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음모
존 그리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잿빛음모'는 법정 스릴러의 마이스터라 할 수 있는 존 그리샴의 27번째 장편 소설이다. 작년에 나왔지만 배경은 2008년, 그러니까 한창 서브프라임 사태로 리먼브라더스가 파산하던 때로 하고 있다. 그 때, 소설의 주인공 서맨사 코퍼는 당시의 많은 젊은 변호사가 그랬듯이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실직하게 된다. 하지만 전적인 해고는 아니고 비영리 법률 구조 클리닉에서 일정 기간 변호사로 일을 하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조건부였는데 그렇게 해고된 변호사가 너무 많아 경쟁률이 치열한 관계로 그마저도 쉽지 않다. 더구나 그녀는 변호사이면서도 항공기 사고 같은 엄청난 소송 가액의 사건만 쫓다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바람에 망한 변호사 아버지의 과거 때문에 법정에서 소송하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고 그래서 예전 법률 회사에서 그랬듯이 서류 작업만 하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일은 더욱 구하기가 힘들다. 결국 무차별로 여러 비영리 법률 단체에다 구직 메일을 보냈던 서맨사는 9번의 거절 메일을 받은 끝에 드디어 10번째의 메일에서 면접을 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 곳은 바로 애팔레치아 산맥에 위치한 브래디라는 한 작은 산간 마을에서 활동하는 마운틴 법률 구조 클리닉. 서맨사 코퍼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곳으로 떠난다. 대도시 뉴욕과는 전혀 다른, 비록 워싱턴과 500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삶의 모습은 한 세기 이상이나 차이나는 그 곳으로...


 일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그 곳에서 서맨사 코퍼는 두 가지의 현실을 목도한다. 하나는 탐욕스런 석탄 기업의 노골적인 노천 채굴로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는 자연 환경과 주민들의 삶이다. 노천 채굴이란 석탄을 캐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써 갱도를 건설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피하고자 중장비를 동원하여 무식하게 그냥 땅만 죽어라 파헤치는 방식이다. 수십대의 중장비가 동원하여 숲을 초토화시키고 아래의 암반층은 폭약으로 날려 버린다. 제거된 나무들과 흙들은 계곡에다 버린다. 결국 계곡이 메워지고 하천이 매장된다. 그리고 그 물에 의존하는 생태계도 고사된다. 그 곳에서 이런 석탄 기업의 행패와 싸우고 있는 도너반이라는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끊임없이 땅을, 또 그렇게 땅에 발붙이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있어요. 돈과 권력이 자기에게 있다는 이유만으로"(p. 69)


 도너반에 말대로 서맨사는 희망의 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삶의 막다른 벼랑으로 내몰린 이들을 만난다. 그것이 서맨사가 목도하게 된 또 하나의 현실이다. 수임료 0으로 일하는 마운틴 법률 클리닉이 아니면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졌을 이들이 그 곳에는 많다. 그들을 위해 분투하는 클리닉의 사람들과 석탄 기업과 투쟁하는 도너반을 보며 서맨사는 변호사가 정말은 어떤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인지 차츰 깨달아간다. 소송이 너무 싫어서 서류 작업만 하고 싶은 그녀이지만 이제 소송을 피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맨사가 목격한 현실이 서맨사를 이렇게 변화시키는 것처럼 이 소설은 법정 스릴러라기 보다는 서맨사 개인의 성장 소설로 읽힐 여지가 더 크다. 사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할 위험을 안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자들은 아직도 존 그리샴 하면 프로페셔널한 킬러로 늘 주인공의 목숨이 아슬아슬했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나 '팰리컨 브리프'를 떠올리거나 '의뢰인"이나 '타임 투 킬'처럼 통쾌한 한 방이 있는 법정에서의 싸움을 기대할 텐데 여기서는 그 무엇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초반 도너반이 보여주는 석탄 기업의 만행은 독자에게 '팰리컨 브리프' 와도 같이 악한 거대 기업과 싸우는 정의로운 변호사라는 영웅 서사에 대한 기대감을 주지만 그건 뒤로 갈수록 배반당하고 김이 다 빠진 맥주를 들이키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게 된다. 솔직히 말해 이 작품은 실패작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서사는 정돈되지 않으며 초반에 뿌려진 떡밥도 회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반에 도너반의 죽음이 나왔는 데도 그 이유와 해결에 대해서조차 소설은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흡사 기대감만 잔뜩 부풀려 놓고 실망스럽기 그지없게 끝난 메이웨더와 파퀴아오의 시합 같다. 당연히 도대체 이 소설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것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 왜 존 그리샴은 이런 패착을 두게 된 것일까?

 너무나 현저히 드러나는 것이라 아무래도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도너반과 서맨사가 가지는 차이다. 도너반은 불우한 자신의 과거 때문에 석탄 기업에 원한을 가지고 있으며 때문에 아주 적극적으로 석탄 기업과의 투쟁에 임한다. 석탄 기업은 자연에 그런 깡패 짓을 하는 만큼 사람에게도 그런 짓을 서슴치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너반은 굴하지도 겁먹지도 않는다. 오히려 투쟁 의지만 더 불태울 뿐이다. 도너반이 불이라면 서맨사는 얼음이다. 그만큼 소극적이라는 의미다. 도너반은 소송을 즐겨하지만 서맨사는 어떡하든 소송을 피하고 싶어한다. 서맨사가 마운틴 법률 클리닉에 호감을 가지면서도 선뜻 그 곳의 정식 변호사가 되는 것을 꺼리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불의엔 분노하지만 싸우기 보다는 피하고 싶어하는 쪽. 이렇게나 둘은 다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도너반은 초기 그리샴의 주인공들과 많이 닮았다. 영화로 치면 '팰리컨 브리프'의 쥴리아 로버츠, '의뢰인'의 수잔 서랜든,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의 톰 크루즈 , '레인 메이커'의 맷 데이먼 그리고 '런어웨이 주어러'의 존 쿠삭 같은 이들 말이다. 그들의 대담성과 적극성을 도너번은 분명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존 그리샴은 그를 죽여버린다. 이제 석탄 기업과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려는 찰라에 도너번은 자신이 몰던 경비행기의 추락으로 어이없이 죽고마는 것이다. 왜 이러는 것일까? 도너번의 전면전은 분명 소설의 흥행을 위한 견인차였다. 존 그리샴에게 빛나는 성공을 가져다줬던 캐릭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그는 도너반의 동아줄을 잘라 버리고 서맨사라는 새끼줄을 잡는다. 소설의 인기를 위해서라면 너무도 연약한 그 줄을 말이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 미국의 법률 현실에 대한 체념이 아닐까 하는.

 존 그리샴은 이 소설에서 현재 미국의 법률 현실이 어떠한 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름아닌 서맨사의 아빠, 마샬을 통해서다. 그는 소송 펀드 매니저다. 소송 펀드란 사모 펀드의 일종으로 배상액이 큰 사건을 맡은 변호사에 투자하여 배상액의 몇 %를 이익으로 배당받는 펀드다. 미국에선 요즘 그런 게 유행하고 있다. 이제 소송까지 투자의 대상이 된 시대인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소송 가액 때문이다. 도너반만 해도 석탄 회사와 전면전을 벌이려면 2백만 달러의 비용이 필요하다. 대부분 이런 소송은 막대한 자료 조사와 증인등 준비가 필요하고 장기간에 걸쳐 이뤄지기 때문이다. 한 작은 산악 마을의 일개 변호사에 불과한 도너반은 물론 그만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소송 펀드의 도움을 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더이상 애런 브로코비치 같은 케이스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그대로 수잔 서랜든이나 맷 데이먼 그리고 톰 크루즈나 존 쿠삭 같은 이들이 활약할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현실적으로 한 개인이 감수하기엔 비용이 너무도 막대해져버린 탓이다. 자본의 힘에 눌려 '어 퓨 굿맨' 같은 영웅 서사는 이제 퇴장해야 할 처지다. 존 그리샴은 그것을 받아들인다. 도너반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에 석탄 회사가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는 서맨사의 의문에 마샬 변호사를 통하여 거대 기업이 자신에게 오히려 더 큰 위험으로 돌아올 일을 할 리는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쐐기를 박는다. 마치 예전의 주인공들에게 지금의 노회한 존 그리샴이 조언하는 것 같은 이런 마샬의 말은 차라리 존 그리샴의 항복 선언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잿빛 음모'는 혼란의 산물이다.

 여기엔 자신이 바라는 꿈과 그것을 배신하는 현실 사이에서 아직 어디로 갈 지를 정하지 못한 존 그리샴의 망설임이 보인다. 도너번이 표상하는 영웅 서사를 포기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서맨사가 표상하는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지도 못한 탓에 그만 이런 어정쩡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이런 고민은 한 번으로 족하다. 독자들의 인내심은 두 번, 세 번의 고민을 참아 줄 정도로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택은 독자에게 맡기고 어느 한 방향으로 길을 정해 그것만 치열하게 달려가는 작품으로 돌아와줬으면 좋겠다. 지금 도너반의 배짱이 필요한 사람은 바로 존 그리샴 자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