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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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려령이라는 이름은 몰라도 완득이는 알 정도로 2008년 한 해 돌풍을 일으켰던 작가가 펴낸 두 번째 청소년 소설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읽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원래는 어린이 책 먼저 냈는데 지금은 어째 청소년 책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여하튼 '김려령'이라는 이름보다 '완득이의 작가'로 더 잘 알려진 그녀의 책을 만났다. 그리고 다 읽고 나서 여러가지 감정이 교차하며 가슴이 답답했다. 특히 작가의 말을 읽으며 더 답답했다. 아니, 작가는 평범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이 하는 거라는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이 작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기에 작가의 아픔이 결코 작지 않았다는 심증을 굳힌다. 

이런 책을 읽으면 중학생들이 모두 고위험군처럼 여겨진다(그러나 다행인 것은 일부에서만 그렇다는 점이다). 어디선가 지독하게 왕따를 선동하는 아이가 있고, 누군가는 거기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천지처럼 그런 결정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오싹하다. 그런 순간 만큼은 완전히 책 속에 몰입해서 현실로 착각하곤 한다. 그래서 가슴이 조마조마하기도 했다가 열이 올라 얼굴이 벌게지기도 한다. 특히 요 또래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더할 것이다. 

이야기는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 한다. 또한 화자도 왔다갔다 한다. 그래서 가끔은 정신 없고 가끔은 헷갈리지만 나중에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하나씩 연결고리가 이어질 때 깔끔하게 정리가 된다. 만약 행복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구성했다면 쾌감을 느낀다고 할 법한데 여기서는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아픔이 더 크다. 심지어는 작가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하필이면 왜 이렇게 아픈 주제를 선택해서 마음껏 감동하지도 못하게 하느냐 말이다. 

화연이의 교묘한 거짓말-눈 하나 깜짝하지도 않고 상대를 곯리는 모습. 여기서는 이것을 우아한 거짓말이라고 표현했다-을 보며 참 무서운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천지는 왜 그런 화연이에게 자신의 모습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을까. 식구들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러나 정말이지 아이들 사회에서 친구끼리의 묘한 신경전은 어른이 충고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이다. 남의 경우라면 이러쿵 저러쿵 조언해주기 쉽지만 막상 자신과 관련된 일이 되면 선택의 폭이 그다지 넓지 않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그런데 화연이 천지에게 하는 행동도 무섭지만 천지 엄마도 결코 보통 사람은 아니다. 모든 것을 우연인 것처럼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지만 알고 보면 화연이네 동네로 이사간 것도, 화연이 엄마네 가게에 자꾸 가는 것도 계획적인 것이었다. 처음엔 아무것도 모르고 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족들하지만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화연마저 죽을까봐 뒤를 쫓는 모습이. 말로는 '천지 때문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화연을 용서했기 때문은 아닐런지. 

김려령 특유의 톡톡 튀는 말투와, 앞뒤로 왔다갔다 하지만 그 안에 규칙이 있어 한 순간에 '갑자기' 이해가 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또한 자살한 딸의 엄마를 우울하게 그리지 않는 것이 큰 특징이다. 엄마의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식을 잃은 엄마가 맞나 싶을 정도로 씩씩하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자리잡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한편으론 천지가 털실뭉치를 다섯 개 만들고 그 안에 편지를 써서 고마운 사람과 미운 사람에게 줬다는 방식이 너무 낭만적이라 괜한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개인의 특성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모두 다르므로)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기우 같지만 실제로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게 바로 그냥 문학을 바라보는 사람과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가 아닐런지 모르겠다.

을 만나는 것을 보며 안타까웠는데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 시치미 떼는 모습을 보니 무섭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편으론 천지 엄마가 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아 답답했는데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니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했구나하고 말이다. 그리고 누구보다 만지의 깊은 속에 가슴 찡했다. 비록 화연이 가해자이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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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2만리 아셰트클래식 1
쥘 베른 지음, 쥘베르 모렐 그림,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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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오자마자 딸을 붙잡고 나 혼자 신나서 이야기했다.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 책인줄 아느냐, 이 사람이 공상 세계를 얼마나 잘 그리는 줄 아느냐, 영화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를 지은 원저자다라며 그야말로 혼자 신났었다. 내가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 때의 감동이 밀려왔다. 어느 곳이든 거침없이 항해를 하던 노틸러스호와 냉철하고 지적인 은둔자 네모 함장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그 외의 것은, 글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엄청 재미있게 읽었다는 '기억'밖에는. 

예전에 읽었던 책을 왜 다시 읽느냐, 그것도 어른이 되어서라고 묻는다면 몇 가지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우선 완역이라는 말에 솔깃했다. 예전에 보았던 책은 그다지 두껍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즉 많이 축약되었다는 얘기다. 되도록이면 완역을 보아야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주저없이 선택했다.(그런데 꼭 완역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약간 들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딸에게 강력히 권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잘 모르고 흥미가 없는 물고기 종류가 어찌나 나오는지.) 

그리고 또 하나는 예전에 읽었던 것이라도 다시 읽으면 느낌도 다르고 기억에 남는 것도 다를 것이니 청소년기에 읽는 책과 어른이 되어 읽는 책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또, 어린이 청소년 책을 읽어야하는 '일' 때문이기도 하다. 확실히 그때와 지금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당연하지만. 읽으면서 과연 이런 부분이 있었던가 싶은 장면이 있는가 하면 제목을 대면 바로 연상되는 장면도 있다. 또한 읽다 보니 생각나는 장면도 있다. 기억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억의 특성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와 관련되었거나 관심 있는 것, 동경하는 것은 더 잘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그냥 흘려버리는 기억의 특성 말이다. 아마 한참이 지나면 바닷속에서 만난 동물과 식물에 대한 것은 여전히 내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나와는 별로 상관없는 것이고 관심도 흥미도 없는 분야니까. 

그러나 네모의 태도와 지적인 모습, 노틸러스호의 대단한 성능, 그리고 아로낙스 박사는 여전히 기억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추가된 부분이 있다. 콩세유의 모습이다. 동물을 완벽하게 분류할 줄 알지만 오로지 이론적인 것 뿐이고 실물은 전혀 구분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실소를 짓게 한다. 그러면서 우리의 교육현실이 오버랩되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지만 어찌나 자세하고 정교하게 묘사와 서술을 하는지 읽으면서도 과학정보책을 읽는 것으로 착각하곤 했다. 물론 예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다. 그만큼 그 때는 과학이나 주변 상식에 관심도 없을 뿐더러 무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쥘 베른은 인기있는 작가였으나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작가는 아니었다고 한다. 마치 베스트셀러인 책이 작품성이 뛰어난 책은 아니듯이. 그러나 쥘 베른이 당시엔 인정을 못 받았다 해도 그의 책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보면 좀 헷갈리기도 한다. 

완역이라는 말에 선뜻 집어들었지만 사실 쉽지 않은 책읽기였다. 특히 내가 관심없는 물고기를 자세하게 설명할 때는 그냥 글자만 읽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도 이런데 나보다 더 관심없고 상식이 부족한 딸이 과연 이것을 참고 읽어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읽고 나면 확실히 여운이 남는 책인데. 여하튼 완역을 읽어서 뿌듯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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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 아빠 시공 청소년 문학 26
마거릿 비처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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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책을 읽으면 자꾸 부모의 입장에서 해석하게 된다. 되도록 또래 독자의 입장에서 읽으려고 애써보지만 어느 순간 어른 입장으로 돌아가곤 한다. 다른 주제는 안 그런데 유독 성을 다룬 책이 그렇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드러내지 못하는 주제여서 그럴 수도 있고, 시간의 변화에 유독 영향을 많이 받는 주제라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때는 샘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그냥 줄거리를 따라갔는데 읽고 나서 샘과 약간의 거리를 둘 수 있게 되자 문화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구나를 절감한다. 우리나라 청소년 책에서 청소년의 임신을 다룬 책은 분위기가 하나같이 암울하며 그 자체로 커다란 문젯거리로 취급된다. 실수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여기서도 브리타니의 부모가 하는 말이나 행동을 보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브리타니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가면 아기 낳은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것이라며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 밖의 많은 부분에서는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우선 십대의 성, 특히 임신을 다루면서 남학생이 주인공이 되어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우리는 대부분 피해자는 여성이라는 등식을 기정사실화하고 피해에만 초점을 맞추지는 않나 싶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러한 도덕적 잣대를 일체 배제한 채 이미 임신을 한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그것도 아주 침착하고 담담하고 경쾌하게. 여자 친구인 브리타니가 아기를 입양보내려고 하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자기가 키우겠다고 한 샘과, 똑똑한 학생이었지만 실수로 아기를 낳게 된 클레어가 당당하게 현실을 헤쳐나가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우리나라 같으면 가문의 수치로 취급되어 얼굴 들고 못 다닐 텐데. 정말 문화가 아주 많이 다르다. 그렇다고 외국의 모든 사람들이 이 책에서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샘의 아빠가 샘을 교육하는 방식이다. 당장 학생이기 때문에 맥스를 키울 경제적 능력이 없기에 일단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고 나중에 갚기로 한다. 뭐, 그 정도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샘이 대학을 가고 싶어하자 그러면 맥스는 어떻게 키울 것이냐며 반대하는 부분은 요즘 우리 사회와 견주어 볼 때 많이 다르다. 그 정도야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들의 사고방식에 비추어 보면 오히려 우리가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주변에 재미교포인 분이 있는데 정말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는데도 왜 한 집에서 사느냐며 아주 의아해하는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그 밖에도 아이 키우면서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또 클레어가 아기에 관한 일을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엄마 간섭을 받는 것을 못 견뎌하는 부분이나 청소년 시기의 임신이라는 어찌보면 아주 커다란 일을 겪었는데도 부모는 전면에 거의 드러나지 않는 점들에서 문화차이를 느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사회가 마냥 부럽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쩌면 청소년들은 그럴 수도 있겠으나 아직은 그래도 우리가 커다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렇게 풀어가는 방식이 부러울 따름이다. 고등학생이면서 아기를 키우는 모습을 지나치게 비관적이지 않으면서도 현실을 외면하면서까지 낙천적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아기에 대한 의무감, 사랑과 청소년 시기를 잃은 것 같은 좌절감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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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파랑새 청소년문학 7
J.M.G. 르 클레지오 지음, 김예령 옮김, 박형동 그림 / 파랑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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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어린이 문학과는 가깝게 지냈지만(그나마도 아이 키우기 시작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일반 문학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에 매년 노벨문학상이 발표되더라도 그냥 누가 탔구나 정도에서 멈춘다. 그런데 2008년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만은 예외다. 자의에 의해서라기 보다 타의에 의한 것이 더 크지만 어쨌든 그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어린이 책이 몇 권 있어서 읽어봤던 것이다. 원래부터 있었는데 상을 받은 후 더 주목을 받았던 것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하튼 그렇게 그림책으로 몇 권을 만났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청소년 책을 만났다. 바로 이 책이다. 

습관적으로 언제 씌어졌는지(번역 출간된 것이 아니라 작가가 그 쓴 연도가 궁금해서 꼭 살펴본다. 시대적 배경도 작품을 '느끼는'데 많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살펴보는 편인데 이 책을 보니 몇 년 전에 나왔던 책이다. 즉 이번에나온 게 2쇄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만약 몇 년 전에 이 책을 봤다면 관심이 갔을까. 여기서는 작품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익숙한 이름에 나도 모르게 호의를 보이는 인식의 헛점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확실히 클레지오라는 이름을 보고 더 관심이 갔던 게 사실이니까. 

요즘들어 청소년 책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 책들에게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바로 아이들의 모습을 경쾌하고 빠른 템포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서 인생의 고뇌나 마음의 번민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아니, 있다고 해도 톡톡 튀는 대화나 짧은 문장으로 직설적으로 들려준다. 그에 반해 이 책은 내면의 감정을 상당히 많이 보여주고 있다. 전자가 외향적이라면 후자는 내성적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학교에 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냥 무작정 돌아다니는 륄라비의 뒤를 조용히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왜 학교에 가지 않느냐는 걱정도, 언제 돌아갈거냐는 의문도 감히 내뱉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게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륄라비는 학교로 돌아와 있다. 보통의 어른을 대변하는 교장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이제 조금 현실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아마도 나도 똑같은 그렇고 그런 어른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 책을 청소년들이 읽는다면 한동안 당황하지 않을까 싶다. 요즘의 책과는 이야기하는 방식이 너무 다르니까. 그러나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이고 피상적인 이야기만 다루는 책 말고 이런 책도 꼭 읽어서 문학이 어떤 것인지 느꼈으면 좋겠다. 사실, 내가 그랬다. 읽을 때는 좀 늘어지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건지 생각하느라 힘들었지만 읽고 나니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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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와줘, 제발 주니어김영사 청소년문학 1
엘리자베트 죌러 지음, 임정희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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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안타깝고 화 나고 걱정되는 갖가지 감정에 시달렸다. 그러면서 잠시 드는 생각이 청소년들의 폭력 문제는 어느 나라나 비슷하구나라는 것이었다. 한때는 특히 우리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기본적인 인성교육을 도외시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현상이 여러 나라에서 발생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만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마치 개인이 빈곤층으로 살아가는 것이 단순히 그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구조적으로 문제가 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학교 폭력의 실상을 다룬 청소년 심리소설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나온 책이라 그런지 정말 학교 폭력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우리와 지리적, 심리적 거리가 먼 독일의 이야기지만 일어나는 일은 어쩜 그리 똑같은지. 아무 이유없이 힘 없는 한 아이를 지목해서 괴롭히는 가해자, 보복이 두려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피해자 그리고 그 폭력이 자신에게 향할까봐 못 본 체하는 방관자, 이렇게 삼박자가 그대로 들어맞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피해자가 간 길은 우리의 현실과 약간 다르다. 바로 문화적 차이겠지. 만약 우리도 무기를 허용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라는 씁쓸한 생각마저 든다. 

그냥 평범했던 한 아이가 더 이상 누구도 손 대지 못할 만큼 문제아가 되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자살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폭력적인 게임을 전전하는 과정, 그리고 가족에게도 난폭하게 구는 일련의 과정은 문제아란 못된 행동을 일삼는 특정한 아이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른의 입장에서 봐서 그런지 폭력적인 게임을 하는 과정을 그렇게 자세히 묘사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심리적인 압박감을 나타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친구에게 폭력을 일삼고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피해자의 고통이 어떨지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법정에서의 행동을 보며 화가 치밀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도대체 라파엘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라파엘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중간에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아주 짤막하게 나오지만. 그런데 그런 라파엘이 감옥에서 비슷한 폭력을 당하고나서야 니코의 심정을 이해한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헌데 왜 라파엘이 안 됐다거나 안타깝지 않고 오히려 샘통이라는 생각이 드는걸까. 아마 청소년들도 이 상황에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잘못한 사람은 그렇게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작가가 그런 부분도 생각을 했더라면 하는 생각도 잠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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