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위에서 반올림 15
오드리 콜럼비스 지음, 김혜진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뒷표지에 '하루 동안 윌라 조와 다른 세 인물들의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고 적혀있다. 흔히 책 한 권에서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한다면 전개가 느려서 무척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하루는 주된 사건이 전개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안에 펼쳐지는 여러 이야기가 하루만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책을 거의 다 읽을 때까지 이게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간중간 과거를 회상하며 오래전의 일도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독자는 마지막에 가서야 처음과 끝 부분이 같은 시공간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이야기는 윌라 조와 동생이 이른 아침 지붕 위에 앉아 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지붕 위에서 하늘을 쳐다볼 뿐이다. 그런데 그들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하긴 나라도 아이들이 지붕 위에 올라 앉아 있으면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진 못할 것이다. 게다가 사람이란 남의 일에 얼마나 참견을 잘 하는가 말이다. 특히 평범하지 않은 행동을 할 때는 더욱 더. 윌라 조와 동생은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 만한 요건을 모두 갖추었다. 우선 이모네 집에서 당분간 살고 있고 꼬맹이 동생은 말을 못, 아니 안한다. 그들이 이모네 집으로 오게 된 이유가 엄마가 아기를 잃고 그 충격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이모가 돌보기 위해서다. 게다가 이모는 아이가 없다. 만약 내가 아이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이모의 환경이 조카를 돌보기에 좋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겪어 보니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를 키워본 것과 그냥 남의 아이만 바라본 경우는 차이가 엄청나다는 걸 알겠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윌라 조가 이모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야기는 시간 순서대로 차근차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것만을 달랑 알려준다. 그래서 윌라 조가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보를 가지고 전후관계를 파악해야 하고 원인과 결과도 유추해야 한다. 꼬맹이는 왜 말을 하지 않게 되었는지, 엄마는 그 사실을 알기는 하는 건지, 아기는 왜 죽었는지, 왜 아빠는 등장하지 않는지 등등.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답을 조금씩 조금씩, 그것도 순서를 왔다갔다 하며 알려준다. 솔직히 그래서 중간에는 혼란스러웠다. 이야기의 일관성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지금 이들의 상황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의문이 들기도 햇다. 또, 커다란 사건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는 구조는 보통 전개가 빠른 우리 문학과 달라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 문장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 잠시 역자(김헤진 작가를 좋아하면서도)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연결되고 이모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왕풍뎅이들을 매일 아침마다 버리기도 했는데..."라는 말 한 마디로 그동안 이모에 대한 오해가 풀렸다고나 할까. 이모는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무척 중요시한다. 그래서 조카가 하는 행동이 언제나 못마땅하고 위태롭게 여겨졌던 것이다. 적어도 윌라 조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한때는 아이들 맡은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사랑이 아닌 의무만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위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오해였음이 드러났다. 단지 이모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몰랐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모두 진심을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 이제 독자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간 건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 움큼의 감동이 밀려온다. 건조한 듯하면서도 찡한 뭔가가 있다. 다만 아기가 죽은 사실 때문에 이토록 한 가정이 슬픔에 잠길 수 있다는 걸 이해할 청소년 독자가 얼마나 될지 그게 의문이다. 뉴베리 아너상을 받았지만 정서상으로는 다가가기 힘든 뭔가가 있었다. 이런 게 바로 문화의 차이겠지. 그러나 작품성은 문화 차이와는 별개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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