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라면 정조처럼 - 정조대왕의 숨겨진 리더십 코드 5049
김준혁 지음 / 더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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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독살되었는가? 이 질문에 독살 되었다고 말하면 주류의 역사학자들에게 뭇매를 맞게 된다. 이덕일이 책을 많이 팔아 먹기위해서 주장한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는다는 비난을 받기에 딱좋다. 이덕일의 책을 많이 읽은 나로서는 이덕일을 변호하면서도 굳이 정조 독살설을 비호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에 문재인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은 책 중에 '리더라면 정조처럼'이라는 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칭 정조변호라라고 말하는 김준혁 교수의 책이기에 그를 통해서 정조를 새롭게 만나고 싶었다. 시중의 자기 개발서의 냄새를 풍기는 책제목을 보며, 과연 인간 정조의 모습을 얼마나 새롭게 발견할지 궁금하다.

 

1. 정조의 개혁과 문재인의 개혁

"문재인 보유국"이라는 말이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초강대국 미국을 비롯한 소위 '선진국'들이 너무도 처참한 사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보유국"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박근혜 정권 시기 메르스 사태와 같은 대처를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에서 했다면 너무도 비참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가장 인상 깊게 본 정조의 리더십은 무엇이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경제개혁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다고 한다.

  신혜통공을 실시하여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상업발달을 도모하는 경제 개혁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용한다는 전교를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승지가 국왕의 전교를 대돌리며 반대했다. 마치, 조국을 비롯한 추미애, 박범계 법무장관을 임명하려하자, 야당이 무척이나 반대한 것과 유사하다. 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경우에는 검찰청이 상상을 초월한 고강도 압수수색을 했다. 검찰이 가지고 있었던 특권을 내려 놓는다는 것이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정조가 채제공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것을 관철했듯이, 조국을 법무장관에 앉혔으며, 추다르크라 불리는 추미애와 판사출신의 박범계를 법무부 장관에 앉히며 개혁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마치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강팀들을 상대할 때, 계투 작전을 방불케하는 용인술이다. 조국과 마찬가지로 추미애와 박범계도 사소한 일들을 침소봉대하여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지른 추악한 사람으로 몰아붙인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이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신혜통공을 추진했던 채제공도 마찬가지이다. 시정잡배들이 채제공의 집에 와서 야유를 하는 무례한 짖들을 서슴치 않았다. 이러한 모든 고난을 극복해야만 개혁은 완성된다. 문재인 정권도 정조가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혜통공을 반포하여 조선의 상업을 발전시켰듯이, 검찰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우리의 검탈이 국민의 검찰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라는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이 부족하다고 하자, 대통령은 "저는 반드시 기자회견만이 국민들과의 소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통의 한 방법이죠."라고 일갈한다. 기자들의 얕은 생각으로는 자신들과의 소통이 국민들과의 소통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기자들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낮아졌다. 박근혜에게 질문한번 제대로 못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기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기자들은 질문한번 제대로 못했다. 그러면서 기레기라는 말들이 시민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정권에서 질문도 제대로 못하는 기자들이 대통령에게 소통을 못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그런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그럼, 대통령은 국민과 소통하고 있는가?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큰 소통의 방법이 '국민청원'이다. 과거 정권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들이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국민청원'에 올리면 20만의 시민이 동의하면 청와대가 답변한다. 청와대가 해결할 수 없는 요청도 올라온다. 억울한 시민들은 자신의 억울함을 청와대가 해결은 못해도 들어주기를 소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정조가 화성행차를 하면서 수많은 격쟁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문재인 정권의 국민청원은 현대판 경쟁이요. 상언이다. 일본의 경우, 격쟁을 하려면 죽음을 각오해야한다. 다이묘에게 격쟁을 하면 다이묘는 농민의 억울함을 듣고서 그 농민을 죽여버렸다. 말그대로 목숨을 내놓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정조대왕은 수많은 격쟁을 받아들이고, 백성의 고통을 해결하려했다. 왕의 행차를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가로막고는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행위는 관점에 따라서는 무례한 일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소통의 한방법으로 정조는 활용한 것이다. 정조의 이런 소통의 방식은 맥이 끈기지 않았다. 정조의 '격쟁'은 문재인 정권에서 '국민청원'으로 부활하여 국민과 소통하고 있다. 이를 기레기들만 모르고 있다.

  김준혁 교수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김준혁 교수는 '하마석'이라 말한다. 양반이 말을 탈때, 양반은 노비를 밟고 말을 탄다. 인간이 인간을 밟는다는 것은 참으로 치욕스러운 일이다. 정조는 하마석을 설치하여 양반이 노비를 밟고 말을 타는 비인간적인 행위를 없애려했다. 만백성을 아끼는 애민군주 정조의 모습이 빛나는 부분이다.

  오늘날의 애민정치는 어디에서 부터 시작해야할까? 코로나 19 펜데믹을 극복하고 있는 오늘을 생각해보자. 코로나 19 펜데믹 상황을 극복하는데 많은 의료인력들의 노고가 가장 크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인력의 노고만으로는 지금의 K-방역이 성공할 수 없었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비대면 사회에서 택배 노동자의 활약이 없었다면 K-방역은 성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택배 노동자의 과로사 소식이 연이어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요즘, 택배 노동자에 대한 노동 상황을 개선하는데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아울러, 코로나 19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대한민국의 그늘진 노동현장을 들여다보고 개혁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애민군주 정조의 리더십을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배워야할 가장 큰 덕목이지 않을까?

 

2. 정조는 독살되었을까? 

정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정조는 왜? 죽었는가?"이다.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정조 독살설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조 독살설을 대중에게 퍼뜨리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바로 '이덕일'이다. 역사관련 서적 분야에서 이덕일은 엄청난 베스트 셀러를 연이어서 내놓고 있다. 억울하고 원통해하는 패자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이덕일의 역사관은 한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강한 흡입력을 불러 일으킨다. 비참하게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고 자란 정조가 왕이되어 개혁정치를 추진하지만, 정순왕후로 대표되는 노론세력의 반발로 독살 되었다는 이야기는 한편의 드라마이다.

  이덕일의 "조선왕 독살사건"의 공전의 히트는 많은 강단 사학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특히 노론 중심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조선시대 전공자들은 이덕일을 열심히 비판했다. TV에 자주나오는 신00 교수는 독살설에 대해서 '조선이 그정도로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역사관련 연수를 갔을 때, 충남대학교 모교수는 '어느 작가는 조선의 모든 왕들이 독살되었다는 듯이 서술한 사람도 있다.'라며 비꼬기도 했다. 정조 독살설은 이덕일을 비판하는데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이다. 삼인성호라는 말이 있다. 한사람이 시장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말하면 믿지 않지만, 세사람이 말하면 호랑이가 시장에 나타났다는 말을 믿는다. 나도 정조 독살설을 믿지 않았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가 겹쳐서 죽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읽으며 생각이 달라졌다.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정조는 화병과 과로사 겹쳐 죽었다는 기존입장이 왜? 정조는 독살 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바뀌었을까? 정조를 둘러싼 주변 상황이 정조 독살을 의심하기 충분했다. 정조의 정통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영조는 정조를 효장세자에게 입적시킨다. 그런데, 효장세자가 죽은 이유를 아는가?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효장세자는 '화흉(和兇)'으로 죽었다. 무신난 이후,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대를 끊어 놓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뼈를 가루내어 효장세자의 밥에 넣고 궁궐주변에 묻어두었다. 이러한 죽음은 효장세자로 끝나지 않았다.

  정조가 3번이나 청혼한 끝에 결혼한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았다. 문효세자의 죽음은 홍역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문효세자가 죽은 후 2년 뒤 밝혀진 사실은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문효세자의 어머니이 의빈  성씨도 구선복에 의한 독살이었다. 구선복은 누구인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을 때, 사도세자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자이다. 이를 12살의 정조는 똑똑히 보았다. 그럼에도 왕이 되어 구선복을 죽이지 않았건만, 구선복은 정조가 사랑하는 문효세자와 의빈 성씨를 독살했다. 정조 주변에는 노론세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정조를 노리고 있었다. '명의록'에는 정조가 왕세손 시절에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적혀있다. 한나라의 왕세손이 자객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갑옷을 입고 잠을 잤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정조가 즉위하고 나서 사흘만에 자객이 궁궐에 난입한 사실만 보더라도 정조 주변에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이 많았고, 정조 주변의 소중한 인물들이 독살되었다.

  정조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약을 잘못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나는 여기에 주목하지 않는다. 정순왕후가 기력이 좋아지고 있는 정조의 방에 들어와서 신하들로하여금 무러나게한다. 얼마후 곡소리가 난다. 정조는 "수정전"을 외쳤다. 수정전은 정순왕후를 뜻한다. 기력이 회복되고 있는 정조를 여성이 독대한다는 것은 조선시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정조사후, 권력을 잡은 것은 정순왕후이다. 정조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정순왕후이다. 그렇다면 정순왕후를 의심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가?

  결정적 증거가 없기에 노론 세력에 의해서 정조가 독살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조와 정조를 둘러싼 사람들의 죽음은 '정조 독살설'을 허무 맹랑한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도록 만든다.

 

 

  정조는 무명옷만 입었으며, 옷이 해지거나 버선이 구멍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꿰매 입었다. 침전 영춘전이 하도 낡아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어 곰팡이가 피기도 했다. 조선의 모든 것이 그의 것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모두 누리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누리면 백성의 삶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너무도 검소해서 방안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다면 자신의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도 알았을텐데 말이다.

  지존의 자리에 있지만 자신을 낮추며 몸으로 낮은 곳에 임하는 삶을 살았던 정조 대왕! 그의 삶을 통해서 나도 한가지를 배웠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하려고 하지 말라!"

 

  탁월한 리더일 수록 아랫사람의 일처리가 미숙해보인다. 내가 리더에 있을지라도 절대 완벽을 요구하지 말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리더인 내가 채워주자! 리더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 아랫사람은 입을 다문다. 아랫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말자. 이것이 '리더라면 정조처럼'을 통해서 배운 정조의 리더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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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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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 '연기'라는 말이 있다. 이말을 쉬운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인연이라는 그물로 연결되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태균 교수의 '베트남 전쟁'이라는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역사라는 그물에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 포획되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나간 전쟁,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하기에는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역사는 기록하는 민족의 것이며, 기억하는 자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동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1.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

 나비의 날개짓이 지구 반대편에 가서는 태풍을 일으킬 수 있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이 사실들이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실을 종종 발견한다. 우리의 비극인 6.25전쟁의 날개짓은 바다건너 베트남에 커다란 폭풍을 일으켰다. 

  6.25전쟁의 전쟁 전개 양상은 베트남 전쟁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흔히, 베트남 전쟁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전선을 형성하여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을 것으로 상상한다. 6.25전쟁에 대한 교육을 받은 우리로서는 '전쟁'이란 당연히 전선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는 전선이 없다.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뤄야하는 기이한 전쟁이 베트남 전쟁이다. 베트남 전쟁이 전선이 없는 기이한 양상을 띄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6.25전쟁의 날개짓 때문이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하자, 중국군이 참전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이후 전개되는 지루한 공방전의 아픈 기억을 미군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중국군도 가지고 있는 기억이었다. 북위 17도선을 돌파하면 중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것을 미국은 두려워했다. 중국도 미군이 북위 17도선을 돌파하지 않기를 바랫을 것이다. 결국, 북위 17도선을 유지한채, 남베트남의 베트콩과 전투개 전개되었다. 밀림 속에서, 구찌터널에서 출몰하는 베트공은 미군을 괴롭혔다. 

  뗏대공세와 펜타곤 페이퍼가 공개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한 민낯이 보여지자, 반전운동이 들불처럼 일이났다.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전쟁비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미국의 곳간은 비어있었다. 결국 닉슨은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안한다. 이는 6.25전쟁에서도 보았던 모습이다. 남북의 전쟁에 중국군과 소련군, 미군을 비롯한 UN군이 개입하면서 6.25는 국제전쟁화하였다. 휴전협상에 남북한이 마주앉지 않고, 북한군과 중국군 VS 미군이 마주앉았다. 강대국들의 휴전협상이 이뤄지면서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무수한 소모전 속에서 알토랑 같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무수한 화력을 쏟아부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얇팍한 생각은 베트남 전쟁에서도 계속되었다. 6.25전쟁의 휴전협상 시기에 쏟아진 화력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었다고 판단한 미국이 선택한 협상전략이었다. 이시기 우리의 한국군의 젊은이들도 많이 생명을 잃었다. 

  이렇듯, 6.25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평화'라는 6.25전쟁의 교훈을 배우기 보다는, 전쟁을 이길 수 있는 얕은 방법만을 그들은 배우려했다. 진정한 교훈을 역사를 통해서 배우지 못한 댓가는 이길 수없는 전쟁에 수많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들이 귀국했을 때, 특히 미국에서는 전쟁범죄자 취급을 받도록했다. 전쟁에서 배울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평화'라는 가치란 사실을 깨달아야할 것이다. 


2. 전쟁에서 배워야할 것.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라는 책에 어느 여군의 회고담이 있다. 끔찍한 전쟁이 끝나자, 그 여군은 이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아끼며 살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녀에게 장난감 무기를 안겨주었고, 사람들은 다시 서로를 미워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에 나오는 소련 여군의 느꼈던 아이러니를 역사에서 흔하게 목격한다. 끔찍한 전쟁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교훈을 얻지 못했다. 과연 베트남 전쟁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어야할까? 

  6.25 전쟁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듯이, 베트남에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서 민간인 학생이 이뤄졌다.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정권의 대통령이 베트남에 사과를 했다. 그러나, 미국을 상대로 승리한 베트남 정부는 한국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다. 베트남 정부의 입장은 미국의 용병으로 온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의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저자 박태균이 지적했듯이, 우리가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면, 미군에 노근리 학살의 사과를 요구하면, 그들은 베트남에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위안소를 운영했다며 반박한다. 한국도 그러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니, 우리에게 반성을 요구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나의 눈에 있는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만 탓할 수는 없다. 우리가 일본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듯이, 미국에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듯이, 베트남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용기있게 사과해야할 것이다. 잘못이 있다면 이를 인정하고 사과해야 우리는 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고통과 직면해야만 우리는 과거의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다. 

  저자 박태균이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의 교훈은 무엇일까? 박태균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어야한다. 그것이 곧 암보다."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지지한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진 역사를 우리는 무수히도 보았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면서도 앞도적인 화력의 우위속에서도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쫓겨 났다. 한국과 태국, 필리핀까지 끌어들이면서 천문학적 전쟁비용을 쏟아부어서 남베트남정부를 지원했지만,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했다. 미군없는 남베트남정부는 너무도 허무하게 북베트남에 무너졌다. 국민이 지키고 싶지 않은 정부는 아무리 강한 세력이 유지시키고 싶더라도 유지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저자 박태균은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아간다. 베트남 전쟁에 알토랑같은 젊은이들을 밀어 넣은 박정희 정권도 결국 남베트남정권이 무너지고 나서 몇년후에 붕괴된다. "대통령인 내가 발포명령하는데 누가 날 죽이겠나!"라던 그도 김재규의 총탄에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자들은 역사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배운다. 진정으로 현명한 자라면 역사에서 참된 교훈을 얻어야한다. 위정자들은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들어야한다. 이것이 베트남 전쟁의 참된 교훈이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 반성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도록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에게도 반성과 사과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한 용기가 모여 이 사회를 움직인다면,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를 만드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한신대학교에서 1급 정교사 연수를 받을 때, 박태균 교수를 처음 만났다. 젊고 실력있는 교수라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다. 역시나, 그의 책 '베트남 전쟁'은 쉬우면서도 수많은 생각할 꺼리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 하수는 쉬운말을 어렵게 설명하고, 고수는 어려운말을 쉽게 표현한다는 말이있다. 학문적 내공이 상당한 박태균 교수는 어렵고 복잡한 베트남 전쟁을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베트남과 어떠한 관계를 모색해야할지를 고민하려면 먼저 이 책을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ps. 한홍구 교수의 책 '유신'에는 박정희 정권이 베트남 전쟁에 위안부를 보내려했으나, 다행히도 보내지 않았다고 씌여있다. 과연 베트남에 한국군이 관리하는 위안소가 있었는지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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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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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캐스트 '벙커1'을 통해서 강신주를 처음 만났다. 그가하는 상담을 들으며 강신주라는 철학자의 내공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생을 많아 살아본 할아버지도 아닌데, 상담 심리학을 정공한 사람도 아닌데, 일개 철학자가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꿰둟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놀라웠다. 그후, 강신주의 동영상 강의와 서적들을 살펴보며 그가 말하는 논리의 핵심이 무엇인지 긍금했다. 지난번 강신주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위해서 쓴, '김수영을 위하여'라는 책에 이어서 '철학 삶을 만나다.'를 펼쳐들었다. 강신주식 철학의 비밀을 이 책을 통해서 파헤치고 싶다. 


1. 강신주식 철학적 사고의 매력

  강신주가 쓴 철학책들은 쉽다. 대학에서 '철학 개론'을 들으며 무슨 내용인지 이해되지도 않는데 시험을 보기 위해서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이 한 말들을 무조건 암기했던 기억이 남는다. 대학에서 배운 철학은 이해되지 않는 말들을 무조건 암기하는 탁월한 암기과목이었다. 이에 반해서 강신주가 말하는 철학은 우리 삶을 철학하게한다. 철학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특히, 제1부 철학적 사유의 비밀에서는 일상적인 우리 삶에서 어떻게 철학적 사유가 일어나는가를 풍부한 사례와 친절한 설명으로 풀어낸다.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왜? 이러한 철학 수업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들만 쏟아냈는가?, 교수가 학생과 대화하기는 커녕, 교수 혼자 독백을 했가? 라는 질문이 연속으로 쏟아졌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철학적 사유가 우리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낯설게 볼 때 철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3단 논법대로 우리는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우리의 사유는 일어난다. 어찌보면 평범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의 사유에 강신주는 도끼를 휘두른다. "당연하다."라는 생각의 위험성을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있어주는 것이 당연하기에 우리는 부모에게도, 아내에게도, 우리 딸들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나의 몸과 마음에게도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존재가 내 옆을 떠나거나,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낯설게 보면서 소중함을 안다. 강신주가 다상담에서 "'내옆의 아내와 언제던지 헤어질 수 있다.'라고 생각해야 아내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3단 논법대로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3단 논법의 역순으로 사유한다. 나의 행동과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3단 논법을 끌어들여합리화한다. 강신주의 날카로운 지적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까지도 인간은 3단 논법으로 사유한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뇌 과학적으로 살펴보아도,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인간이 역사적 사례를 소환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들을 철학적 사유를 하지 않았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철학적 사유의 위대함은 '우연성의 철학'과 '필연성의 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의 모든 일들이 유연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유와 신과같은 존재의 계획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유의 대립이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역사를 발전론적으로 보고, 역사의 필연성을 밝혀내는 것을 역사학에서는 무척 중요시한다. 그리고 그러한 논문들을 우수한 논문으로 대우한다. 반면 우연에의해서 발생한 사건들의 나열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역사적 사유를 하지 않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역사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아니다. 라고 교육받았던 나로서는 세상은 필연적이기 보다는 우연적인 사건들의 연속이라는 주장이 낯설기는하다. 

  강신주가 소개한 철학적 사유의 비밀들은 단순히 철학이라는 학문의 고담준론에 갖힌 사유가 아니었다. 우리 삶을 철학하게하는 소중한 지혜였다. 


2. 강신주의 철학을 넘어서.

  강신주는 '사랑과 가족', '국가' 그리고 '자본주의'를 낯설게 만든다.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는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철학적 사유를 유발시킨다. 

  우리의 사랑은 남녀가 사랑한다면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야 완성된다는 헤겔식 철학의 고정관념에 가깝다. 반면, 강신주는 바디우의 철학을 끌어들여 '둘'의 사랑을 '둘'로 정의 내린다. 둘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인 '눈부처'를 보면서 서로를 독립된 개체로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다. 우리는 '둘이 하나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신화에 갖혀 우리를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강신주의 철학적 사유에 항상 맞짱구만 칠수는 없다. 나의 전공이 역사이다보니, 강신주가 근거로 제시하는 역사적 사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강신주는 '국가'도 낯설게 본다. 인디언 사회를 문명화된 사회로 묘사하며 국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디언 들에게 서구 문명의 총아인 '총'을 주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었을까? 재레드 다이야몬든 교수가 말했듯이, 태평양의 부족들에게 총기를 주자 그들은 잔인한 정복전쟁을 시작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대표적인 왕국이 하와이 왕국이다. 물질적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의 모습을 문명화로보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그들의 물적 토대가 강력한 집권자가 나오기에는 너무 허약했기 때문에 원시공산사회가 유지되었던 것은 아닐까?

  강신주는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개념을 국가에 확장시켜 인질=국민, 국가=인질범이라는 도식으로 국가를 낯설게 본다. 강신주식 사고가 무척 신선해보인다. 그러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서 개인의 생존은 위태롭다. 시리아 내전을 본다면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곳의 주민들은 생존 자체에 커다란 위협을 느끼고 목숨을 걸고 시리아를 탈출해서 유럽으로 가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독재자가 주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도, 생명을 위협받는 무질서보다는 안정된 독재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강신주는 한발자국 더 나아가 국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한다. "국가는 수탈과 자본에 따른 역동적 교환관계로 유지되는 기구"라고 규정하고 '국가'의 민낯을 보여준다. 강신주의 글이 이해가 가면서도 불현듯 반론을 제기해본다. 국가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필요가 있을까? 국가는 개인을 일방적으로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할까? 북유럽의 복지국가를 보라! 국가라는 시스템이 있기에 개인은 무정부상태에서 벗어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의 혜택을 누리고 있지않는가? 강신주의 지적대로 국가가 개인을 수탈하기 위해서 복지를 제공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역으로 그러한 국가의 속성을 개인이 이용해서 복지의 혜택을 누리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있지 않은가! 공기의 매서운 저항을 이용해서 우리가 행글라이드를 보다 재미있게 탈 수 있듯이, 국가의 속성을 꿰뚫어보고 국가를 이용해서 우리 삶을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특정 지배층이 국가를 이끌어가던 시대라면 강신주의 주장은 정확히 들어맞는 지적이다. 그러나, 민주화된 사회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권력을 감시하며 국가를 제대로 움직인다면 국가라는 '리바이어던'은 시민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대학에서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가 '철학과가 없어지는 것은 괜찮지만, 철학적 사유가 없어지는 것은 걱정이 됩니다.'라는 대답이 기억난다. 그때는 '철학적 사유'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철학은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말들을 외우는 학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강신주의 '철학 삶을 만난다.'라는 책을 읽으며 '철학적 사유'가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 철학이 우리 삶과 전혀 관계 없는 학문이기 보다는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소중한 학문임을 강신주의 책 '철학 삶을 만난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철학을 공부하려고 생각하는 학생과 일반인들이 입문서로 읽는다면 삶이 풍성해지리라는 믿음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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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하브루타 - 랍비가 직접 말하는
랍비 아론 패리 지음, 김정완 옮김 / 한국경제신문i / 2017년 9월
평점 :
절판


어린시절, 탈무드를 읽으며, 유대인의 놀라운 민족성에 감탄했다. '탈무드', '탈무드 도전', '천재를 만드는 탈무드 교육' 이 세권이 그 시절에 읽은 대표적인 유대인 관련 서적이다. 탈무드를 읽으면 유대인과 같은 탁월한 능력을 갖을 것이라는 환상을 그 시절에 갖았다. 교사가 되고 나서, 하브루타라는 유대인 학습법을 알았다. 유대인 관련 서적을 읽으며 유대인의 능력을 샘솟게 하는 원천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탈무드 하브루타'를 펼쳐 들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은 '탈무드'는 재미 있는 이야기를 뽑아서 만든 어린이용 탈무드 동화책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 '탈무드 하브루타'는 랍비 아론 패리가 탈무드에 대해서 설명한 입문서, 혹은 개론서라고 할 수 있는 책이다.

  책의 성격상, 유대인이 되거나, 하브루타를 배우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탈무드의 율법들은 유대인에게는 엄청난 의미가 있지만, 유대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별다른 효용이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너무도 많은 율법들이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율법을 지키려면 수도승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랍비에 의해서 씌여졌다보니, 자신들의 행위를 지나치게 합리화하는 부분도 있다. 신화를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차지한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팔래세타인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착잡해지기도 했다. 

  또하나! "동아시아에서 마야인"이라는 글은 너무도 어이없었다. 이부분은 번역자의 실수인지, 랍비의 무지 때문인지 알수는 없지만, 마야인을 동아시아 사람이라고 서술한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내가 유대인에 대한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독교의 원죄론에 강한 의문을 갖았던 나로서는 원죄론을 부정하고, 신이 세상을 불완전하게 창조했고, 이 창조행위는 계속되며, 여기에 인간도 동참한다는 티쿤울람 사상은 너무도 매력적이다. 또한 모든 것이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숙명론에 반기를 들며, 인간의 자유의지를 긍정한 부분은 유대교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힐렐 이라는 랍비는 토라를 한마디로 요약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이것이 토란의 전부다. 나머지는 해설이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논어' 위령공편에, 자공(子貢)이 공자(孔子)에게 “제가 평생 동안 실천할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이 있습니까?” 라고 묻자,  “그것은 바로 서(恕)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아야 한다.”(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라고 한 말과 너무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진리는 하나로 상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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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1-14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탈무드는 과대평가를 받기 쉬우면서도 오해받기 쉬운 책이라고 생각해요.

강나루 2021-01-14 09: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책을 읽으며 탈무드를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유대인의 율법이 아니라 그들의 학습법인 하브루타라는 점이에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육체적인 몸을 주신 아버지와, 영혼을 낳아주신 아버지를 가진자는 행복하다. 강신주는 유체를 주신 아버지를 떠나 보내면서 영혼의 아버지도 떠나보내기 위해서 이 책을 집필했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가 없다. 비, 바람을 막아주던 큰나무를 떠나 보내야 작은 나무는 큰나무 처럼 대지에 뿌리 박고 우뚝 하늘로 치솟을 수 있다. 이 책은 자신의 정신적 아버지 '김수영'을 떠나보내고 홀로 서려는 철학자 강신주가 김수영에게 바치는 장송곡이다. 무척이나 김수영을 사랑한 강신주는 어떻게 그를 저 세상으로 보낼까?


1. 강신주 다시 태어나다.

  항상 대중 앞에서 강해보이는 강신주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찌질했다. 가난한 가정에 코를 질질 흘리며, 소매로 흘러내리는 코를 열심히 닦아서 소매가 맨질맨질 윤이날 정도였다. 이러한 강신주는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찌질한 강신주! 그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든 두개가 있었다. 하나는 글쓰기 실력이다. 책상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좋은 느낌을 풀어쓴 글이 상일 타게 되었다. 이로인해서 강신주를 괴롭히던 선생님과 강신주를 왕따시키던 학생들의 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면 사람들로 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신주는 알게 되었다. 글을 통해서 찌질한 강신주는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강신주로 다시 태어난다.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만든 두번째는 김수영과의 만남이다. 강신주는 자신이 평생의 삶의 맨토를 발견한 것이다. 아니, 스승이자 마음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강신주는 괴로울 때마다 김수영의 시를 읽었다. 김수영을 통해서 배운 그의 삶의 신념은 강신주의 나침반이 되었다. 

  철학 판매 분야에서 10여년 동안 독보적 1위를 차지하는 강신주는 어린시절 글솜씨와 김수영 철학의 세례를 받으며 거리의 철학자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강신주의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은 강신주에게 어떠한 철학적 세례를 주었을까?


2. 단독성의 발견

 우리는 "모난돌이 정맞는다.", "튀지마라, 잘할 것도 없다. 중간만 가라."라는 말을 자주듣는다. 자신만의 삶을 살기 보다는 남들과 비슷한 삶을 살며, 자신만의 생각을 말하기 보다는 타인이 하는 일반적인 말을 하며 안전하게 살도록 우리는 교육받았다. 부모로부터, 군대에서, 학교에서.....

  김수영의 시에서 강신주는 "단독성"을 발견한다. 일반적인 시가 아닌, "단독성"을 가진 시를 김수영을 썼다. 누구나 쓸 수있는 시가 아닌, 유일한 시를 김수영은 쓰고 있다. "단독성=새로움=상상력"이라는 삼위일체가 이뤄지면서 김수영의 시는 단독적인 시로 우리에게 우뚝서게 된다. 

  영화 '기생충'의 감독 봉준호는 오스카 감독상을 수상하며 "내가 어렸을 적 영화공부를 할때 마음 깊이 새긴 말이 있다."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이건 마틴 스콜세지의 말이다."라는 소감을 발표했다. 세계적 감독 봉준호가 가슴에 새긴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말은 강신주가 김수영에서 보았던 "단독성"이라는 개념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본다. "단독적"인 삶을 살고 싶었으며, 언제나 새로우면서도 우리에게 금지된 것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고 싶었던 강신주는 봉준호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에서 보았던 "단독성"을 김수영에게서 보았다. "단독성"은 이렇게 거장들에게는 "보편적"인 개념이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하지 않을까? 시가 시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하듯이, 우리의 삶이 진정한 삶이기 위해서는 "단독성"이 있어야한다. 인구 통계상의 숫자가 아니라, 나와 너 사이의 유일한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워지며, 자유롭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삶을 살아야하지 않을까? 


3. 단독적인 시

  강신주가 소개한 김수영의 시는 너무도 "단독적"이다. 참신하다. 상상력이 풍부하다. 그리고 보편적이다. 너무도 단독적인 김수영의 시 두편의 일부를 읽어보자.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70쪽,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단독적이지 않은가?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는 납짝 엎드려 순종하다가, 만만한 선생님 앞에서는 기고만장하게 대드는 학생 처럼, 강대한 거악에는 순종하는 강아지 처럼 꼬리를 흔들다가, 힘없는 약자에게는 군림하려든다. 김수영의 부끄러운 모습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려했던 우리의 진면목이다. 독재정권에는 순종하던 언론이,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정권 위에 군림하려고 자본과 기존 기득권세력과 야합하고 있다. 김수영의 시가 너무도 위대해 보이는 것은 김수영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 가장 창조적이었으며, 보편적이면서도 참신하기 때문이다. 그 어는 상상력 많은 시인의 시보다 많은 상상력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김수영은 자신의 비겁함과 마주한다. 진정 자신의 나약함과 직면할 수 잇는 용기가 김수영에게 있다. 그렇기에 김수영은 위대하다. 나약한 나 자신과 직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며 강한척, 용감한 척하는 우리와 너무도 대조적이다. 아마도 강신주도 나와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찌질한 어린시절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지 못하는 강신주가 김수영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찌질함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었지 않을까? 그래서 김수영이 강신주를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두번째 시는 너무도 충격적이다. 너무도 충격적이다. 


  "'김OO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18쪽, 김수영, <김일성 만세>-


  2021년 지금 읽어도 너무도 충격적이고, 못내 불편함을 느끼게하는 시이다. 이러한 시를 발표하고 군사정권에서 김수영이 살 수 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하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행히도 김수영은 이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이 시를 김수영이 2021년 다시 발표해도 그는 공산주의자로 몰릴 것이다. 이 땅의 기레기들이 김수영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지금 이 시를 인용하면서도 '김OO 만세'라고 적어 놓은 것은, 나 자신도 분단의 벽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단의 비극을 넘어서기에는 대한민국의 땅은 너무도 척박하다.

  과거 독재로부터 압살당하던 언론은, 민주정권이 들어서자, 자본권력은 물론이고 적폐세력과 손을 잡고 민주정권을 물어 뜯고 있다. 자신에게 썩은 고기라도 던져주는 기득권들에게 꼬리를 살랑 살랑 흔들며 충견임을 입증하려 노력하고 있다. 김수영은 분단만 넘어서면 언론의 자유가 이뤄지리라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분단을 넘어선다할지라도 기자들이 자본권력과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않는다면, 우리 언론은 기레기들의 천국일 수 밖에 없다. 김수영이 살았을 때보다 어쩌면, 우리 언론의 현실은 더욱 비참해 보인다. 그럴수록, 김수영의 시가 보여준 단독성은 더욱 빛이 난다. 



  강신주는 마음의 아버지 김수영을 통해서 고통스런 자신의 내면을 치유했다. 그리고 단독적인 삶을 살아가려 노력했다. 강신주의 어린시절은 나의 어린 시절과 너무도 흡사했다. 가난한 가정과 코피를 잘 흘리는 아이, 가난하기에 새옷을 해입고 다니지 못하는 아이였다. 같은 옷을 매일 입고 다녔기에 반아이들은 나를 싫어했다. 강신주가 왕따만을 당했다면, 나는 구타도 당했다. 선생님이 교실에 없는 시간에 여러번 당하는 구타가 지금도 똑똑히 기억난다. 그때 나의 위안이 되었던 것은 책이었다. 책을 읽을 때는 나는 행복했다. 강신주가 김수영을 발견했듯이, 나도 강신주를 발견했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의 삶이 옳았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하는지 방향 감각을 갖게 되었다. 

  그렇다면, 강신주가 생각하는 세상은 어떠해야하는 것일까?  갖가지 꽃들이 자신의 단독성을 드러내며 장엄하게 핀세상, 바로 "화엄"의 세상이 아닐까? 치과에 걸려진 TV로 박근혜 탄핵을 보던 아주머니가 '박근혜 불쌍하네'라는 말을 했다. 그때 나는 '박근혜를 동정하기 보다는 박근혜를 뽑은 우리가 반성해야한다.'라고 강변했다. 그 아주머니가 곧이어한 말은 "그럼 누구를 뽑아야해?"라고 노예처럼 물었다. 그녀는 스스로 제대로된 대표를 뽑지 못하는 노예였다. "각 개인들의 철저한 국민의식, 다시 말해 메시아를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가 되고 결단과 실천"을 하지 못한다면, 주어진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 타인에 이해서 주입된 신념과 이념의 노예가 되기 보다는, 강신주가  "공통된 중심이 없어야 다양한 팽이들이 자신만의 소리를 내며 돌 수 있는 법"이라 말했듯이, 강요되고 주입된 거짓들에게서 벗어나서, 자신의 단독성을 마음것 발현한다면 "사회는 이런 다양한 소리들로 빚어낸 교향곡"이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화엄"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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