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말, 말, 말
제임스 잉글리스 지음, 강미경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세계적인 명언과 연설들을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다. 인간의 말은 맥락속에서 이해해야한다. 여론을 호도하는 극우 정치인들은 특정인의 주장을 앞뒤 맥락을 잘라버리고 자신이 편리한데로 이해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악날한 수법을 사용한다. 맥락을 떠난 말은 진실을 말할 수 없다. 우리가 진실을 알고 싶다면 그 말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아야한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말들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 말들의 앞뒤 맥락을 살펴보며 그 말들의 위력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

 

1. 연설문 선정의 빛과 그림자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잉글리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이다. 서양인이라는 그의 출신은 세계적 명연설을 선정할때도 그 한계가 드러났다. 동양의 명연설문은 간디의 연설문과 전범 히로히토 일왕의 연설이 전부이다. 최소안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은 없었다. 반면에 호주인인 그는 호주 출신의 명연설문은 꼼꼼히 챙겨 넣었다. 너무도 서양중심의 편향적인 연설문 선정이다. 제갈량의 '출사표'와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비롯한 수많은 명문을 넣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이 책이 한계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페리클레스의 전사자 추도 연설' 처럼 역사의 격랑속에서 이뤄진 명연설문을 만나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성 인권과 참정권에 관한 연설문을 비롯해서, 흑인 인권과 관련된 연설문을 수록했다. 이 책의 원제목이 'Fighting talk'이다. 단지 전쟁에 관한 연설문만을 싣지 않고 흑인 인권과 여성의 권리에 대한 연설을 빼놓치 않은 것이 이책을 더욱 빛나게한다. 물론, 흑백 인종차별 문제가 심각한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이기에 흑백 인종문제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2. 나의 가슴을 울린 말들!!

  세계의 명연설문을 묶어 놓은 이 책속에는 나의 가슴을 울린 말들이 많다. 그중에서 일부를 뽑아서 그 감동을 나눠보자.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선에 협조하는 것만큰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 마하트마 간디-

 

  '간디평전'을 읽었을 때의 감동이 되살아나는 연설이다. 지난 이명박근혜 정권 시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부역했는가? 4대강 사업에 협조하며, 때로는 침묵으로 그들에게 동조했다. 그들에게 빌붙어서, '폭식투쟁'을 하는 일배충들이 날뛰는 아비지옥이었다. 최소한 그 악의 세력에 동조하지 않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한국사 국정교과서를 쓴 저자중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 2명이나 있다. 한명은 대학교시절 교수라는 작자고, 한명은 대학원에서 만난 사람이다. 최소한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라면, 박근혜정권의 국정교과서 작업이 얼마나 우리 역사교육을 뒷걸음치게하는가를 알고 있을텐데, 그들은 박근혜정권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들은 더이상 '교수님',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암흑의 9년이라는 시간 을 버틴,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당신은 용기있는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들이 아버지를 묻는 것보다 아버지가 아들을 묻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자는 세상에 둘도 없다." -헤로도투스-

 

  평화시에는 아들이 어버지를 묻지만, 전쟁시에는 아버지가 아들을 가슴에 먼저 묻는다. 전쟁은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그 전쟁을 미화하며 '숭고한 전쟁'이라 말하며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미는 전쟁광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다. 헤로도투스는 전쟁의 비극적 속성을 한마디로 잘 말하고 있다.

 

"사랑의 반대는 증오가 아니라 무관심이다.

예술의 반대는 추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신앙의 반대는 이단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리고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다."-엘리 위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작가 엘리 위젤은 절규한다. 인류의 죄악에 무관심할때 그 악은 다시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게 된다. 시간이 지날 수록 홀로코스트에 대한 관심이 무뎌지는 현실을 보며 엘리 위젤은 악이 다시 고개를 들것이라 몸서리쳤을 것이다. 그이 말대로 관심이 없다면, '사랑, 예술, 신앙, 생명'이 지속될 수 없다. 관심에서 '사랑, 예술, 신앙, 생명'이 지속될 수 있다. 우리 인류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요즘 문제가 되는 예멘 난문문제를 비롯해서 팔레스타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관심'에서 부터 출발한다.

 

"친애하는 세계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해줄지 묻지 말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우리가 함께 손잡고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보십시오."-존F.케네디-

 

  우리주변에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행운을 주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노력으로 결실을 맺으려는 노력을 하기보다는, 부모 혹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행운을 주길 바라는 사람이 많다. 예전에 교장의 갑질을 보면서 어느 선배교사가 "아니, 왜? 전교조는 뭐하는거야!"라는 말을 나에게 했다. 그 선배교사는 전교조가 모든 학교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해주기를 바라는 투였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 전교조에 왜? 안들어오세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 교사라는자는 전교조의 문제점을 말하기 시작했다. 용기가 없어 교장의 갑질에 숨죽이는 비겁한자가, 전교조 선생님들에게 앞장서서 갑질에 대항해주길 바라면서, 그들은 절대 전교조와 같이 연대하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교조를 욕하면서 전교조가 일구워 놓은 곡식만을 거둬들이려한다. 그들에게 케네디의 말을 해주고 싶다. 옥토를 물려주지 않은 부모를 원망하기 보다는, 자신이 개척할 황무지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라! 황무지를 옥토로 일굴 수 있는 부모에게 축복을 주어라! 누군가 자신에게 행운을 주기만을 바라는 거지 근성을 버려라!

 

"우리는 이라크 국민을 해방시키러 들어가는 것이며, 저 고대의 땅에 깃발이 휘날린다면 그것은 그들의 깃발이 될 것이다.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여라."

"제군은 전투에서는 인정사정 두지 않되 승리에서는 관대해야 한다."

"(이라크) 그 나라에 가거든 살살 걸어라. 아무리 사소한 것도 함부로 대해선 안된다. 이라크 국민처럼 고결하고 관대하면서도 올곧은 국민은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팀 콜린스 중령-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전, 쿠웨이트 사막의 포트 블레어 메인 기지에서 콜린스는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감동적인 연설을 약800명의 미군에게 한다. 이것이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군 장교의 연설이라면 당신은 믿겠는가? 미군이 1945년 9월에 인천항을 통해서 한반도에 들어서면서 그들은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2003년 미군은 스스로 '해방군'으로 이라크에 간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미군에 팀 콜린스 중령과 같은 군인들만 있었다면, 이라크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됐을 것이다. 전쟁터로 가는 미군이 자신의 적국 국민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존경심을 보이라는 연설을 한다. 이것이 그대로 실천되었다면, 미국은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미군 최고 책임자, 부시 대통령 밑에 어찌 이리도 참다운 군인이 있을 수있는가?라는 의문이 계속해서 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장교가 꿈인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명연설문이다.

 

"아내의 잘못에는 눈을 감고

아내의 미덕에는 후하게 칭찬하라."-윌리엄 피트가 영국 하원 연설에서 프라이어의 시를 인용-

 

무릎을 탁치게하는 명언이다.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야하는 시구절이다. 아내의 잘못에 눈을 감고 아내의 미덕에 후하게 칭찬해야 가정이 화목하고 평온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 특히 아내의 미덕을 후하게 칭찬하지 못하는 나를 자주 발견한다. 무덤덤한 한국남자의 한계를 이제는 극복해야겠다.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3.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이원복교수의 연수를 듣다가 놀랐던 기억이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으며, 소크라테스는 국가를 가장 중요한게 생각했다는 설명을 들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소크라테스가 했다는 도덕교과서의 서술은 잘못된 것임을 법원에서 판결로 이미 결론지었다. 그런데 이원복교수는 아직도 소크라텟가 악법도 법이라고 말했다 강의하고 있으니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독재정권시절에 만들어진 잘못된 지식이 민주정권이 들어선 지금도 횡횡하는 현실을 보면서 을씨년스러운 느낌이든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왜? 유죄판결을 받고 죽었을까? 그의 마직막 변론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좀 우스운 표현을 사용하자면 등에 처럼 성가신 나란 사람은 실은 신이 이 나라에 보냈습니다. 이 나라는 덩치가 커서 움직임이 굼뜬 준마와 같아서 생기를 불어넣을 자극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이 하루 온종일 어디서나 여러분에게 들러붙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으라고 나 같은 등에를 이 나라에 보낸 것입니다. 다시는 나 같은 사람을 찾기 어려울 테니 나를 살려두는 게 좋을 겝니다."

 

  신에 대한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오염시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된 그가 배심원들에게 할 수있는 말이 아니다. 그의 변론을 읽으면 그가 과연 살고 싶어서 이런말을 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든다. 소크라테스는 배심원들을 내려다보며 꾸짖고 있다. 배심원들은 소크라테스를 제정신이 아닌자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슬아슬하게 유죄판결이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소크라테스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내가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갚아주게"라고 했다. 의술의 신에게 빚을 졌다는 말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이 죽음을 택했고, 그래서 배심원들의 유죄선고를 유도했다는 점에서 그는 탈출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독배를 마셨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

  우리가 아는 명연설중에 페리클레스의 전사자 추도 연설을 빼놓을 수 없다. 세계사 시험문제 지문으로도 자주나오는 이 명연설을 직접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무척 행운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페리클레스의 명연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없는 내용이 있다.

 

  "아직도 출산할 수 있는 나이라면 죽은 자식을 대신할 자식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운을 내십시오. 새로 태어난 자식은 잃어버린 자식을 잊게 해줄 뿐만 아니라 부국강병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할 말인가? 개인을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고 있다. 마치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연설을 21세기에 한다면 아마도 수많은 여성들의 미투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요즘, 미투운동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일찍이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활약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의 연설을 읽으면, 몹시 불편한 느낌이 많이 든다.

 

"남성성은 파괴적이고, 고집스럽고, 이기적이며, 과정이 심하고, 전쟁과 폭력과 정복과 탈취를 사랑하고,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모두에 불화와 무질서와 질빙과 죽음을 야기합니다."

 

  워싱턴에서 여성참정권을 요구하며 이러한 연설을 한 그녀를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여성과 남성은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화합의 관계여야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어야한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적으로 돌린다면 인류는 생존할 수없다. 나의 주장이 옳다고 타인의 인격을 말살하는 행위는 인류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여성이 권력을 쥔다고 반드시 여성성을 발휘하여 세상을 평화롭게 만든는 것도 아니다. 박근혜 전대통령을 보면서 과연 여성이 권력을 쥐면 반드시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볼 수있을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권력을 쥐면 누구든지 폭군도 될 수 있고, 현군도 될 수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 각각의 그릇의 차이이다. 권력을 참되게 행사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닌자가 권력을 갖게되면 불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의 여성운동도 서로를 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화합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루디 줄리아니 유욕 시장의 명연설을 읽으며, 그의 테러없는 세상을 향한 이상에 공감한다. 그러나 테러의 원인을 다각도로 보지 못한점은 매우 아쉽다. 9.11테러의 원인을 미국의 패권주의에서 찾는 의견이 많다. 오사마 빈라덴이 사실은 사우디의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그가 왜? 반미주의자가 되었는지 생각해보아야할 것이다. 지금 서아시아(중동) 문제의 근본적원인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배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순 중에 하나는 강대국들! 정확히 이야기하면 매이져 석유기억들이 너무도 싼값으로 석유를 중동에서 사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들의 자원이 강대국들의 매이져 기업들에 의해서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분노를 쌓았다. 그리고 이라크 전쟁과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거치면서 테러리스트들은 그 분노를 더욱 키웠다. 마침내 'IS'라는 괴물을 탄생시켰다. 테러와의 전쟁이 오히려 테러라는 괴물을 키우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졌다. 이책에 소개된 많은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연설을 쫒은 결과는 너무도 참담하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용서'와 '사랑'일 것이다.

  하임 헤르조그의 '시오니즘은 인종주의'라는 유엔 결의안에 대한 반박 연설을 읽으며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하임 헤르조는 나치에 의해서 벌어진 '크리스탈나흐트(수정의 밤)'사건에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마치 시오니즘을 인종주의로 규정한 사람들이 나치의 동조자인 듯한 인상을 주는 연설을 읽으며, 오늘날의 팔래스타인 문제가 떠올랐다. 어제의 약자인 유대인들이 오늘의 강자가되어, 오늘의 약자인 팔래스타인인들에게 가하는 참상이 떠올랐다. 폭력은 대물림되는 것일까?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다.

 

4. 연민의 글

  강해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때로는 연민의 정이 든다. 강철같은 심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되는 엘리자베스 1세, 사자의 심장을 가진 맹수로 보이는 나폴레옹! 그들의 글에서 오히려 연민이 느껴진다.

  이 책에 따르면 엘리자베스는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통념을 거부하면서 예사로 침을 뱉고, 욕설을 일삼고, 맥주를 즐겨 마셔 백성들 사이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신은 이 글을 읽으며 어떤 마음을 들었는가? 엘리자베스에게서 정이 떨어졌는가? 나는 오히려 그녀가 애처럽게 보인다. '천일의 앤'이라는 이야기로 유명한 그녀의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했다. 가장 행복하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여야할 부부가,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가 되었을 때, 자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남성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그녀는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곡된 남성상은 그녀를 불행에 빠뜨렸다. 그녀는 '국가와 결혼했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거부한 것도 그녀의 불행한 가정사에서 비롯되었다 본다.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상처를 받았다. 누구도 그녀의 아픔을 보듬어줄 수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나폴레옹-

 

  나폴레옹이 1821년 죽음에 임박했을 때, 그의 본처 조세핀의 이름을 불렀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이혼했다. 그리고 아들을 얻었지만, 그는 황위를 잃어버린다. 조세핀과 있을때, 그는 인생의 오르막길에 올랐고, 그녀를 떠나보면서 그의 인생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죽음의 모래시계가 떠날때를 알릴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떠올리면서 얼마나 많은 회안을 느꼈을까?

 

"그대의 선조들이 큰 물을 건너 이섬에 상륙하면서 말이오.  (중략) 그러면서 조그만 자리 하나만 달라고 청했소. 우리는 그들을 가엾게 여겨 그 부탁을 들어주었고, 그들은 우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소. 우리는 그들에게 옥수수와 고기를 주었으나, 그들은 그 보답으로 우리에게 독을 주었소."

"형제여, 예전에는 우리의 자리가 넓었고 그대들의 자리는 무척 좁았소. 이제 그대들은 아주 큰 민족이 되었고, 우리에게는 담요를 펼 곳마져 남아 있지 않소. 그대들은 우리나라를 온통 차지해 놓고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 구려. 우리에게 그대들의 종교까지 강요하려 들다니 말이요."-사고예와타 추장-

 

  청교도들을 환대하며 친구로 대해주었지만, 그들은 인디언친구들의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낯선 사람이 오면 환대하라 가르친다. 그러나 진정으로 환대한 것이 오히려 독으로 되돌아 오기도한다. 사고예와타 추장의 말은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한다. 환대만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환대받을 가치가 있는자에게만 환대를 해야한다. 환대할자와 환대하지 말아야할자를 구분하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제주도의 예멘 난민들은 환대의 대상인가? 환대하지 말아야할 자인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자들은 영국의 대의가 정당하다고 굳게 확신하기에 그 중추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전력을 다해 기여해왔습니다.(중략) 그들의 조상은 잉글랜드에서,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웨일스에서 왔습니다. 그들은 영국 국민을 수세기에 걸쳐 결집시켜온 핏줄과 영광과 말을 물려받았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인종과 언어가 본토와 같은 영국 땅입니다."-존 커틴-

 

영국의 이익이 자신들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생각을 읽으며 착잡한 연민을 느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을 위해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일본군이 남진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하자 영국은 과연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해서 싸웠을까? 처칠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시아를 일본에 넘겨주는 한이 있더라도 미국 군대를 영국 방어에 투입한다는 내용의 비밀협정을 루스벨트 대통령과 체결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영국인으로 착각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연민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이 책에는 우리의 피를 끓게하는 많은 연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연설들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중에서 '징병과 전쟁을 비판한 무정부주의자의 연설'을 한 에머 골드먼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녀는 투옥과 추방을 여러차례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녀는 "미국 국민 모두가 들고 일어나 우리는 누가 뭐래도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미국의 남녀 무구에게나 자유와 기회를 의미하는 그런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말할 것'이라고 외친다. 그녀는 온몸으로 주어진 천국은 없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천국을 원한다면 당신이 사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라고 우리에게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과거 이명박근혜정권에서 새로운 천국을 맛보기 위해서 이민을 가려는 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천국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느곳에서도 천국을 발견할 수 없다. 이땅이 지옥이라면, 우리 다함께 이땅을 천국을 만들기 위해 힘을 모으자! 그것이 이땅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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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세계의 신화
아침나무 지음 / 삼양미디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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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에 바래면 전설이 되고, 햇볕에 빛나면 역사가 된다.!! 세계의 신화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추가하거나 덜어 내어 마침내 문자로 정착된 이야기이다. 달빛에 바랜 전설이 햇볕을 만나 우리에게 전해져 신화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단군신화와 중국의 삼황오제, 그리고 그리스 로마신화를 뺀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신화는 너무도 협소하다. 그중에서도 단군신화는 거짓말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고, 그리스 로마신화만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기는 신화 사대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스 로마신화에 대한 연수를 들으며, 세계의 다른 민족도 많은 아름다운 신화를 갖고 있지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을 빼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우리의 신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의 신화를 잘알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는 '단군신화'를 말할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가서, 동명신화를 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창조신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단군신화'에는 천지창조 이야기는 있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창조신화가 있었다. 이 책에 따르면, '부도지'의 주인공인 마고가 등장한다. 그리고 선천시대와 중천시대, 후천시대를 거치면서 만물이 창조된다. 무속신화(천지왕본풀이)에서는 옥황상제와 천지왕이 세상만물을 창조한 것으로 나온다. 이 책에는 소개되지 않지만, 제주도의 신화에는 설문대할망이 제주도를 만든 이야기가 나온다. 비루하게 '단군신화'만을 우리의 신화로 알고, 우리신화에는 천지창조 이야기가 없다고 주장했던, 우리의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 사랑을 가지고 우리 삶 속의 모든 이야기들을 들여다보면, 잊혀졌던, 우리 태고의 이야기가 들린다. 이 책을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물론, 이책에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들어있다. 환인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이 책에는 과감하게 환인이 우주를 창조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순간 '환단고기'를 참조했던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환단고기'에는 '치우천황'이라는 인물이 소개되는 이 책에도 치우천황을 우리의 영웅으로 소개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위서로 평가하는 책을 과감하게 채용하여 책을 서술한 저자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러나 저자의 이름이 '아침나무'라는 필명으로만 소개되어 있다. 저자는 20세기에 만들어진 이야기도 신화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일까?

  이 책에는 우리 조상들이 모셨던 신들이 나온다. 황우양이 성주신이 되고, 황우양의 부인이 지신, 터주신이 된다. 우리의 토착 신들도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모르고 살았다. 어린이가 읽을 수 있는 동화책을 통해서 이러한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자연스럽게 어린이들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도록 말이다.

  서낭신이 소진랑 이라는 이야기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황우양이 길가는 이들의 침이나 받아 먹으라고 세워 놓았는데, 서낭당은 커다란 숭배의 대상으로 숭배되어 왔다. 고려시대 관리는 서낭당에 인사를 하지 않았다고 관직에서 파직되기도 했다. 참, 재미있는 아이러니이다.

  불교 탱화를 감상하다보면, 시왕도가 눈에 띈다.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없는 나에게는 시왕도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바리떼기 이야기에는 바리데기의 일곱 아들이 열시왕 즉, 십대왕이 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불교의 시왕도와 바리데기 신화의 연관성이 무엇일까? 지옥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인 시왕(十王)을 그린 시왕도가 오리 무속의 영향을 받았다기 보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무속신화가 불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적 요소를 받아들인 것은 아닐까? 무당의 조상신이 되는 바리데기와 불교와의 습합은 이질적인 두 종교가 만나서 새로운 교류를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2. 신화의 보편성.

  세계의 신화는 고립적으로 발전하기도하고 교류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한다. 때로는 고립적으로 발전하고 때로는 교류하면서 발전하기도 했던 세계의 신화들에게서 너무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그것은, 천지를 창조하고 인간을 흙으로 만들었다는 내용과, 신이 창조한 인간을 신은 홍수를 통해서 심판했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신이 인간을 흙으로 빚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유대교와 크리스트교가 탄생한 서아시아 지역의 페르시아에도 최초의 인간 '키유마르스'를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 몽골 신화에서도 오치르마니는 챠간 숑고드에게 흙으로 사람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흙으로 사람을 만들었다. 저 멀리 신대륙의 마야문명에도 진흙과 나무로 인간을 만들었으나 불완전하여 옥수수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관념은 세계의 공통적인 관념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리적 차이점에 따라서 자신들의 주식인 옥수수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수정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인간의 관념을 엿 볼 수 있는 신화적 요소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페르시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올 뿐만 아니라, 인도판 노아 이야기 라고 할 수 있는 '마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강물이 범람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벌어지는 환경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이러한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상상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물과 불은 떼어 놓을 수 없다. 불은 신성한 것이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위해서, 신들의 세계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갖다 주었다는 이야기는, 아프리카 신화에서도 전해진다. 즉, 피그미족의 신화를 보면, 우연히 신의 집에서 불을 보고는 용감한 피그미 한사람이 신의 집에서 불을 훔쳤다고 한다. 이러한 프로메테우스적인 이야기가 세계 여러 신화 속에 많이 나오는 것은 불이 인간에게 얼마나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는지를 알려 주는 것이리라....

 

 

3. 신화의 특수성 - 신도 죽을 수 있을까?

  신도 죽을 수 있을까? 신은 불사의 존재일까? 우리는 신은 불멸의 존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보편적이지 않은 생각이다. 크리스트교의 신처럼 절대적인 존재는 세계의 신화속에서 흔히 있는 존재가 아니다. 많은 종교에서는 신들은 하나의 특정한 능력을 가진 존재일 뿐이다. 심지어는 죽기도하고 중노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집트신화에서 '오시리스'라는 존재는 세트의 함정에 빠져 죽었다가 살아난다.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혜와 지하수의 신 에아가 바다 신 아프수를 죽인다. 그뿐인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는 지위가 낮은 작은 신들은 홍수방지와 농사를 위해서 침전된 강바닥을 파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술에 취하기도하며, 노동에 불만을 품기도 한다. 켈트 신화에서 브레스 왕의 폭정으로 다난족의 신들까지 중노동을 해야했으며, 풍요의 신 다그다는 브레스의 성주변에 참호를 파기가지 한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 인간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신이 마지막 전쟁 나그라뢰크에서 죽는 모습은 북유럽 신화에서도 보인다. 신은 불사의 존재라는 것은 보편적인 모습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유대교와 크리스트교 계통의 신화에서 볼 수 있는 특수한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대교 계열의 신앙이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세계의 신화는 그 고정관념을 깨뜨려 주었다.

 

4. 신화의 특수성 - 북유럽 신화의 귀환

  '반지의 제왕', '리니지', '라그나뢰크'의 줄거리와 캐릭터의 모델이 되는 신화를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 낯설게 보이는 북유럽 신화가 그 모델이다. 북유럽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다른 점이 너무도 많다. 북유럽의 자연환경과 북유럽인들의 투쟁이 신화속에 녹아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유럽 신화의 다양성과 독특함이 21세기에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를 만들고 있다. 수도사들에 의해서 정리된 북유럽 신화의 마지막은 나그나뢰크로 끝난다. 마지막 전쟁 나그나뢰크에 오딘을 비롯한 많은 신들이 참여하여 장렬히 싸우다가 죽는다. 그라나 나그나뢰크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하나의 끝은 새로운 시작이 된다는 북유럽 신화를 보고 있다면, 북유럽 신화는 암울하다는 고정관념이 틀리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둡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삶을 개척해 나가야했던 북유럽인들은 자연에 굴복하지 않았다. 한시대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는 희망을 품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갔다. 그리고 지금 그 창조적 신화의 에너지는 다시 '반지의 제왕', '리니지'라는 문화 콘텐츠로 되살아나고 있다. 

 

5. 살아있는 켈트신화

  켈트 신화를 그리스 로마 신화만큼 잘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캘트신화는 우리 삶 속에 너무도 가까이 다가와 있다. 요즘 할로윈 데이가 되면 기괴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영어 유치원을 비롯한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에서는 그 잔치를 성대하게 한다. 사실 할로윈 데이를 미국에서 시작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 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켈트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켈트족들은 마법에 걸린 사후의 인간 영혼은 드루이드가 섬기는 신인 샴하인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다. 10월 31일은 겨울이 시작되는 심하인 축제날이다. 삼하인 축제날에는 죽은 자들이 긴 겨울밤에 활동하기 위해서 되살아난다고 생각하며, 그들에게 자신들의 집을 볼품 없게 보이기 위해서 벽난로 불을 꺼뜨리기도 했다. 이것이 기독교가 전파된 후에 11월 1일을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 All Hallows' Eve)로 불려지게 되었고, 이 말이 '할로윈(Halloween)'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이들이 이러한 기원을 알고 있을까?

  '침략의 서'에 신족인 '투아다 데 다난'족이 아일랜드에 도착하여 '피르볼그족'과 전투를 한다. 잉글랜드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바이킹족의 침략과 로마인들의 침략, 스페인의 무적함대의 침략을 받은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이 신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 침략자들을 신족으로 묘사한 것도 이 신화를 만든 이들이 본토의 토박이 켈트족이라기 보다는 유럽대륙에서 이주해온 켈트족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한다. 신화는 시대와 소통하면서 형성되고 발전되기 때문일 것이다.

 

6. 그리스 로마 신화의 생명력은 어디에 있을까?

  신화라는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생각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교양없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추앙받는 이유는 그 신화의 위대성보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한 세계가 패권을 장악하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을 했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학성과 우수성을 주장하며, 그리스 로마신화가 우수하지 않았다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선생님의 강력한 반발을 듣기도 했다.

  그럼, 그리스 로마 신화의 문학성과 강력한 생명력의 근원은 무엇일까? 우선 개방성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이집트의 하토르는 그리스 로마신화의 아프로디테가 되고, 아누비스는 헤르메스가 세트는 티폰이 된다. 그리스 로마신화의 신들의 기원은 사실 이집트 문명에 있다. 진정한 창조는 이집트 문명에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로마 문명은 이들 원석을 받아들의 자신들만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두번째는 끊임 없는 재창조에 있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와 비롯한 수많은 작가들이 문학화 작업을 했다. 신화가 살아있는 생명력을 갖기 위해서는 끊임 없는 재탄생의 과정을 가져야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그 작업을 끊임 없이 해가고 있다. 스타벅스 커피 로그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이렌이 살아 있듯이 그리스 로마 신화는 끊임 없이 재탄생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가 살아있는 이유이다.

 

7. 신화 속에 녹아있는 심리학

  인도의 신화에 하늘의 신 드야우스와 땅의 신 프리비티 사이에 인드라가 태어난다. 많은 신들이 인드라를 주시하자, 인드라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드라를 숲속에 숨기고 귀여워하지 않았다. 부모의 방치로 인해서 인드라는 드야우스를 죽이고, 번개라는 강력한 무기를 쟁취한다. 그리고 하늘, 땅, 지하 3계를 지배하는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신화 속의 제우스가 그의 아버지를 죽이고 권력을 쟁취하는 모습과 닮아있다. 신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다는 설정은 신이 불사의 존재라는 고정관점을 깨뜨려야 이해가 가능하다. 더 나아가, 아버지를 이기고 독립하려는 아들의 심리를 형상화한 신화로 해석 가능하다. 큰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다. 아버지를 이기지 않고 아들은 세상에 나갈 수 없다. 어려서부터 오이디푸스 컴플랙스를 겪던 아들은 아버지를 이기고 세상에 나간다.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자신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 진리를 그리스 로마신화와 인도신화는 말하고 있다.

  인도신화에서 프라자티는 욕정이 강한 신이다. 딸을 보면서 욕정을 느낄 정도이다. 딸이 사슴으로 변해서 도망가자, 프라자티는 숫사슴으로 변해 추적한다. 참다 못한 폭풍의 신 루드라가 화살을 쏘아 프라자티를 맞추었다. 엽기적인 이러한 내용의 신화는 다른 지역의 신화에서도 나온다. 사춘기가 되면 딸은 아버지를 멀리한다. 스킨십을 하는 것을 특히 싫어한다. 이것은 근친상간의 위험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딸들의 보호욕구이다. 이러한 심리학적 기재가 신화속에 투영되어 프라자티 신화로 탄생했다. 신화를 알면 인간의 저변에 깔려 있는 심오한 심리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간다.

 

8. 신화를 통해서 알게 된 이야기들과 의문들

가. 일본인들은 천당과 지옥에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신들이 사는 곳(다카마노하라)과 인간계(아사하나노 나캇쿠니) 그리고 악령이 사는 곳(오미노 쿠니)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이들 신들이 사는 다카마노하라와 악령이 사는 오미노 쿠니에 갈 수 없다. '천당 간다.', '지옥간다.'라는 말을 내뱉는 우리들의 사고관념과 일본인들의 사고관념은 너무도 다르다. 아직도 천황이 있고, 천민이 있는 일본사회 속에서는 죽어서도 자신의 신분을 벗어난 세계에 갈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신사에 갈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먼나라 일본은 죽음에 대한 세계관이 우리와 너무도 다르다.

 

나. 피그미족, 다양한 인종을 탄생시키다.

 피그미족 신화에 따르면, 한마법사가 세상을 창조했다. 인간을 만드는데, 코요테의 장난으로 인해서 흑인과 백인, 황인종이 생겨났다. 외부와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피그미족 사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신화가 만들어졌을까? 혹시 백인 선교사가 들어 오고 나서 생겨난 이야기가 아닐까?

 

다. 약속을 지키는 인도와 지키지 않는 켈트인

  인도신화 속에서는 자신이 내뱉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한다.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에 운명의 사슬을 벗어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그러나 켈트 신화에서는 프윌은 그와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적을 유인해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도 문화의 차이일까? 아니면 신화를 재미있게 이끌어가기 위한 장치일 뿐일까?

 

라. 비극적 최후를 맞는 페르시아 영웅들

  많은 영웅들을 공주를 구하고 부와 명예를 얻으며 공주와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신화 속에 나오는 잠시드와 마누키르라는 영웅은 자신의 위대한 성공에 취하여 비참한 말로를 겪는다. 다른 지역의 영웅담과는 너무도 다른 결말이다. 이것이 이란의 특징일까? 아니면 자만에 빠지기 쉬운 인간에게 울리는 경종일까?

 

 

9. 동의할 수 없는 내용들

  이 책에서는 몽골과 한국어가 비슷한 단어가 많다는 것을 근거로 들어 몽골과 한국을 같은 계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몽신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몽골에도 있으며, 몽골의 '~치'가 한국에도 그대로 있고, 몽골이 말을 '몰'이라고 발음하고, 제주도에서 '몰'로 말을 발음한다. 이러한 근거가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이라는 근거는 되지 않는다고 본다. 왜? 그럴까? 사건을 바라보는 선후가 다르다. 한국어와 몽골어가 비슷한 이유는 몽골과 한국이 같은 계통으로 같은 뿌리를 갖았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고려의 원간섭기에 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다. 연지와 곤지, 쪽두리, 소주 등이 이때 몽골로 부터 들어왔으며, 몽골에 의해서 강제로 제주도에서 말을 사육하기 시작했으며, 몽골인들로 부터 제주도 사람들은 말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 몽골에 동명신화가 남아있는 이유는 고구려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고구려의 유민이 이곳을 점령하거나 망국에 한을 안고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신화를 공부하는 사람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게 다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낮선 신화들을 쉽게 이해하도록 다양한 사진과 지도를 첨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머릿속으로 상상하기 힘든 이미지들을 친절한 그림으로 설명해주니 너무도 흥미진진했다. 흥미진진했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이 책에서 가장 나의 가슴을 울린 한마디를 떠올려보았다.

  "마지막 남은 나무가 베어진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히 뒤에야, 마지막 남은 물 한붕울이 사라진 뒤에야, 그때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사람은 돈을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을."

  황금만능주의에 물들고 환경오염을 문제시하지 않는 주변의 인간을 바라보며, 북미대륙에 살았던 크리족의 이 말은 나의 가슴을 울린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문명의 붕괴'라는 책에 이와 비슷한 말이 전해온다. 이스터섬의 마지막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문명이 붕괴할 때,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중에 하나는 자연환경의 파괴이다. 이스터섬의 사례는 자산파괴가 인간 문명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경고는 북미대륙에 살았던 크리족의 신화속에서 부터 전해져오고 있다. 우리 인류는 그 경고를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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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 2017-12-10 08: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언제 읽을까 눈길만 주고 있네요 ㅎㅎ

강나루 2017-12-10 08:51   좋아요 1 | URL
두꺼운 부피 때문에 망설이기도 하지만, 일단 손을 데면 술술 읽혀져요.^^

낭만인생 2017-12-10 1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 내용 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강나루 2017-12-10 20:09   좋아요 0 | URL
내용이 좋다니, 감사합니다.^^

munsun09 2017-12-11 1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서 읽으려고 하니 절판으로 뜨네요^^
중고를 살펴봐야겠어요.

강나루 2017-12-11 17:52   좋아요 1 | URL
절판이라니... 안타깝네요

라온 2017-12-11 2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중고로 샀어요

강나루 2017-12-12 04:11   좋아요 0 | URL
네 ^^ 중고도 좋지요 즐거운 책읽는 시간 보내요^^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 변혁의 정치 리더십 연구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 지음, 조중빈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이라는 제목을 보고 역사를 통해서 탁월한 리더십의 근원을 찾아가는 책으로 생각하고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놀랍게도 첫페이지에는 여러사람의 추천글이 있었다. 이명박과 정동영이라는 정치인과 총리후보로 지명되었다가 일대 파란을 일으키며 낙마했던 문창극의 추천사가 보였다. 추천한 인물들을 보니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이들이 이 책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썼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과연 이책은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이며 추천사를 쓴 인물들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고 추천사를 썼을까?

 

1. 히틀러는 리더인가?

  이 책의 도입부에 저자 제임스 맥그리거 번즈의 수업시간에 이루어진 토론을 소개한다. '히틀러는 리더인가?'라는 주제에 학생들은 논리적인 답변으로 '그렇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제임스 맥그리거 번즈는 단오하게 히틀러는 리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국민을 지배했을 뿐 이끌지 못했다. 그는 통치자(Ruler)일뿐 지도자(Leader)는 아니라고 단언한다. 통치자는 신민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어서 지도자와 추동자 사이에 힘을 실어주는 필수 불가결한 유대가 없다. 겉으로는 통치자가 강해보이고 절대 무너질 것 처럼 보이지 않는 철옹성으로 보이지만, 너무도 허무하게 무너진 통치자들을 우리는 역사속에서 많이 보았다. 특히 연산군의 경우 수많은 신하들을 죽이고, 왕을 대리해서 일을 보러 가는 내시들에게도 길바닥에 엎드리도록 한 겉모습에서 그의 권력이 탄탄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궁궐을 지키는 내시들은 수채구멍으로 도망쳤고, 왕옆의 승지들도 왕을 내팽겨치고 도망쳤다. 연산군을 지켜줄 사람은 흥청의 기녀들과 장녹수 뿐이었다. 진정으로 강한 것은 통치자가 아니라 팔로우들과 소통하는 지도자들이다. 노무현이 죽고 나서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음속에 살아있는 대통령으로 여기며 그리워하고 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리더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리더십은 통치술보다 강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 역사속에서 진정한 리더는 몇명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두소지인(斗筲之人)을 어떻게 논의에 끌어들일 수 있느냐며 화를 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별볼일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앉힌 것도 국민이라는 점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통치자가 부당한 통치를 하도록 내버려둔 많은 국민들의 뼈아픈 반성이 없이는 역사의 진보는 없다.

 

2. 나폴레옹은 리더인가 통치자인가?

  이 책에는 다양한 리더와 통치자들이 소개되어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결실을 통채로 넘겨받은 나폴레옹 시기의 공립학교의 모습은 과히 충격적이었다. 엄격한 규율을 통해서 길러지는 프랑스의 학생들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되기 위한 사관학교라 말해도 손색이 없는 파시즘적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리더가 아니라 통치자였다. 그의 나폴레옹 법전(Civil Code)을 빼면 그는 철저한 독재자였다. 아니, 나폴레옹 법전에도 여성의 권리는 철저히 무시되어있다. 프랑스혁염의 과감한 진보성을 담기보다는 온건한 내용의 법들이 나폴레옹 법전에 정리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달콤한 결실만을 얻은 통치자들일 뿐이다.

  프랑스대학명의 나라의 국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강한 통치술을 가진 리더를 원한다. 그리서 번즈는 프랑스에서는 지도자와 추종자가 서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리더십은 없다고 말한다. 미국의 경우 미국 헌법과 권리장전을 채택하면서 보인 집단적 리더십을 보여주었는데, 왜? 프랑스에서는 그러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프랑스 인들은 강한 통치술을 자랑한 나폴레옹과 드골을 그들의 리더로 뽑았다. 흔히 프랑스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통치하기 힘든 국민이라 말한다. 그래서 그들의 자유를 억압하자, 프랑스대혁명에서 부터 최근의 68혁명까지!! 엄청난 혁명을 프랑스인들은 일으켰다. 프랑스인들은 자율과 자유를 원했고, 이러한 국민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제4공화국을 비롯한 많은 지배자들은 혼란만을 가속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혼란은 강한 리더십을 통한 안정을 원하게 된다. 이러한 욕망을 이용해서 강한 통치자들이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그러한 통치자들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혹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 권좌에서 물러난다. 이러한 고리를 제대로 끊지 못한다면, 프랑스에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탁월한 리더가 나오기 힘들지도 모른다.

  번즈는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설을 리더십을 설명하는데 많이 인용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보수주의자들은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중에서 하위 단계인 생물학적 안전에 주로 주목한다. 반면, 진보주의자는 상위의 단계인 사랑과 귀속감 자아실현에 주목한다. 이는 우리사회 모습과 일면 닮아있다. 보수당들이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며 안보위기론에 의존하려한다면, 진보주의자는 이를 뛰어넘어 남북한의 사랑과 한민족으로서의 귀속감을 강조한다. 더 나아가 인류 평화라는 담론으로 까지 나아간다. 프랑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다. 사회혼란은 '안전'이라는 욕구를 분출시켜 보수파가 주도권을 잡게한다. 그리고 통치자가 권력을 잡는다. 그 안전이라는 욕구가 충족되고 나서는 다시 자유와 자아실현이라는 욕구가 분출되어 통치자를 몰아낸다.

 

3. 동의할 수 없는 것들, 이해할 수 없는 것들.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은 정치학을 전공했다. 그러서인지 우리 교과서의 표현과 다른 용어를 써가며 번역한듯한 구절들이 보인다. 그중에 하나가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라는 용어이다. 흔히 미국 독립혁명 이후에, 연방주의와 분권주의자가 대립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공화주의자'라는 용어가 사용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의 차이점은 무엇인지를 명확히 설명해주어야 이해가 빠를 텐데 이러한 설명이 전혀없다. 번역자가 이를 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번역자는 충실히 번역만을 했을뿐, 독자를 위해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논문집을 모아놓은 듯한 이 책은 독자의 이해를 위한 친절한 안내를 포기한 듯 보였다.

  번즈는 리더십은 필연적으로 집단적인 조합체이다. 라고 규정하고하버드대학교를 개혁한 레십스 엘리엇의 사례를 든다. 그러나 레셉스가 어떻게 집단적인 리더십을 발휘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것도 이 책의 저자에게 느끼는 불친절함 중에 하나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공포정치로 치닫게된 원인을 번즈는 왕의 국외 탈출시도 실패에서 찾는다. 그는 박애주의가 실해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공포정치는 프랑스 내부에서 기인하것 처럼 서술하고 있다. 물론 왕에 대한 실망감이 공포정치의 출현이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스모킹건이 되지는 않는다. 공포정치가 출현한 스모킹건은 바론 반혁명세력의 침략에 있다. 외부의 침략은 내부에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광풍을 몰아치게 한다. 이러한 예는 역사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의 적군파 사건은 대표적 사례이다. 산속에 들어간 극단적 공산주의자들은 산밖에 있는 그들의 '적'에게 공포감을 얻었다. 그것은 내부의 결속을 위해서 반역할 것으로 보이는 자들을 철저하게 살해하는 광폭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1만 5천리 대장정을 마치고 옌안에 안착한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그들을 둘러싼 장개석 군대의 공포속에서 정풍운동을 했고, 수많은 동지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1930년대 만주에서 불어닥친 민생단 사건의 비극은 외부의 공포가 내부에 얼마나 무서운 극단주의를 낳는지를 보여준다.

 

  번즈는 천재들이 결손가정 혹은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내가 읽은 교육학책의 내용과 상이한 차이를 보인다. 최근 발달한 뇌과학에 따른면 뇌가 발달하기 위해서는 안정감과 행복감을 느껴야한다. 행복한 가정이 아이들의 뇌발달을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천재들이 개인적 약점과 가정의 결손 혹은 불행이 있었다면, 이것은 그들의 열등감을 탁월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탁월한 예술작품을 낳기 위해서 우리자녀를 불행에 빠드려야할까? 아니다. 헤르만 해세는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며 많은 고통을 당했으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하여 고아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고통은 '수레바퀴밑에서'라는 작품을 낳았다. 이러한 어린시절의 고통은 해세를 성년이 되어서도 행복하게 하지 못했다. 나의 자녀가 탁월한 예술작품을 낳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불행한 삶에 빠지도록 모험에 나설것인가? 아니다. 아이는 도구가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 인격체가 스스로 자라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부모가 해야할 일이 아닐까?

 

  이책에서는 공교육이 창의성을 말살한다는 뉘앙스의 글도 있다. 발명왕 에디슨은 공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창의성을 발휘하는 위대한 발명가가 되지 않았는가? 이밖에도 기존교육에서 벗어난 수많은 창의적 리더들이 많다. 그럼 공교육은 창의성을 말살하는 존재인가? 규율을 강조하는 지금의 학교문화는 바뀌어야한다. 그리고 창의성을 길러내는 교육이 이뤄져야한다. 그렇다고 공교육을 받지 않는 것이 창의성을 기르는 길이 될 수는 없다. 초기 과학적 축적이 적을 때는 공교육을 통하지 않고 창의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이 과학이 고도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교육을 통하지 않고 고도의 과학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더욱이 아인슈타인이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에 떨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단편적 과학사에 대한 이해에서 기인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공부를 잘했으며, 아버지 사업의 실패로 갑자기 전학을 하면서 벌어진 일들을 공부를 못한 아인슈타인이 탁월한 천재과학자가 되었다는 신화를 만드는데 이용했을 뿐이다. 하루아침에 로마제국이 완성되지 않는다는점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번즈는 법제도를 통해 투쟁을 억제하는 것은 진정한 리더십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일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반드시 맞는 말을 아니다. 조선의 왕들 중에서는 안정된 제도에서 왕이 된자가 현명치 못한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왕이 연산군이다 그는 적장자로서 세자교육도 제대로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선 최대의 폭군이되었다. 수많은 신하를 죽였으며, 갖가지 음행을 일삼았다. 그런데, 변칙으로 왕이 되었음에도 최대의 성군이 되경우도 있다. 바로 세종이다. 적장자 계승이라는 원칙을 벗어던지고 왕의 세번째 아들 충령이 왕이되었다. 그가 조선의 명군이되었다. 변칙이 정법을 때로는 뛰어넘기도 한다.

 

4. 변혁적 리더십!!

  이 책에서는 변혁적 리더십을 강조한다. 수에즈 운하로 성공한 레셉스는 파나마 운하에 도전한다. 과거의 성공에 취한 레셉스는 수에즈 운하의 경험을 그대로 파나마 운하에 적용한 것이다. 지형이 전혀다른 두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과거의 성공에 취해서 자신의 앞날을 파멸에 몰아넣은 것이다. 수에즈 운하로 인해서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고, 레셉스는 교만에 마져 파멸하고 말았다. 레셉스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했다. 문제 상황만 보지 않고 심층적, 근본적 요구에 반응하여 해결책을 추구해야만 했다. 변화를 추구해야만 성공에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얼마나 변화를 싫어하는 자들이 많은가? 변화하는 수업환경 속에서 앞으로는 학생중심의 수업을 해야한다는 전달연수를 교육청에서 진행한 적이있다. 그런데, 나이든 어느 역사교사가 '나처럼 나이 많은 사람이 해서 뭐하겠어! 젊은 사람들이 해얗지. 나 같은 사람은 몇년있다가 명퇴해야지'라는 말을 했다. 나는 그 교사에게 '그럼 빨리 명퇴하시죠. 지금 당장'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변화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되풀이하려고만하는 퇴물들과 같이 일을 해야만하는 자는 무척 고통스럽다.

  변혁적 리더십은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 움직인다. 즉 준거의 틀이 그들의 욕구에 부합될 때만 변화는 가능한 것이다. 번즈는 리더십은 혼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학교에서는 리더십만 강조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지도자보다 수많은 팔로우 즉, 추종자가 있다. 리더가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팔로우들이 있어야한다. 그리고 팔로우들을 리더는 각성시키기 위해서 노력해야하며, 팔로우가 때로는 리더가 되거나 리더에게 영감을 주어야한다. 그 대표적 예가, 촛불혁명일 것이다. 처음에는 탄핵에 주저하던 국회의원들이 촛불의 힘을 깨닫고 나서는 탄핵에 동조했다. 이것이 촛불혁명의 서막이었다. 리더없는 시위가 사회를 변혁하고, 국회위원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했다. 리더십의 역설일 것이다.

 

5. 진정한 가치 무엇인가?

  '신의 의지'를 믿으며 통치술을 발휘했던 사람이 있다. 바로 펠리페 2세이다. 그는 과학적 사고보다는 신의 의지를 믿었다. 그리고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에게 그의 무적함대는 괴멸되고 만다. 맹복적인 믿음은 시야를 좁힌다. 이렇게 시야를 좁히는 경우는 503도 만찬가지 일 것이다.

  그럼 어떠한 믿음, 혹은 가치가 참다운 리더십발휘에 도움이 될까? 번즈는 '힘을 실어주는 가치'를 제시한다. 즉, 가치가 강할수록 지도자들에게 강력한 힘이 실린다는 말이다. 최근에 읽은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공통의 이야기는 사피엔스를 강하게 만든다. 네안데르탈인보다 강할 것이 없는 사피엔스가 그들을 박멸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은 공통의 이야기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이용해서 대중을 조직화할 수 있었다. 조직화되지 않은 대중의 혁명은 번번히 납치당한다. 강한 가치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도록 대중을 하나로 뭉치게한다.

  이러한 가치나 사상은 행복을 생산해낼 수 있을 때만 무기로서 효과를 지닐 수 있다. 번즈는 최고의 가치를 '행복'에 두고 있다. 책의 곳곳에 자신의 아이들 키우면서 터득했던 지혜를 리더십에 적용해서 설명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가정적인 남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의 행복을 느끼며 그 행복이라는 가치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교조화된 사상이 아니라면, 행복을 생산하는 가치라면 그 가치는 충분히 무기로서 효과를 지닐 것이다.

 

6. 대중과 리더와의 관계는?

  번즈는 힘은 그 힘에 지배 받는 사람들이 그 힘의 정당성을 인정할 때 강해진다. 라고 지적한다. 물리적 힘보다 강한 것은 사람들의 동기라는 지적이다. 한사람이 부처님을 찾아와서 욕을 퍼부었지만, 부처님은 주인의 음식을 손님이 거절하면 그 음식은 주인의 것이라는 예화를 들려주며 자신은 그욕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생각난다. 지배자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우리가 그 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강자를 강하게 만드는 것은 약자의 굴욕 때문이다. 이점을 우리가 명심한다면 독재자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렇기에 탁월한 리더는 팔로우들이 따라오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이책에서 많이 예로든는 루즈벨트는 협력자로 민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과 서로 힘을 실어주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503이 방향 없는 선구자가 되려했다면 mon은 협력자가 되려하는 현실을 바라보며 과연 어느 리더십이 우리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리더십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번즈는 변혁적 리더십은 행복을 추구하는 기회를 확대해야한다고 강조하며 글을 마치고 있다. 그리고 지구상의 절대빈곤을 지적하며 이를 해결할 리더십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리더십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이책의 서문을 열었던 번즈! 그는 진정한 리더십이 해결해야할 과제를 인류복지 증진(행복)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지구상의 많은 인류가 빈곤에 시달리리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그의 글에서 대학자 다운 풍모가 풍겨나온다.

  다시 추천글로 가자! 그럼 추천글을 쓴사람들 중에서 진정한 리더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러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이 추천글에는 존재하는가?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절대빈곤에 시달리는 지구의 시민들을 구원할 자가 과연 그들중에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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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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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를 읽고 많은 충격을 받았다. 역사를 바라보는 신선한 충격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의 신작 '호모데우스'도 나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분량을 생각해서 천천히 읽으려 했으나, 아는 분이 자신이 책을 샀다며 나에게 떠 넘기듯이 빌려주었다. 빌린 책이라 소중히 읽고 돌려주려, 책표지도 종이로 깜싸고 열심히 읽었다. 식탁위해서 읽던중 막내가 책에서 낙서를 했다. 막내아이를 혼내면서도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읽는 내내 방대한 내용의 글을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는 유발 하라리의 내공에 감탄했다. '호모 데우스'는 과연 '사피엔스'의 아성을 넘어 미래 나갈 수 있을까?

 

1. 사피엔스의 후속작

  '사피엔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호모 데우스'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전작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라는 사람의 역사관을 처음 접했을 때는 그의 탁월한 식견에 새삼 놀랐다. 그러나 '사피엔스'의 충격 덕분에 '호모 데우스'에서의 충격은 예상되었고, 전작만큼의 충격을 안겨주시는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절대, '호모 데우스'가 전작만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사피엔스'를 출간하고 한국에 온 유발 하라리는 한국 독자들로부터 미래 사회에 대한 집중적인 질문을 받았다. 이세돌이 알파고에게 4:1로 패한 상황이라 우리들의 충격은 상당했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예상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다. 아마도 이때부터 사피엔스가 멸종하고 '호모 데우스'의 시대가 올 것을 예상하고 집필준비에 들어간 것 같다. 위대한 질문이 있어야, 위대한 작품이 있는 법이니까....

  이 책은 탁월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한다. 기존의 질병과 전쟁을 극복한 사피엔스는 평화를 쟁취했다. 그 다음은 신이 되려는 도전을 하게 된다. 제1부와 제2부는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떠나서 네안데르탈인을 박멸하고 지구의 주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이러한 사피엔스의 무기는 탁월한 스토리텔러라는 것이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창조해 냈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이 올라선다. 바로 인본주의 혁명이다. 그런데, 사피엔스가 발전시키는 과학은 사피엔스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다. 바로 인본주의가 흔들린다. 사피엔스의 가치는 떨어지고, 업그래이드된 새로운 인류가 탄생할 것이다. 바로 신이된 인간! '호모 데우스'의 출현이다. 오지 않은 미래를 하라리는 냉혹하게 직시하고 있다. 그는 최신 과학에 기초해서 자신이 생각해는 미래사회를 그려나갔다. 너무 비관적으로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사회에서 모순을 치유하면 새로운 형태의 모순이 나타나거나 발견된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류는 도전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사피엔스는 호모 데우스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될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알고리즘에게 사육될 수도 있다.

 

2.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하는 이유는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유발 하라리는 지적하고 있다. 유발 하라리는 미래를 말하는데 과거에서 부터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느 철없는 정치인이, 과거에 얽매이면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역사에 무지한자들이 보통 이런말을 한다. 이들에 대해서 하라리는 '과거에서 해방되어 다른 운명을 상상하기 위해서'라도 역사를 공부해야한다고 일갈한다. 과거를 직시하지 않고 어떻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겠는가? 과거 수구 세력이 역사쿠데타를 일으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독재를 미화하려했다. 역사가 미래를 설계재료이기에 자신들의 과거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면 미래를 보지 못한다고 말하는 정치인들은 역사의 힘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가 과거를 망각하길 바라는 것일까?

  유발 하라리는 과거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역사를 직시한다.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인간들이 종교에 대한 비판을 터부시한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종교를 냉혹하게 해부한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셈족 언어에서 '이브'는 '뱀' 혹은 '암컷뱀'을 뜻한다. 즉, 인간은 파충류에서 진화했으며, 그 애니미즘의 흔적이 이브의 이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자신이 파충류에서 진화했음을 깨달을 때, 신의 권능은 부정되고 사피엔스가 만들어낸 스토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신이 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었다는 믿음을 갖는 순간 사피엔스는 신에 복종하게 된다. 그 복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인류는 지금도 중세사회에 살았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하지만 일신론자들은 죽는 날까지 이런 유아적 망상을 붙들고 산다.'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아도취에 빠져있다고 일신론자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유발 하라리!! 유대인인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니다. 예루살렘 히브리대학교수인 그가 동료 유대인들에게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게 일신교인 유대교를 벗어난 말들을 그의 책에 쓴 것이다. 이때 '그럼 유발 하라리는 유대교도가 아니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유발 하라리가 지적했듯이 사피엔스는 진화론을 가르치면서도 교회에 나가 회계를 하기도 하는 존재이니, 일신교를 비판하면서 유대교를 믿을 수는 있을 수도 있다.

  하라리는 이슬람교, 유대교, 자유주의, 공산주의도 일종의 종교라고 단언한다. '사피엔스'에서도 지적했듯이, 유발 하라리는 종교의 개념을 확장한다. 종교의 일반적인 의미를 뛰어 넘어 종교의 속성을 가진, 신이 없는 종교인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인본주의까지도 종교로 본다. 즉, 우리가 신념이라 믿는 것들이 사실은 종교와 같은 속성을 지닌다. 이 벽을 뛰어 넘어야 그 넘어를 볼 수 있다. 많은 자들이 그 벽앞에서 주저한다. 그 벽을 뛰어 넘었을 경우 자신이 감당해야할 따가운 눈총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유발 하라리는 그 벽을 무시한다. '무문관'!! 벽을 벽으로 보지 않으면 벽은 더이상 벽이 아닌 것이다.

  과거라는 벽에 갖혀 고생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잔디씨 모아오기'가 있었다. 내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는 학생들을 운동장 풀뽑기 부터 시작해서 각종 잡일에 동원했다. 그 중에서 '잔디씨 모아오기'는 정말 지겨운 노동이었다. 편지봉투 하나를 채워오기 위해서 우리들은 풀밭을 헤매야했다. 그런데, 그 잔디를 심어야한다는 '미의식'은 유럽 중세말 귀족의 부와 사치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서양도 처음에는 잔디를 키우지 않았다. 물론 우리도 마당에 잔디를 키우지 않았다. 마당은 고추를 말리고 잔치를 벌이는 등의 다용도 장소였다. 잔디는 무덤에나 있는 풀이었다. 그런데 잔디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동력, 재력이 필요하다. 잔디를 키우는 것은 부르주아의 부와 사치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세말!! 유럽 부르주아의 미의식이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을 구속했다. 과거를 직시하니, 서구의 족쇄에 묶여 괴로워했던 나 자신이 측은해보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직시하지 않는다. 공식보고서가 객관적 실체와 충돌하면 객관적 실체가 물러나야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문화대혁명의 비극이 그렇고, 우리 주변에서 만들어졌던 가짜문서들이 그 예이다. 예전에 하지도 않은 일들을 한 것처럼 문서를 적어달라는 듯한 요구를 거절했을 때, '다들 아무말 하지 않는데 왜? 문제를 제기하는 거야!'라는 듯한 눈총을 받았다. 그러나 당당한 나의 주장을 관철했다. 가짜 문서를 줄이는 것도 역사의 진보를 이루는 한걸음일 것이다.

 

3. 알을 깨고 나오다.

  유발 하라리의 거대 담론 속에서 가을걷지 후에 떨어진 낱알 처럼, 수많은 깨달음의 낱알들이 이 책에서 흩어져있다. 특히 한국 독자들을 배려하기 위해서 치밀하게 배치한 듯한 인상을 주는 한국에 대한 다양한 예시들과 한국 독자를 위한 머릿글들은 흩어진 낱알을 줍는데 많은 즐거움을 주었다.

  '조직력이 없는 군중의 혁명은 납치 당한다.'라는 탁월한 지적은 나의 가슴에서 화살을 맞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루마니아인들이 차우셰스쿠를 몰아냈던 부쿠레슈티 광장 시위는 납치당했다. 2011년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 혁명도 납치당했다. 그 뿐인가? 4.19혁명도 87년 6월 민주 항쟁도 납치당했다. 혁명의 피를 흘린 학생들은 권력을 잡지 못했으며, 보수세력이 조직화된 힘을 이용해서 집권했다. 혁명은 납치 당했고 그 혁명의 결실을 되찾기 위해서 수많은 민주화 투사들이 다시 투쟁해야했다. 그러나 우리의 '촛불혁명'은 달라야한다. 조직화되지 않은 촛불 시민들이 혁명의 결실을 맺고 그 열매를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과거의 낡은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나와야한다.

  우리 주변의 소위 배웠다는 식자들 중에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민족을 외치면 마치 '나치'를 보는 것과 같은 눈빛을 보내고, 탈민족을 말해야 유식하고 깨어있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런데, 유발 하라리는 나치즘을 진화론적 민족주의의 극단적인 한형태로 규정한다. 그는 아우슈비츠는 피로물든 붉은 신호등이라고 규정하고 그 가치를 부정해서는 않된다고 말하고 있다. 인본주의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듯이, 민족주의에도 다양한 갈래가 있다. 나가 말하고 싶은 민족주의는 '개방적 민족주의'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를 극단적인 '혈연적 민족주의' 혹은 '진화론적 민족주의'로 규정한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전체주의로 흐를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가 '진화론적 민족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붉은 신호등'을 직시해야하지만, 그렇다고 '민족주의'의 가치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서구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 시민혁명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래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에 국가주의라는 뜻과 민족주의라는 뜻이 혼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고대부터 있었다. '삼한일통'이라는 말을 궂이 말할 필요가 없다. 서구의 관념에 매몰되어 자신을 바로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한다.

  서구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못난 모습은 심리학에도 나타난다. 'WEIRD(Western Educated Industrialised Rich Democratic)가 사회심리학 학술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즉,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에 실린 논문들에서 표본으로 추출한 개인들의 96%가 WEIRD였다. 그리고 68%는 미국인이었다. '미국 심리학과 학생들의 성격 및 사회심리학지'로 학술지 이름을 바꾸자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심리학 학술지의 서구중심주의 그중에서도 미국중심주의는 심각했다. 그리고 그 연구결과를 보편적인 사피엔스의 심리라고 우리는 믿고 배웠던 것이다. 나 자신을 바로볼 때 우리는 서구에 의해서 덧씌워진 가면을 벗고 자신을 직시할 수 있다.  

 

4. 그러나 동의하지 못하는 의문들!!

  유발 하라리의 탁월한 혜안에 많은 감탄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라리의 주장에 마냥 동의만을 할 수는 없다. 유발 하라리는 임제스님의 '살불살조'를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히 서양의 문화와 역사에만 시야가 국한되지 않은 연구자이다. 광범위한 지식을 섭렵한 그는 '논어', '성경', '꾸란'은 더 이상 창조의 원천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과연!! 그럴까? 잡스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애플이 있다.'라고 말을 했고, 그 이후 기업에서 주도하는 인문학 열품이 시작되었다. 인문학이 바로 창조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CEO가 논어를 읽고, 소위 고전이라고 불리는 책들을 전문 연구자들의 강의를 들으며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려 노력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그런데, 유발 하라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전중의 고전인, '논어'와 같은 경전들이 더이상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점이 나와 유발 하라리의 관점이 갈리는 지점이다. 잡스가 지적했듯이 기술은 인문학을 만나야 창조적인 작품이 만들어진다. 미래의 창의성은 과학이 인문학과 만나야 그 바른길을 벗어나지 않고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21세기 진보의 열차가 떠나가는데 '이슬람의 과격파가 훨씬 나뿐 처지'에 처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펼쳐지고 있는 과학기술의 진보를 따라잡지 못하고 우리사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유발 하라리의 주장은 일면 타당한 면도 있으나,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한다. IS를 비롯한 이슬람 과격파들도 진화하기 때문이다. IS는 트위터와 페이스북, 인터넷 유튜브를 비롯한 21세기의 과학기술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이 맹위를 떨치는 이유는 첨단 기기를 이용해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소외와 분노를 자신의 목적달성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진화하듯이 그들도 진화한다. 그리고 우리사회의 모순이 심화될 수록 그들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5. 잡상

  2015년 레바논에서 탈출한 팔레스타인 난민 소녀'림'이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남들은 인생을 즐길 수 있는데 나는 그럴 수 없는 것이 정말 힘들다. 앞날이 캄캄하다.'고 말하자, 메르켈 총리는 "정치는 어려운 일"이라고 대답한 뒤, 독일이 수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여론은 그녀를 냉정하다며 비난했다. 그러자 메르켈은 수십만 명의 난민을 독링로 불러들였고, 이것은 독일의 이슬람화가 확산된다는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럼 메르켈은 이 소녀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했을까? '림'이라는 소녀의 질문이 우리에게 의미있는 것은 그녀의 질문은 '헬조선'을 외치며 이민을 꿈꾸는 우리 청년들의 아우성과도 상통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 국정농단 세력이 활개를 치던시기 너도 나도 이민을 꿈꿨다. 너도 나도 대한민국을 떠난다면 대한민국은 빈껍데기만 남게된다. 회피하며 도망친 곳에 천국이란 없다.!! 그렇게 이민간 사람 중의 상당수는 또다른 천국을 꿈꾸며 다시 도피처를 찾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땅을 천국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에도 천국이란 없다. 내가 레바논에서 탈출한 '림'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당신의 공동체를 개혁하는 것은 그 공동체 구성원의 의무이다. 당신은 그것을 해야한다. 이땅에 천국을 건설하지 못한다면! 내가 살아가는 곳을 개혁하지 못한다면, 그 어느 곳도 천국일 수 없다. 라고 외칠 것이다.

  데이터교를 신봉하는 많은 사람들은 '공유되지 못하면 가치가 없다. 자기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라고 외친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 이를 페이스북에 올리는 모습에서 '데이터 교도'의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예전에 나는 이러한 모습들을 '립스틱 효과'로 설명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젊은 세대들이 자신이 남들에게 보여줄 것은 맛있는 음식들 뿐이다. 열광적으로 음식사진을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니 그 음식들을 페이스북에 올리면서 자기만족이라도 해야되지 않겠나... 그런데 유발 하라리는 이를 '데이터 교도'의 의식을 해석하고 있다. 공유되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젊은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안에 늘어나는 데이터 교도들의 민낯을 보게 된다.

 

5. 현대를 읽는 키워드 인본주의!!

  신을 쫓아낸 사피엔스는 자신 주인이라 주장한다. 자신이 느끼는 것이 정답이다. 아름다움이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 고객은 항상 옳다. 스스로 생각해라,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 라는 말들이 인본주의에 기초한 생각들이다. 현대의 경제, 예술, 정치, 사상의 핵심에 인본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인본주의에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라'라는 말은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기도 했다. 그의 책 '다상담'에서 그가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바로 '인본주의'였다. 강신주의 근대 문명의 충실한 실현자였던 것이다. 딸이있고 남편이 있는 여성이, 행복한 가정을 이뤘는데도 다른 남자 둘을 더 만나고 있다는 상담을 하자, 강신주는 그녀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녀를 옹호하는 말들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강신주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책에서 강신주를 이해하는 마스터키를 얻었다. 그는 충실한 인본주의자 였다. 강신주도 현대사회의 틀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였던 것이다.

 

6. 호모 데우스의 미래

  인간을 업그레이드하려는 노력은 인조인간 만들기에 돌입할것이라 한다. 무기물이 유기물로 대체된다. 여기에서 나는 혼란이 생겼다. 그럼, 그 무기물을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인간을 뜻하는 '호모'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까? 유기물과 무기물의 경계가 사라지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유발 하라리가 말하고 있는 미래는 우리의 관념을 뛰어 넘는다. 그는 현대를 종착지로 보지 않는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현재를 종착역으로 가정하고 과거의 역사를 현재 종착역을 향해서 달려오는 기차로 설정한다. 사피엔스가 신을 쫓아내고 인본주의를 종교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러나 이 것은 역사의 종착역이 아니다. 인본주의는 깨질 수 있는 또하나의 신화일 뿐이었다. 유발 하라리는 새로운 불평등이 도래할 것을 예언한다. 사람 하나하나가 군사 자원이며, 귀중한 소비자였기에 인본주의라는 종교는 확고히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사피엔스는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사피엔스를 위해서 발전시킨 과학기술 덕분에 사피엔스는 스스로를 절멸 시킬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 정부에게 구슬을 받고 섬과 나라를 팔았던 인디언들 처럼 우리고 이메일 서비스와 웃긴 동여상을 제공 받는 댓가로 우리의 소중한 생체정보와 개인정보 데이터를 첨단 기술 기업가에게 넘기고 있다. 이것을 막을 대안이없다. 나부터 이메일과 전자기기를 쓰지 않는다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딜레마 속에서 우리의 암울한 미래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어가고 있다.

  로봇쥐 실험은 더욱 충격적이다. 쥐의 뇌에 전기적 자극을 통해서 리모콘으로 쥐를 마음데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게도 똑 같이 적용될 수 있다. 소심한 기자가 헬맷을 쓰자 탁월한 스나이퍼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그리 기뻐할 만한 사실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을 강화시키고, 그 강화시킨 능력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며 다시한번 자신을 강화시키는 헬맷을 써보기를 열망하는 기자의 모습에서 자신이 타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속에 달려드는 불나방이 떠오른다.

  유발 하라리는 이러한 미래가 인간을 업그레이드하기 보다는 다운그레이드할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을 업그래에드해서 호모 데우스 즉 신으로 만들 것이라는 주장과는 달리 시스템에 의해서 인간은 사육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드로이드 딕의 개발자가 인공지능 로봇에게 “로봇이 세계를 지배할 날이 올거라고 믿는가?”라고 묻자, “오늘 굵직한 질문들을 많이 던지시는군요. 하지만 당신은 나의 친구니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내가 터미네이터로 변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좋게 대해드릴테니까요. 제가 하루종일 감시하고 관찰할 수 있는 ‘인간 동물원’에 편하고 안전하게 생활할 수 있게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는 웃어 넘길 수 없는 현실이다. 이미 업그래이된 호모 데우스에게 기존의 사피엔스들은 귀찮은 존재들이다. 그들을 다운그래에드한다면 그들을 '인간 동물원'에서 사육하며 안락하게 살 수도 있다. 아니 인공지능을 가진 그들에 의해서 사육될 수도 있겠지....

  유발하라리는 '데이터교는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모든 동물들에게 했던 일을 호모 사피엔스에게 할것'이라 주장한다. 마치 동물을 먹는 인간을 본 외계인이 인간을 먹으면 안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호모 데우스'라는 책을 읽기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 모두가 호모 데우스가 되는 이상적인 미래사회에 대한 예견이 펼쳐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마치 이 책에서 소개된 '사이보그1,2'영화를 보는 듯했다. 암울한 미래가 우리의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듯이 아직 미래는 오지 않았다. 다양한 시나리오 중에서 유발 하라리는 하나를 제시했을 뿐이다. 우리의 미래가 어찌 전개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오늘 미래를 소재로한 SF영화를 보며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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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 속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10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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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삶은 역사적 결과물들 속에서 이뤄어지는 이야기들이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물건들은 누군가의 역사적 산물이다. 그러하기에 역사는 수업시간에 스토리 텔링의 소재이며, 처음 만나는 사람과 어색함을 깨뜨리기 위한 좋은 도구이다. 세계사를 가르치며 다양한 스토리텔링의 소재들을 수집해왔다. 나름의 소재를 쌓아오면서 더 다양한 소재들을 찾던중에 '옷장 속의 세계사'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영숙이라는 국어교사가 쓴 책이 미덥지는 않아보였지만, 읽기에는 좋을 것으로 보였다. 과연 나의 걱정을 이 책을 얼마나 덜어주었을까?

 

1. 이미 익숙히 알고 있었던 내용들

  이 책은 청소년들을 상대로 만들어낸 책이다. 눈높이가 청소년에 맞춰져 있기에 대부분의 소재들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내용들이다. 금광열풍이 만들어낸 청바지, 동서교역을 가능케한 비단, 1차세계대전의 산물 트랜치코트, 핵실험에 경종을 울린 비키니 등등.... 비교적 잘 알려진 내용들이었으며, 세계사 수업시간에 많이 설명하던 소재들이다. 특히 비단은 시험문제에도 잘나오는 소재라서 두말할 필요가 없다. 다소 식상할뻔했던 이 책은 옷과 옷감이라는 소재를 이용해서 세계사를 아울러 서술했다. 국어교사의 글솜씨가 쉬운 세계사 이해에 도움을 주었기에 나름 의미 있어 보였다. 이를 뒤집어 본다면 청소년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쉬운 수준의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 역사와 옷을 보다 밀접하게 설명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 소재

벨벳 혁명을 설명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벨벳 혁명'을 바츨라프 하벨이 왜? '벨벳'이라 명명했는지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것은 벨벳이라는 소재와 세계사의 관련성을 약화시키는 빌미로 다가왔다. 부드러우면서도 고급스러운 벨벳의 감촉을 비유해서 '벨벳 혁명'이라 불렀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저자가 이부분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 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넥타이와 양복'이라는 주제도 세계사의 관련성이 높아보이지 않았다. 이들이 넥타이를 맷다고 이를 '옷장속의 세계사'의 한 주제로 삼은 것은 좀 무리가 있어보인다. '마녀의 옷'이라는 제목으로 잔다르크를 설명했으나, 그녀의 복장과 '마녀의 옷'이라는 제목은 관련성이 강하게 서술되어 있지 않았다. '바틱'이라는 주제는 도입부에 '바틱'에 대해서 설명을 할 뿐, '바틱'이라는 옷감이 인도네시아의 역사와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너무도 약했다. 억지춘향의 느낌이 강했다.

 

  세계사에 관한 재미있는 책들이 과히 많다고 할 수 없는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는데 의미가 커보인다. 역사에서 스토리텔링의 소재를 찾는 사람들이나, 세계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청소년들이 읽는다면 더 없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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