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글이 누나 사계절 아동문고 65
권영상 지음, 허구 그림 / 사계절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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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습관은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 텐데 내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앞표지를 보고 뒤표지를 보고 작가 소개를 보고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까지 모두 읽는다. 그 중 하나라도 빼먹으면 괜히 책을 다 읽은 것 같지 않은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괜한 강박관념일지도 모르겠다. 글쓴이의 말을 읽으면 책을 읽기 전에 마음을 다잡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나의 어린 시절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한 줄 때문에 읽는 내내 착각을 했다. 이건 작가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 것이구나하고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래도 이건 소설이잖아'하며 사실적인 사건을 뼈대로 허구적 요소를 집어 넣은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야 했다. 왜 다른 자전적 소설과는 다르게 이 책은 자꾸 작가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일까. 이유를 모르겠다.

책에서는 시대를 구체적 숫자로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한국전쟁이 난 지 10년이 넘었다는 것에서 60년대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 당시의 농촌 생활이야 뻔하다. 모두 힘들고 신산하게 사는 삶.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보다 더 인간적이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글쎄...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철 없는 소리한다고 한심해 할지 모르겠으나 지금이라고 그때의 문제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니까. 단지 나아진 것이 있다면 먹고 지내는 것에서 확실한 발전을 한 점이라고나할까... 나도 시골에서 자랐지만 이 보다는 훨씬 뒤에 자랐으니 책 속의 상황에 모두 공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 어린 시절도 하나씩 떠올라서 살며시 입꼬리가 올라가기도 했다.

지금은 여름에 너도나도 달려가는 경포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무슨 안 좋은 일만 생겼다 하면 머리 식히러 도피하는 단골 명소가 바로 강릉이나 속초다. 그런 경포대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동경의 장소이며 관광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기도 처음에는 그저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평범한 마을일 뿐이었다는 것을 이 책이 상기시켜 준다. 처음으로 경포대를 관광지로 만들면서 기차를 놓던 시절이 바로 주인공이 자란 시절이란다. 이렇게 또 나는 내 위주로 상황을 판단하는 우를 범한다. 지금은 대관령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다니지만(오히려 한계령이나 미시령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고개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될 정도다.) 이 때만 해도 대관령은 교류를 막는 거대한 고개였다는 것이 새삼 신기하게 느껴진다. 넘을 수 없는, 문명과 가까이 갈 수 없는 벽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문명과 거리가 먼 시골에서 그래도 끼니 걱정 없이 그럭저럭 초등학교를 다니는 주인공은 이제 5학년이다. 그러나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 마저 병이 나서 병원에 입원한다. 게다가 주인공의 형은 어려서 시력을 잃어 학교도 못 다니고 있다. 결국 중학교에 다니던 맏이인 누나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도맡는다. 열 다섯, 열 여섯 살의 나이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하긴 닥치면 어떻게든 되게 마련이긴 하겠지만 지금의 그 또래 아이들을 보면 둥글이 누나가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떠안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래도 주인공인 '나'는 누나의 보살핌으로 천진하고 나름대로 즐거운 시절을 보낸다. 누나가 업어 줄 때는 도대체 몇 살이길래 업어줄까 궁금했다. 나중에 보니 5학년이란다. 그런데도 누나에게 업히다니... 누나인 내 입장에서 보니 왜 그리 얄미운지 모르겠다. 누나는 입원한 엄마와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서 온갖 궂은 일을 다 하는데도 도와주지는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도 너무 얄미웠다. 그래도 둥글이 누나는 일 시키지 않고 정말 어른인 양 동생들을 돌본다. 그 시절에는 이런 일이 흔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대개 딸은 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장남은 공부시키는 모습.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 장남이 공부를 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그 역할을 주인공인 신해가 하게 된 것이다.

둥글이 누나는 집안 일 뿐만 아니라 논일과 밭일까지 모두 하고 나중에는 양계장까지 한다. 물론 그 양계장은 돈을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첫째 동생인 시구의 희망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시작한 것이겠지.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고자... 그래서 병아리 돌보고 모이 주는 것도 신구에게 일임을 한 것일 터다. 주인공 신해는 서울에서 포도농사를 짓기 위해 온 경섭이 아저씨에게 많은 것을 배운다. 왜 항상 시골에 서울 사람이 오면 그 사람의 역할은 모두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 더 넓은 곳으로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길을 터 주고... 하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시대였으니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에게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모두 같은 시간 속에서 살지만 그 당시만 해도 물리적 시간은 같았어도 논리적 시간은 같지 않았겠지.

뒤에 남은 책장이 줄어드는데도 병아리 키우는 일이 잘못되었다느니 엄마의 병세가 악화되었다느니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아마도 작가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결말에 연연했을 것이다.(그래도 이건 소설인데...) 비록 둥글이 누나는 이상적인 방향인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지만 엄마도 퇴원하고 졸업식에서 선생님께 받은 희망나무인 호두나무도 잘 자라고 형도 삶의 빛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책을 가벼운 마음으로 덮을 수 있었다. 과연 그 후에 그들의 삶은 어땠을까. 무척 궁금하다.

성장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의 변화를 겪는 아이들의 심리나 상황을 다루었다기 보다는 가족애를 다룬 듯한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어려웠던 시절을 가족이 같이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회상하며 형과 누나에 대한 미안함에서 벗어난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의 아이들은 이 책을 읽으며 이해도 안 가고 공감도 안 되겠지만 그것도 지금과 연결선 상에 있는 생활 모습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의 아이들도 반드시 알고 지나야 할 생활모습인 것이다. 어찌보면 어른들이 더 좋아할 책이 아닌가 싶다.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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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기젤라 풀빛 그림 아이 36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 글 그림, 김경연 옮김 / 풀빛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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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말고 아이가 '내 그럴 줄 알았어.'하고 소리친다. 무슨 얘긴가 했더니 <브루노를 위한 책>에 나오는 여자와 여기 나오는 기젤라가 똑같아서 지은이를 보았더니 역시나 같은 사람이었단다. 물론 올라와 기젤라가 똑같지는 않다. 단지 분위기가 비슷할 뿐... 그래도 이제 2학년이, 그것도 그림과는 거의 남이다시피한 아이가 그런 것을 눈치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견하던지...(고슴도치 엄마라고 놀려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중간에 글이 많은 부분은 건너뛴다. 그럼 그렇지. 그러더니 저녁에 읽어달란다.

니콜라우스 하이델바흐의 책은(비록 두 권 밖에 못 보았지만) 특성이 있다. 환상으로 떠난다는 점이야 많은 어린이책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새삼스러울 것이 없고... 내가 느꼈던 특성은 두 페이지에 걸쳐서 커다랗게 나오는 그림과 짧은 글로 인해 독자에게 상상할 시간을 충분히 준다는 점이다. 그림이 커다랗게 나올 때면 대체로 글이 얼마 없다. 그러나 그림이 작아지면 다시 글이 많아진다. <브루노를 위한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초반에는 이 많은 글을 어찌 읽어주나 걱정했는데 중간 부분부터는 글이 없고 그림으로만 전개되어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반대로 이번 책은 초반에 글이 얼마 없기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림에 심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글이 많아져서 당황했다. 

책을 읽는 내내 상당히 헷갈렸다. 이게 도대체 딸과 단둘이 여행을 떠난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맞는 건지, 아니면 낮에 부녀가 놀았던, 아니면 다음날 놀 것을 이야기 속에 버무려서 미리 암시를 해주는 것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도 그럴것이 여행 간 곳의 배경과 이야기 속에서 기젤라가 있는 곳 배경이 동일하니 그럴 수밖에. 어쨌든 아빠와 딸은 다른 식구들은 남겨두고 둘만 여행을 떠난다. 이 집에는 아마도 아이들이 많은가보다. 창문에 비치는 모습으로 보아 주인공까지 포함해서 5명은 되는가보다. 게다가 엄마는 어린 아기를 안고 있다. 아빠랑 둘이서 빨간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은 보기만해도 유쾌하고 즐겁다. 게다가 바닷가에 있는 커다란 호텔에서 묵었단다. 한쪽으로는 절벽이 펼쳐지고 기암괴석이 있으며 호텔 근처는 잔잔한 바다가 펼쳐진다. 아,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이며 가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초록색 풀밭이 끝없이 이어진 구릉은 또 어떤가.

둘은 정말 쉬기 위한 여행을 떠났나보다. 별 하는 일 없이 수영하고 뗏목에 누워 있고 밥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그야말로 기젤라 같은 생활을 한다. 저녁만 되면 아빠는 딸에게 이야기를 해준다. 그 이야기가 바로 여왕 기젤라에 대한 이야기다. 굉장히 부자인 기젤라는 바다로 여행을 떠났다가 폭풍우를 만나 어느 섬에 표류하는데 거기서 오히려 자신의 시중을 드는 미어캣을 만나게 된다. 사람이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했던가. 기젤라도 처음에는 고맙다는 말을 할 줄 아는 아이였지만 차츰차츰 절대적 권위를 누리게 되자 폭정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에는 미어캣 가죽으로 만든 비키니 수영복을 만들어 오라는 명령을 함으로써 자신의 몰락을 자초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몰락이었을까. 미어캣들이 기젤라를 바다에서 영원히 떠돌게 뗏목에 태워서(정확히 말하자면 묶어서) 바다로 보내지만 바다에 있는 기젤라의 모습은 신나보이기까지 한다. 멋진 노와 돛도 있고 왕관도 있으며 의자도 있다. 그리고 가장 다행스러운 것은 미어캣들이 떠나보낼 때는 분명 팔과 다리가 모두 묶인 듯이 보였지만 이제는 한쪽 팔이 자유롭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끈들의 역할도 무용지물인 셈이다. 사실 아이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기젤라가 꽁꽁 묶인 채로 바다로 떠밀렸다면 진짜 표류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런 모습이라면 현재의 생활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얘기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아니 은근히 미어캣의 행동에 찬성하고 그런 수난을 당한 걸 고소해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빠가 기젤라 이야기를 하는 내내 묵고 있는 호텔 주변에 있는 바위가 조그만 그림으로 계속 나온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기젤라가 바다로 떠나는 커다란 화면에서는 두 화면 가득한 그림 속에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그림책이란 이래서 쉬우면서도 어렵다. 읽는 이 마음대로 해석해도 되니 얼마나 쉬운가. 그러나 과연 내가 생각한 그게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기에 또한 어렵다. 여하튼 둘은 그렇게 신나는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온 식구가 나와서 기다리며 반겨주는 집으로 말이다. 아이는 읽고 나자 기젤라가 얄밉단다. 하지만 그 모습은 아직 자기 위주로 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바로 아이들의 모습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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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탓이 아니야, 책임에 대하여 모두가 친구 4
레이프 크리스티안손 지음, 딕 스텐베리 그림, 김상열 옮김 / 고래이야기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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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있다. 오죽하면 이런 속담까지 있을까. 그러고보면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고 자신은 살짝 빠져 나가는 것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닌가보다. 어른들도 오래전부터 그랬는데 하물며 아이들이야 어떻겠는가. 특히 아이가 학교에서 누군가와 문제가 있거나 선생님께 혼났을 경우 어른들은 일단 아이의 말 중에서 반만 믿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아이는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이야기하고 불리한 부분은 쏙 빼놓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 잘못이 없었는데 혼났다는 둥, 자신은 가만히 있었는데 다른 친구가 잘못해서 싸웠다는 둥 전적으로 자신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가 조금 자라니까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자신의 잘못은 대충 빨리 이야기하고 남의 잘못만 길게 부각시킨다. 그때 재빨리 아이의 잘못을 지적하면 마지못해 인정한다.

아이가 학교를 들어가게 되면 부모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 중 하나가 바로 혹시 자신의 아이가 왕따를 당하지나 않을까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아이가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지 아닌지를 살피기 전에 자신의 아이가 다른 아이를 왕따 시키는데 일조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살펴봐야한다. 물론 아이들이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별 악의를 갖지 않고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 비웃거나 상처주는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의가 없다고 괜찮다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알려줘야 한다. 간혹 집단 따돌림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면 가해자 부모들은 그럴 만하니까 그랬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만하다는 것은 누구 기준일까. 아마도 자신의 아이가 이야기하는 것만 듣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리라. 자기에게 유리한 말만 하는 아이 말을...

그러나 누군가가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을 때 네가 가서 친구가 되어주라고 내 아이에게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현실에서는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이런 문제들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야 커다란 죄의식이나 자각없이 한 행동일 경우도 있다. 그런 행동을 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어른들도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본다. 물론 당사자인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면 좋겠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내 아이에게 닥친 일이 아니라고 방관하는 어른들은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나도 거기에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행동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실은 이런 것이 더 무서운 것이다.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는 잘못들이...

개인적으로 이 책처럼 의도가 너무나 뻔하게 드러나는 책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읽고 나서 이런 책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동일한 군중들이 반복되고 그 중 한 아이만 나와서 자신의 입장을 변명하는 아주 단순한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분노와 좌절을 느낌과 동시에 나도 어떤 것을 해야만 할 것 같은 사명감을 느꼈다. 이제부터라도 아이들에게 나와 다르다고 남을 괴롭히거나 그것을 방관하는 일이 얼마나 나쁘고 부끄러운 일인가를 끊임없이 가르친다면 미래 사회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러기에 이런 책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 아이들이란 원래 선하다. 그러나 지금 선하다고 마냥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꾸준히 알려주고 바로잡아 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어른들의 몫이다. 그 어른의 몫을 이런 책을 읽히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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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 / 갈라파고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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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미 FTA 문제로 시끄럽다. 한때는 세계화를 외치지 않으면 혼자 도태되는 양 모두가 세계화를 외치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기업은 기업대로 정부는 정부대로... 거기에 따라 개인들은 이리 저리 휩쓸려 다녀야했다. 그러나 지금 그 세계화를 외친 결과는 무엇일까. 이제 경쟁상대가 나라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로 확대되었다는 것? 부자들은 더욱 부자가 되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없는 자들은 더욱 힘든 빈익빈 부익부만 심해졌을 뿐... 이제는 너무 상투적이고 뻔한 문제라서 이것을 거론하는 것조차 진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지구의 미래는 결코 밝지 않다.

당장 나와 관련 없는 문제들은 크게 관심 갖지 않고 피부에 와 닿지도 않는 것이 일반인이 살아가는 현실이다. 일례로 FTA를 반대하며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더라도 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람은 그냥 시위를 하는구나...라던가 불이익을 많이 당하겠구나 정도지 그들의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저 내가 사용하는 물건의 가격이 내려가면 반기는 것이 고작이다. 한 나라 안에서도 그럴진대 하물며 우리와 거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먼 아프리카나 서아시아의 기아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 없다. 나도 그들의 문제를 막연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뿐 감성적으로는 공감이 안 된다. 그렇게 먹을 게 없으면 다른 땅으로 이주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좀 더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 망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굶어 죽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얼마나 무지한 생각이었던지...

부르키나파소에서 개혁을 단행해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식량 문제를 해결했던 상카라의 예를 보며 희망을 보았고 뒤이어 그의 암살에서 절망을 보았다. 아무리 외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해도 그 구성원들의 노력이나 의식개혁 없이는 경제적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나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알고 있음에도 몇몇 개인이 자신의 욕심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보며(물론 주변의 강대국들이 상당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한심하기까지 했다. 왜 그 나라 국민들은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마도 국민들 의식이 깨어 있다면 적어도 어느 것이 정당한 것이며 옳은 것인지 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그러기에 교육은 무엇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많은 나라에서 기아를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고보니 환경문제 등은 많이 거론되고 있지만 기아 문제는 어쩌다 연례 행사로 나오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 같다. 그것도 항상 동일한 레파토리를 가지고 반복된다. 기아 하면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가 눈은 동그랗고 배는 볼록하며 다리는 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형상을 한 모습이 연상되니 말이다. 아마도 TV에서 주로 그런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겠지. 또한 저자는 기아에 대해 뜬구름 잡는 식의 정서적인 대응은 별 도움이 안된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나도 모호한 이상이나 현실과 동떨어진 인간애만 가지고 있을 뿐 구체적인 실태나 대응 방안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나 또한 그렇게 교육되어진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간혹 직접 행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부끄러움과 함께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인간애'는 가지고 있기에...

이 책은 2000년에 독일에서 출간된 책을 이번에 내놓은 책인데 마지막 부분에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어 마치 요즘에 씌어진 책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렇잖아도 요즘 세계화가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저자도 거기에 동참하는 셈이다. 책을 덮으며 안타까움과 분노, 그리고 무기력감을 느꼈다. 과연 이 시점에서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불행하게도 없어 보인다. 오로지 각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경제자립을 이루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싸워야 할 뿐이다. 그나마도 강대국들이나 다국적 기업들이 방해하면 쉽지 않지만 말이다. 그에 맞서기 위해서는 일단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배 부를 때 이야기다. 그러니 문제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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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18 22:04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지음, 유영미 옮김, 우석훈 해제, 주경복 부록/갈라파고스 2007년 11월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2007년 11월 8일 읽은 책이다. 관심분야의 책들 위주로 읽다가 알라딘 리뷰 선발 대회 때문에 선택하게 된 책인데, 이런 책을 읽을 수록 점점 내 관심분야가 달라져감을 느낀다. 총평 물질적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 책에서 언급하는 "기아의 진실"은 가히 충격적이다. 막연하게 못 사..
 
 
 
송이의 노란 우산 우리나라 그림동화 4
이철환 지음, 유기훈 그림 / 대교출판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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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아이들의 영악함에 놀라곤 한다. 반대로 순수함에 놀라는 경우도 있다. 어떤 때는 천사 같다가도 금방 악마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아이들이라는 생각을 종종한다. 어쩜 그렇게 잘 변할 수 있을까.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순수하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서 그런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렇게 믿고 싶다.

책을 펼치면 엄마와 송이의 모습이 오를 수 없는 거대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마치 독자가 아기가 되어 엄마와 송이를 올려다 보는 느낌이다. 그렇게 서서히 눈높이가 올라가고 나면 시장에서 장사하는 엄마 옆에서 소꿉놀이를 하는 송이가 보인다. 그 옆에는 때가 꼬질꼬질한 인형도 있다. 그러나 그림상으로는 예쁘기만 하다.

시장에는 채소할아버지가 있다. 할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폐인이 되어 장사도 안 하고 술만 먹고 아무데서나 잠을 잔다. 여자는 혼자 살아도 남자는 혼자 못 산다고 했던가. 물론 지금이야 남자들도 혼자 잘하고 살지만 이 할아버지 나이 정도만 되면 집안일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자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 할아버지의 행색이 오죽할까. 송이도 할아버지가 무섭기만 하다. 냄새까지 심하게 난다며 피한다.

그러나 할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은 후로 송이는 이제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다. 아니 걱정되기까지 한다. 비가 오는 데도 우산도 안 쓰고 맨 바닥에 쓰러져 잠자는 할아버지가 너무 안쓰럽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송이는 마음을 연다. 만약 송이가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면 과연 금방 마음을 열 수 있었을까. 무서워 하다가도 자신을 한번 도와주었다고 이처럼 마음이 쉽게 돌아서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가능했겠지.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을 아직 보지 않은 순수한 마음이었기에...

이제 할아버지는 외롭지 않을 것이다. 어렵게 모은 돈으로 송이에게 인형을 하나 사준다. 송이는 전에 가지고 놀던 인형과 할아버지가 새로 사 주신 인형을 나란히 앉혀 놓고 소꿉장난을 한다. 다정하게 앉아 있는 인형이 할아버지와 송이의 거리를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는 이제 무기력하고 의미없는 삶을 살진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제는 자신만의 생활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생활하시겠지. 둘은 서로에게 대단한 일을 해 준 것도 아닌데도 힘이 되어 주고 있다. 생활이란 이런 것이리라. 별것 아닌 것에도 힘을 얻고 삶의 가치를 깨닫는 것...

제목이 <영이의 비닐 우산>과 아주 흡사하다. 그 책은 투박한 유화로 진하게 그려진 반면 이 책은 파스텔 느낌이 나는 은은한 색채다. 주제도 비슷하다. 할아버지와 아이의 말 없는 소통...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영이의 비닐 우산>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커다란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저 잔잔한 여운과 훈훈함을 느끼는 그런 이야기라고나 할까. 처음부터 결론이 정해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요즘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한번 읽혀볼만한 책이다. 물론 거기서 느끼는 감정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할아버지가 불쌍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고, 이런 할아버지를 어떻게 도와주냐고 할 수도 있을 테고, 송이는 참 착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어쨌든 아이들이 느낀 것이라면 무엇이든 존중해 줄 의무가 있다. 또 그래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독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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