 많이 받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SNS가 발달하고 자신의 삶을 더욱 손쉽게 타인에게 노출할 수 있게 되면서 더욱 커져버린 유혹이다. 오죽하면 지금 사회를 과시 사회라고도 부르겠는가. 그런데 바깥에 드러낼 수 있는 것들은 언제나 위계 질서를 가질 수밖에 없고 가장 꼭대기에 있지 않는 이상 늘 상대적으로 불만족과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없이 엷어져만 가는 자신의 존재감을 체득한 가운데 어떻게 하면 나도 저 사람처럼 강한 존재감을 가질 수 있을까 고뇌하게 될 뿐이다. 악순환이다. 


 당신도 이런 상황을 겪었다면 '마마 탄두리'는 작가가 몸소 그랬듯, 그 악순환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기대하는 방식은 아닐 수 있다. 이 책이 정말 권하고자 하는 것은 샤르마 이모부와 헤르버르트 삼촌처럼 존재감에 대한 집착 자체에서 벗어나는 것이니까 말이다. 과시가 아니라 고유한 내면에 충실한 가운데 점차로 다듬어지는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 홀로 존재하는 개성이 아니라 타인과 공존하는 가운데 여러가지 색깔 중 하나로 고요하게 드러나는 개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

 '마마 탄두리'는 바로 그런 것들에 당신이 군침을 흘리도록 유혹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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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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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그건 작품을 수수께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의 독재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 ‘곡성 그러했듯무수한 의혹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두들 자신만이 찾은 단서를 바탕으로 의미의 숲을 만들어 가더라도 누구도 감히 그것이 틀렸다 단정할  없도록 하는 권위에 굴복시키지 않고지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너도   있어!’ 유혹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난무하는 해석의 전장 속으로 참여할  있게 하는 무대 중앙에서 오직 듣기만 하는 침묵의 관객 앞에서 설파하는 독백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사고로 단단히 무장한 고유한 목소리를 한껏   있는 대화의 광장이 되는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창백한 불꽃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일단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고 있다일정한 서사의 흐름이 없다찰스 킨보트가  머리말이 나오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시인  프랜시스 셰이드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창백한 불꽃이란 시가 뒤이어 이어진다그리고  시에 대해 가장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찰스 킨보트의거의 책의 3분의 2 차지하는  주석이 따라나온다우리는 그래도  책이 소설이긴 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석에서 주로 받는데그것 역시 평범하지 않아서 앞서 나온 시의 단어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락을 이루며 셰이드의 삶과 킨보트가 가지고 있는 셰이드와의 추억 그리고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카를 크사베리의 탈출기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야고프 그라두스의 이야기등 여러 방면으로 종횡무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야기의 결을 섬세하게 훑지 않으면 지금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내가 처음 읽을  그랬듯이, 멍하니 읽다보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그저 도통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려 나보코프는 도대체  이런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부터 들게 되는 것이다.

 

  재독은 필연이었고 목적은 당연히  이유를 찾아내는데 있었다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백한 불꽃 해석의 전장터라는  깨달았다셰이드가 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것과 킨보트가 주석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셰이드가 ‘창백한 불꽃 썼던 것은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부모 곁을 먼저 떠나간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그가 시에서 이렇게 썼던 대로 아이의 존재도인간의 삶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보여주는데 있었다

 

 마땅히 확신하건대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p. 91)


 그러나 킨보트에게  시는 자기 혼자만의 과거를 세계에 전하는 매개체였다현실에선 잃어버린 왕국을 시를 통해 되찾을  있는 그리고 문학이 가진 영원한 생명을 통해 비로소 회복한  성채를 영겁에 걸쳐 보존할  있는기회였다 마디로 그에게 ‘창백한 불꽃 헤이즐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동시에 많은 추모 평론이 셰이드의 자전적 경험으로 이뤄졌다고 해석했듯셰이드의 것도 아니었다. ‘창백한 불꽃 킨보트 자신의 것이었다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주석에서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나간다작가의 진짜 의도나 세간의 중론 따윈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진실은 왕처럼 하나일 수밖에 없고  진실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단언에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p. 36)


 ‘창백한 불꽃 이런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근원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면 투쟁은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 식의 하나의 의미로 고착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그러나 셰이드의 시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앞서 내가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 썼다고 말했지만 사실 셰이드가  이런 시를 썼는지는 셰이드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읽어보면 알겠지만 과연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로 파악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되는  난해한 시인 까닭이다어쩌면 시인조차  이유를 몰랐을 수도 있다왜냐하면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나의  저서(자유시)였다. ‘밤의 파도소리

 다음에 나왔고그후에 ‘헤베의 술잔 눅눅한 사육제의

  마지막 꽃수레가이제 나는

 전부 ‘시집이라 명명하고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명한 무언가는뭔가 달빛 방울 같은

제목이 필요하다도와주시오창백한 불꽃) (p. 90)



 대부분 제목을 자신의 작품을 파악했을 때 만든다는 점에서 시인 자신도 시가 가지는 진짜 의미에 가닿지 못하는 간극을 느낀 것이다거기서 도움을 호소하며 터져 나온 ‘창백한 불꽃 차라리 간구였으며 간극이 나타내는 시의 의미를 하나로 길어낼  없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또한 이는 딸이 죽음과 관련한 시구에서 보듯종결에 대한 거부도 있었다.

 

 하지만 킨보트는 전혀 다른 의미로 ‘창백한 불꽃 행한다.

 나는 나보코프가 ‘창백한 불꽃이란 제목을 감히 중의적 의미로 달았다고 생각한다하나는 앞서 말한,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는  거부하는 걸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킨보트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을 뜻한다. 후자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창백한 불꽃 이미지란 다름아닌소설의 마지막(그러니까 원래 시에는 없는 1000행의 주석 부분) 나오는 셰이드의 삶을 끝장낸 암살자 그라두스의 총탄이 발사된 총구이다바로 거기서 터져나온더이상 스스로 다른 빛과 표정을 짓지 못하는 ‘창백한’ 시신으로 만들어 여지없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해 버린 ‘불꽃’을 '창백한 불꽃'이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것으로 내가 셰이드와 킨보트를 완전히 대척점에 두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한 쪽에는 문학을 보다 다양한 의미로 널리 타오르게 하려는 불꽃이 있고 다른  쪽엔 자신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는 확신으로  하나의 의미만 허용하려는 불꽃이 있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대로 셰이드의 시를 구축하려는 킨보트의 몸짓은 그대로 암살자 그라두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나보코프가 그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라두스의 이야기를 기입했다고 생각한다권위와 지식에 기대어 자기가 파악한 의미를 진리의 권좌에 앉혀 모두가 순종하기를 바라는우리 또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를 성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말이다킨보트가 셰이드 시에대 하고 있는 것과 그라두스가 카를 크사베리의 목숨을 빼앗으려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노력하는 것의 동일성은 킨보트와 그라두스가 각각 셰이드와 암살 대상에게 다가가려   겪는 과정 상의 곤란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일면 드러난다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시를 쓰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복해서 실패하듯이 그와 발맞추어 카를 크사베리를 암살하려는 그라두스의 시도 또한 예기치 않게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런 과정의 닮음과 순서의 비슷한 배치로 그라두스가  다른 킨보트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그라두스에 대해 킨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물은 단순한 형태의 스프링과 코일로 내부가 작동하는 태엽장치 같은 인간이었다어쩌면 청교도라고 부를 만도 했다몸서리쳐질 정도로 단순한 어떤 근본적인 혐오감이 그의 둔감한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그가 혐오한 것은 불의와 기만이었다그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표현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모하게  정열을 다해 둘의 조합 -  둘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이지만 -  혐오했다 자의 어쩔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산물만 아니었다면그러한 혐오는 칭찬받아 마땅했다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만적이라고 단정했다그는 통념을 숭배했는데자못 현학적인 침착함을 발휘한 숭배였다.(p. 189)

 

 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그런 것은 아예 존재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오직 자신과 자신만이 아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타자는 있을 자리가 그의 왕국엔 없다. 그런데 킨보트가 원래 젬블라 왕국에서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왕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이러한 그라두스의 모습은 킨보트를 보다 단순화한 것이라 해석해도 별 무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우리는 킨보트와 그라두스를 자기 중심주의라는 범주에 같이 놓아둘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셰이드가 있다. 나보코프는 이 대립을 셰이드의 딸 헤이즐을 통하여 더욱 강조한다.

 킨보트의 주석을 통하여 드러나는 헤이즐은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며 기꺼이 유령과 소통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만큼 헤이즐은 현실의 지배 영역에서 탈주해 있으며 한껏 타자 친화 또는 지향적인 존재다.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은 그런 딸이 영원하길 바라는 시였다. 이는 곧 문학이 어떤 권위나 지식으로 내리누르는 규정에 굴종하지 않고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하더라도 보다 많은 타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열어주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헤이즐과 관련된 너무나 기이해 보이는 서사는 바로 이러한 셰이드가 딛고 서 있는 자리의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들어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건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킨보트의 해석이 아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셰이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하여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 같은 형체로 응고된 어둡고 창백한 반점 덩어리가 현관 불빛이 가까스로 미치는 정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p. 235)(강조는 필자)'


 여기에 들어간 '창백한'과 '불빛'은 제목의 '창백한 불빛'이 어쩌다 나오게 되었는지 또한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한다. 그런데 킨보트는 이걸 단순한 전기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석을 단다. 불가해한 타자의 출몰과 그걸 그대로 존중하려는 문학에 대하여 과학이라는 도구로 타자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킨보트가 과학을 언급하니 헤이즐이 죽은 연도가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죽은 1957년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 1호를 쏘아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미국인들이 이제 곧 공중에서 핵폭탄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압도적으로 느꼈던 해이기도 하다. 그 때 미국은 오직 과학에 사활을 걸었다.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문학이 설 자리는 그렇게 점점 더 사라져 갔던 것이다. 헤이즐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비록 셰이드는 사상과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문학을 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셰이드의 이런 말은 그가 문학을 많고도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타자 지향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내 생각에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비평가나 작자 모두 바보란    있어.” 킨보트 :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중국이나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없어 달랑  사진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p. 194)


 이제 오직 수수께기로 가득차 보였던 '창백한 불꽃'이 내밀하게 간직한 속뜻을 내게 조금 드러내는 것 같다. 문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건 타자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토록 문학이 윤리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자전적 경험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이 소설 전에 나온 '롤리타'가 오로지 소재로 오해를 받아 큰 논란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한 사람의 타자를 대한다는 것이 한 명의 스승을 대하듯 겸허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겪도록 하기 위해 '롤리타'도 그렇고, '창백한 불꽃'도 그렇고 이처럼 자신의 이해와 공감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겐 신선한 자극과 그 못지 않은 터득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암호를 작품마다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 나오는 얘기인데, 그 이유를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 있으며,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예지의 기호라는 '신화'를 수용한 자 앞에 비로소 텍스트는 열린다. 그것은 '스승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가 똑같은 하나의 지적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p. 44)


 '창백한 불꽃'이 주고자 하는 태도가 이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킨보트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 -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타자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승으로 군림하려 하는 한, 독선과 묵살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까지 보고나니 홀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보다 미미하지만 저마다 다른 색깔과 형상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절로 다짐하게 된다.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더위로 숨막히는 여름밤을 아주 낭만적인 풍경으로 뒤바꾸듯, 그 어디에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스승이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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