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듭과 십자가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소설은 묘지에서 시작한다.

 묘지에 둘러진 담 위로 까마귀들이 울고 있는 그 곳에서 그는 생전에 그토록 인정받고 싶었으나 인정받을 수 없었던 이의 무덤을 말없이 바라보다 묘지를 나온다. 그는 오랜만에 동생을 찾아가 볼 생각을 한다. 자기와는 달리 인정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동생. 가는 길엔 비가 내리고 도로 사정이 나빠 가기가 쉽지 않다. 마치 동생에게로 가고 싶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버림받았던 과거를 생생하게 환기하게 만드는 실체이기에 그런 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과거에 매몰된 자다. 과거의 상처, 과거의 실수. 거기에 사로잡혀 그는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잠시 들르는 관광객은 전혀 알 수 없는, 사실은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 도시인 에든버러와도 같다.


 이제는 영국의 대표적 범죄 소설 시리즈로 자리잡은 이언 랜킨의 존 리버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시작을 연 작품의 제목은 '매듭과 십자가'. 거의 3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영국에서도 흔치 않은 성을 가진, 이  리버스(rebus)라는 인물을 '부활하는 남자들'로 처음 만났다. 2004년 에드가 앨런 포 수상작에다 영국에서 아주 유명한 시리즈라고 해서 읽게 된 것이었는데 시작부터 리버스는 서장에게 머그컵을 던지고 근무 태도 불량으로 다시 경찰 학교로 가서 그런 문제아들만 모아놓고 가르치는 교정 프로그램을 연수받는다. 제목의 '부활하는 남자들'이란 바로 그 프로그램을 일컫는 일종의 '은어'다. 재밌는 것은 머그컵의 표적이 되었던 서장이 '질 템플턴'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왜 재밌냐면, '부활하는 남자들(2001)'에서는 리버스와 견원지간이나 다를 바 없는 질 템플턴이 대략 13년 전인 '매듭과 십자가'에선 (이제 막 시작되려는)연인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기에 관계가 이토록 어긋나 버렸을까? 역시 사내연애는 끝이 안 좋으면 더없이 힘든 것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한편 그 과정을 소상히 알 수 있도록 리버스 시리즈가 계속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사족에 불과하다. 리버스가 '부활하는 남자들'이란 프로그램에서 하는 일이 미제로 남은 과거 사건을 다시 수사하는 것이라는 게 보다 더 중요하다. 거기서 리버스는 자신이 과거에 담당했던 사건을 다시 마주하고, 이제는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새로이 조명하게 된다.


 이렇게 '매듭과 십자가'와 '부활하는 남자들'엔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과거'다. 아마도 이것이 리버스 시리즈만의 독보적 키워드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과거의 아픔, 과거의 잘못으로 매듭지어진 시간을 다시 풀고, '십자가'가 서로 연결하는 것이듯 매듭으로 묶였던 시간을 현재로, 미래로 흐르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이언 랜킨이 리버스를 통해 추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언 랜킨은 앞으로 리버스가 걸어가야 할 노선을 처음부터 제목으로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제목의 '매듭'과 '십자가'는 리버스에게 누군가 보내온 봉투에서 나온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애초에 이언 랜킨은 시리즈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매듭과 십자가' 한 권으로 끝낼 생각이었긴 하지만 말이다.


 키워드 이야기나 나왔으니 말인데 '매듭과 십자가'에는 리버스를 차별화하는 특성을 나타내는 키워드가 두 가지 있는 것 같다. 그 중 하나는 물론 앞에서 말한 과거고 다른 하나는, 이게 '이 작품에선 더 비중있게 다뤄지는데, 바로 '위축된 남성성'이다.


 이언 랜킨이 마초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매듭과 십자가'는 훼손된 남성성에 대한 공포를 반영한 소설이다.

 (여기에 대해 좀 더 거창하게 문화사적인 이야기를 했는데 리뷰가 길어져서 그건 따로 페이퍼로 작성하기로 하고 생략해 버렸다. 문맥이 다소 이상하더라도 조금만 양해해 주시길...)

 읽어보면 분명히 느끼겠지만 리버스는 형사로서 그리 매력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은 그 어떤 사람들 보다 크나 수사관으로서의 열의는 그다지 없는 편이다. 담배와 술에 대한 열의의 반만 있었어도 조기에 사건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다. 지금 에든버러는 소녀들을 납치해 살인하는 연쇄 살인마로 '딸을 집안에 가두라!'는 카피가 신문에 메인으로 등장할만큼 공포에 물든 상황이다. 잇달아 희생자가 나오지만 수사의 진척은 도무지 없고 여론의 압박은 심해지기만 한다. 하지만 리버스의 관심은 다른 쪽으로 더 많이 돌아간다. 사회의 아픔 보다는 개인의 아픔 쪽으로 말이다. 자신의 상처 그리고 외로움. 탐문 보다는 우울과 허무의 코트를 입고 밤늦은 선술집에서 그것을 토로하는 장면이 더 많이 목격된다. 그는 정말 고독하다. 아내와 이혼하고 사랑하는 딸 '사만다'마저 아내에게 빼앗겼고 경찰에서는 대부분의 형사가 그와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외톨이인 것이다. 그는 외로움을 달래려 여자에게 먼저 수작을 걸고 그녀가 파티에 초대하자 잔뜩 단장에 신경쓰고 갔는데, 우리의 기대와도 다르게 자신을 부른 그녀가 정작 다른 남자와 얼싸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상처받는다. 그러다 거기서 질 템플턴을 만나고 하룻밤을 보내지만 뒤로 해달라는 그녀와 정사를 벌이다 과거의 고통이 떠올라 운다. 질은 뒤로 하는 게 싫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죠 하고 묻는다.


이렇게 리버스는 뭔가 다른, 어쩌면 많이 이상하기도 한 형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전직이 SAS라는 특수 부대 군인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좀 더 과장을 허락한다면 마치 수사물에서 활약하는 형사에 대해 가지는 우리의 기대를 차례로 배반하겠다는 작심을 한 것만 같다. 스포일러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리버스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 혀를 차며 한심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면 우리는 궁금해진다. 왜 리버스는 형사가 되었던 것일까?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거창한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범죄자 체포를 통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다는 치기어린 호승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끝내 그가 왜 형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다만 그에겐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하는 과거의 아픔이 있다는 것과 그 아픔의 실상 뿐이다. 그리고 거기서 이 소설이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 자,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범인의 정체, 과거의 진실에 대해 작품으로 확인하고 싶으신 분은 여기서 읽기를 강제 종료해 주세요. -


 그렇다면 모든 것의 열쇠가 되는 과거의 상처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신이 동성애의 유혹에 강하게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미 읽으신 분들은 의문을 제기하실 것이다. 리버스의 상처는 친구를 내버려 두고 온 것에 있지 않았냐고 말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표면적인 부분에서만 그러하다. 정말로 친구에 대한 배신이 이유라면 이건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낳은 설정이 그만한 아픔을 가져오기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리버스가 여기에 얼마나 커다란 아픔을 느끼냐 하면 자신마저 완전히 기억을 봉인해 버려 동생 마이클의 최면을 통해서야 겨우 기억할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자발적인 배신이었다면 이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버스의 경우 전혀 자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의에 의해 강제된 배신이었다. 배신당한 친구가 목숨을 잃은 것도 아니고 그저 훈련 과정에서 탈락했을 뿐이다. 도대체 이렇게나 봉인하고 자책할만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언 랜킨의 작가적 역량이 모자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 상태에서의 말이지만, 다른 이유를 상정해야 한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이것이 결정적 단서다.


  "그냥 키스만 하자는 거야."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존 빼지 말라고." 그의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왔어. 자기가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거지. 그 친구도 상황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 다가왔지. 그의 몸이 닿자 가볍게 경련이 일더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인데도 몸은 말을 듣지 않았어. 난 그냥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쏟을 뿐이었지."(P. 184)


 열쇠는 저 볼드체의 문장이다. 동료 리브가 키스하자고 다가오면서 리버스의 몸에 닿자 그는 가벼운 경련을 느낀다. 그리고 의식과 달리 몸이 저항하지 않는 걸 깨닫는다. 즉 리버스는 리브의 행위에 흥분했고 만일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고든과 키스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리버스가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지금까지 그를 자책하게 만든 진짜 원인인 트라우마다. 그것은 하나의 의문문으로 정리된다. 

 "내가 혹시 동성애자인 것은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늘 리버스를 아프게 만드는 것의 실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커다란 아픔이 된 까닭은 리버스가 그날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표정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리버스가 하마터면 리브와 키스할 뻔 했을 때 갑자기 감방 문이 열리면서 들어왔던 장교가 처음으로 리버스에게 보여주었던 그 표정. 바로 역.겹.다.


 한 남자가 문간으로 들어왔어. 영국인. 분명 외국인은 아니었어. 계급이 꽤 높아 보였지. 그는 역겹다는 얼굴로 우릴 쳐다봤어. 밖에서 우리 얘길 고스란히 엿들은 모양이야.(P. 185)


 여기서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로, 훼손된 남성성의 소유자임을 사람들에게 들켰을 경우 어떤 반응을 받게될 지 적나라하게 목격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내면 깊은 곳에다 꼭꼭 감춰두었고 더하여 자신의 남성성을 의심받지 않도록 강한 남성성의 표상인 형사가 된 것이다.


 다시 말해 리버스는 내내 자신이 동성애자일 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첫 반응을 보여준 사람이 하필이면 계급이 꽤 높은 사람이라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계급이 꽤 높은 그 사람이 바로 아버지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꽤 높은 계급의 사람은 종종 '부대의 아버지'라 호명되곤 하지 않던가. 그대로 그 사람의 역겨운 표정은 리버스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내내 보았던 자신을 멀리하거나 무시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불러 일으켰을 것이다.


  그 계급 높은 사람의 표정을 보기 전까지는 아버지의 부당한 차별이라고만 여겼었는데, 그 이후 리버스는 그럴만한 이유가 자기에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군인이 되어서까지 아버지의 인정을 얻고 싶었던 리버스는 이제 단순히 그럴듯한 직업만 가지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다. 사실 이미 승부는 나 있었던 것이다. 동성애 유혹에 쉽게 빠져버릴 정도로 리버스는 자신의 남성성이 손상당했다고 여겼고 이왕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아버지의 인정은 앞으로도 영원히 받지 못할 것이라 예감한다. 오로지 진정한 남성성만이 아버지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시작이 그 무덤이라는 점은 이것을 결정적으로 드러낸다. 하여 그는 더욱 절망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가 왜 질 템플턴과 정사 도중 눈물을 흘렸는지도 이해된다. 리버스는 왜 질 템플턴과 정사를 나누다 불현듯 군대에 있었을 적 일을 떠올린 것일까? 이유는 상황이 아니라 체위에 있다. 질 템플턴과 뒤로 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이 리버스에게 대부분 호모들 간의 정사 체위임을 무의식적으로 깨닫게 했고 거기서 희열을 느끼는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어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아마도 원래는 한 권의 완결된 작품으로 생각했던 탓인지 이렇게 소설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설정이 디테일하다. 플롯엔 허점이 있을지 몰라도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주제에 맞게 그리고 그 암시를 독자들이 받을 수 있도록 미세 조정된 설정들이 돋보인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허점은 눈감아주고 싶어진다.


이 소설이 가진 호모포비아로서의 설정은 연쇄 살인에서 더욱 드러난다. 왜 주로 소녀들이 살해되는가? 그것은 바로 소녀가 여성 중에서 남성이 가장 손쉽게 지배가능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성애자라는 게 증명되어 시험에서 탈락한 리브가 저지른다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성이 훼손되었다고 여겨지는 자가 살인을 통해서 자신의 남성성이 그렇지 않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형사로서의 리버스 모습 그대로다. 그렇게 리브와 리버스, 둘은 강하게 연결된다. 아니나 다를까 리버스는 그를 형제로 생각한다고 종종 고백까지 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리브가 연쇄 살인을 한 애초의 목적이 실은 사만다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뚜렷하게 부각된다. 리버스 자신이 가장 되찾아오고 싶어하는 이도 바로 사만다이기 때문이다. 즉 리브는 리버스의 욕망을 대신 실현시켜 주는 존재다. 리브의 살인은 리버스가 가진 열망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것은 리브가 재혼한 아내의 남편을 살해하는 것에서 더 한층 재확인 된다. 더구나 그 남편의 직업은 시인이다. 여성스런 직업의 소유자인 것이다. 리버스는 여성스런 직업을 가진 자에게 아내를 빼앗김으로써 더욱 자신의 남성성이 손상되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므로 리버스에게 있어 그의 제거는 필연적이다. 이는 남편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범인에게 죽는 어른 남성이라는 점에서 한층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런 식으로 이언 랜킨은 '훼손된 남성성에 대한 공포'를 은밀하지만 디테일하게 깔아 놓았다. 때문에 이 소설은 형사물의 전형적인 모습을 많이 비켜나 있지만 오히려 더 색다른 독해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리버스는 정말로 동성애자일 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리버스의 마초적인 모습은 내부의 공포가 왜곡되어 발현된 모습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겁이 많은 개가 더 많이 짖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말이다. 특히나 마지막 장면에서 리브와 함께 뒹구는 리버스의 모습은 이언 랜킨의 짓궂은 농담이 아니라면 그동안 억누르고 있었던 동성애의 욕망을 드디어 해소시켜주는 랜킨의 배려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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