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내 말 좀 들어 주세요 - 어느 날 갑자기 가십의 주인공이 돼 버린 한 소녀의 이야기
세라 자르 지음, 김경숙 옮김 / 살림Friends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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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키우는 부모로서 가장 상상하기 싫은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디에나가 겪은 일일 것이다. 어렸을 때도 물론 불안하긴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불안함이 아이가 크면서 늘어난다. 그래서 딸이 생리를 시작했을 때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그런 것이었다. 더구나 요즘은 성문화가 개방되어서인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아직 어려서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하나의 일로 인해 생겨날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철없는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디에나의 오빠와 스테이시가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하면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일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흔히 미국인들이 성에 대해 상당히 개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디에나가 한때의 실수로 인해 겪게 되는 괴로움을 보면 어느 나라든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소문이 나고 그것으로 가족들이 괴로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아냥의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디에나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당당히 이야기하는 것이나 가족들과 나누는 대화를 보면서 우리와는 문화가 참 다르다는 것 또한 느꼈다. 만약 우리나라였다면 그러한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간혹 비슷한 주제를 가진 청소년 책을 만나긴 했지만 풀어가는 방식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대개 부모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아니면 디에나의 아빠처럼 부모가 아이에게 실망해서 외면하더라도 그러한 걱정의 주체는 부모가 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처럼 일을 겪은 아이 자신이 문제를 끊임없이 되짚어보고 자신의 상처를 보듬어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우리 청소년 문학에서는 주인공을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열세 살에 겪었던 일로 3년간 마음 고생을 하며 자존감이 낮아질 대로 낮아진 디에나가 자신을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과정을 그린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한 것은 친구 리와의 대화에서 종종 드러난다. 만약 리 같은 애였다면 남자 친구도 사귈 수 있었을 것이고 더 좋은 곳에 취직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나 안타깝던지. 결국 디에나는 자신의 문제, 토미와의 일을 3년이 지난 후에야 해결하고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친구와도 잘 이야기되는 것으로 끝난다. 솔직히 여기서 토미와의 일을 해결하는 방식이 좀 의외였고 당황스러웠다. 이게 바로 문화의 차이라는 것이겠지. 그래서인지 디에나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정교하고 세련된 문체이긴 한데 행간의 의미가 너무나 많아서(간혹 외국영화를 보면 상황설명을 굳이 하지 않고 몇 마디 대화로 수많은 것을 알려주는 특유의 위트가 생각난다.) 그것을 다 이해하는 것은 무리였나 보다.  

내가 부모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자꾸 디에나 부모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들이 조금만 디에나에게 신경을 써 주면 안 되었을까, 조금만 더 사랑을 표현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디에나도 그것을 계속 갈구했는데 그들은 외면했다. 특히 아빠가. 물론 아빠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인공이 디에나이다 보니 독자는 자꾸 디에나 편에서 생각하게 된다. 나중에는 아빠도 조금 변했고 더 변할 것을 암시하고 끝났지만 과연 정말 그들의 문제가 해결된 것일까 의문이 든다. 서로 시원하게 말을 하지 않았고 함께 고민한 흔적도 안 보인다. 그래서 분명 해피앤딩이 분명한데도 뭔가 떨쳐버리지 못한 어떤 것이 남는다. 확실한 것은 대런과 스테이시가 부부로서 잘 헤쳐나갈 것과 디에나가 자존감을 회복했다는 정도. 물론 인간에게, 특히 청소년에게 자존감 회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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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 노래 푸른도서관 30
배봉기 지음 / 푸른책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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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일종의 거석문화에 속하는 모아이 석상의 표지 그림이 먼저 눈에 띈다. 아주 오래 전에 이처럼 거대한 돌을 저런 곳에 어떻게 세웠는지, 그리고 왜 세워 놓았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모아이 석상. 남태평양의 자그만한 섬인 이스터 섬이 그래서 더 신비롭게 다가온다. 그런데 여기서 그 모아이 석상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도 약간의 진실에 허구를 섞어서. 물론 진실에 약간의 허구를 섞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작가가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적 허구를 넣었다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만약 이것이 상당히 사실에 의한 기록이라면 아직 밝혀지지 않았던 '왜'라는 부분이 밝혀진 셈이다. 

이야기는 낯선 배가 섬에 정박해서 섬 주민들에게 대화를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섬의 사제 중 한 명이자 족장인 서술자가 그것을 반대하며 주민들을 결집시키기 위해 '대 구송회'를 제의한다. 예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 이방인들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문득 우리나라에도 이양선이 수없이 많이 왔었다는 기록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이 19세기일 뿐이지 그 전에도 그러한 배는 많이 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섬인 이스터 섬(이 이름도 네덜란드인에 의해 지어진 이름이다.)에 낯선 배가 도착한 것은 우리의 그것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다. 아무래도 지리적으로 접근하기가 어려울 테니까.  

여기서 낯선 배가 나타난 때는 서양이 막 식민지를 찾아다니고 피부색이 검은 사람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넘기는 노예 무역이 한창이던 시기다. 노예 무역이 횡행하던 때라는 배경만 가지고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대 구송회는 실패하고 어쩌다가 이방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꼴이 되면서 결국 섬의 남자는 대부분 잡혀가고 만다. 그리고 그 중 한 사람, 즉 서술자는 간신히 살아서 이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겼다'가 아니라 '남기게 되었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원주민이 남긴 것이 아니라 그가 농장에서 노예로 있을 때 주인집 아이에게 해준 이야기를 그 아이가 자라서 남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온전히 쓴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지해서 적은 것이기에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그래서 작가가 거기에 살을 붙인 것이라는 얘기다. 

그 '대 구송회'라는 것은 일종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겠다. 섬의 역사를 노래처럼 불러서 세대에서 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문자가 없을 경우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셈이다. 그래서 중간 부분은 바로 그 역사가 나온다. 아, 그래서 이스터 섬에 거대한 석상이 세워졌구나. 우리가 지금 보기에는 마냥 신기하기만 한 것이 사실은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바탕이 된 것이다. 그것도 그냥 좋은 의도에서의 땀이 아니라 전쟁의 일환으로. 그러니 얼마나 비참하고 안타까운 문화인가.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것을 보고 감탄한다. 문득 당시는 백성들에게 강제 노력을 시켜서 어떤 것을 만들면 아주 못된 것이지만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르면 그것이 가치 있는 문화로 평가받는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작가가 허구적 요소를 얼마나 집어 넣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모아이 석상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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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선생님과 함께 읽는 세계 명작 2 생각이 자라는 나무 17
강혜원 외 지음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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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청소년 시기였을 때보다 지금이 고전을 훨씬 더 많이 읽는다.(대신 훨씬 빨리 잊는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그와 관련된 모임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어쨌든 상당히 고무적이다. 특히 이 책(1권보다 2권)에서 언급하는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 괜히 뿌듯하다. 어쩌면 그래서 (1권보다)이 책의 내용이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돈 키호테>를 읽으며 교과서에 나왔던 일부의 글이 오히려 전체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는데 방해가 되었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그것은 아주 일부일 뿐이며 돈 키호테를 이해하기 위해 턱없이 부족하고 아니, 오히려 오해하게 만들고 작가의 위트와 풍자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 이 책을 왜 고전이라 칭하는지 절실히 깨닫기도 했다. 문득 여기서 <돈 키호테>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읽다 보니 그 때의 감동이 다시 떠올랐다. 

글 중간중간에 들어 있는 정보들이 가끔은 본문의 내용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작품 이외의 정보들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사실 책이란 수많은 독자가 자기 방식대로 느끼는 바가 다르고 따라서 읽히는 방식도 다를 수 있다. 그러기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대로 느끼지 못했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떤 책들은 작가가 살아있을 때는 외면을 당하다가 나중에야 빛을 보는 경우도 있잖은가.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차이는 차치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읽히는 방법이 다를 수 있고 문화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내가 읽었던 방식과 비교하며 읽는 재미도 있었다. 역시 이 책을 읽기 전에 여기서 소개하는 고전을 먼저 읽는다면 얻는 게 훨씬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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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선생님과 함께 읽는 세계 명작 1 생각이 자라는 나무 16
강혜원 외 지음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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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작가나 작품에 대한 정보가 잘 되어 있다. 논술을 대비하기 위해서겠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책을 읽는 것보다 당시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를 알면 작품을 이해하는 폭이 훨씬 더 넓어지리라 본다. 그런데 만약 그 정보에 관련된 것만 모아 놓았다면 어떨까. 한편으론 책을 읽지 않아도 알 수 있도록 떠먹여 주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책을 모두 읽었다는 전제하에)많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든다. 

바로 얼마 전에 딸과 함께 <제인 에어>를 읽었던 터라 이 책의 목차에서 그 제목을 발견하는 순간 괜히 반가웠다. 물론 전에 읽었던 책에서 작가나 작품에 대해서 자세하게 읽었지만 이렇게 따로 나올 정도라면 더 자세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뭐, 그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준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 부분 충족시켜준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는 좀 뻔하다 싶게 저자(고전의 원저자가 아니라 국어 선생님들)의 주관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청소년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문제를 거론한다. 

고전이라고 일컫는 책들은 오랜시간 동안 읽히며 인정받아 온 책들이다. 따라서 단편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을 여기서도 종종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시대적 상황을 설명하면서 작가에 대한 것도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기 때문에 작품과 작가, 그리고 시대상황까지 알 수 있다. 다만, 이 책을 읽기 전에 원래의 고전을 먼저 읽어보길 권한다. 내 경우도 읽었던 책에 대한 것을 읽는 것과 그렇지 않은 책에 대한 설명을 읽는 것에 많은 차이가 있었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이 책을 빠른 시간 내에 고전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확장된 지식을 넓히는 도구로 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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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피도 안마른 것들 인권을 넘보다 ㅋㅋ - 청소년인권 이야기
공현 외 지음 / 메이데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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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머리를 만지기 위해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치장하는 딸을 보며 속으로만 구시렁댄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 딸의 권리라는 생각에 그냥 넘긴다. 하지만 치마가 껑충 올라간 것을 볼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말로는 치마 허리가 너무 커서 어쩔 수 없다지만 그걸 쳐다보는 나로서는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다. 분명 무릎 위로 살짝 올라가는 것이 예쁘지만 그러면 걸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뒤통수에 대고 한 마디 한다. '조심해!'라고. 사실 내가 보기에도 치마가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것과 위로 올라가는 것의 차이는 확연하다. 그러니 한창 민감한 아이들은 오죽할까. 그럴 때면 꼭 이렇게 복장을 일일이 간섭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특히 학교에 입학하기 전 소집일 때 가져온 안내장을 읽는 순간 답답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척 많았고 웬 규정은 그리 까다로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적응'된다. 아이도 나도. 

현재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중등교육이 지나치게 경쟁적이며 또한 지나치게 규율을 강조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리고 청소년들의 인권을 아주 많이 침해한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의 모순과 위험성을 인식한 것이 비단 부모의 입장에서 책을 읽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부당함을 인식하고 있고 바뀌었으면 하는 것도 있지만, 누군가가 바꿔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내 아이가 아닌 누군가가 말이다. 마치 우리나라가 암울한 시기였을 때 대학을 보내는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가장 흔한 말이 '데모하지 말아라'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때 누군가가 데모를 하고 시위를 했기 때문에 민주화된 지금(많이 후퇴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때보다 많이 변한 것은 사실이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청소년인권 문제도 나중에 그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까.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볼 일이 있다.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책임이 뒤따른다. 그런데 요즘 청소년들이 과연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는지 의문이다. 휴대전화 압수를 예로 들었는데 만약 휴대전화를 그냥 학생이 가지고 있게 하면 정말 필요할 때만 보고 스스로 자제할 수 있을까. 내 딸을 보건대 그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보인다. 수업 시간에 수시로 문자를 보낸다면 그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 수업에 집중하는 것이 좋고 어쩌고를 떠나 앞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한 기본 예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의 교사들이 권위주의적인 것은 사실이다. 권위는 없고 권위주의만 있어서 청소년들에게 질타를 받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무조건 청소년들의 인권만 강조하며 해결하기에는 이른감이 있어 보인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청소년들은 참 통쾌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글쓴이가 청소년인지 모르겠으나 논리의 허점이 종종 드러났다. 추측형 어미를 쓰며 그것이 마치 사실인 양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만약 이 글을 쓴 사람이 어른이라면 청소년 또래의 자녀가 있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과연 자녀의 학교생활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해줄까 내지는 여기서 이야기한 그러한 학교생활을 보며 어떻게 행동할까. 모든 것은 내가 그 안에 있을 때와 밖에서 바라볼 때 입장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만약 내가 청소년 시기에 이 책을 보았다면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이미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로 접근을 하다보니 상당부분 불편했다. 때로는 옳은 이야기임에도 속으로 '아직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거야'라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그러나 제도적인 문제점을 지적할 때는 나도 덩달아 통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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