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나의 작품이 오래 살아남는 길은 무엇일까?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에 따르면 그건 작품을 수수께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떠한 의미의 독재도 허용하지 않는 영화 ‘곡성 그러했듯무수한 의혹이 존재하는 가운데 모두들 자신만이 찾은 단서를 바탕으로 의미의 숲을 만들어 가더라도 누구도 감히 그것이 틀렸다 단정할  없도록 하는 권위에 굴복시키지 않고지식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너도   있어!’ 유혹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난무하는 해석의 전장 속으로 참여할  있게 하는 무대 중앙에서 오직 듣기만 하는 침묵의 관객 앞에서 설파하는 독백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사고로 단단히 무장한 고유한 목소리를 한껏   있는 대화의 광장이 되는  말이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도 자신의 작품이 그렇게 되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나는 ‘창백한 불꽃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일단  소설은 특이한 형식을 갖고 있다일정한 서사의 흐름이 없다찰스 킨보트가  머리말이 나오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시인  프랜시스 셰이드가 죽기 직전까지 집필한 ‘창백한 불꽃이란 시가 뒤이어 이어진다그리고  시에 대해 가장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찰스 킨보트의거의 책의 3분의 2 차지하는  주석이 따라나온다우리는 그래도  책이 소설이긴 하구나 하는 인상을 주석에서 주로 받는데그것 역시 평범하지 않아서 앞서 나온 시의 단어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나의 단락을 이루며 셰이드의 삶과 킨보트가 가지고 있는 셰이드와의 추억 그리고 젬블라 왕국의 마지막  카를 크사베리의 탈출기와 그를 암살하기 위해 쫓아다니는 야고프 그라두스의 이야기등 여러 방면으로 종횡무진 하고 있는 형편이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이야기의 결을 섬세하게 훑지 않으면 지금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나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내가 처음 읽을  그랬듯이, 멍하니 읽다보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이 그저 도통   없는 수수께끼가 되어버려 나보코프는 도대체  이런 소설을 썼나 하는 의문부터 들게 되는 것이다.

 

  재독은 필연이었고 목적은 당연히  이유를 찾아내는데 있었다그러한 과정 속에서 ‘창백한 불꽃 해석의 전장터라는  깨달았다셰이드가 시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것과 킨보트가 주석을 통해 알리고자 하는 것이 서로 달랐던 것이다셰이드가 ‘창백한 불꽃 썼던 것은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에 불과하다부모 곁을 먼저 떠나간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서였다그가 시에서 이렇게 썼던 대로 아이의 존재도인간의 삶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보여주는데 있었다

 

 마땅히 확신하건대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이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다.(p. 91)


 그러나 킨보트에게  시는 자기 혼자만의 과거를 세계에 전하는 매개체였다현실에선 잃어버린 왕국을 시를 통해 되찾을  있는 그리고 문학이 가진 영원한 생명을 통해 비로소 회복한  성채를 영겁에 걸쳐 보존할  있는기회였다 마디로 그에게 ‘창백한 불꽃 헤이즐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동시에 많은 추모 평론이 셰이드의 자전적 경험으로 이뤄졌다고 해석했듯셰이드의 것도 아니었다. ‘창백한 불꽃 킨보트 자신의 것이었다그는 그렇다는 사실을 주석에서 적극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해 나간다작가의 진짜 의도나 세간의 중론 따윈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진실은 왕처럼 하나일 수밖에 없고  진실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니까.

 

이런 단언에 친애하는 시인은 어쩌면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나좋든 나쁘든 최후의 말을 하는 이는 바로 주석자다.(p. 36)


 ‘창백한 불꽃 이런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근원적인 측면에서 따져 보면 투쟁은 ‘네가 틀렸고 내가 옳다!’ 식의 하나의 의미로 고착화시키려는 움직임이다그러나 셰이드의 시는 원래 그런 목적으로 쓰여지지 않았다앞서 내가 헤이즐을 기리기 위해 썼다고 말했지만 사실 셰이드가  이런 시를 썼는지는 셰이드 본인만이 알고 있다고 해야 한다읽어보면 알겠지만 과연 하나의 총체적인 의미로 파악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게 되는  난해한 시인 까닭이다어쩌면 시인조차  이유를 몰랐을 수도 있다왜냐하면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나의  저서(자유시)였다. ‘밤의 파도소리

 다음에 나왔고그후에 ‘헤베의 술잔 눅눅한 사육제의

  마지막 꽃수레가이제 나는

 전부 ‘시집이라 명명하고더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투명한 무언가는뭔가 달빛 방울 같은

제목이 필요하다도와주시오창백한 불꽃) (p. 90)



 대부분 제목을 자신의 작품을 파악했을 때 만든다는 점에서 시인 자신도 시가 가지는 진짜 의미에 가닿지 못하는 간극을 느낀 것이다거기서 도움을 호소하며 터져 나온 ‘창백한 불꽃 차라리 간구였으며 간극이 나타내는 시의 의미를 하나로 길어낼  없다는 일종의 항복 선언이었다또한 이는 딸이 죽음과 관련한 시구에서 보듯종결에 대한 거부도 있었다.

 

 하지만 킨보트는 전혀 다른 의미로 ‘창백한 불꽃 행한다.

 나는 나보코프가 ‘창백한 불꽃이란 제목을 감히 중의적 의미로 달았다고 생각한다하나는 앞서 말한, 하나의 의미로 고착되는  거부하는 걸 뜻하고 또 다른 하나는 킨보트가 하는 것과 같이  하나의 의미로 규정하는 것을 뜻한다. 후자에 있어 내가 생각하는 ‘창백한 불꽃 이미지란 다름아닌소설의 마지막(그러니까 원래 시에는 없는 1000행의 주석 부분) 나오는 셰이드의 삶을 끝장낸 암살자 그라두스의 총탄이 발사된 총구이다바로 거기서 터져나온더이상 스스로 다른 빛과 표정을 짓지 못하는 ‘창백한’ 시신으로 만들어 여지없이  하나의 의미로 박제해 버린 ‘불꽃’을 '창백한 불꽃'이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이것으로 내가 셰이드와 킨보트를 완전히 대척점에 두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한 쪽에는 문학을 보다 다양한 의미로 널리 타오르게 하려는 불꽃이 있고 다른  쪽엔 자신이 보다 진리에 가깝다는 확신으로  하나의 의미만 허용하려는 불꽃이 있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오직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대로 셰이드의 시를 구축하려는 킨보트의 몸짓은 그대로 암살자 그라두스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나보코프가 그걸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그라두스의 이야기를 기입했다고 생각한다권위와 지식에 기대어 자기가 파악한 의미를 진리의 권좌에 앉혀 모두가 순종하기를 바라는우리 또한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을 지도 모를 성향을 대표하는 존재로 말이다킨보트가 셰이드 시에대 하고 있는 것과 그라두스가 카를 크사베리의 목숨을 빼앗으려 세계를 종횡무진하며 노력하는 것의 동일성은 킨보트와 그라두스가 각각 셰이드와 암살 대상에게 다가가려   겪는 과정 상의 곤란이 비슷하다는 것에서도 일면 드러난다킨보트가 셰이드에게 자신이 바라는 대로 시를 쓰도록 하려는 의도가 반복해서 실패하듯이 그와 발맞추어 카를 크사베리를 암살하려는 그라두스의 시도 또한 예기치 않게 좌절을 경험하는 것이다이런 과정의 닮음과 순서의 비슷한 배치로 그라두스가  다른 킨보트라는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데 그라두스에 대해 킨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의 인물은 단순한 형태의 스프링과 코일로 내부가 작동하는 태엽장치 같은 인간이었다어쩌면 청교도라고 부를 만도 했다몸서리쳐질 정도로 단순한 어떤 근본적인 혐오감이 그의 둔감한 영혼에 스며들어 있었다그가 혐오한 것은 불의와 기만이었다그는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고 표현할 필요도 없을 만큼 무모하게  정열을 다해 둘의 조합 -  둘은 항상 붙어다니기 마련이지만 -  혐오했다 자의 어쩔  없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부산물만 아니었다면그러한 혐오는 칭찬받아 마땅했다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범위를 넘어서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기만적이라고 단정했다그는 통념을 숭배했는데자못 현학적인 침착함을 발휘한 숭배였다.(p. 189)

 

 그는 자신이 이해할  없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다그런 것은 아예 존재해선 안된다고 여기는 인물이다. 오직 자신과 자신만이 아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을 말하고 보여주는 타자는 있을 자리가 그의 왕국엔 없다. 그런데 킨보트가 원래 젬블라 왕국에서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유아독존으로 군림하던 왕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이러한 그라두스의 모습은 킨보트를 보다 단순화한 것이라 해석해도 별 무리가 있을 것 같진 않다. 이렇게 우리는 킨보트와 그라두스를 자기 중심주의라는 범주에 같이 놓아둘 수 있다. 


 그 반대편에 셰이드가 있다. 나보코프는 이 대립을 셰이드의 딸 헤이즐을 통하여 더욱 강조한다.

 킨보트의 주석을 통하여 드러나는 헤이즐은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일으키며 기꺼이 유령과 소통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만큼 헤이즐은 현실의 지배 영역에서 탈주해 있으며 한껏 타자 친화 또는 지향적인 존재다. 셰이드가 쓴 '창백한 불꽃'은 그런 딸이 영원하길 바라는 시였다. 이는 곧 문학이 어떤 권위나 지식으로 내리누르는 규정에 굴종하지 않고 그런 것이 없거나 부족하더라도 보다 많은 타자의 목소리에 스스로를 열어주는 존재가 되길 바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헤이즐과 관련된 너무나 기이해 보이는 서사는 바로 이러한 셰이드가 딛고 서 있는 자리의 선명한 부각을 위하여 들어간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그건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킨보트의 해석이 아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셰이드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하여 유령을 목격한다.


 '유령 같은 형체로 응고된 어둡고 창백한 반점 덩어리가 현관 불빛이 가까스로 미치는 정원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p. 235)(강조는 필자)'


 여기에 들어간 '창백한'과 '불빛'은 제목의 '창백한 불빛'이 어쩌다 나오게 되었는지 또한 어느 정도 추정하게 한다. 그런데 킨보트는 이걸 단순한 전기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석을 단다. 불가해한 타자의 출몰과 그걸 그대로 존중하려는 문학에 대하여 과학이라는 도구로 타자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깨끗하게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킨보트가 과학을 언급하니 헤이즐이 죽은 연도가 의미심장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죽은 1957년은 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닉 1호를 쏘아 올리는 것에 성공하여 미국인들이 이제 곧 공중에서 핵폭탄이 쏟아질지 모른다는 공포를 압도적으로 느꼈던 해이기도 하다. 그 때 미국은 오직 과학에 사활을 걸었다. 타자에게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주는 문학이 설 자리는 그렇게 점점 더 사라져 갔던 것이다. 헤이즐의 죽음은 바로 그런 것을 나타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비록 셰이드는 사상과 사회적 배경을 무시하고 문학을 보라고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셰이드의 이런 말은 그가 문학을 많고도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타자 지향적인 존재로 보고 있다는 내 생각에 자신감을 충전하고 있다.


 예를 들면 ‘셸리의 문체는 매우 단순하고 훌륭하다라든지 ‘예이츠는 항상 진실하다’ 같은 해석 말이지이런 해석은 아주 만연해 있어서어떤 비평가가 어떤 작자의 진정성에 대해 얘기한다면 비평가나 작자 모두 바보란    있어.” 킨보트 :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운다고 들었는데요?” “바로 거기부터 빗자루로 쓸어버리듯 뜯어고쳐야  아이에게 서른 과목을 가르치려면 서른 명의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네중국이나  밖의 다른 것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경도와 위도 차이도 설명할  없어 달랑  사진   보여주며 그게 중국이라고 귀찮은  말하는 여선생은 없어야지.”(p. 194)


 이제 오직 수수께기로 가득차 보였던 '창백한 불꽃'이 내밀하게 간직한 속뜻을 내게 조금 드러내는 것 같다. 문학에 대한 태도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건 타자에 대한 태도와 동일하다는 것을.

 

 이토록 문학이 윤리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그의 아버지가 러시아 극우파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자전적 경험에서 연유하기도 하고, 이 소설 전에 나온 '롤리타'가 오로지 소재로 오해를 받아 큰 논란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출판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비롯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오래 살아남는 작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학 작품이나 한 사람의 타자를 대한다는 것이 한 명의 스승을 대하듯 겸허하고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로 하여금 직접 겪도록 하기 위해 '롤리타'도 그렇고, '창백한 불꽃'도 그렇고 이처럼 자신의 이해와 공감을 초월하는 것이라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들에겐 신선한 자극과 그 못지 않은 터득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암호를 작품마다 계속 누비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고 보니 타자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스승을 섬기는 것이 불가능한 자는 텍스트도 읽을 수 없다고 말했다. 우치다 타츠루가 쓴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에 나오는 얘기인데, 그 이유를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스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타자' 안에 무한의 예지가 숨어 있으며, 그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예지의 기호라는 '신화'를 수용한 자 앞에 비로소 텍스트는 열린다. 그것은 '스승을 섬긴다'고 하는 행위와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행위가 똑같은 하나의 지적 모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같은 책, p. 44)


 '창백한 불꽃'이 주고자 하는 태도가 이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킨보트의 독백으로 끝난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어디에서 그 장면이 펼쳐지든, 누군가가 어디선가 조용히 출발할 것이다-아니, 누군가는 이미 출발했고, 아직은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표를 사고, 버스 배 비행기에 오르고, 착륙하고, 백만 명의 사진사를 향해 걸어가고, 결국 내 초인종을 울릴 것이다. - 더 크고, 더 훌륭하고, 더 유능한 그라두스가. (p.371)


 타자를 스승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승으로 군림하려 하는 한, 독선과 묵살로 이어지는 비극의 연쇄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것까지 보고나니 홀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보다 미미하지만 저마다 다른 색깔과 형상으로 타오르는 작은 불꽃들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절로 다짐하게 된다.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더위로 숨막히는 여름밤을 아주 낭만적인 풍경으로 뒤바꾸듯, 그 어디에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스승이 깃들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