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밑 시공 청소년 문학 36
캐티 아펠트 지음, 박수현 옮김, 데이비드 스몰 그림 / 시공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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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 책은 작가에 대한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물론 그림 작가는 알지만 소설에서의 그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뉴베리 아너 상'이라는 딱지를 보고 골랐다. 문화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그래도 상을 받은 작품이라면 어느 정도 가치는 있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인식에 따랐다. 읽고 나서? 글쎄,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재미있다거나 청소년들이 푹 빠져서 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원래 작품성과 재미는 어느 정도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이긴 한다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별을 다섯 개 준 이유는 읽으면서, 혹은 읽고 나서 생각할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이야기를 나열해서 읽고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리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와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았다. 무엇 때문에 약간 지루함을 느꼈을까하고. 아마도 우리의 자극적이고 전개가 빠른 청소년 책을 읽다가 서정적이고 대화도 별로 없으며 주로 묘사가 많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말이지 이 책은 꽤 두꺼운데도 대화가 거의 없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루이스 새커가 평했듯이 시적인 느낌이 난다. 소설이 시적인 느낌이 난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지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하고 동물과 인간을 함께 그리고 있기 때문에 약간은 판타지 같은 느낌도 난다. 과거와 현재를 따로따로 이야기해서 둘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쇠사슬에 묶여 희망이라곤 없이 살아가는 사냥개 앞에 나타난 고양이는, 흔히 생각하듯 개와 고양이가 원수라는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트린다. 둘은 서로 의지하며 주인인 악어 동갈치 낯바닥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애쓴다. 그러다가 고양이가 새끼를 낳는다. 그러나 여기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야기가 아니지. 주인에게 들키는 바람에 고양이는 미끼로 사용될 뻔하다가 가까스로 새끼만 구하고 자신은 죽는다. 그 새끼 고양이가 개인 레인저를 찾아가는 여정이 정말 눈물겹다. 사람의 기준으로 치자면 그냥 강을 건너 집을 찾아가면 될 텐데, 새끼 고양이 퍽에게 강물은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장애물이다. 그러고 보니 읽을 때는 미처 못 느꼈는데 퍽이 집을 찾아가는 것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안전한 마루밑에서 지내다가 주인에게 들키는 바람에 이제 더 이상 그곳도 안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서로 과거를 지나 현재에 모습을 드러낸 뱀과 벌새 덕분에 사빈과 퍽, 레인저는 악랄한 악어 동갈치 낯바닥이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살게 된다. 레인저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것은 아주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쇠사슬에 묶여 원을 그리며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었으니까. 그들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 비록 힘겨웠지만 이제는 전설이 되었다. 그 전설에 관한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고. 

헌데 이 작가는 '여기,~'라는 식의 말을 많이 쓴다. 처음엔 독특하고 재미있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어찌나 많이 나오는지 나중에는 좀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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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반 인터넷 소설가 푸른도서관 36
이금이 지음, 이누리 그림 / 푸른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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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수학여행을 떠나는 딸이 집에 와서 툴툴 거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들떠서 신났던 터다. 그 이유인즉 학년 주임이 방 배정을 번호순으로 하라고 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그동안 친한 친구들끼리 방을 쓰기 위해 열심히 머리 굴렸는데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친하지 않은 친구들도 있어서 어쩌고 저쩌고 한창 떠든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책이 생각났다. 하긴 읽으면서도 어쩜 지금 여기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있을까 싶어 감탄했었다. 아마도 작가가 딸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게다.  

딸 아이가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많아서 책을 건넸더니 표지를 보고 이게 뭐냔다. 이금이 작가의 딸이 그린 것이라고 했더니, 그게 아니라 이런 표지면 학교에 가지고 갈 수가 없단다. 그럼 북커버 씌우면 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래도 애들이 벗겨본단다. 그러면서 남자 애들이 봐서 안 된다나. 그래, 책을 읽기 전엔 나도 이게 도대체 무슨 그림일까 의아하긴 했다. 그런데 읽고 난 지금은 이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다. 또 그 안에 상당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도 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책인데 처음엔 주인공이 마치 담임 선생님 같았다. 화자가 바로 담임이니까. 좀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 선생님이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일까. 게다가 시작하자마자 봄이라는 아이가 무단결석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로 보아 그와 관련된 이 선생님의 얘기일 거라는 추측을 했으나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어디까지나 청소년인 봄이다. 그러나 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부분은 아주 일부일 뿐이다. 나머지는 여러 사람이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봄이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조금씩 사건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과정도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소설로 구성되어 있는데다 담임 선생님까지 끼어들어 혼란스러워하니 독자는 더욱 갈피를 못 잡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연결되는 진실고리가 드디어 하나로 완전히 합쳐졌을 때 답답함이 풀어졌지만 한편으론 더욱 답답해진다. 바로 봄이가 처한 현실, 결국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다지 떳떳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순진한 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좋아해서 들어준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들었던 것이다. 대리만족이든 시간 때우기든 가장 큰 원인은 '너처럼 뚱뚱한 애가 어떻게?'라는 생각이 모든 아이들 마음 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런지(책을 읽는 도중에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사실이다. 이성적으로는 외모보다 그 사람의 인격에 끌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한쪽 구석에서는 '그래도'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님도 한때 가졌던 생각이다. 선생님과 아이들이 함께 이야기한 적은 없지만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20년이 넘는 시간차가 무색할만큼 변한 것이 없었다는데 시선이 자꾸 머문다. 이게 바로 요즘 사람들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닐까. 외모지상주의. 그래서 표지를 뚱뚱한 비너스로 그린 것이리라. 이렇게 뚱뚱해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고, 충분히 귀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앞으로 봄이는 어떻게 될까. 그나마 봄이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알고 있었기에 상처를 덜 받을 수 있었다. 안그랬다면 혼자만 전전긍긍하고 더불어 독자도 안타까워했을 테니까. 그보다도 담임의 대응방식이 더 궁금하다. 아이들이 똘똘 뭉쳐 진실을 은폐하려 했고 자신은 그저 방관자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낙담했을까 싶기도 했다. 

작가는 그토록 많은 책을 냈는데도 여전히 아이디어가 고갈되지 않나 보다. 너무 쉽게 글을 쓰는 것 같아 샘나기도 하지만(내가 샘 낼 필요가 없는데) 글을 참 잘 쓴다는 사실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양한 형식의 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쓰는 걸 보면 정말 타고난 '꾼'인가 보다. 내용에 관해 할 이야기가 많은 책인데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의 신선함과 작가의 능력에 감탄만 하고 있다. 확실히 우리 어린이청소년문학의 한 축을 이루는 작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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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에서 반올림 15
오드리 콜럼비스 지음, 김혜진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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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표지에 '하루 동안 윌라 조와 다른 세 인물들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흔히 책 한 권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면 전개가 느려서 무척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하루는 주된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안에 펼쳐지는 여러 이야기가 하루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책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 이게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간중간 과거를 회상하며 오래전의 일도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처음과 끝 부분이 같은 시공간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이야기는 윌라 조와 동생이 이른 아침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지붕 위에서 하늘을 쳐다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하긴 나라도 아이들이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으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란 남의 일에 얼마나 참견을 잘 하는가 말이다. 특히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는 더욱 더. 윌라 조와 동생은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우선 이모네 집에서 당분간 살고 있고 꼬맹이 동생은 말을 못, 아니 안한다. 그들이 이모네 집으로 오게 된 이유가 엄마가 아기를 잃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이모가 돌보기 위해서다. 게다가 이모는 아이가 없다. 만약 내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이모의 환경이 조카를 돌보기에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겪어 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를 키워본 것과 그냥 남의 아이만 바라본 경우는 차이가 엄청나다는 걸 알겠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윌라 조가 이모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것만을 달랑 알려준다. 그래서 윌라 조가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보를 가지고 전후관계를 파악해야 하고 원인과 결과도 유추해야 한다. 꼬맹이는 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엄마는 그 사실을 알기는 하는 건지, 아기는 왜 죽었는지, 왜 아빠는 등장하지 않는지 등등.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조금씩 조금씩, 그것도 순서를 왔다갔다 하며 알려준다. 솔직히 그래서 중간에는 혼란스러웠다. 이야기의 일관성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지금 이들의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의문이 들기도 햇다. 또, 커다란 사건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구조는 보통 전개가 빠른 우리 문학과 달라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문장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 잠시 역자(김헤진 작가를 좋아하면서도)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연결되고 이모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왕풍뎅이들을 매일 아침마다 버리기도 했는데..."라는 말 한 마디로 그동안 이모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고나 할까. 이모는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무척 중요시한다. 그래서 조카가 하는 행동이 언제나 못마땅하고 위태롭게 여겨졌던 것이다. 적어도 윌라 조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한때는 아이들 맡은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사랑이 아닌 의무만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위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오해였음이 드러났다. 단지 이모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 진심을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 이제 독자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움큼의 감동이 밀려온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찡한 뭔가가 있다. 다만 아기가 죽은 사실 때문에 이토록 한 가정이 슬픔에 잠길 수 있다는 걸 이해할 청소년 독자가 얼마나 될지 그게 의문이다. 뉴베리 아너상을 받았지만 정서상으로는 다가가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이런 게 바로 문화의 차이겠지. 그러나 작품성은 문화 차이와는 별개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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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빨강 창비청소년문학 27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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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문학에서 처음으로 시를 만났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청소년문학이라고 하면 당연히 소설만 생각했다. 간혹 청소년들이 쓴 시를 보긴 했으나 이처럼 청소년을 위해 시인이 쓴 시는 생경하다(그러나 내용은 너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어린이를 위한 시는 많은데 말이다. 그만큼 우리가 청소년에게 무심했다는 말일까. 하긴 청소년을 위한 문학작품이 쏟아져나온 게 그닥 오래되지 않았다. 그러니 장르의 다양성에 대한 기대는 성급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고 이제 시가 나왔으니 좀 더 다양한 문학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는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딸이 많이 공감하겠구나 싶은 시가 그득하다. 동시가 그들의 삶을 외면한 채 아름다운 것만 보여주고자 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 그들의 아픔과 방황, 생활을 이야기했듯이 여기에 나오는 시도 청소년들의 삶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그들만의 고뇌를 이야기하는 시가 없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너무 자연스럽다. 마치 예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시 같다. 처음 나온 청소년을 위한 시라면 약간은 어색함이 느껴져야 맞는 것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냥 기계처럼 공부만 해야하는 상황을 '공부기계'라고 표현하며 은근슬쩍 현실을 꼬집는다. 또한 공부를 잘하면 뭐든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뭘해도 잔소리만 듣는 진실을 자조적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성에 대해 호기심이 왕성한 그들만의 활력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청소년들의 모습 그대로다. 때로는 위로하고, 때로는 아픔을 감싸주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감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청소년을 위한 시. 이제 청소년들도 소설이 아닌 시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크나큰 변화가 아닐까 싶다. 창비청소년문학 화이팅, 박성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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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자친구 이야기 사계절 1318 문고 17
크리스티앙 그르니에 지음, 김주열 옮김 / 사계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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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두 남녀가 각자 자기의 시각에서 서술하는 두 개의 이야기 중 하나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한 권에서 두 이야기를 교차하기도 하고 때로는 앞뒤로 나뉘어져 있기도 한데 이 책은 아예 다른 책으로 구성되었다. 그래서 한 편만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같은 추억, 서로 다른 이야기'가 이어진다는 글귀를 보고 나머지 한 권을 읽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이 너무 재미있으니까. 

이 책'들'을 먼저 읽은 지인이 꼭 '남자친구 이야기'부터 읽으라고 하기에 그것 먼저 읽고 나중에 여자친구 이야기를 읽었다. 두 권을 다 읽고 왜 그러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래서 딸에게 어느 것 먼저 읽었냐니까 여자친구 이야기부터 읽었단다. 그러면 감동이 덜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전혀 아니란다. 그런데 딸은 이 책이 더 감동적이었단다. 잔을 위해 그토록 힘겹게 연습하는 피에르의 모습이 너무 감동적이었다나. 난, 남자친구 이야기가 더 감동적이었는데. 아무래도 나중에 읽는 책은 어느 정도 결론을 알고 읽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그렇다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바로 어느 것을 먼저 읽든 그게 더 감동적이라고. 

여하튼 내 경우 남자친구 이야기 먼저 읽었으니 그걸 기준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잔의 입장에서 볼 때 피에르가 너무 우유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피에르의 입장에서 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겠다. 또한 잔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알겠다. 잔의 아빠가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기 위해 연습하는 모습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딸이 감동하는 이유를 알겠다. 말은 쉽게 연주회 연습이라고 하지만 학교 다니면서 연습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면서 틈틈이 잔을 위한 시간까지 냈으니. 

잔의 아빠가 사용하던 피아노를 팔았는데 그걸 피에르가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런 게 바로 운명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둘은 서로 그 피아노에 대해 어떠한 의미도 두지 않는다. 그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라고 생각한 나 같은 독자만 그들의 기막힌 운명에 기뻐할 뿐이다. 엄마로서 이런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서로에게 도움이 되고 각자 자신의 생활 또한 철저한 이들과 같다면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클래식과 관련된 상당 부분이 사실 그대로를 묘사하고 있어서 클래식에 문외한인 나 같은 독자는 상식이 조금 늘었다. 이 책을 읽고 <방랑자 환상곡>과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들어보았다. 특히 <방랑자 환상곡>의 경우 브렌델의 곡과 다른 곡을 들어보기도 했다. 정말이지 이 두 책을 읽으면 여기 나오는 일부의 음악을 안 들어볼 수 없다. 그러면서 잔과 피에르의 모습을 상상한다. 무대에서는 열정적인 피아니스트지만 밖에서는 수줍음 많은 평범한 남학생인 피에르. 그가 펼치는 아름다운 사랑과 피아노에 대한 열정을 만나는 좋은 시간이었다. 당분간 이 책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청소년에게 선물할 일이 있으면 꼭 남자친구 이야기와 함께 이 책으로 해야겠다. 읽게 되어 무지무지 다행인 책, 읽고 나서 무지무지 행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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