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과 십자가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디테일한 설정에 주목하다보면 전혀 다른 의미의 지점들이 보이는 작품이다. 원래 랜킨은 리버스를 동성애자로 그리려 하지 않았을까 강하게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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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과 십자가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소설은 묘지에서 시작한다.

 묘지에 둘러진 담 위로 까마귀들이 울고 있는 그 곳에서 그는 생전에 그토록 인정받고 싶었으나 인정받을 수 없었던 이의 무덤을 말없이 바라보다 묘지를 나온다. 그는 오랜만에 동생을 찾아가 볼 생각을 한다. 자기와는 달리 인정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동생. 가는 길엔 비가 내리고 도로 사정이 나빠 가기가 쉽지 않다. 마치 동생에게로 가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버림받았던 과거를 생생하게 환기하게 만드는 실체이기에 그런 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과거에 매몰된 자다. 과거의 상처, 과거의 실수. 거기에 사로잡혀 그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잠시 들르는 관광객은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은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도시인 에든버러와도 같다.


 이제는 영국의 대표적 범죄 소설 시리즈로 자리잡은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작을 연 작품의 제목은 '매듭과 십자가'. 거의 3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영국에서도 흔치 않은 성을 가진, 이  리버스(rebus)라는 인물을 '부활하는 남자들'로 처음 만났다. 2004년 에드가 앨런 포 수상작에다 영국에서 아주 유명한 시리즈라고 해서 읽게 된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리버스는 서장에게 머그컵을 던지고 근무 태도 불량으로 다시 경찰 학교로 가서 그런 문제아들만 모아놓고 가르치는 교정 프로그램을 연수받는다. 제목의 '부활하는 남자들'이란 바로 그 프로그램을 일컫는 일종의 '은어'다. 재밌는 것은 머그컵의 표적이 되었던 서장이 '질 템플턴'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왜 재밌냐면, '부활하는 남자들(2001)'에서는 리버스와 견원지간이나 다를 바 없는 질 템플턴이 대략 13년 전인 '매듭과 십자가'에선 (이제 막 시작되려는)연인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관계가 이토록 어긋나 버렸을까? 역시 사내연애는 끝이 안 좋으면 더없이 힘든 것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한편 그 과정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리버스 시리즈가 계속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족에 불과하다. 리버스가 '부활하는 남자들'이란 프로그램에서 하는 일이 미제로 남은 과거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것이라는 게 보다 더 중요하다. 거기서 리버스는 자신이 과거에 담당했던 사건을 다시 마주하고, 이제는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새로이 조명하게 된다.


 이렇게 '매듭과 십자가'와 '부활하는 남자들'엔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과거'다. 아마도 이것이 리버스 시리즈만의 독보적 키워드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과거의 아픔, 과거의 잘못으로 매듭지어진 시간을 다시 풀고, '십자가'가 서로 연결하는 것이듯 매듭으로 묶였던 시간을 현재로, 미래로 흐르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언 랜킨이 리버스를 통해 추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언 랜킨은 앞으로 리버스가 걸어가야 할 노선을 처음부터 제목으로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제목의 '매듭'과 '십자가'는 리버스에게 누군가 보내온 봉투에서 나온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애초에 이언 랜킨은 시리즈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매듭과 십자가' 한 권으로 끝낼 생각이었긴 하지만 말이다.


 키워드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매듭과 십자가'에는 리버스를 차별화하는 특성을 나타내는 키워드가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물론 앞에서 말한 과거고 다른 하나는, 이게 '이 작품에선 더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바로 '위축된 남성성'이다.


 이언 랜킨이 마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매듭과 십자가'는 훼손된 남성성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소설이다.

 (여기에 대해 좀 더 거창하게 문화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리뷰가 길어져서 그건 따로 페이퍼로 작성하기로 하고 생략해 버렸다. 문맥이 다소 이상하더라도 조금만 양해해 주시길...)

 읽어보면 분명히 느끼겠지만 리버스는 형사로서 그리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은 그 어떤 사람들 보다 크나 수사관으로서의 열의는 그다지 없는 편이다. 담배와 술에 대한 열의의 반만 있었어도 조기에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지금 에든버러는 소녀들을 납치해 살인하는 연쇄 살인마로 '딸을 집안에 가두라!'는 카피가 신문에 메인으로 등장할만큼 공포에 물든 상황이다. 잇달아 희생자가 나오지만 수사의 진척은 도무지 없고 여론의 압박은 심해지기만 한다. 하지만 리버스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더 많이 돌아간다. 사회의 아픔 보다는 개인의 아픔 쪽으로 말이다. 자신의 상처 그리고 외로움. 탐문 보다는 우울과 허무의 코트를 입고 밤늦은 선술집에서 그것을 토로하는 장면이 더 많이 목격된다. 그는 정말 고독하다. 아내와 이혼하고 사랑하는 딸 '사만다'마저 아내에게 빼앗겼고 경찰에서는 대부분의 형사가 그와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톨이인 것이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려 여자에게 먼저 수작을 걸고 그녀가 파티에 초대하자 잔뜩 단장에 신경쓰고 갔는데, 우리의 기대와도 다르게 자신을 부른 그녀가 정작 다른 남자와 얼싸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상처받는다. 그러다 거기서 질 템플턴을 만나고 하룻밤을 보내지만 뒤로 해달라는 그녀와 정사를 벌이다 과거의 고통이 떠올라 운다. 질은 뒤로 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죠 하고 묻는다.


이렇게 리버스는 뭔가 다른, 어쩌면 많이 이상하기도 한 형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전직이 SAS라는 특수 부대 군인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좀 더 과장을 허락한다면 마치 수사물에서 활약하는 형사에 대해 가지는 우리의 기대를 차례로 배반하겠다는 작심을 한 것만 같다. 스포일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리버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 혀를 차며 한심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면 우리는 궁금해진다. 왜 리버스는 형사가 되었던 것일까?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거창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범죄자 체포를 통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는 치기어린 호승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끝내 그가 왜 형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다만 그에겐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과거의 아픔이 있다는 것과 그 아픔의 실상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이 소설이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자,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범인의 정체, 과거의 진실에 대해 작품으로 확인하고 싶으신 분은 여기서 읽기를 강제 종료해 주세요. -


 그렇다면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과거의 상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동성애의 유혹에 강하게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미 읽으신 분들은 의문을 제기하실 것이다. 리버스의 상처는 친구를 내버려 두고 온 것에 있지 않았냐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표면적인 부분에서만 그러하다. 정말로 친구에 대한 배신이 이유라면 이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낳은 설정이 그만한 아픔을 가져오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리버스가 여기에 얼마나 커다란 아픔을 느끼냐 하면 자신마저 완전히 기억을 봉인해 버려 동생 마이클의 최면을 통해서야 겨우 기억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자발적인 배신이었다면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버스의 경우 전혀 자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강제된 배신이었다. 배신당한 친구가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저 훈련 과정에서 탈락했을 뿐이다. 도대체 이렇게나 봉인하고 자책할만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언 랜킨의 작가적 역량이 모자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의 말이지만, 다른 이유를 상정해야 한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이것이 결정적 단서다.


  "그냥 키스만 하자는 거야."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존 빼지 말라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왔어.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거지. 그 친구도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왔지. 그의 몸이 닿자 가볍게 경련이 일더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어. 난 그냥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쏟을 뿐이었지."(P. 184)


 열쇠는 저 볼드체의 문장이다. 동료 리브가 키스하자고 다가오면서 리버스의 몸에 닿자 그는 가벼운 경련을 느낀다. 그리고 의식과 달리 몸이 저항하지 않는 걸 깨닫는다. 즉 리버스는 리브의 행위에 흥분했고 만일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고든과 키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리버스가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지금까지 그를 자책하게 만든 진짜 원인인 트라우마다. 그것은 하나의 의문문으로 정리된다. 

 "내가 혹시 동성애자인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늘 리버스를 아프게 만드는 것의 실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커다란 아픔이 된 까닭은 리버스가 그날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리버스가 하마터면 리브와 키스할 뻔 했을 때 갑자기 감방 문이 열리면서 들어왔던 장교가 처음으로 리버스에게 보여주었던 그 표정. 바로 역.겹.다.


 한 남자가 문간으로 들어왔어. 영국인. 분명 외국인은 아니었어. 계급이 꽤 높아 보였지. 그는 역겹다는 얼굴로 우릴 쳐다봤어. 밖에서 우리 얘길 고스란히 엿들은 모양이야.(P. 185)


 여기서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로, 훼손된 남성성의 소유자임을 사람들에게 들켰을 경우 어떤 반응을 받게될 지 적나라하게 목격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내면 깊은 곳에다 꼭꼭 감춰두었고 더하여 자신의 남성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강한 남성성의 표상인 형사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리버스는 내내 자신이 동성애자일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첫 반응을 보여준 사람이 하필이면 계급이 꽤 높은 사람이라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계급이 꽤 높은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꽤 높은 계급의 사람은 종종 '부대의 아버지'라 호명되곤 하지 않던가. 그대로 그 사람의 역겨운 표정은 리버스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내내 보았던 자신을 멀리하거나 무시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 계급 높은 사람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부당한 차별이라고만 여겼었는데, 그 이후 리버스는 그럴만한 이유가 자기에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군인이 되어서까지 아버지의 인정을 얻고 싶었던 리버스는 이제 단순히 그럴듯한 직업만 가지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사실 이미 승부는 나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 유혹에 쉽게 빠져버릴 정도로 리버스는 자신의 남성성이 손상당했다고 여겼고 이왕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아버지의 인정은 앞으로도 영원히 받지 못할 것이라 예감한다. 오로지 진정한 남성성만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작이 그 무덤이라는 점은 이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하여 그는 더욱 절망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가 왜 질 템플턴과 정사 도중 눈물을 흘렸는지도 이해된다. 리버스는 왜 질 템플턴과 정사를 나누다 불현듯 군대에 있었을 적 일을 떠올린 것일까? 이유는 상황이 아니라 체위에 있다. 질 템플턴과 뒤로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리버스에게 대부분 호모들 간의 정사 체위임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했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아마도 원래는 한 권의 완결된 작품으로 생각했던 탓인지 이렇게 소설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설정이 디테일하다. 플롯엔 허점이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그리고 그 암시를 독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미세 조정된 설정들이 돋보인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허점은 눈감아주고 싶어진다.


이 소설이 가진 호모포비아로서의 설정은 연쇄 살인에서 더욱 드러난다. 왜 주로 소녀들이 살해되는가? 그것은 바로 소녀가 여성 중에서 남성이 가장 손쉽게 지배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성애자라는 게 증명되어 시험에서 탈락한 리브가 저지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성이 훼손되었다고 여겨지는 자가 살인을 통해서 자신의 남성성이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사로서의 리버스 모습 그대로다. 그렇게 리브와 리버스, 둘은 강하게 연결된다. 아니나 다를까 리버스는 그를 형제로 생각한다고 종종 고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리브가 연쇄 살인을 한 애초의 목적이 실은 사만다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리버스 자신이 가장 되찾아오고 싶어하는 이도 바로 사만다이기 때문이다. 즉 리브는 리버스의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 주는 존재다. 리브의 살인은 리버스가 가진 열망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것은 리브가 재혼한 아내의 남편을 살해하는 것에서 더 한층 재확인 된다. 더구나 그 남편의 직업은 시인이다. 여성스런 직업의 소유자인 것이다. 리버스는 여성스런 직업을 가진 자에게 아내를 빼앗김으로써 더욱 자신의 남성성이 손상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리버스에게 있어 그의 제거는 필연적이다. 이는 남편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범인에게 죽는 어른 남성이라는 점에서 한층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런 식으로 이언 랜킨은 '훼손된 남성성에 대한 공포'를 은밀하지만 디테일하게 깔아 놓았다. 때문에 이 소설은 형사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많이 비켜나 있지만 오히려 더 색다른 독해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리버스는 정말로 동성애자일 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리버스의 마초적인 모습은 내부의 공포가 왜곡되어 발현된 모습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겁이 많은 개가 더 많이 짖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서 리브와 함께 뒹구는 리버스의 모습은 이언 랜킨의 짓궂은 농담이 아니라면 그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동성애의 욕망을 드디어 해소시켜주는 랜킨의 배려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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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박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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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OPEN YOUR EYES!'

 공포 영화에서 눈은 생존을 위한 필수품이다. 생명마저 빼았을 수 있는 위험이 어디에 도사리고 있을 지 모르기에 살려면 더욱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샅샅이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 그러지 못한 자들이 희생되었다. 숨어있는 살인마를 미처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장면이 나올 때마다 관객들은 자주 이렇게 소리치지 않았던가! "제발 뒤좀 돌아봐!"


 공포는 어둠에 있고 눈은 그 어둠을 몰아낼 빛이었다. 이건 허다한 공포 영화에서 굳어진 RULE이었다. 그런데 신예 작가 조시 멜러먼의 데뷔작 '버드 박스'에선 이 룰이 역전된다. 오히려 공포는 눈에서 오고 어둠만이 유일한 생명줄이 되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그것은 러시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잇달아 사람들이 주위의 사람들을 살해하고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들은 마치 자신을 비롯하여 주위의 모든 생명을 멸절시켜 버리겠다는 듯이 행동하는데 그 이유가 나중에 밝혀진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보고나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 정체를 모르는 것은 그 존재와 눈이 마주치면 바로 광기에 사로잡혀 남들과 자신을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즉 자신도 살고 주위의 사람도 살리려면 무조건 그 존재를 보지 않는 수밖에 없다. 하여 존재의 정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것은 미국에까지 내려온다. 소설의 주인공은 맬로리. 그녀는 어느새 미국이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삼켜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사람들이 잇달아 참혹하게 죽고 경찰도 군인도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막지 못한다. 맬로리는 언니와 함께 살다가 윗층에서 언니가 자살한 것을 본 후 도움을 청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한다.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는 맬로리의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전개된다. 현재는 이미 아이는 태어나 다섯 살이 된 시점이다. 


 아이들은 태어나서 바깥 세상을 한 번도 못 봤다. 창문을 내다본 적도 없다. 맬로리조차 창으로 바깥 풍경을 못 본 지 4년이 넘었다.(P. 11)


 그런데 그녀는 지금 4년 동안 살던 집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 집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건 사실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4년을 기다려야 했다. 아이들이 자라서 충분히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다. 그녀에겐 아이들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살기 위해선 절대 눈을 떠서는 안되는데 안전이 보장되는 곳까지 무사히 탈출하려면 눈을 뜨지 않고서는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에 더욱 그렇다. 눈을 감고는 절대 할 수 없는 여정. 그래서 그녀는 다른 감각이 필요했다. 눈처럼 방향과 외부의 위험을 알려줄만한 것을. 그렇다. 고맙게도 신은 인간에게 두 개의 눈을 허락한 것처럼 두 개의 귀를 허락했다. 청각이 그녀가 의지할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4년을 기다렸던 것이다. 아이들의 청각을 훈련시켜 잠수함의 소나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드디어 떠날 날이 이제 다가왔다. 그녀는 안대로 자신과 두 아이의 눈을 모두 가리고 4년만에 처음으로 집을 나선다. 어둠 속에서 '그것'의 존재를 희미하게 감지하면서...


 동시에 4년 전의 과거가 진행된다. 도움을 찾아 떠났던 그녀가 간신히 찾은 보호처. 거기엔 모두 다섯 명의 남녀가 있었다. 바깥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곳을 담요로 가로막은 그 곳에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서로 협력하면서 지내고 있었다. 미드 '워킹데드'에 나오는 공동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거기서 생존을 위해 토론으로 좀비를 분석하고 대처 방법을 논의했듯이 이 공동체도 그렇게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은 떨어지고 물품도 부족해지기에 아무래도 그 안에 있을 수만은 없고 바깥으로 나가야 하는 까닭이다. 즉 불안은 여전하다.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 또한 그러하다. 아무리 협력이 잘 된다고 하더라도 생존이 절박한 상황인 이상 내가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고 그런 이해관계가 얽히게 되는 이상 의견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의혹이 쌓여가고 점차 불신의 벽으로 굳어진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때로 목격하게 된다. 바깥의 적이 아무리 무섭다고 하더라도 내부의 지인보다 덜 공포스럽다는 것을. 

 맬로리가 속한 공동체도 그렇게 된다. 그녀가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노트에서 읽었던 이 말과도 같이.


 인간이 두려워하는 크리처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p. 275)


 그러고 보면 지금 맬로리가 아이들과 함께 탈출을 감행하는 현재나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끼리 함께 있었던 과거나 그 상황은 본질적으로 같다. 모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맬로리는 집을 탈출하여 바깥으로 나와 있으니 다르지 않은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현재 시야를 모조리 안대로 가리고 있다. 그녀는 사방 어느 곳도 볼 수 없다. 그것은 과거의 공동체가 집의 창문을 모두 담요로 가려 바깥을 하나도 볼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그러니 그녀도 과거의 공동체랑 똑같이 갇혀있다고 봐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맬로리는 그렇게 철저히 준비했는 데도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다. 현재의 이야기는 대부분 맬로리의 내면으로만 채워지는데 거기서 우리는 외부의 조그만 자극에도 금방 두려움에 빠지고 마는 그녀를 보게 된다. 과거 공동체가 그랬던 것과 똑같은 모습을 말이다. 그들도 생존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해도 불안은 늘상 존재했다. 마치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이제 우리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버드 박스'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직접적인 표현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맬로리의 독백으로 제시된다.


 그녀는 지금 이 집이 커다란 상자처럼 느껴졌다. 이 상자에서 나가고 싶었다. 톰과 줄스는 바깥에 있지만 여전히 이 상자에 있는 셈이다. 이 세상은 사방이 폐쇄되어 있다. 세상은 저 밖에 걸어놓은 새 상자 같은 종이 상자에 갇혀 있다. 맬로리는 톰이 그 뚜껑을 열 방법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뚜껑을 열면 그 위에 두 번째 뚜겅이 있고 그 뚜껑을 열면 세 번째 뚜껑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상자에 갇힌 거야. 영원히.' (p. 279)


 소설의 주제는 이 독백에 그대로 나타난다. 비록 독백은 4년 전의 것이지만 그 때의 예감 그대로 우리는 여전히 그녀가 상자에 갇혀 있음을 본다. 맬로리는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일까? 아이들을 훌륭히 준비시킨 지금도 그녀는 왜 여전히 불안에 떨고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것일까?


 여기서 왜 조시 맬러먼이 소설의 구성을 하필이면 현재와 과거로 나누어 병행시키는 지 알 수 있을 듯 하다. 바로 '갇힘'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라는 것 때문임을 말이다. 즉 우리를 정말로 가두고 있는 것은 바로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이라는 것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것은 현재 맬로리의 모습에서 더욱 드러난다. 그녀가 불안에 빠지는 진짜 이유는 바깥의 '그것' 때문이 아니다. 실은 자신이 훈련시켜온 아이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그녀는 여전히 타인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불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타인을 믿었다면, 자신처럼 전적으로 신뢰했다면 그녀의 여정은 좀 더 편안했을 것이며 애초에 이런 여정을 떠날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과거의 공동체가 무너져 내렸던 것도 바로 불신 때문이었으니까.


 이렇게 조지 맬러먼의 '버드 박스'는 역발상의 아이디어가 빚어낸 그 자체로 좋은 공포 소설이지만 작가는 독자에게 단순히 호러만 주려하지 않는다. 현대인에게 그림자처럼 달라붙어서는 늘 갇힌 느낌을 주는 불안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도 넌지시 알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바로 타인을 신뢰하는 것이다. 현재의 맬로리 내면과 과거의 공동체는 모두 그것을 위한 반면교사라 할 수 있다.


 결국 우리를 가두고 있는 새장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작가 스스로 내놓는 셈이다. 탈출엔 무엇보다도 눈이 필요하다. 하지만 작가는 신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는 게 먼저라고 말한다. 내 안전만 갈구하느라 타인을 위협으로만 보는 신체의 눈 보다는 서로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이해와 배려의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타인에게서 얻는 게 아니라 자신이 먼저 내어줄 때 가능하다.  즉 자신의 마음을 먼저 상대방에게 열어야만 하는 진정으로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다. 말 그대로 'OPEN YOUR HEART!'인 것이다.


 소설의 여정은 그런 여정이다. 'OPEN YOUR EYES'에서 'OPEN YOUR HEART'로 나아가는.

 그 여정 속에서 작가 맬러먼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빗장은 바깥이 아니라 바로 자기 내부에 있다고 말한다. 정말 갇히기 싫다면 먼저 자신부터 열어야 한다고 말이다. '버드 박스'는 그것을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라 할 수 있다. 열지 않았을 경우 얼마나 무시무시한 불안과 공포를 겪게 되는지 제대로 경험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스스로 'OPEN HEART'로 나아갈 필요성을 더욱 느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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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7 00: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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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8 01: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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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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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빛음모'는 법정 스릴러의 마이스터라 할 수 있는 존 그리샴의 27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년에 나왔지만 배경은 2008년, 그러니까 한창 서브프라임 사태로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던 때로 하고 있다. 그 때, 소설의 주인공 서맨사 코퍼는 당시의 많은 젊은 변호사가 그랬듯이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게 된다. 하지만 전적인 해고는 아니고 비영리 법률 구조 클리닉에서 일정 기간 변호사로 일을 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조건부였는데 그렇게 해고된 변호사가 너무 많아 경쟁률이 치열한 관계로 그마저도 쉽지 않다. 더구나 그녀는 변호사이면서도 항공기 사고 같은 엄청난 소송 가액의 사건만 쫓다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바람에 망한 변호사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법정에서 소송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그래서 예전 법률 회사에서 그랬듯이 서류 작업만 하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일은 더욱 구하기가 힘들다. 결국 무차별로 여러 비영리 법률 단체에다 구직 메일을 보냈던 서맨사는 9번의 거절 메일을 받은 끝에 드디어 10번째의 메일에서 면접을 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곳은 바로 애팔레치아 산맥에 위치한 브래디라는 한 작은 산간 마을에서 활동하는 마운틴 법률 구조 클리닉. 서맨사 코퍼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곳으로 떠난다. 대도시 뉴욕과는 전혀 다른, 비록 워싱턴과 500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삶의 모습은 한 세기 이상이나 차이나는 그 곳으로...


 일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서맨사 코퍼는 두 가지의 현실을 목도한다. 하나는 탐욕스런 석탄 기업의 노골적인 노천 채굴로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는 자연 환경과 주민들의 삶이다. 노천 채굴이란 석탄을 캐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갱도를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피하고자 중장비를 동원하여 무식하게 그냥 땅만 죽어라 파헤치는 방식이다. 수십대의 중장비가 동원하여 숲을 초토화시키고 아래의 암반층은 폭약으로 날려 버린다. 제거된 나무들과 흙들은 계곡에다 버린다. 결국 계곡이 메워지고 하천이 매장된다. 그리고 그 물에 의존하는 생태계도 고사된다. 그 곳에서 이런 석탄 기업의 행패와 싸우고 있는 도너반이라는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땅을, 또 그렇게 땅에 발붙이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어요. 돈과 권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이유만으로"(p. 69)


 도너반에 말대로 서맨사는 희망의 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린 이들을 만난다. 그것이 서맨사가 목도하게 된 또 하나의 현실이다. 수임료 0으로 일하는 마운틴 법률 클리닉이 아니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을 이들이 그 곳에는 많다. 그들을 위해 분투하는 클리닉의 사람들과 석탄 기업과 투쟁하는 도너반을 보며 서맨사는 변호사가 정말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차츰 깨달아간다. 소송이 너무 싫어서 서류 작업만 하고 싶은 그녀이지만 이제 소송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맨사가 목격한 현실이 서맨사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처럼 이 소설은 법정 스릴러라기 보다는 서맨사 개인의 성장 소설로 읽힐 여지가 더 크다. 사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은 아직도 존 그리샴 하면 프로페셔널한 킬러로 늘 주인공의 목숨이 아슬아슬했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나 '팰리컨 브리프'를 떠올리거나 '의뢰인"이나 '타임 투 킬'처럼 통쾌한 한 방이 있는 법정에서의 싸움을 기대할 텐데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 도너반이 보여주는 석탄 기업의 만행은 독자에게 '팰리컨 브리프' 와도 같이 악한 거대 기업과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영웅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만 그건 뒤로 갈수록 배반당하고 김이 다 빠진 맥주를 들이키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솔직히 말해 이 작품은 실패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서사는 정돈되지 않으며 초반에 뿌려진 떡밥도 회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반에 도너반의 죽음이 나왔는 데도 그 이유와 해결에 대해서조차 소설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흡사 기대감만 잔뜩 부풀려 놓고 실망스럽기 그지없게 끝난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시합 같다. 당연히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왜 존 그리샴은 이런 패착을 두게 된 것일까?

 너무나 현저히 드러나는 것이라 아무래도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도너반과 서맨사가 가지는 차이다. 도너반은 불우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석탄 기업에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아주 적극적으로 석탄 기업과의 투쟁에 임한다. 석탄 기업은 자연에 그런 깡패 짓을 하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런 짓을 서슴치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반은 굴하지도 겁먹지도 않는다. 오히려 투쟁 의지만 더 불태울 뿐이다. 도너반이 불이라면 서맨사는 얼음이다. 그만큼 소극적이라는 의미다. 도너반은 소송을 즐겨하지만 서맨사는 어떡하든 소송을 피하고 싶어한다. 서맨사가 마운틴 법률 클리닉에 호감을 가지면서도 선뜻 그 곳의 정식 변호사가 되는 것을 꺼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불의엔 분노하지만 싸우기 보다는 피하고 싶어하는 쪽. 이렇게나 둘은 다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도너반은 초기 그리샴의 주인공들과 많이 닮았다. 영화로 치면 '팰리컨 브리프'의 쥴리아 로버츠, '의뢰인'의 수잔 서랜든,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의 톰 크루즈 , '레인 메이커'의 맷 데이먼 그리고 '런어웨이 주어러'의 존 쿠삭 같은 이들 말이다. 그들의 대담성과 적극성을 도너번은 분명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존 그리샴은 그를 죽여버린다. 이제 석탄 기업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는 찰라에 도너번은 자신이 몰던 경비행기의 추락으로 어이없이 죽고마는 것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도너번의 전면전은 분명 소설의 흥행을 위한 견인차였다. 존 그리샴에게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줬던 캐릭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도너반의 동아줄을 잘라 버리고 서맨사라는 새끼줄을 잡는다. 소설의 인기를 위해서라면 너무도 연약한 그 줄을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미국의 법률 현실에 대한 체념이 아닐까 하는.

 존 그리샴은 이 소설에서 현재 미국의 법률 현실이 어떠한 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름아닌 서맨사의 아빠, 마샬을 통해서다. 그는 소송 펀드 매니저다. 소송 펀드란 사모 펀드의 일종으로 배상액이 큰 사건을 맡은 변호사에 투자하여 배상액의 몇 %를 이익으로 배당받는 펀드다. 미국에선 요즘 그런 게 유행하고 있다. 이제 소송까지 투자의 대상이 된 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소송 가액 때문이다. 도너반만 해도 석탄 회사와 전면전을 벌이려면 2백만 달러의 비용이 필요하다. 대부분 이런 소송은 막대한 자료 조사와 증인등 준비가 필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 작은 산악 마을의 일개 변호사에 불과한 도너반은 물론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소송 펀드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더이상 애런 브로코비치 같은 케이스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로 수잔 서랜든이나 맷 데이먼 그리고 톰 크루즈나 존 쿠삭 같은 이들이 활약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감수하기엔 비용이 너무도 막대해져버린 탓이다. 자본의 힘에 눌려 '어 퓨 굿맨' 같은 영웅 서사는 이제 퇴장해야 할 처지다. 존 그리샴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도너반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석탄 회사가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서맨사의 의문에 마샬 변호사를 통하여 거대 기업이 자신에게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돌아올 일을 할 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쐐기를 박는다. 마치 예전의 주인공들에게 지금의 노회한 존 그리샴이 조언하는 것 같은 이런 마샬의 말은 차라리 존 그리샴의 항복 선언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잿빛 음모'는 혼란의 산물이다.

 여기엔 자신이 바라는 꿈과 그것을 배신하는 현실 사이에서 아직 어디로 갈 지를 정하지 못한 존 그리샴의 망설임이 보인다. 도너번이 표상하는 영웅 서사를 포기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서맨사가 표상하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한 탓에 그만 이런 어정쩡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고민은 한 번으로 족하다. 독자들의 인내심은 두 번, 세 번의 고민을 참아 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은 독자에게 맡기고 어느 한 방향으로 길을 정해 그것만 치열하게 달려가는 작품으로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지금 도너반의 배짱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존 그리샴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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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스토어 밀리언셀러 클럽 138
벤틀리 리틀 지음, 송경아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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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를 모르고 읽었다면 스티븐 킹의 소설로 착각할 뻔 했습니다. 소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에 웬 낯선 타자가 불현듯 나타나서는 점차 그 공동체를 파괴시켜 나간다는 이야기는 스티븐 킹의 소설에서 익히 보던 것이었으니까요. 대표적인 것으로 제가 가장 무섭게 읽은 '살렘즈 롯'이 있고 타자와의 전면전이 치뤄지는 '미스트'도 있으며 미국의 레이거노믹스를 공포소설로 훌륭하게 형상화시킨 'NEEDFUL THINGS(흔히 '욕망을 파는 집'으로 알려져 있는)'이 있지요. 특히 이 '욕망을 파는 집'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더 스토어'는 '욕망을 파는 집'과 유사한 경로로 진행되거든요.


 '욕망을 파는 집'의 영화 포스터.


 잠시 '욕망을 파는 집'의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웃간 인심이 좋아 정겨운 작은 마을 캐슬록에 'NEEDFUL THINGS'라는 가게가 문득 나타납니다. 무엇을 파는 지 궁금해하던 마을 사람들 눈에 가게가 쇼윈도에다 걸어둔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팝니다'라는 푯말이 보입니다. 호기심 많은 꼬마 하나가 시험삼아 들어갑니다. 노인인 주인에게 꼬마는 자기가 가장 갖고 싶지만 엄청 희귀한 야구 선수 카드를 말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정말로 구해줍니다. 푯말이 말하는 게 진짜라는 소문이 퍼져 나가면서 저마다 은밀히 가지고 싶었던 것을 구하기 위해 가게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빛이 오는 곳에 그림자도 따라오는 법이듯 욕망이 차츰 실현되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불행도 찾아옵니다. 마약처럼 자신의 거듭된 욕망 실현에 중독된 나머지 파멸로 치닫는 것이죠. 결국 캐슬록이란 평화로웠던 마을 전체가 마을 사람들끼리의 증오로 인한 서로에 대한 학살로 깡그리 파괴되고 맙니다.


  '더 스토어'의 이야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주니퍼'란 작은 마을에 '월마트'와 비슷한(저자 자신이 '더 스토어'의 아이디어를 '월마트'를 보면서 떠올렸다고 하는군요.) '더 스토어'가 들어옵니다. 주인공 빌은 아침마다 조깅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코스는 '더 스토어'가 들어올 부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빌은 거기서 사슴이나 동물들이 죽어 있는 것을 봅니다. 동물들의 사체는 사냥이나 사고가 아닌 그냥 거기 와서 자연사 해 버린 것 같아 보입니다. 게다가 '더 스토어'는 여러 지점에서 점원이 총으로 손님들을 학살하는 등의 비극적 사건이 잇달아 일어난 곳이란 걸 알게 됩니다. 빌은 '더 스토어'에 웬지모를 사악함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싫어하게 됩니다. 하지만 '더 스토어'는 마을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옵니다. 다양한 물건을 가까이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과 많은 고용으로 경기가 오래도록 바닥을 치던 '주니퍼'에 활력을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죠. '욕망을 파는 집'에서 마을 사람들이 가게를 좋아했던 이유인 '욕망을 쉽게 이루어준다'는 것과 마찬가지인 이유로 주니퍼의 마을 사람들 역시 '더 스토어'를 좋아합니다. 하물며 빌조차 '더 스토어'로 가 그 많은 상품을 본 뒤론 그 곳을 파라다이스로 여겨 버립니다. 그러자 '욕망을 파는 집'이 마을 사람들을 지배했듯이 '더 스토어'도 차츰 주니퍼의 마을 사람들을 지배하게 됩니다. 언론을 돈으로 사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사만 내도록 하고 경쟁하는 작은 가게들은 주인을 죽여서까지 몰아내 버리며 급기야 주니퍼 의회를 장악해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법까지 바꿔버립니다. '더 스토어' 앞에서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공기관은 죽고 아름답고 인심 좋았던 '주니퍼'는 오로지 '더 스토어'만이 만인지상의 존재로 군림하는 파시스트적인 마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욕망을 파는 집'에서 사실은 악마였던 가게 주인에게 영혼을 모조리 빼앗겼던 캐슬록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가 된 것이죠.

 이렇게 비슷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더 스토어'는 그 과정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욕망을 파는 집'과 차이가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욕망을 파는 집'이 욕망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사람을 파멸해 나가는 지를 밝혀 공포를 주로 개인적인 측면에서 드러낸다면 그와 달리 '더 스토어'는 공포 자체를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세력이 사람들의 욕망 실현을 빌미로 어떻게 공동체를 무너뜨려 가는가 하는 보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가져온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더 스토어'의 모습이 읽다보면 소설에선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생생한 리얼리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호러라는 덧칠을 하긴 했습니다만 현실에서 월마트와 같은 SSM이 작은 지역의 상권을 장악해 나가는 과정을 소설이 가급적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SSM, 즉 기업형 슈퍼마켓이 무분별하게 진출하여 골목상권을 위태롭게 만드는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더욱 실감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이 보다 집중하고 있는 그 측면의 공포를 통해 왜 우리가 SSM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내버려 두어선 안되는지 더 많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독자를 자기가 속한 현실의 문제로 인도하고 거기에 대해 사유를 통해 참여하도록 만든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포의 변증법'을 쓴 프랑코 모레티는 공포가 자본주의가 은밀하게 감춰둔 독소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파헤칠 수 있는 유용한 통로가 되는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를 통해 여실히 밝힌 적이 있지요. 그런 면에서 '더 스토어'도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소설이라면 분명 잡아내지 못할 지점까지 내려가 소비지상주의가 모토로 되어버린 현재 자본주의 가 어떻게 인간의 욕망을 형성하고 인간을 길들이며 또한 사회마저 자기 뜻대로 통제해 나갈 수 있는 지, 일상에서 얼른 깨닫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독소를 잘 짚어내주고 있으니까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1부와 2부를 이 소설과 곁들여서 읽으면 더욱 '더 스토어'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으실듯 합니다. '더 스토어'는 사실 거기에 나오는 장 보드리야르의 이야기를 소설로 구현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부정적인 면을 말할 차례로군요. '욕망을 파는 집' 보다 담고자 하는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그만큼 부작용도 따랐는데요, 그건 바로 이야기가 시야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작가가 공포와 사회적 주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기 싫어서인지 이 둘을 긴밀하게 엮기 위한 설정과 상황들이 곳곳에 보이는데 읽다보면 그게 오히려 이 소설의 악재로 작용한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일단 등장인물의 소비가 너무 심하다는 측면입니다. 대표적으로는 초반의 그렉 하그로브를 들 수 있을 것인데 이 사람은 건설업자로 '더 스토어'의 부지 공사를 맡는데 이야기 초반에서 '더 스토어'를 반대하는 빌과 공청회에서 대립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뭔가 둘 사이에 '더 스토어'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킬 것 같은데 얼마 안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그것도 직접 묘사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말로 간단히 처리해 버리죠. 거기다 그 딸이 주인공의 딸에게 나타나서 '더 스토어'에 뭔가 불길한 것이 있음을 은밀히 알리는데 그것도 그것으로 그칠 뿐, 소설에서 더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인물과 전개에 있어서 구멍이 불쑥불쑥 존재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단단하게 잡아주지 못하고 다소 산만하게 흩어져 오히려 소설이 주고자 하는 공포조차 반감되는 면이 존재하지요.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지요. 공포에 관해서라면 딱 이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소설에 공포를 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게 오히려 소설을 덜 공포스럽게 만드니까요. 바로 독자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이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밤의 매니저' 때문입니다. 소설에는 '밤의 매니저'라는 좀비 비슷한 존재들이 나옵니다. '비슷한'이라고 굳이 말을 한 것은 소설에서도 그 정체를 딱히 단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영혼 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도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두교에서 주술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좀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죠. 제 생각으로는 '욕망을 파는 집'에서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긴 이들이 육신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이런 존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튼 바로 이 부분이 그 자체로 좋은 소비지상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된 이 소설을 그 비판의 날마저 무디게 할 위험이 있는 초현실로 넘어가게 만드는 데요. 정작 이 존재에겐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실 이야기에서 이 존재를 빼버려도 전개상 별 무리가 없고 꼭 있어야할만큼 소설 주제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아니거든요. 어쩌면 '욕망을 파는 집'과 마찬가지로 '더 스토어'에 포획된 영혼의 미래를 보여주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지만 그렇다면 소설이 더욱 디테일하게 보여줬어야 했을 것 같아요. 그저 죽여서 되는 것으로만 끝내 버리니 영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거기다 이 존재들은 결말에서 중요한 역할까지 하는데 존재 자체의 맥락을 짚어낼 수 없으니 결말도 그렇게 확 와 닿지 않게 됩니다. 아무래도 분명 공포 효과의 증대를 노리고 나온 존재들 같은데 스포트라이트를 받을수록 오히려 공포의 수치가 하락하도록 부추겨요.

 허다한 공포 영화와 소설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 한 가지가 있다면 공포는 결코 졸라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무섭게 만드려고 잔혹한 장면, 섬뜩한 연출, 음산한 음악을 깔아도 그 맥락이 이해되지 않으면 소용없어요. 공포는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수용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통해 창조되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무서울 때는 언제나 보거나 읽는 자의 상상력이 적극적으로 개입될 때죠. 남이 만든 장면이 아니라 내가 연출한 장면을 통해 공포는 불현듯 도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용자의 적극적 해석 여지(우리는 이것을 공감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를 만들지 못하는 공포는 그저 '제발 무섭게 느껴줘!'라고 조르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거죠. 그런 공포는 아무 것도 낳지 못하고 그저 소비되는 것에 불과합니다. '밤의 매니저'가 그러하다는 것이죠. 특히나 밤의 매니저가 되는 제이크의 경우에는 앞뒤까지 맞지 않아 더욱 곤혹스럽습니다. '더 스토어'의 점원인 그는 물건을 소소하게 훔치다가 발각되어 밤의 매니저가 되는데 앞에서 우리는 부랑자 사냥을 통해 아무리 불법적인 일이더라도 태연하게 저지르는 '더 스토어' 점원의 모습을 보면서 '더 스토어'가 얼마나 점원을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게 되거든요. 그런데 높은 위치에 있는 제이크가 점포의 물건을 훔친다구요? 앞서도 말했듯이 아무래도 작가가 편하게 캐릭터를 소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의 전개상 캐릭터가 막상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면 가지치기하듯 쳐내는 느낌이랄까요.

소비지상주의의 부정적인 모습을 비난하는 소설이 이번엔 저에게 소비의 남용을 지적당하고 있다니 어쩐지 재밌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식으로 작가는 더욱 소비의 질 나쁜 측면을 알려주려는 것일까요? 후후. 아무튼 벤틀리 리틀은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났는데 좀 더 이야기를 꽉 장악하고 나아갔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조금 남네요. 스티븐 킹보다 판돈이 올라가서인지 이야기에 좀 휘둘리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별 다섯 개를 주는 것은 비록 90년대에 나왔으나 이 이야기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이고 632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재밌게 읽을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저는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너무 궁금해서 중간쯤 읽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결말부터 읽고 다시 중간으로 돌아갔을 정도예요.(빌의 딸 '서만사' 때문이었어요. 저는 서만사의 변화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이 가진 또 하나의 소비 남용을 말해야 겠네요. 그건 바로 여성을 너무 수동적으로 소모한다는 것입니다. 변화의 주도적 역할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몫이고 여성은 그저 아내 '지니'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그저 불안해하거나 '서만사'처럼 조종당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아요. '더 스토어'에서 여성 점원을 대하는 태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는데 그렇게 소설이 너무 남성 중심의 시각이 아닌가 하는 텁텁함이 읽다가 들었던 것이 이제야 생각나는군요.으음, 별 하나 정도는 깎아야 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인상으로는 어쨌든 기대되는 작가라는 점에는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더 나은 모습으로 만나길 바라며 그런 면에서 최고의 호러 소설에 주는 브람스토커상 수상작(90년)이자 90년대 최고의 호러 소설중 하나로 손꼽히는 'THE REVELATION'이 발간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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