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한 방울 - 이어령의 마지막 노트 2019~2022
이어령 지음 / 김영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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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죽음을 대면할 때 숙연해진다. 아무리 커다른 권력을 가진자라도, 아무리 어마어마한 부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나약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시대의 지성인으로서 한 평생을 살아왔던 이어령도 죽음을 대면하며 한들자 한글자 메모를 남겼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라고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가!(Life is C between B and D) 즉, 인생이란 '삶, 탄생(Birth)과 죽음(Death) 사이에서 선택(Choice)'이라는 뜻이다. 삶과 죽음의 선택 속에서 이어령은 메모지와 펜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적는 길을 선택했다. 자신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며 죽음을 묵묵히 대면하는 길을 선택했다. 암과 싸우기 보다는 암을 친구로 대하기로 선택한 그의 마지막을 드려다보자.


  '눈물 한 방울'이라는 책 제목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어령은 제목을 '눈물 한 방울'이라 정한 이유를 "우리는 피 흘린 혁명도 경험해봤고, 땀 흘려 경제도 부흥해봤다. 딱 하나,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 바로 눈물, 즉 박애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자신을 위한 눈물이 아닌, 이웃을 위해서 흘릴 수 있는 사랑의 눈물이 필요한 시기임을 이어령은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의 실천으로서의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함에 동의하지만, 이어령이 '눈물 한 방울'이라는 제목을 자신의 마지막 노트의 제목으로 정한 것은 지난날의 회한과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죽음의 공포 때문이 아닐까? 

 이어령은 다양한 사물을 통해서 사유를 하고 이를 기록했다. 이책의 초반부에는 '늙다와 낡다'라는 글이 있다. "늙은이여! 쫄지마. 이가 빠지고 머리카락이 빠져도 손톱 발톱이 부서져도 두 손만 있으면 만세를 부를 수 있으면 천세 만세 살 수 있다."라며 늙은 자신에게 '천세 만세 살 수 있다.'며 희망의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글은 늙고 병들었기에 천천히 죽음에 다가갈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내면에 대한 위로의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밤길에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뒤쫓아 온다."-33쪽


  이어령은 '밤'과 '검은 그림자'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승 사자가 찾아올 듯한 '밤길'과 검은 옷을 입은 저승사자의 '검은 그림자'가 두려웠던 것 같다. 심지어는 불을 켜 놓고 잠을 자기까지 한다.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대해서 의연히 맞서려 몸부림치는 이어령의 내면이 읽혀진다. 


  "죽음은 무지개인가 보다.  ..... 하늘로 들어가는 문 찬란한 오색 무지개"-39쪽


  무지개를 보며 어떤이는 희망을 본다. 또 어떤이는 현실에 뿌리 두지 못한 허황된 생각을 본다. 그런데, 이어령은 '하늘로 들어가는 찬란한 문'을 본다. 누구나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죽음이라는 길을 보면서 어떠한 길에 들어설지 두려움이 밀려온다. 죽음에 들어가는 문이 찬란한 오색 무지개라 말한 이어령은 죽음에 임해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것일까?

  이 책의 곳곳에 죽음에 관한 말들이 흩어져 있다. 바람 한점 없는 날에도 저자의 마음은 흔들린다. 살고 싶어서..... 그러면서 신에게 일말의 시간을 달라며 애원한다. 


  "하나님 제가 죽음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까닭은 저에게는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169쪽


  책을 꺼낼 힘도 없어 전자 책으로 글을 읽는 이어령! 조금 늦게 신의 곁에 가더라도 용서해 달라는 그의 글에서 책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향기가 난다. 책을 읽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새책을 주문한다. 그리고 다 읽은 책이라 할지라도 새롭게 읽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도 사랑하는 책과 이별해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책들과도 이별을 해야할 시간이 되어서 최고 사령관이 부대의 사열을 하듯 서가의 구석구석을 돌았다."-195쪽


  즉음을 맞이하는 2022년! 그는 "여기에 남은 여백 만큼만 살게하소서"라며 절대자에게 부탁했다. 이제는 여백이 남지 않았는지 절대자의 허락을 받지 못했는지. 책을 사열하며 이별을 고한다. 그에게는 읽어야할 책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래서 그 책들을 읽기 위해서라도 더 살고 싶었다. 그러나 절대자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몸무게는 쭉쭉 빠져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2022년 1월 23일 밤에 마지막 글을 남긴다. 


  "나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


  라는 글을 남기고 펜을 내려 놓는다. 죽음에 앞서 한마디 말을 남기고 싶었던 이어령은 그렇게 쓰러져갔다. 그로부터 한달 후인, 2022년 2월 26일 절대자의 곁으로 간다.


 깊은 사유의 내공을 가진 그의 지혜를 더 이상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프지만, 죽음을 담담하게 직면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기고, 마지막까지 책을 사랑한 그의 모습은 나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일평생 독서를 해도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다. 더 많은 책을 읽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우리는 이어령 선생 처럼 길을 떠나야한다. 그 길을 담담하면서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을 통해서 확인했다. 이어령 선생이 편안히 영면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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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3
정태헌 지음 / 역사비평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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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은 좋지만, 잘 읽히지 않는 책은 좋은책일까? '문답으로 읽는 20세기 한국경제사'는 좋은 내용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쉽게 읽히지는 않는책이다. 어려운 경제사를 쉽게 풀어쓰는 것이 쉽지는 않겠으나, 쉽게 풀어쓰려는 노력이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좋은 책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나의 내공이 전문가 수준이 아니라서 저자 정태헌의 설명을 100%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정태헌이 전하고자하는 올바른 경제사의 어려 관점에는 공감을 한다. 


  정태헌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실날한 비판을 한다.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각종 숫자를 들이대며 마치 객관적인 양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에 대해서 정태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민지 자본주의에서 개발과 성장이 없었다면 어떻게 수탈이 가능했겠습니까? 문제는 개발과 성장의 주체가 누구였으며, 식민지 자본주의의 귀결이 어떠했는가하는 점"-17쪽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글을 읽노라면 그들은 식민지 시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리고 이땅의 고통받는 조선인에 대해서 무관심한 그들을 보면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정태헌이 강조한 "개발과 성장의 주체"란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핵심 질문이다. 친일 부끄러워하는 염치도 없는 자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현실에서 정태헌의 글을 우리에게 청량감을 감돌게 한다. 

  정태헌이 고려대 경영학과 출신이라 경제학자들이 중시여기는 숫자만 강조하지는 않을지 걱정을 했다. 그러나 정태헌은 여타 역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학자로서의 소양과 탁월한 내공을 가지고 있다. 정태헌은 경제가 성장하면 민주주의 통일 등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거민의식이에서 탈피해서 민주주의 민족적 국민의식이 확산될 때, 경제 성장과 자본축적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태헌은 강조한다. 이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독립이 있고 나서야 실력을 기를 수 있다는 주장과 일맥 상통한다. 주체가 빠져버린 역사가 역사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에게 말해주고 싶다. 역사에는 "주체" 즉 이땅의 주인공의 역사라고....

  정태헌은 현대 한국의 경제 성장 원동력에 대해서도 그의 깊은 내공을 드러낸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란 사회구성원에게 생산결과물과 자원의 동원, 분배과정에서 동의와 자발성을 촉진시키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의미"-248쪽, 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없이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이 불가능함을 정태헌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서구의 경제학자들이 한국의 독재가 경제 성장을 불러왔다는 주장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이라는 정태헌의 주장은 참으로 날카롭다. 

  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은 구가 한 것일까? 박정희의 리더십 일까? 미국의 도움 때문일까? 최저 임금도 받지 못하고 고된 노동을 한 민중의 땀 덕택일까? 경제 성장의 원인을 어느 하나의 입장에서 보려는 측면에서 위의 3가지는 비슷한 면을 보인다. 정태헌은 어느 하나가 원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권력과 국민의 피드백"이 경제 성장을 이루는 힘이었다고 지적한다. 지배와 피지배 사이의 상호작용이 경제 성장을 추동하기도하며, 그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정태헌은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경제사를 쉽지 않은 부분이다. 일제 강점기를 미화시키는 식민지 근대화론자와 수많은 식민지를 거느린 역사를 가지고 있는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은 한국의 경제성장 원인을 일제의 식민지배 덕택이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들의 주장에 속시원한 반박을 하기 위해서는 정태헌과 같은 경제사학자들이 쓴 글들을 읽어둘 필요가 있다. 물론, 그의 글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는 단점이 있으나,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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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투스트라 2022-08-22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나니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진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 너무 궁금하네요

강나루 2022-08-23 08:45   좋아요 0 | URL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이 맘이드는 책이에요^^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 - 어떤 세상에서도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김제동과 전문가 7인이 전하는 다정한 안부와 제안
김제동 외 지음 / 나무의마음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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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마술사 김제동이 7인의 석학과 만났다. 물리학자 김상욱, 건축가 유현준, 천문학자 심채경, 경제 전문가 이원재, 뇌과학자 정재승, 국립과천과학관 이정모, 대중문화전문가 김창남!! 그들이 가지고 있는 현명함을 김제동이 쉬운말로 끄집어 냈다. 7인의 석학중에서 뇌과학자 정재승 박사는 대중강연과 책으로 익히 잘알고 있었던 분이다. 또한 국립과천과학관 관장 이정모 박사는 팟캐스트를 통해서 잘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던 분들의 인터뷰들도 물론 재미있었지만,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 전혀 알지 못했던 분들로 부터 받은 감동과 깨달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 


1. 건축가 유현준에 대한 선입견을 제거하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는 TV를 통해서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 후보와 만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현준에 대한 선입견이 생겨났다. 그도 별수 없이 토건족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일 수 밖에 없구나!! 독서 목록에 있었던 유현준 교수의 책을 목록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질문이 답이 되는 순간'이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된 유현준 교수는 내가 생각했던 그러한 인물이 아니었다. 

  유현준 교수는 단순히 건물을 올리는 것에 대해서만 골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시 생태, 인간관계, 사회 생태 등 우리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인문학자였다. 유현준 교수는 '공유'라는 단어를 싫어한다. '나의 것' 즉 '내것'이 생겨야 사람들은 애착을 가질 수 있다. 나의 집이 생겨야 애착을 갖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1950년 미국의 세인트루이스에서 프루이트아이고 아파트 33개동을 만들어 임대해주었다. 그런데 2년만에 슬럼화되어 폭파시켜버렸다.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다. 

 이에 대비되는 사례도 있다.   칠레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에 80m2 큰집절반을 지어 분양했다. 자신의 집을 소유한 사람들은 집을 가꾸기 시작했다. 애착이 생긴 그들은 주변에 관심을 갖으면서 공동체를 형성했다. 내것에 더 애책을 가지는 인간의 본성을 무시한 철저히 이상주의에 기초한 정책들이 실패한 사례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진보후보는 임대주택을 지어 주택난을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냈다. 보수 후보는 연예 프로에 나와서 자기집을 갖는 것이 더 났다며 우회적으로 진보후보의 공약을 비판했다. 그때는 이성적으로 지금의 주택난을 해결하고, 청년들의 주거 안정을 위해서는 많은 임대주택을 짓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조그만 땅이라도 자신의 것을 갖길 원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무지했다. 보수 후보가 당선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진보후보가 주거공약을 제시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컸을 것이다. 

  유현준교수는 지방정부에 보다 많은 권한을 주어 다양성을 키워야한다고 주장한다. 아파트를 분양하더라도 보다 다양한 모습의 아파트를 지어 분양하도록 제도를 개선할 것을 주장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가치가 없어요. 내집의 가치는 결국 집값밖에 않남는 세상이되는 거죠"라는 유현준 교수의 말에 지금의 주택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있다. 개별화와 다양성을 중시되는 쪽으로 교육의 논의가 옮겨진지 오래다. 성적에 따라서 한줄세우기를 하기 보다는 각자의 개성과 창의성을 고려해서 여러줄 세우기를 하자! 이러한 생각이 반영된 것이 학생부 종합전형이다. 각학교와 학과에 맞는 인재를 뽑을 수 있도록하여, 성적으로 한줄세우기하는 병폐를 없애겠다! 물론 이상과 현실을 다를지라도, 그 의도만큼은 진정성을 알아주어야한다. 유현준 교수는 아파트에도 다양성을 도입하여 집값으로 한줄세우기 보다는 개성으로 여러줄을 세우자는 의견을 제시한다. 바로 우리의 주택정책이 나아갈 방향을 그가 제시했다. 

  탁월한 건축가이자, 인문학자이 그의 목소리가 정책에 반영될 날을 그대한다. 진보 후보들도 유현준 교수의 말에 귀기울이기를 기대한다. 


2. 물리학자에게서 인문학의 향기를 맡다!!

  소위 이과생들에게서 인문학의 향기를 맡기 힘들다는 편견이있다. 더욱이 물리학자가 인문학을 말한다면 어쩐지 어색해보인다. 그러나,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는 인문학의 향기를 보여주었다. 

  김상우 교수와의 대화는 찬물로 라면 끓이기로부터 시작했다. 물이 끓을 때 면과 스프를 넣어야할까? 찬물을 넣고 바로 면과 스프를 넣어야할까? 실생활과 밀접하면서도 재미있는 이 실험의 결과는 찬물에 면과 스프를 넣고 끓여도 라면의 맛에는 별 영향이 없다는 사실이다. 김상욱 교수의 매력은 그 다음부터 이어졌다. 

  김상욱 교수는 데릭 시버스 동영상을 소개하며 첫번째 움직임이 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첫번째 팔로우가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셋이 되어야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나라를 건국하더라도 2대, 3대가 잘 나라를 다스려야 그 나라가 잘 유지될 수 있다. 견훤의 후백제, 유비가 세운 촉나라도 2대를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지 않았던가! 첫번째 팔로우가 생겨나고 둘이 셋이 되면 하나의 커다란 파동이 된다. 사회 변화의 움직임도 이와 같다. 금모으기 운동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첫번째 팔로우가 없었다면, 그 운동이 커다란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사회를 변혁하기 위해서는 위대한 팔로우십이 있어야한다.!! 김상욱교수의 강의는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김상욱 교수는 갈렐레오의 지동설을 설명하면서, 지동설이 옳다면 우리는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지구 위해서 살면서 운동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를 질문한다. 그 해답이 F=ma라는 뉴턴의 공식으로 이어지고, 아인슈타인에 이르러서는 "절대 움직임이란 무엇인가", "움직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으로 이어진다. 단숨에 물리학의 역사를 쉽게 설명하는 김상욱교수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세계사를 설명할 때도 참조해야겠다. 

  김상욱 교수는 인공지능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법을 허에서 찾는다. 빌허!! "우리의 의미나 가치 자체가 상상에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지켜낼 수 있다."라는 김상욱 교수의 말은, 인공지능과 경쟁하려 하지말고 인공지능이라는 말에 올라타라는 이어령 교수의 말과 상통한다. 인공지능과 경쟁하려하지 말고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상상력의 힘을 우리가 길러낸다면 인공지능 시대는 재앙이 아니라 축복일 수 있다. 

  고수는 궁극의 지점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김상욱 교수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인문학자의 혜안이 느껴진다. 물리학이라는 창으로 인문학을 바라본 느낌이다. 


3. 기본소득에 대한 편견을 없애다. 

  기본소득은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아이디어 쯤으로 알고 이었다. 그러나 경제전문가 이원재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기본소득은 사회보장이라는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나있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구상했다. 사회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여하는 나의 몫을 찾는 시스템이 기본소득이었다. 기본소득을 실시하면 고소득자가 세금을 더 낸다할지라도 인생의 소득 그래프에서 마이너스구간에 해당되는 생애초기와 노년기에는 혜택을 받는다는 점에서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기본소득은 이익이다. 

  기본소득이 마련된다면 삶에 안정감이 갖춰진다. 여유를 갖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창조적인 일에 자신의 정열을 쏟을 수 있다. 창의성이 중요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풍부한 창조적 콘텐츠를 마련하게 해줄 것이다. 기본소득은 인간은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인간 존엄성확보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일자리가 줄어가는 사회에서 허(창의성)를 발휘할 수 있는 밑바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지향해야할 길이라 할 수 있다. 



  김제동은 대화 중간중간에 법륜 스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한다. 대중강연에서도 법륜스님의 말씀을 자신의 말인양하기도했다. 대중문화전문가 김창남 교수의 대담에서는 신영복 선생에 관한 추억을 더듬으며 신영복 선생의 사상에 대해서 말했다. 김제동이 어떻게해서 언어의 마술사가 되었을까? 그 의문이 이책을 읽으며 풀렸다. 그는 '인간책'을 옆에 두었다.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들과 교류하면서 그분의 사상을 자신의 삶에 내면화시키려했고,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꽃의 향기를 몸에 베게 하려면 꽃과 함께해야하듯이,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려한다면 존경할만한 스승을 친구로 두어야한다. 김제동은 그러한분들을 스승이자 친구로 모시고 있었다.

  유현준 교수는 "좋은 가치관을 가져야 좋은 도시를 가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좋은 도시에 살기 위해서 나도 좋은 사람이어야한다. 좋은 국가, 좋은 사회에 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린 국가탓, 사회탓을 많이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이 그러한 자격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우리가 좋은 도시, 좋은 사회, 좋은 국가에서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에 어울리는 자격을 갖추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김제동 처럼 존경할만한 사람을 스승이자 친구로 두어야한다. 나도 그러한분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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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8-12 17: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유현준씨는 저도 책도 읽고 방송도 듣고 했는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더라고요. 저는 제 주변에서 스승을 찾기는 좀 어려울듯 하니 강나루님 소개해주신 이 책으로 만나볼 생각입니다.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강나루 2022-08-12 19:39   좋아요 2 | URL
네,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바라돌이님, 즐거운 독서시간 보내세요^^

기억의집 2022-09-16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윤이 미우니깐.. 유교수도 곱게는 안 보여요… ㅠㅠ
 
체르노빌 히스토리 -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대응 방식
세르히 플로히 지음, 허승철 옮김 / 책과함께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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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 마피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탈핵의 시동을 걸었지만, 제대로 탈핵의 길을 달리기도 전에 정권이 바뀌면서 탈핵도 폐기 되었다. 윤 대통령이 경남 창원의 원전업체를 방문해서 원전업계를 살리기 위해서 안전을 중시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윤 대통령 “안전 중시 버려라…원전업계는 전쟁터” 발언 논란 : 환경 : 사회 : 뉴스 : 한겨레 (hani.co.kr)). 상식에 어긋나는 말을 설마 국민의 절대 다수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이 했을지 의문이 들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뒷걸음질치는 탈핵! 다시 한번 탈핵의 필요성을 일깨우는 책을 읽고 싶었다. 그래서 '체르노빌 히스토리'를 꺼내들었다. "우리가 이미 일어난 재앙에서 교훈을 얻지 않으면, 새로운 체르노빌식 재앙이 일어날 가능성이 더 크다는데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21쪽)라는 세르히 플로히의 지적은 아쉽게도 현실화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바로 그 재앙의 서막이다. 그런데, 우리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착잡한 마음에 책장을 넘겼다. 


  암에 걸린 사람은 처음에는 부인을 한다고 한다. 자신이 암을 걸릴리가 없다며 오진일 것이라며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받는다. 이러한 일이 체르노빌에서도 일어낫다. 체르노빌 핵발전소 원전 냉각수 연못에서 낙시를 즐기는 10여명의 낚시꾼들은 핵발전소 폭발이 있었으메도 이 심각성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방사능 흑연조각이 길에 널려 있는데도 현지 전문가와 모스크바에서 온 전문가는 4호 원전의 폭발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전은 안전하다는 신화가 그들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눈앞의 진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작동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들이 체르노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첫번째 사람들이었지만 마지막 사람은 아니었다."(130쪽) 우리 주변에도 그러한 인간들이 너무도 많이 있다. 두번의 전 지구적 재앙을 겪고서도 핵발전소는 안전하다는 신화를 믿고, 원전업계를 살리기 위해서 안전을 중시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그들의 주장을 지지하는 비상식적인 인간들이 많다는 현실이 절망적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인류의 안전을 헌신짝 취급하는 그들과 함께 지구에 살아야하는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절망적이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재앙을 뒷처리하기 위해서 소련 정부는 소방대원과 군대를 동원했다. 그리고 예비군을 동원하여 방사능 피폭을 당하며 커다란 석관을 원전 4호기에 뒤집어 씌웠다. 60여만의 군인들이 피폭되며 원전을 잠재웠지만, 핵발전소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빈국제학술대회에서 레가소프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경위, 원인 분석, 영향, 원자력 사고 예측 방법을 보고 했다. 그 결과 소련 정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유사한 사고 예방을 위해 자신의 경험을 세계와 공유하는 긍정적 이미지로 바뀌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소련 지도부는 레가소프의 행위를 탐탁치 못하게 여겼다. 그리고 체르노빌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비밀로 분류했다. 체르노빌과 가까운 오염지역 나로디치에 당국은 주민 정착을 위해서 집을 짓고 있었다. 야로신스카야는 그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 취재를 했다. 당국은 그녀가 진실을 알릴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야로신스카야는 굴복하지 않았다. 소련이 공산국가이기에 이러한 상황이 가능하다고 착각할 수도있다. 그러나,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나고 일본 정부도 소련과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후쿠시마의 위험성을 언론에서 말할 수 없도록 재갈을 물리고, 후쿠시마 근처에 사람들을 안전하다며 정착시키려하고 있다. 핵마피아에  지배당하는 국가의 모습은 비슷한가 보다. 

  302쪽에는 아이들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 사진들을 바라보며 가슴이 먹먹했다. 1990년대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14세 미만 인구중에서 3000건의 감상선암이 등록되었다. 원전 마피아들에 의해서 벌어진 핵사고에 죄없는 어린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돈과 권력이 없는 주민이 희생되고 있다. 

  체르노빌이라는 재앙을 겪으며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드라치는 "체르노빌이 우크라이나의 모든 민주화운동에 원동력이 되었다. 폴란드의 자유노조운동이 그 전범이 되었고, 작가협회는 요람이 되었다."라고 말했듯이, 체르노빌의 재앙을 딛고 우크라이나인들이 깨어났다. 더 나아가서 동유럽에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핵사고를 당한 우크라이나는 환경 민족주의로 독립과 반원전 운동을 했다. 우리의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원전 마피아들의 입장에서는 가르치기 싫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의 실수에서 교훈을 얻어 현실의 지혜를 얻고자한다면 체르노빌 핵사고가 소련의 붕괴와 동유럽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영향을 반드시 가르쳐야한다. 

  모든 사람들이 재앙을 딛고 깨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재앙을 딛고 깨어났다면 일본인들은 아직도 잠들어있다. 오히려 후쿠시마 핵사고 이후 아베를 필두로한 극우 정권이 탄탄하게 권력을 장악하며 핵사고의 위험을 감추려했다. 도쿄 올림픽에 후쿠시마 식품을 사용하는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과거의 재앙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하는 일본 국민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체르노빌 핵사고 이전에 오제르크 폭발 사고가 있었다. 핵폐기물이 폭발하면서 2000만 퀴리의 방사능이 누출되었다. 이때 미국은 이를 이용해서 소련을 공격하려하지 않았다. 거대한 핵마피아의 본능이 작동하여 원자력이 청정에너지라는 믿음을 고수하고 싶었을 것이다. 오제르크 폭발사고의 교훈을 얻지 못한 소련은 체르노빌 핵사고의 고통을 겪었다. 체르노빌 핵사고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일본은 후쿠시마 핵사고의 고통을 겪는다. 이제 우리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핵사고로부터 교훈을 얻어야한다. 단세포 동물처럼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악을 행하는 결정을 한다면 우리는 우리 후손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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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7-29 19: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탈핵은 세계적인 추세인데 좁은 나라에서 오히려 거꾸로 가려 하니 황당하고 걱정입니다. 저도 윤 대통령 기사보고 놀랄때가 많아 다시 검색해서 크로스체크 하곤해요. 이 책 추천받았는데 꼭 읽어봐야겠어요^^*

강나루 2022-07-29 18:44   좋아요 2 | URL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입니다.^^

mini74 2022-07-29 19: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체르노빌의 아이들 이런 책을 봤는데 정말 무섭고 끔찍했어요. 걱정이네요. 일본 오염수 방류도 그렇고 ㅠㅠ 주변 엄마들은 김 미리 사 놓으라고 그러네요 ㅠㅠ

강나루 2022-07-29 20:09   좋아요 1 | URL
일본에 할말은 하는 대통령이 그립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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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에게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이에게는 혹평을 받으며 쓰레기 취급을 받기도한다. 또 어떤이에게는 최대의 찬사를 받기도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알라딘에 올라와 있는 서평을 보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는다.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나도 혹평을 하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떻게 평가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바라보기로 했다.

 

1. 색골(色骨)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를 집어들었을 때, 진정한 자유인으로서의 조르바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자유인이기 보다는 색골이다. 여성의 육체에 탐닉하는 전형적이 색골이다. 이 책을 넘기며 2~3페이지 마다 조르바은 여성에 육체, 그중에서도 엉덩이와 가슴에 탐닉한다.

 

"조르바가 저 과부는 누구인가요?"라고 묻자, 콘도마늘리오는 "씨받이 암말이지요." -114

"두목, 저것 좀 보쇼 저 잡년이 궁둥이 흔드는 것 좀 봐요. 삐뚤빼뚤! 꼬랑지에 기름 잔뜩 오른 암양같군"-38

"애야, 내가 저렇게 많은 계집아이들은 남겨 놓고 죽어간는데 울지 않게 생겼니?"-92

 

이러한 말들은 조르바가 직접하거나 조르바가 자신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내뱉은 말들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긴다. 철저히 마초적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어떻게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머리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조르바와 같은 마초가 자유인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자유인은 너무도 많다. 특히 군대에서 그러한 인간들을 많이 만났다.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여기며 노골적인 표현을 섞어 여자를 후리고 다닌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새로운 여자와 잠자리를 갖게 되면 새로운 훈장을 받은 것마냥 자랑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각하는 자유인이 바로 색골들이란 말인가!

조르바는 여성 중에서도 과부에게 유난히 집착한다. 과부는 언제나 정복 가능하며, 그녀들을 혼자 밤을 지내도록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라는 조르바의 주장은 황당하기까지하다. 여성에 대한 존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든 조르바의 표현은 듣기에 거슬린다. 그런데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러한 조르바를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조르바, 내 몽당 당신에게 주고 말고요. 당신이 한것 ... 여자 꿰어 차고, 머리를 물들이고, 돈을 쓰고 한거. 당신이 다가져요. 노래나 부릅시다.!"-207

 

돈많은 갑부의 허세가 녹아 있는 문장이다. 계집질하며 자신의 돈을 허락도 없이 낭비한 조르바를 좋아하는 작가는 과연 정상적인 인간인지 의문이든다. 자신의 성적 욕망에 충실한 조르바! 그리고 주인이 없기에 쉽게 성적 대상으로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과부를 탐닉하는 조르바! 돈많은 갑부의 환심을 사서 그의 돈을 마음대로 유용하는 조르바! 그를 자유인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인생을 무계획적으로 사는 망나니로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2. 이드(조르바)와 슈퍼에고(화자) 사이

'그리스인 조르바'는 실존 인물 조르바를 모델로 쓰여졌다. 화자가 갈탄을 채굴하러 크래타에 간 것도 실제 있었던 일이라 한다.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이상한 점이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한 화자(작가)의 관계는 너무도 친밀했다. 조르바가 하는 모든 행동을 그는 사랑스러운 관점에서 묘사하고 긍정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돈을 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화내지 않고 조르바와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불현듯, ‘그리스인 조르바와 화자가 같은 인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조르바와 화자는 두명이 아니라 한몸에 있는 두가지 존재라고 보면 이 책의 서술이 쉽게 이해된다. 조르바는 화자의 가슴 속에 꿈틀되고 있는 욕망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이드라고 한다. 그리고 화자는 자아(에고)나 슈퍼에고(도덕 등)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화자는 티베트 승려의 수행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본능을 억누르려한다. 그러나 자신의 저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욕망의 물결은 잠재울 수 없다. 즉 조르바는 세상의 윤리를 비웃으며 자유롭게 여성들을 탐닉한다. 윤리에 갖힌 자아와 욕망에 충실한 조르바 사이에서 갈등이 펼쳐진다.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이러한 싸움은 욕망(조르바)의 승리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결국, 화자는 과부를 안아주라는 조르바의 충고를 실천에 옮긴다. 그리고 화자의 몸에서 풍기는 과부의 비누냄새를 맡은 조르바는 기뻐한다. 욕망의 승리인 것이다.

모든 만남은 영원할 수 없다. 조르바와 화자는 헤어진다. 욕망이 충족되었으니 욕망에 대한 갈망은 전처럼 강할 수는 없다. 조르바와 헤어진 화자는 조르바가 독일에 올 것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조르바를 찾아가지 않는다. 결국 조르바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화자는 욕망에서 해방된다. 계율을 어겼다고 모두가 파계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율을 어기고 더 위대한 스님이 된 원효처럼 화자는 과부와 잠자리를 가지고 나서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었다.

 

3. 전쟁 트라우마를 겪는 조르바

그리스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존재가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그리스 독립을 위해서 자신의 적인 신부를 죽였다. 그런데, 거리에서 그 신부의 자녀를 마주치자 조르바는 자신이 가진 돈과 바구니까지 그 아이들에게 준다. 조르바는 그리스 민족주의 열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지만, 민족주의라는 열풍이 때로는 불쌍한 아이들의 아버지를 살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조르바는 적들에게 쫓기다가 어느 과부의 집에 들어간다. 그리고 과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졌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육체도 탐닉한다. 과부가 다음에 또 오라고 말했다. 조르바는 그 마을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그때 그 과부도 죽었을 것이라고 조르바는 추측한다.

아마도 조르바는 이때 과부의 목숨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유난히도 과부에 탐닉하는지도 모른다. 성적으로만 과부를 탐닉한 것이 아니다. 맨손으로 칼을 쥔 놈을 상대로 결투를 했다. 과부를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성당에 들어가려하는 과부를 크래타의 남자들이 돌을 던지며 죽이려했다. 그녀가 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면 그녀를 내쫓으면 될 것을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광기에 사로잡힌 크래타 남성들은 과부를 죽이려했다. 목숨을 걸고 그녀를 위해서 싸운 것은 조르바였다. 그는 승리했으나 그녀를 살리지 못했다. 조르바는 다시 한번 과부를 살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할 결정적 기회를 잃어버렸다.

조르바가 사랑했고, 미래까지 약속한 부블리나 부인이 죽어갔다. 물론 그녀도 과부이다. 그녀는 "죽고 싶지 않아! 정말 죽고 싶지 않아"를 외친다. 그런데, 크래타 사람들은 냉혹했다. 그녀 앞에서 ", 어서 서둘러, 어서 죽어야지. 이여편네야"라고 말하고, "그래야 우리도 뭐하나 가져갈 것 아닌가"라는 말을 죽어가는 부블리나 부인 앞에서 말한다. 그녀가 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크래타 사람들은 그녀의 물건과 가축들을 하나둘 가져갔다. 크래타인들에게 과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기 보다는 그녀의 물건을 가져갈 수 있는 기회라며 기뻐했다.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들의 집단 거주지가 크래타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스 독립 전쟁 과정에서 과부를 살리지 못한 그는 목숨을 걸고 한명의 과부를 살리려했다. 그러나 그는 살리지 못했다. 심지어는 자신과 미래를 약속한 과부의 죽음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조르바에게 과부는 성적 욕망의 대상이기 보다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사랑해야만하는 존재였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갖혀있는 자신의 영혼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그이기에 고상한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고, 그래서 노골적인 뒷거리의 용어로 그녀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조르바는 성당을 싫어했다. 조르바와 화자가 하룻밤 묵었던 수도원에서는 살인 사건까지 일어났다. 조르바는 수도사를 저주했고, 수도사의 소굴인 수도원을 격멸했다.

 

"그래요 두목, 내 수중에만 들어오면 수도원은 기적의 공간이 될 겁니다."-319

 

위선적인 수도승을 바라보며 타락할대로 타락한 그들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심지어 조르바는 자하리아에게 수도원에 불을 지라고 부추긴다. 자하리아는 수도원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한다. 조르바는 아마도 과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크래타인의 저변에는 크리스트교의 왜곡된 윤리의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수도승과 수도원은 저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화자는 곳곳에 불교적 언어를 사용해서 크리스트교를 우회적으로 공격했다. 겉으로는 고상한척, 사랑으로 세상을 이끄는 존재인척하지만, 실제로는 불쌍한 중생을 착취하는 크리스트교의 윤리에서 맞서서 조르바는 싸웠다. 그는 자유인이기에 그것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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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7-29 1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도 명작이라고 해서
결국 읽기는 했었는데...

요즘에는 맞지 않는 캐릭이라
그런지 소화해 내기가 쉽지가
않았습니다.

강나루 2022-07-29 18:13   좋아요 1 | URL
저도 읽는 중간중간에 여러번 포기하기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