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올림 8
이경화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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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남자지만 보통의 남자와 다른 어떤 한 남자가 있다. 그의 부모님은 상당히 진보적인 분이다. 생각도 진보적이고 말도 통한다고 생각한 아들은 부모님께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힌다.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그의 부모의 반응은 어땠을까. 진보적인 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지 화를 냈다고 한다. 몇 년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건만 왜 이처럼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일까.  

이 사회에서 아무리 생각이 앞서나가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남을 바라보는 시각과 내 일이었을 때의 시각은 다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확연히 구분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생물학적으로는 확연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게이나 레즈비언은 스스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데도 설마하는 마음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현이가 정신과에 다니다가 의사로부터 확답을 받았을 때 충격이었다는 말이 오히려 내게 충격이었다. 아, 처음엔 그 사실을 부정하기도 하는구나. 나는 정말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싶었다. 그제서야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면서 드는 생각 하나. 만약 내 주변에서 커밍아웃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성적인 반응을 보이리라고 확신하지 못하겠다. 남의 일이었을 때와 내 일이었을 때 동일한 잣대를 적용할지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내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다시금 의문을 가져본다. 정말 남자가 남자를, 혹은 여자가 여자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사춘기 시절에는 간혹 동성 친구에게 애틋하거나 아련한 마음을 갖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하지 말고 함께 살자고 굳게 약속하지만 조금 더 커서 애인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몰수하기 일쑤다. 그때는 그것이 참 야속했는데 돌이켜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보수적인 시각으로는 다행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현이는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커밍아웃을 했는데도 오히려 좋아하는 여진이가 있고 끊임없이 관심가지고 지켜보며 속으로 응원하는 엄마도 있고, 남은 삶을 주고 간 상요도 있으니까.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현이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자신도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가 덧나지 않고 내성을 키우는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 가장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현이 아버지조차 현이가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해준 계기가 되었다. 만약 현이 아버지가 그토록 지독한 마초가 아니었다면 현이 엄마가 이혼하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현이의 정체성이 탄로났을 때 상요 아버지처럼 반응했을 테니까. 

청소년 책에서 동성애를 다룬 책이 있던가. 스치듯 다룬 책은 있어도 이처럼 아예 대놓고 이야기하는 책은 없는 듯하다. 실제 있었던 사건을 기초로 하기에 작가가 자료조사를 해서인지 몰랐던 사실을 아는 기회가 되었다. 호모라는 말은 비하하는 의미가 있으며 정식으로 게이라고 써야한다던가 위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이 확인되면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깝고 미안했다. 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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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톨이 - 제8회 푸른문학상 수상 청소년소설집 푸른도서관 39
김인해 외 지음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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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부모의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고 자녀의 나이에 따라 시야가 달라진다고 한다. 내 경우를 보더라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아이가 초등학생일 때는 관심사가 초등학생과 관련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다가 중학생으로 접어들면서 좀 더 넓어졌다. 아직 고등학생이 되지 않았기에 막연히 고등학생이 되면 또 달라지리라 예상은 하지만 현재로서는 더 이상 새로울 게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은 인정한다. 여하튼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서 청소년용 책을 많이 읽었다. 그런데 이게 은근히 재미있다. 주로 초등학생을 주독자로 한다는 동화는 구성이나 소재면에서 생각하고 따질 게 많은 반면 청소년 소설은 아무래도 다양하고 자유로워서인지 훨씬 재미있고 느끼는 것도 많다. 내 아이를 이해할 통로를 찾는 것과 별개로 내가 즐기기 위해 읽은지 오래되었다. 

세 편의 이야기가 모두 따스하다. 첫 번째 이야기인 <외톨이>의 경우 따스하다기 보다 싸한 아픔이 있지만 나머지 두 개의 이야기는 확실히 따스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싸한 아픔이 느껴지는 첫 번째 이야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왜일까. 억지로 봉사활동 갔다가 진짜 좋은 마음으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걸 알고 뿌듯해하는 석이를 보며 더불어 산다는 건 꼭 거창한 목표를 갖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스함이 느껴지는 대신 여운은 오래 남지 않는다.  

새엄마에게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해서 사사건건 삐딱하게 바라보지만 결국 새엄마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모습에선 안도감마저 느껴진다. 가족의 형태가 많이 바뀌고 있다던데 이런 이야기에서도 그런 걸 감지할 수 있다. 이번 푸른문학상 동화 수상작 중에서도 새엄마를 받아들이는 이야기(<하늘에 세수하고 싶어>)가 있던데 여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게다가 새엄마의 특징이 비슷하고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도 비슷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새엄마와 이처럼 새로운 관계를 엮어가는 이야기는 있는데 새아빠를 받아들이는 어린 주인공 이야기는 흔치 않다. 아직까지 핏줄의 개념이 있어서 그런 걸까.  

이제 아껴두었던 첫 번째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왜 이토록 이 이야기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아마도 안타깝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로 친구를 잃은 시욱이의 행동이 안타깝고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당하다 결국 외톨이가 되는 재민이가 안타깝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속마음과는 반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시욱이의 상황이, 그게 현실이기 때문에 안타깝다. 마녀사냥을 하듯 옮겨다니는 '말'이, 그걸 즐기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것이 현실을 그대로 그리고 있기에 더욱 안타깝다. 그리고 이들의 왜곡된 관계가 제대로 풀어지지 않아 안타깝다. 왜 재민이는 시욱이를 무시했을까. 왜 시욱이는 재민이에게 자신의 기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시욱이는 자신의 비겁함 때문에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지만 재민이는 시욱이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둘은 제대로 된 '대화'라는 걸 하지 않은 듯하다. 그러기에 이처럼 단순한 오해로도 그 지경이 되지. 이것은 비단 시욱이와 재민이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가끔 피상적인 이야기만 하며 친구관계를 유지하는 딸에게 너희들은 도대체 진지한 이야기를 왜 안 하느냐고 푸념하곤 한다. 그러면 딸은 그런 이야기하면 친구들이 싫어한다고 말한다. 대신 진지한 대화가 가능한 친구가 있단다. 생각도 깊고 자기주장도 확실한 친구라며 진지한 고민거리는 그 친구와 이야기하는 눈치다. 딸에게 그런 친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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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도시 반올림 23
존 그린 지음, 김민석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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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으면 여러 생각을 많이 한다. 문화차이라는 것도 느끼고 세대차이도 느끼면서 말이다. 외국 작가의 책을 읽으며 때로는 부러워하고 때로는 동경하기도 하는데 이처럼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도 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기쁨도 있다. 

마고와 쿠엔틴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웃집에 살기 때문에 친하게 지낸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라고 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다. 차라리 '어린 시절에는'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쿠엔틴과 마고는 어렸을 때는 친했지만 자라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간다. 부모의 보살핌과 관심속에 모범생으로 생활하는 쿠엔틴과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다 자신의 의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하는 마고는 서로 같은 곳에 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활한다. 쿠엔틴의 부모는 계속 마고의 부모가 부모 노릇을 제대로 못한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다. 도대체 마고 부모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튼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쿠엔틴의 일생에서 아주 획기적인 일을 겪는다. 긴 인생에서 보자면 잠깐의 일탈이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의 쿠엔틴의 생활 모습과는 너무 다르기에 많이 혼란스러워한다. 문제는 단순히 마고와 벌인 한밤중의 모험이 아니라 그로 인해 쿠엔틴이 변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남의 일에 최대한 간섭하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지냈던 쿠엔틴이 드디어 다른 사람의 일도 신경쓴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라진 마고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기까지 한다. 사실 마고를 찾기 위해, 마고가 남긴 실마리를 찾기 위한 과정은 좀 지루하다. 그게 그토록 의미있는 단서일까, 소설이니까 작가가 의미를 두었을 뿐 독자에게는 그다지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고나 할까. 차라리 그 와중에 조금씩 변하는 쿠엔틴의 모습과 친구들의 모습이 더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문화 차이를 느낀 부분은 어디일까. 우선 가출을 해서 신고를 하지만 형사가 마고에게 집으로 돌아오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는 부분이다. 우리 같으면 가출한 청소년에게 그렇게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또 하나는 그처럼 먼 곳에서 혼자 살기 위해 훌쩍 떠나는 마고의 행동을 이해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는 점이다. 내가 아무리 청소년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아량이 넓은 척 해도 마고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나를 더 많이 버려야 할 듯하다. 이게 과연 문화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세대 차이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단지 소설속에 등장하는 독특한 캐릭터일 뿐인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으로는 이미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읽으니 신기하게 느껴지는 그들의 운전하는 모습과 파티 문화다.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고등학생들이 차를 끌고 다니는 것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니까. 

문제는 그들이 차를 몰고 가면서 하는 행동들이다. 시간을 최대한 아끼기 위해 차 안에서 소변을 병에 해결하고 그것을 밖으로 내던지는 행동이나 차를 멈추지 않은 상태에서 운전자를 바꾸는 행동이 왜 그리 거슬리던지. 마치 영화에서 말도 안 되는 장면이 펼쳐지는 듯했다. 물론 소설이니까 얼마든지 모험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지만 이건 그래도 청소년이 읽는 소설 아닌가. 그렇다면 무모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어느 정도 제거해야 하지 않았을까. 만약 우리 작가의 소설이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외국 작가들은 그런 것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가 보다(때로는 그런 것들 때문에 외국 작가의 책을 읽으며 통쾌해 하기도 하고 무릎을 치기도 한다. '바로 이런 거야.'하면서). 그래서 문화 차이를 느낀다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세대 차이도 느낀다는 것이다. 어쩌면 청소년들에게 그런 것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괜히 별별 걱정을 다하는 어른이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청소년 또래였다면 이처럼 걱정하는 어른을 보면 분명 지나친 걱정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청소년을 이해해야 한다는 이성적인 나와 자식을 키우는 부모로서의 내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심오한 이야기들을 마고나 레이더의 입을 통해 자주 이야기하지만 다른 걱정거리들 때문에 거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나마 생각나는 것이 있다면 평면적인 종이 도시에서 별다른 생각없이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그곳에 있기를 거부하는 마고와 친구란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있는 그대로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레이더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 말하는 종이 도시란 지도 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시라고 한다. 지도 제작자들이 일부러 만들어 놓은 도시란다. 아, 문화 차이를 느끼는 부분이 또 있다. 여기에는 상당히 많은 지명과 그 나라의 현재의 모습이 나오는데 지도상으로만 그 나라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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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하詩겠습니까 2 - 중학생이 사랑하는 시 아침이슬 청소년 13
이상대 엮음 / 아침이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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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에서 올해 청소년들이 쓴 시와 수필을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발제를 우연히 내가 맡게 되었다. 당시는 쉽지 않은 주제로 여겨져 부담이 되었지만 발제 책들을 읽으며 내가 발제를 맡게 된 걸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발제를 맡지 않으면 대충 보게 되는데 '어쩔 수 없이' 비교적 꼼꼼하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청소년들이 쓴 소설집 <로그인하시겠습니까?>를 만났고 이어서 이 책도 만났다. 만약 내가 발제를 하지 않았으면 관심도 없었을 테고 이런 책이 나왔는지도 몰랐을 것 아닌가. 

여러 차례 밝힌 적이 있지만, 책을 좋아하지만 가장 안 읽는 분야가 바로 시집이다. 시집을 어쩌다 읽고 나면 괜찮다, 그러니 앞으로는 자주 읽자라고 다짐하지만 그게 쉽지 않다. 일단 끌리지 않는데 어쩌랴.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내용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간혹 뒤통수를 맞은 듯한 느낌이 드는 시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아주 가끔이다. 청소년인 딸도 시는 좋아하지 않는다. 하긴 나도 그랬다. 교과서에 나온 작품만 간신히 읽는 정도였으니 딸에게 시를 읽으라고 권하지도 못하겠다. 그런데 중학생들이 시를 읽고 느낀 글을 모은 책이라니 우선 궁금했다. 아니, 시를 좋아하는 애들도 있나 싶어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기특하면서 부러웠다. 얘네들은 어쩌다 시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런데 내막을 알고 보니 얘네들도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시대의 중학생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신서중학교 학생들은 특별한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인생에서 아주 귀한 경험을 했다는 점이다. 후기에서도 나오고 느낌에서도 가끔 나오듯이 아이들도 처음에는 시 공책 쓰는 걸 부담스러워했단다. 하긴 무엇이든 시켜서 하는 건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아이들도 처음엔 싫었지만 자꾸 쓰다 보니 시가 좋아지고 좀 더 일찍 이런 걸 했으면 하는 아쉬움마저 들었던 것이다. 시간이 날 때 시집을 꺼내 읽으면 마음이 정리가 된다거나 가방에 항상 시집 한 권이 들어있다는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도서관에 가서 시집을 들춰보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가.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도 자신의 경험과 결부될 때 느낌이 남다르다. 그건 각 시를 읽고 느낌을 적은 글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엄마와 싸우고 나서 읽은 정채봉의 '엄마'라는 시가 눈에 들어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모습은 어른으로서 청소년을 이해하게 해준다. 사실 한창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글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책도 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지 말하지 않을 뿐인데 그들을 생각없이 행동한다고 치부한 건 아닌가 싶다. 어떤 학생은 자신을 본성이 사악하다고 말하는데 이런 시 공책이 아니면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어찌 보면 자신과 만나는 글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아픔도 치유되지 않을까. 그리고 가끔은 아주 풋풋한 사랑앓이를 하는 모습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당사자는 아플 텐데 웃어서 미안하군). 

나 혼자 여기 있는 시들을 읽었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느낌들을 청소년들을 통해 많이 느꼈다. 오히려 이들의 감상글을 읽으며 많이 배웠다. 시는 이렇게 읽으면 되는구나하고 말이다. 청소년들이 쓴 시와 수필, 소설을 읽으며 들었던 생각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런 기회가 얘네들처럼 특별한 선생님을 만난 아이들만 누리는 특권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청소년들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점이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때로는 치유할 수 있어서 좋고 어른들은 청소년들을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 이런 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에만 매달리는 현재의 모습이 변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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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 동백꽃 (양장) 클래식 보물창고 6
김유정 지음 / 보물창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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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에 으레 읽어야 할 단편 중 하나가 바로 김유정의 작품이다. 그 옛날, 청소년 시절에 읽었던지라 어렴풋이 생각나던 작품을 요즘 찾아 읽고 있다. 딸에게 읽으라고 해야하는데 옛말투 그대로의 작품은 읽기 어려워하니 요즘 청소년들이 읽을 만한 작품을 찾고 있던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산뜻하게, 그야말로 요즘 취향에 맞춰 나왔으니 일단 다행이다. 말투 자체를 바꿀 수는 없기에 주석을 달아주었으니 이해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은 없다. 물론 뒤의 부록을 찾아가며 읽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 그 정도의 수고는 감수할 수 있다. 때로는 내용으로 뜻을 유추할 수도 있으니 몰랐던 우리말을 새롭게 아는 재미도 있다고 하면 좀 심한 걸까. 

어쨌든 김유정의 작품 8편을 만났다. 지금 기억으로,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걸었기에 김유정의 작품 중 보편적인 두어 개만 읽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일부러 김유정의 작품을 찾아 읽은 기억은 없다. 그래서 상당수의 작품이 처음 만난 것들이다. 

김유정은 20세기 초에 태어나 중반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으니, 일제강점기를 고스란히 지냈다. 김유정 작품에서 유독 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 이유를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농민은 아무리 힘들게 일해도 굶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수탈의 대상이었던 시절에 농촌에서 지냈으니 농촌이 주된 대상일 수밖에 없다. 작품 하나하나가 모두 어쩜 이리 궁핍한 생활을 할까 싶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하니 현실 비판적인 이러한 이야기를 쓰는 게 당연해 보인다.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이래야 한다느니 이런 건 바꿔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슬쩍 눙치며 넘어가는 듯하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사회적 모순과 농촌의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특히 농사까지 내팽개치고 일확천금을 얻기 위해 금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시 상황을 잘 나타낸다. 또한 인간의 이기심과 간사한 마음을 인물의 행동을 통해 너무 잘 표현했다. 특히 <금 따는 콩밭>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인간의 모든 면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대가 앞으로 나아가면 모든 것이 발전하고 새로운 걸 발견한다고 하는데 우리 근현대 단편을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하다. 내가 문학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린지는 모르겠으나 기교는 발전했을지 몰라도 그 외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청소년기에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그냥 읽었는데 나이가 드니 그때 읽었던 단편들이 문득문득 생각난다. 그렇다고 당시 엄청 감명 깊게 읽었던 책도 아닌데 말이다. 그만큼 생각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나 보다. 그러니 지금 청소년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들이나 나나 일제강점기를 거친 게 아니니 책에 나오는 상황을 온전히 가슴으로 이해 못하는 것은 똑같을 게다. 딸에게 틈만 나면 이러한 소설을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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