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다녀온 지 두어 달이 지나면 그 때부터 근질근질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큰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간 올해부터는 여행을 포기했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일 때만 해도 평일에 체험학습을 내고 다녔는데 이제 중학생이 되니 그러기엔 부담스럽다. 그래서 시험이 끝나면 갔다오기로 잠정 합의를 했던 터다. 

사실 여행을 다니는 것이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목적과 직접 경험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그래서 주로 역사나 체험을 위주로 가게 되었고 자연히 아이들은 그다지 반겨하지 않았다. 큰 아이는 잠을 푹 잘 수 없다는 것을 가장 큰 불만으로 여기며 투덜댄다. 가끔 무작정 떠나서 순수하게 놀다오기라도 하면 둘째는 무척 좋아할 정도였다.  

헌데 요즘은 큰 아이가 주말에 집에만 있으면 허탈하다며 어디라도 다녀오자고 한다. 전 같으면 마지못해 따라나서던 아이가 아니던가. 이제 여행이 습관이 된 것일까. 그래서 몇 달 어딘가를 갔다오지 않으면 뭔가가 허전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모처럼 여행을 가자고 먼저 제안한 딸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시험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원래는 1박을 할 생각이었으나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당일로 잡았다. 장소는 책에서 보았었고 주간지 특별부록에서도 보았던 농다리가 있는 진천으로 잡았다. 

일전에 아우라지에 있는 섶다리를 보고 참 특이한 다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만들어진 지 천 년이 다 된 돌다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우선 이 책에 나오는 정보를 보며 그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 좋고 유익한 곳을 소개하는 책이라서 그런지 내 취지와 딱 맞는다. 마침 여기에 진천에 대한 정보가 있는 것을 보았던 참이다. 작년에 이 책을 구입했는데 책을 보며 상당 부분 우리가 갔던 곳이라서 반갑기도 했고 우리도 참 많이 돌아다녔구나를 새삼 느끼기도 했었다. 여기서 추천하는 코스인 종박물관과 농다리, 보탑사, 이원아트빌리지를 그대로 따라가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날 큰 아이가 묻는다. 몇 시에 출발할 거냐고. 워낙 미리 준비하는 딸인지라 출발 시각을 알아야 준비하는 시간을 계산해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8시 출발, 7시 20분 아침식사라고 했더니 아무말 없이 알았단다. 전 같으면 쉬는 날인데 너무 일찍 일어난다고 투덜댈텐데... 오히려 쉽게 대답하는 딸을 보며 우리 부부가 의아했다. 대신 둘째가 난리다. 그렇잖아도 1박2일로 갯벌을 갔다온 뒤라 피곤하다는 거다. 하지만 아직 어린 둘째의 의견은 무시.(이러면 안 되는데...)

주말이면 영동고속도로가 막히기 때문에 국도로 향했다. 아는 길을 먼저 가기 때문에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르지도 않는다. 만약 네비게이션이 생각이 있는 사물이었다면 이랬을 것이다. '지들 맘대로 갈 거면서 나한테 왜 물어 봐!'라고.
 
종박물관 주차장에 들어서니 한산하다. 지어진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겠다.  


밖에는 이처럼 성덕대왕 신종 모형을 만들어 놓아서 마음껏 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웅장한 소리를 들으며 종에 손도 대보았다. 박물관 안에는 음통과 움통에 대한 자세한 설명 뿐만 아니라 음통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소리를 직접 들으며 비교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음통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성으로 잡음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바닥에 움푹 파인 것을 움통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리를 반사해서 여운이 길도록 해준다. 박물관 안에는 시기별로 종을 배치해 놓아 각 시대별 특성과 차이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중국의 영향으로 음통이 없기도 하고 가운데 선을 그었으며 모양도 투박한 것을 알 수 있다. 승아는 왜 안 좋은 것을 받아들이냐고 반문한다. 글쎄, 그게 꼭 안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이야 전통적인 우리의 방식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알고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 당시의 유행이라는 것이 있지 않던가. 패션의 역사도 지나고 보면 무척 촌스러운 것도 당시는 대단한 유행이었다는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2005년에 개관해서 아직 주변이 어수선하고 규모도 그다지 큰 것은 아니지만 종의 세세한 부분까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농다리로 향했다.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니 거의 천 년을 저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천 년 전의 사람들이 다녔던 곳을 지금 나도 건넜다니. 다리를 물의 흐름에 맞게 구불구불한 모양으로, 마치 지네가 기어가는 듯한 모양이라 농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걸쳐 있는 돌은 커다란 하나의 돌인데 금방이라도 툭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천 년을 버텨왔다니 그야말로 기우겠지. 


농다리를 왔다갔다 하면 건강하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원래 다리밟기도 그런 의미니 거기서 유래된 것일까. 저 길을 건너서 올라가면 산책길이 있다. 지금도 정비를 하고 있는 중이지만 깔끔하다. 작은 언덕을 넘으면 저수지가 나온다.

앞으로는(사진으로 보면 오른쪽) 중부고속도로가 있어서 좀 시끄럽다. 그동안 중부고속도로를 수없이 다녔지만 이런 다리가 있는 줄 전혀 몰랐으니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점심을 먹고 찾아간 곳은 보탑사다. 원래 길 떠나면 먹는 것이 가장 문제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먹는 편이 아니라서(우리의 여행 목적은 먹는 것이 아니기에) 지나가며 괜찮다 싶은 곳을 들어가곤 한다. 그렇게 들어간 식당이 마침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맛은 그다지 좋지 않지만 고추장삼결살이라는, 둘째가 아주 좋아하는 메뉴라서 연호는 아주 맛나게 먹는다. 그리고 나올 때 개업선물도 두 개 받아왔다. 식당 가서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보탑사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길이 워낙 좁아서 앞에서 차가 오나 안 오나 잘 살펴봐야 한다. 잘못하면 오도가도 못할 수가 있으니. 하지만 그래서 더 조심하는 것도 있다. 차가 오면 미리 넓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과연 이렇게 산골에 있는 절에 사람이 올까라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웬걸, 차가 무척 많다.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이 절 유명한가 보다."

보탑사는 탑과 본당이 같은 특이한 절이다. 즉 저 사진에 보이는 것이 바로 탑이자 부처를 모신 불전이다. 탑은 목탑이며 더욱 특이한 것은 저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다. 밖에서 보면 삼층이지만 안으로 가면 중간에 층이 하나씩 더 있어서 총 5층이다. 올라가면서 딸꾹질을 하던 승아는 사람들이 절을 하는 조용한 1층에 발을 내딛는 순간 딸꾹질을 크게 해서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탑 주변은 야생화를 어찌나 잘 가꾸어 놓았던지 사람들이 모두 그 꽃을 보며 감탄한다. 그리고 한쪽에는 비석이 있는데 비문이 하나도 없다. 설명서에 비문이 없다고 하니 알았지 안 그랬으면 비석을 보고도 모를 뻔했다. 그래서 이 비석을 '무자비'라고도 한단다.  

보탑사를 나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이원아트빌리지로 향했다. 이월성당 사진을 보자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난다. 바로 얼마전에 읽었던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이다. 아, 이렇게 서로 모르던 것들이 연결되어 내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의 기쁨이란. 그래서 여행을 떠나면서 두 권의 책을 챙겼던 터다. 안 그랬으면 낭패볼 뻔했다.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에 씌어 있기를 '내비게이션에도 뜨지 않는 이원아트빌리지'란다. 그 말이 뭔 말인지 실감했다. 이원아트빌리지는 고사하고 우리 내비게이션에는 미잠리라는 마을 조차도 안 뜬다. 간신히 쌍호교를 지나면 바로 있다는 <베스트 여행지>의 글을 읽고 쌍호교를 목적지로 찾아갔다. 다행히 쌍호교는 나온다. 참고로 우리 내비는 미오다. 아무래도 업데이트 좀 해야겠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이원아트빌리지. 이 미술관은 원대연이라는 건축가가 지은 곳이란다. 건축가들이 손에 꼽는 이월성당의 설계자라지. 잘 나가던 사무실을 접고 이곳으로 와서 미술관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잘 알려지지 않아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니 참 안타깝다. 마침 이철수 판화전도 하고 사진전도 해서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두 남자는 어딘가로 휘리릭 가 버리고 승아랑 천천히 둘러보았다. 혹 빠진 것이 있나 꼼꼼히 둘러보는 승아를 보며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이 든 것일까. 비록 둘 다 그림에는 문외한이지만 딸과 함께 이야기 나누며 미술관을 둘러보는 그 기분이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이곳은 개방하는 공간이 3천 평이란다. 건물이 많고 길도 미로처럼 되어 있지만 어디로 가든 모두 만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 길을 잘못 들 염려는 없다. 어느 곳에는 이렇게 주변에서 흔히 보는 나뭇가지로 만든 자전거도 놓여 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런 수레도 있다. 거기에 담겨 있는 갖가지 꽃은 또 어찌나 예쁘던지.


한쪽에는 색이 칠해진 돌이 놓여 있다. 가만 보아하니 관람객이 가지고 놀라고 해 놓은 것 같다. 연호는 아예 자리잡고 앉아서 자기 이름을 쓰겠단다. 그런데 한 글자 쓰더니 너무 힘들다며 그만둔다. 자그만한 전시관이 곳곳에 있어 발길 닿는대로 가서 구경하도록 되어 있다.


한쪽 벽에는 이런 인형도 놓여 있다. 


상촌미술관이 있는 이원아트빌리지 입구. 건축가 원대연의 그림도 있는데 역시 건축가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월성당 이야기를 하자면 원대연 건축가가 지어준 성당이란다. 건축가들은 그곳을 군더더기를 빼고 자연과 어우러진 편한 건축으로 손에 꼽는단다. <딸과 떠나는 인문학 기행>의 저자 이용재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두움과 밝음만 있는 명품'이란다. 그곳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그냥 왔다.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오면서 남편도 승아의 변한 모습에 놀랐단다. 이제야 그동안 우리가 저희에게 했던 교육의 방향을 이해하는 것일까. 며칠 전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내게 큰 고통을 안겨준 기억마저 좋은 경험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그러면서 집에 오는 중에 수학 문제집을 꼭 사야한다기에 서점을 간신히 찾아갔다. 어차피 큰 기대하지 않는 교내수학경시대회니 그냥 보랬더니 안 된단다. 명색이 반에서 몇 명만 보는 거라 은근히 부담이 되나 보다. 이거 우리집은 부모와 자식이 반대다. 이번 여행은 무엇보다 딸의 변한 모습을 '확인'한 뿌듯하고 감동적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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