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집안의 형제들 1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서상범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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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들으면 자동적으로 작가가 튀어나오는 작품들이 있다. 그렇지만 그 중 읽은 책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책도 워낙 유명해서 읽었다고 착각할 정도다. 다만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책은 이름이 하도 복잡해서 지레 겁먹고 포기하니 읽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다.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어찌나 정신이 없는지 가계도를 그리며 읽다가 그마저도 헷갈려서 중도에 포기했었다. 그 후로 톨스토이의 작품은 조금 읽었지만 <전쟁과 평화>는 다시 집어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이 책도 비슷했는데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읽게 되었고 3권 모두 읽었다. 읽어보니, 재미있다. 이렇게 술술 넘어가는 걸 그땐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완역이 아니라는 점, 즉 분량을 많이 줄였기 때문에 줄거리를 이해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작가의 섬세한 문장을 이해하기에는 약간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안 읽는 것보다는 이렇게라도 읽는 게 낫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게다가 심하게 축약한 것은 아니니까. 내가 종종 하는 말이 있는데 내 수준에는 이런 책이 딱이라는 것이다. 완역본을 힘들게 읽다가 포기하는 것보다는 낫겠다 싶다. 사실 원전의 맛을 느끼려면 완역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얼마전에 <돈 키호테>를 읽으며 느꼈다. 축약본과 완역본을 함께 읽으니 확실히 차이가 났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처음 감동받았던 책은 이 시리즈의 <돈 키호테>였다. 책을 읽고 문체나 서술방식에서 감동을 받을 수도 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떤 느낌에 감동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역본의 <돈 키호테>를 읽고 작가의 재치와 문체에 대한 감탄이었다면 이 시리즈의 <돈 키호테>는 돈 키호테에 대한 연민이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닐까.

 장장 세 권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예전에는 러시아 사람들의 이름이 그토록 헷갈렸는데 이제 그 정도는 아니다. 각 인물들의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고 서사가 긴박하게 전개되어서 구별이 잘 되었다고나 할까. 어느 나라나 한 집안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어차피 개인이든 가족이든 나라와 떨어져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모습을 보고 자란 세 형제가 은연중에 자신들도 아버지의 피를 이어 받아 인간답게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알렉세이만 다른 형제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그마저도 후속편에서 살인을 저지르게 될 뻔했다니 전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그래서 도스토에프스키가 후속편을 쓰지 않은-아니, 못 쓴-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원래는 애칭을 많이 쓰지만(어떤 관계냐에 따라 애칭이 다르단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정식 이름을 썼다고 한다. 어쩌면 그래서 덜 헷갈렸는지도 모른다. 만약 친밀도에 따라 부르는 애칭이 달랐다면 그거 쫓아다니느라 애먹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에는 유독 죄와 살인이 많고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애초부터 종교에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 나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래서 사람은 문화적인 영향도 크다고 하는가 보다. 그런데 그런 책도 자꾸 보니까 이제 조금 이해가 되고 공감이 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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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발걸음 창비청소년문학 35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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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루이스 쌔커의 <구덩이>를 읽었을 때의 감동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엔 다소 정신없고 각각 따로 놀던 이야기들이 마지막에 가서는 서로 연결되는 그 오묘한 사건들, 그리고 무작정 구덩이만 파는 아이들을 보면서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모를 답답함이 결국 시원하게 풀렸을 때의 통쾌함을 배가 시켰던 기억도 생생하다. 지인의남편은 그 책을 읽고 '이렇게 재미있는 책을 왜 혼자만 보려했느냐'고 했다지. 그래서 후속작이 나왔다기에 기대를 엄청 했다. 결과는? 원래 인간은 금방 적응하는 능력이 있어서 이미 루이스 쌔커식의 수사법에 익숙해졌다고나 할까. 

 <구덩이>가 우리의 소년원격인 초록호수캠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었다면 이것은 그 후에 사회에 돌아왔을 때의 이야기다. 어느 사회나 전과가 있으면 사람들의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법이다. 시어도어는 그것을 충분히 알기에 더욱 조심한다. 엑스레이도 그렇고. 그러나 세상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작은 발걸음부터 시작하라는 조언에 따라 자신과 몇 가지 약속을 정했으나 이야기란 언제나 그렇듯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다. 엑스레이가 암표 장사를 하자며 제의할 때부터 뭔가 일이 시작될 것을 짐작하고 제발 말려들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건 곧 작가에게 책을 쓰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시어도어, 그러니까 겨드랑이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특히 옆집에 사는 지니는 단순히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아깝다. 약간의 장애가 있어서 말을 더듬고 다리가 불편하지만 사람의 진심을 읽을 줄 아는 순수한 영혼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시어도어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지니를 통해 치료할 수 있었다. 둘의 대화를 읽으면 애정을 갖고 진심으로 대하면 직설적인 이야기도 상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평범한 학생과 유명한 가수의 사랑 이야기보다 시어도어와 지니의 모습이 훨씬 기억에 남는다. 

 둘은 우연한 기회에 카이라의 콘서트에 가게 되었지만 흑인 남자가 어린 백인 여자 아이를 데려왔다는 이유(물론 위조된 입장권이었다는 죄목이 있지만 그보다는 이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었을까)로 경찰에게 무조건 구타를 당했다. 그곳에서 시장을 만났고 그 덕분에 카이라와 친구가 될 수 있었지만 곳곳에서 시어도어가 자신의 전과기록과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시어도어 또한 지니 못지않게 순수하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그의 진심이 전달되어 일이 잘 풀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는 지나치게 큰 사건에 휘말려들지만 그것도 잘 해결됐다. 카이라가 크게 다쳤지만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자기만의, 자기의 마음이 들어간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시어도어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마치 주변에서 사건을 만들고 해결하지만 정작 주인공(특히 어리버리한 주인공)은 모르는 코미디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엑스레이의 계략을 겨드랑이도 알고 있었고 함께 모의했지만 아주 기본적인 것만 알았을 뿐 나머지는 저절로 일어났고 알아서 풀리지 않았던가 말이다. 초록호수캠프에 있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을 뿐 <구덩이>와는 별개의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약간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어서 이것이 후속편이라고 한다면 내게는 전편이 훨씬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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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고등 세트 (최신판, 전5권) (특별부록 :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고등 가이드북) 국어 교과서 작품 읽기 시리즈
고화정 외 엮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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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는 순수 문학 작품, 그것도 현대 작가들이 청소년을 위해 쓴 작품에만 관심을 가졌다. 아무래도 요즘 작가들이 쓴 작품이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울 테니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고 내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다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바로 다양한 작품을 접해야겠구나라는 것이다. 그 시절 비록 완전히 이해하거나 공감하진 못했어도 좋은 작품을 읽고 여운을 주체하지 못하던 때가 기억난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은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니 읽을 가치가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단순히 국어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가치있는 작품을 읽어둬야 한다는 의미에서도 독서는 필요하다. 그렇다고 시간은 유한하고 할 일은 많은 고등학생이 무턱대고 많이 읽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고등학생들이 꼭 읽어두면 좋은 작품을 고르고 골라 펴낸 이런 책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고등학생 때 교과서에 나왔던 작품은 모두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니, 작자의 생몰연도를 알아봤으니 분명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그냥 교과서에 나오니 같은 시기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듯싶다. 문득 박민규나 공지영, 황석영, 김훈의 작품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새로운 작품을 읽기도 하고 때로는 강연회에서 얼굴을 보기도 하는데 아이들은 그들을 '옛날'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런지. 개인이 필요한 작품을 일일이 찾아서 읽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골고루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편한가 말이다. 

 사실 아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즈음에 이르니 근래 나오는 청소년책들만 읽을 것이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것과 같은 작품들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요즘이다. 게다가 시집을 찾아 읽을 리는 절대 없는데 시까지 엄선해 놓았으니 손도 안 대고 코를 푼 격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정말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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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살의 특별한 여름 - 국제독서협회 아동 청소년상, 뉴베리 영예상
재클린 켈리 지음, 김율희 옮김 / 다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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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간은 그냥 흐를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 커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아니, 흐르는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규정지어 놓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1999년과 2000년의 차이는 숫자상의 차이일 뿐 시간은 전과 다름없이 흐르는데도 전 세계가 호들갑을 떨었다. 물론 당시는 컴퓨터로 처리되는 일이 상당히 많아서 그에 대한 오류를 걱정한 것이라 해도 지구가 종말을 하네 마네하는 얘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1899년과 1900년은 어땠을까. 1999년과 2000년의 차이 정도는 아니어도 세기가 바뀌는 시기이므로 약간의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당시 현재의 그레고리력을 사용하는 나라에서만 그랬겠지만). 그보다 훨씬 전, 그러니까 999년과 1000년은 현재 계산법대로만 존재하는 것이니 당시는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1899년이다. 그리고 1900년이 시작되는 날에 이야기는 끝난다. 사람들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궁금해하는 부분을 읽다 문득 2000년을 맞이하던 때의 호들갑이 생각났다. 그렇다면 이제 책으로 돌아가서 캘퍼니아가 살던 시기의 미국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를 먼저 알아봐야겠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고 대공황이 오기 전이니 그럭저럭 괜찮은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여성들은 아직 투표권이 없었고(1920년에 처음 투표권이 주어졌다고 한다.) 사회 활동이 상당히 드문 때(전화 교환원을 우러러 보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였다. 캘퍼니아의 엄마가 딸을 사교계에 진출시키고 요리와 바느질을 가르치려고 애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여자들의 최대 목표는 남편을 잘 만나서 가정을 꾸리는 것, 곧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시대에 보편적인 가치관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캘퍼니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깃거리가 되기 충분하다. 

 남자 형제들만 있는 집의 여자 형제는 대개 천방지축이기 쉽다. 환경이 그런데다가 성향까지 그러니 누가 말리겠나. 게다가 그것을 은근히 부추기는 할아버지까지 있으니 캘퍼니아의 미래는 당연히 시대를 앞서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가정교육을 중요시하는 때였기 때문에 겉으로는 예의를 갖추는 척한다. 식사시간을 정확히 지켜야 하고, 밥 먹기 전에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며 백인 여자 아이는 절대 들일을 해서는 안 되는 등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너무 정확히 구별되던 때였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보면 여자들이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부채질 하며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옷이 왜 그리 입고 싶던지. 그러나 그런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스칼렛처럼 해야하며 때로는 기절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또한 여자가 남자의 부속품처럼 취급받던 시절이었음을 알고 차라리 지금이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숙녀로 키우고 싶어하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캘퍼니아는 들로 뛰어다니며 곤충을 채집하고 식물을 관찰한다. 그러나 시대적인 벽을 완전히 뛰어넘지는 못한 면을 볼 수 있다. 엄마가 반대할 것을 뻔히 알기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을 의식해 예의바른 척한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벽을 넘고자 시도한다. 또한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까봐 노심초사한다. 개인적으로 캘퍼니아 같은 아이를 지나치게 다른 사람의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그린 점이 의아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당시 시대적인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의 이력이 독특하다. 의사에 변호사이면서 과학적인 이야기를 쓰다니. 사실 그래서 과학적인 부분은 약간 못미덥긴 하다. 게다가 뒤에 감사의 말에 오류가 있으면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개발되지 않은 대자연의 모습을 세세하게 그리고 있어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이 많은데도 모두 애정을 갖도록 따스한 시선으로 묘사했다. 커다란 사냥개 에이젝스까지도 나름대로 비중을 차지하니 말이다. 우리가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당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듯 이 책도 일종의 역사동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의 역사동화는 대개 피지배자가 주인공이라 아프고 울분을 토로하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있는 집'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낭만적이다. 캘퍼니아가 차별을 받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조차 덤덤하고 심지어 재미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의 진보는 너무 진지하고 유머가 없다는 말이 왜 생각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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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 사계절 1318 문고 66
황선미 지음 / 사계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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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혹 일반 소설 작가가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되새기며 쓴 글을 읽곤 한다. 한때는 그에 대한 거부감이 꽤 있었다. 어린이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어린이문학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마음에서 약간은 자유로워졌다고나 할까. 작가는 안에 있는 이야기, 즉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아두고 지금 아이들을 위한 글을 쓸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 후기에 보면 안에 품고 있다가 그걸 외면하고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어서 글을 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흔히 읽는다. 황선미 작가도 그런 경우가 아닐까 싶다. 이제 처음 청소년소설을 쓰면서 우선 자기 안에 있는 이야기부터 정리를 해야만 했나 보다. 그래야 다음에는 진짜 지금 여기 있는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라고 멋대로 생각해 본다. 

 한창 개발붐이 일던 때, 그러나 서민들은 여전히 피폐한 삶을 살던 시절,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강한 가난한 집안에서의 딸이란 집안일을 하고 동생을 돌보는 역할이 가장 우선시되었다. 남동생과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만 워낙 남녀차별을 하지 않던 부모님 덕분에 '달걀프라이를 해도 아버지와 장남만 먹었다'는 이야기가 그저 책 속에나 존재하는 것으로만 알던 내게 연재 엄마는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물론 이것도 책 속에 존재하는 이야기지만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는 생각을 하니 자꾸 소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주변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다.  

 장남인 연후는 엄마가 가장 의지하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있지만 가장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서인지 그야말로 존재감이 거의 없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들에게 의지하는지도 모르겠다. 딸에게 모지락스럽게 굴다가도 아들의 말에 순응하는 모습이 지금의 생활에서는 많이 낯설다. 그러나 이것도 우리의 생활모습의 변천사다. 외삼촌네 얹혀 살며 사촌에게도 괜한 미움을 받는 연재가 과연 어떻게 그 상황을 극복할까 궁금했다. 굴러들어온 돌의 입장인 연재가 극적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거나 혹은 재순이의 얄미운 행동이 결국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외톨이로 만들어 버리는 고소한 상황을 은근히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그런 건 그야말로 소설 속에서나 존재하지 현실에서는 힘의 방향이 그처럼 갑자기 변하지 않는 법이다. 둘을 화해시키면서도 여전히 라이벌로 남기는, 그야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상황으로 매듭지었다. 

 판자로 대충 지어서 키만 껑충한 꺽다리 집에서 다섯 식구의 삶은 힘겨워보이지만 그래도 가족이 함께 있기에 견딜만 하다. 그래서 연후를 다른 집 양자로 들이라는 제안조차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것일 게다. 그 속에서 연재는 아무리 엄마가 야단을 치고 자신에게 독하게 굴어도 이제 엄마를 이해하겠다는 생각 대신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성장하는 것이리라. 연재 주변에 그래도 힘을 주는 병직이 삼촌 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잘 헤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황선미라는 이름 때문에 책을 내면 사람들은 일단 관심을 갖는다. 그만큼 이미 어린이문학에서는 굳건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작가다. 이제 청소년소설에 발을 내디뎠으니 앞으로는 <마당을 나온 암탉>에 버금가는 책으로 독자를 즐겁게 하길 기대한다. 사실 이 책은 대단히 환호할 만큼의 책은 아닌 듯하다. 특히 처음 나오는 은행에 색을 입히는 장면, 요즘의 청소년 독자는 그게 무엇인지, 무엇에 쓰이는 건지 알기나 할까. 지나간 시절의 것들을 모두 알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으며, 또 그걸 모른다고 책을 읽는데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황선미 작가의 첫 청소년소설이라 기대를 하고 집어들었는데 처음부터 너무 생경한 이야기라 당황했을 뿐이다. 어쨌든 그녀가 그리는 청소년들의 모습은 어떨까. 작가의 이야기가 아닌 그녀에게서 나온 지금의 청소년들 이야기를 얼른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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