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 쓰고 싶다면 글을 많이 써 보는 것 이외에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

 

 

첫째, 독서광이 되려고 노력할 것.

 

 

둘째, 좋은 품성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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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잃을수록 아는 것이 많아진다. 아는 게 많을수록 텍스트를 빠르게 독해할 수 있고 정확하게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를 독해하고 요약하는 데 능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는다. 그러면 글을 잘 쓸 가능성 또한 높아진다. 그래서 많이 읽지 않고는 잘 쓸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독서광(讀書狂)이 되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고 타고난 재주만으로 글을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 쓰는 기술만 공부해서 잘 쓰는 사람도 물론 없다.(79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우선 독서광이 되어야 하겠다. 재주와 기술만 가지고 글을 쓰는 건 아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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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자 연구자들에 의하면 소크라테스는 레토릭에서 실패했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의 전형인 ‘너 자신을 알라!’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대단히 불쾌하게 하는 어법입니다. (...) 상대방을 설득해야 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와의 대화가 기쁜 것이어야 합니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서는 인간관계에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54~55쪽)

 

- 신영복, <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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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고 싶다면, 좋은 품성을 가져야 하겠다. 자신의 지식과 도덕성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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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곡자는 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그것이 성(誠)이라고 했습니다.(55쪽)

 

- 신영복, <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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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좋은 그릇에 담아서 상대방에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것”

 

 

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이런 게 아닐까?

 

 

인터넷 블로그에서 누군가가 쓴 어떤 글을 읽고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를 가정해 본다.

 

 

“A 님, 그 글은 무엇을 배경으로 쓴 글인지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님의 생각이 잘못된 것 같아서요.”

 

 

또는,

 

 

“A 님, 그 글에 대해 제가 반박하는 글을 써 보겠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하는 것. 이런 게 좋은 그릇에 담은 언어의 예가 될 듯.

 

 

어느 시인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다. 비판의 글을 쓰더라도 글에서 누군가를 향해 독화살을 직접 쏘지 말라고. 그렇게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어느 알라디너가 쓴 리뷰가 생각난다.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에 대해 쓴 리뷰인데 그 리뷰에는 저자의 글 중 어느 대목을 비판하는 글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독자로서의 불쾌감을 드러내지 않았을뿐더러 거칠지 않고 부드럽게 참 잘 썼다. 저자의 잘못된 생각을 정확히 지적하면서 그것 때문에 아쉬웠다는 점을 말할 뿐이었다. 저자가 그 글을 보더라도 뭐라고 따질 수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 글 속엔 정중함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리뷰를 읽고 ‘글은 이렇게 쓰는 거구나.’ 하고 감탄하며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 용기를 내어 댓글을 남겼다. (일 년이 넘은 일로, 내가 어느 페이퍼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결국 글을 잘 쓰고 싶다면 필자의 ‘사고’뿐만 아니라 ‘품성’도 중시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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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는 분명 언어 자체의 개념적 의미와 함께 언어 외적인 정서도 함축되어 있습니다. 삶 속에서 경작된 그 사람의 인품과 체온 같은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각 단어의 문자적 의미가 아닙니다. 단어들이 만들어 내는 언술言述이 더 중요합니다. 언어도 결국 언술을 구성하는 요소에 불과합니다.(55쪽)


- 신영복, <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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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리뷰에서 나는 그 알라디너의 인품과 체온 같은 것을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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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16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 외적이 정서가 담긴 점. 분명합니다. 내용전달만이 언어의 목적이 아닐진대 우리는 지면 위에서든 지면 밖에서든 유려하지 못한 경우가 많지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어제 모임에서 어느분의 그런 달갑지않은 태도, 즉 언어 외적인 정서,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 일이 잠시 있었거든요. 나를 돌아보게되더군요. 그럼에도 아직 거칠지만요.

페크pek0501 2015-05-16 16:04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혹시 제가 앞으로 글쓰기에 품성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잊고 쓴 듯한 글을 쓰게 되면 프레이야 님이 저를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일침을 가해 주세요.
고럴 땐 창피하니까 비밀댓글이면 더욱 감사하고요. ㅋㅋ 그러면 자기 성찰의 시간을 갖고 고치겠습니다.

제가 훗날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까 봐,
이런 페이퍼를 올렸다는 사실조차 잊을까 봐 걱정입니다.
요즘 기억력이 얼마나 나쁜지... 에고...

stella.K 2015-05-16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작가는 바르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ㅋㅋ

페크pek0501 2015-05-17 14:55   좋아요 0 | URL
그건 스텔라 님이 겸손해서가 아닐까 해요. ㅋㅋ

<밤이 선생이다>라는 책은 잘 쓴 에세이가 많아요. 단 하나, 옥의 티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거야 뭐, 나중에 개정판 낼 때 고치면 되지 않겠어요.
저 같으면... 처음엔 이렇게 썼는데 독자의 지적을 받고 나니 내가 놓친 부분이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러면서 고쳐서 실을 것 같아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함으로써 겸손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잖아요.

제일 위험한 것은, 나도 틀릴 수 있다 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태도 같아요.
위대한 철학자도 사상가도 옥의 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요.
우린 신이 아니고 인간이니까요.
아니, 신도 틀릴 때가 있었을 거라고 봐요. ^^

돌궐 2015-05-17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5-05-17 14:49   좋아요 0 | URL
환영합니다.

좋은 글로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가끔이라도 들러 주셔서 댓글을 남겨 주시면 저로선 고마운 일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2015-05-19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5-20 13:13   좋아요 0 | URL
하하~~ 웃겠습니다.
닉네임이 두 개이신 분,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아마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인터넷 공간에선 비밀이 없답니다. 신상 털기가 일어나기도 하는 곳이잖아요.

어쨌든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책을 읽다 보면 이 책과 저 책의 주장이 달라 헷갈릴 때가 있다.

 

 

옳은 편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과 반대라고 볼 수 있는 다음의 글을 읽을 때에도 헷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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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건 우리는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야 한다. 그들이 옳지 못할 때에라도 그렇다. 하지만 그들도 억압자들과 똑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175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

 

 

그런가? 모르겠다. 어떻게 옳지 못한 때에도 그편에 설 수 있단 말인가?

 

 

‘악의’가 아니라 ‘무지’인 것이 문제가 될 경우에 그렇다는 것인가?
 


우리가 비난해야 할 것은 ‘악의(惡意)’이지 ‘무지(無知)’가 아니기 때문인가?

 

 

‘무지’는 죄가 아니기 때문인가? 오히려 연민을 가져야 하기 때문인가?

 

 

살아갈수록 확신할 수 없는 게 많아지는 것 같다. 

 

 

어렵다.

 

 

다음의 글로 위로를 받아야 할까?   

 

 

..............................
어느 것에 대해서도 깊이 천착하지 않은 자만이 확신을 가질 수 있다.(186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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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 첫 시간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나는 자주 사람을 두 종류로 대별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당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과 반대로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비굴하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오만한 사람입니다.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주변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조합(combination)은 없습니다. 강한 사람한테 비굴하지만 약한 사람한테 관용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원칙 없이 좌충우돌하는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135쪽)

 

 

 

 

 

 

2.
재소자들의 문신은 대개 서툴고 조악합니다. 이런 문신이나마 넣는 이유가 벌레들의 문양과 다름이 없습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입니다. 호락호락하게 보이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감옥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재소자들은 바깥에서도 그런 환경에서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교도소 재소자들의 문신은 자기가 험상궂고 성질 사나운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위악’僞惡입니다. ‘위선’僞善과는 정반대를 겨냥하고 있습니다.(266쪽)

 

 

 

 

 

 

3.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 의상은 의상이되 위장僞裝입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그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시위 현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있습니다. 붉은 머리띠, 문신입니다. 단결과 전의戰意를 과시하는 약자들의 위악적 표현입니다. 강자들의 현장은 법정입니다. 검은 법의法衣의 엄숙성과 정숙성이 압도합니다. 시위 현장의 소란과 대조적입니다.(268쪽)

 

 

 

 

 

 

4.
문제는 위선이 미덕으로, 위악이 범죄로 재단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강자의 논리입니다. 테러는 파괴와 살인이고 전쟁은 평화와 정의라는 논리가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은 강자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이란 모순된 조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270쪽)

 

 

 

 

 

 

5.
약자의 위악은 잘 보이지만 강자의 위선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보지 못합니다.(273쪽)

 

 

 

 

 

 

6.

그러나 윌리스는 결론 부분에서 이야기합니다. (...) 기존 체제의 위선에 대한 저항이 그 사회를 개혁하는 동력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다시 그 체제의 효과적인 작동에 봉사하게 되는 역설에 마음 아파합니다.(275쪽)

 

 

 

 

 

 

7.

아우슈비츠에 대한 최고의 증언자로 평가받는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이야기합니다. 아우슈비츠를 운영하고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 보통 사람이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그것이 일부 괴물들에 의해서 자행된 것이었다면 얼마나 다행한 것일까 하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요점은 위선과 위악의 베일을 걷어내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들은 실패하고 있습니다.(276쪽)

 

 

 

 

 

 

8.

화려한 무대와 의상, 오디오와 비디오의 현란한 조명, 그리고 수많은 언설이 만들어 내는 환상 속에서 우리가 그 실체를 직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실패의 더 큰 원인은 이러한 장치가 아니라 우리들의 인간 이해의 천박함에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애증을 고르게 키워 가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노력이 부족함을 탓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공부는 우리의 동공을 외부로 향하여 여는 세계화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향하여 심화하는 인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276쪽)

 

 

 


신영복, <담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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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5-09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빠른 시간안에 주문할 책.^^.아직 리딩중에 있는 책 너무 많아서요 ..잘 읽었어요.

페크pek0501 2015-05-10 12:40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이 책은 구입해 놓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거든요. 일부만 읽어도 배불러지거든요.

저도 읽고 있는 책이 많아서, 사고 싶은 책의 4분의 1만 사게 되는 것 같아요.
읽을 책은 많고 시간은 부족하죠.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세실 2015-05-09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당당하고, 약한 사람에게 관대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은 합니다^^ 이책 독서클럽 토론도서라 반갑네요~~~

페크pek0501 2015-05-10 12:41   좋아요 0 | URL
세실 님은 부럽단 말이야... 하하~~ 든든한 직장에다가 독서클럽의 취미까지...

제가 부러워하는 분들 몇 분 안에 드십니다. 세실 님은...

저도 님 가까이 살아서 끼고 싶네요. 독학하는 것엔 한계가 있는 것 같거든요.

2015-05-10 17: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5-10 19:07   좋아요 0 | URL
하하~~ 제대로 베끼기도 어렵군요. 잘 지적하셨습니다.

3번의 글. 오타였어요.
˝위악이 약자의 의상衣裳이라고 한다면, 위선은 강자의 의상입니다.˝로 바르게 고쳤습니다.

이렇게 지적해 주시는 분이 계셔야 합니다.
저도 읽을 책이 쌓여 있는데도 이 책은 꼭 사야돼, 하고 샀답니다.
앞으로도 틀린 곳이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고맙습니다.^^
 


 

1. 봄에 빠지다 : 겨울을 좋아하는 나는 지난 3월에 겨울과의 작별이 좀 섭섭했는데, 그 섭섭한 마음을 지울 만큼 벚꽃이 피어 있는 이달 4월의 봄에 빠져 버렸다. 봄꽃이 피어 있고 봄바람은 살랑거리고 봄 햇살은 퍼지고 있는 포근한 봄날. 그 봄날의 찬란함에 감탄하곤 했다. 요 며칠 동안.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이 봄 햇살을 받으며 왜 진작 봄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를 몰랐을까 하는 장면을, 드라마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이처럼 세상과의 작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흔하게 있는 것의 가치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인가? 그런데 난 세상과의 작별을 코앞에 두고 있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 흔하게 있는 것의 가치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봄날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죽는 게 얼마나 억울할까?’

 

 

내가 봄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알게 된 건 나이 때문이리라. 계절마다 가지고 있는 풍경에 감탄할 줄 알게 된 건 나이 때문이리라. 이삼십 대엔 몰랐으니까. 이런 게 나이 듦의 이점인 듯. 여러 근심과 불행을 거치고 나면 얻어지는 깨달음인 듯.

 

 

 

 

 

 

2. 체험해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누구든 나에게 비난의 돌을 덜질 수 없어요. 왜냐고요? 나처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내 감정을 공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수전 손택도 이런 말을 했다. 체험해 보기 전까지는 실감할 수 없는 일이라고.

 

 

프루스트 전공자인 제 친구가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어요. 그는 끔찍한 질투심에 시달렸고 심한 상처를 받았어요. 그때 그는 질투를 다루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완전히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되었고 질투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하면서 그 관념들을 계속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고 내게 말했어요. 그 과정에서 프루스트의 텍스트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경험과도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요. (…) 하지만 그 시점까지 그는 심오하게 성적인 질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질투에 대해 읽을 때는 자기 경험의 일환이 아닌 무언가를 읽는 사람의 방식으로 읽었던 거죠. 정말로 체험해보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실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수전 손택의 말>에서.

 

 

그러니 연애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청소년이 연애 소설을 읽는 것과 연애로 인해 고통을 겪어 본 성인이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은 차원이 다르겠다. 어쩐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학창 시절에 읽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 읽었을 때 그렇게 다르더라. 그 이유를 알겠네.

 

 

사별을 경험해 본 사람이 어느 장례식장에 손님으로 간 것과 사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느 장례식장에 손님으로 간 것은 차원이 다르겠다.

 

 

중요한 건 공감하는 능력. 

 

 

 

 

 

 

 

 

 

 

 

 

 

 

 

 

 

 

 

 

 

3. 글쓰기의 가치 : 글을 쓰는 것은 한 가지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가지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무리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글을 쓰면서 최소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글쓰기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닐까 한다.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사고력이 발전할 테니까. 

 

 

에밀 시오랑은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의 가치를 높게 매긴 것 같다. 

 

 

글을 쓸 때는 한 줄을 쓰더라도 창의적인 면모가 있어야 한다. 반면에 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책일지라도 약간의 주의력만으로 충분하다. 우편엽서 한 장을 끄적거리는 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은 것보다 훨씬 더 창조적 행위에 가깝다.(74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글을 쓰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이므로 헤겔의 어려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는 뜻도 되겠다.

 

 

나는 글쓰기의 가치를 ‘생각’에 두는데, 에밀 시오랑은 글쓰기의 가치를 ‘창조’에 두는구나.

 

 

그런데 여기서 딴 얘기 하나.

 

 

대체로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사람은 매일 삶이 즐거운 파티와 같을 텐데, 뭐하러 책상 앞에 구부리고 앉아 글을 쓰겠는가? 파티를 즐기기만 하고 살면 될 터인데.

 

 

 

 

 

 

 

 

 

 

 

 

 

 

 

 

 

 

 

 

 

4. 무거움을 더는 방법 :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에 따르면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눈꺼풀’이다.

 

 

잠을 자서는 안 될 상황에서 졸릴 때 감기는 눈꺼풀로 고생해 본 사람이라면 눈꺼풀의 무게를 잘 알리라.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교감 선생님이 도덕을 가르치셨다. 어느 도덕 시간에 얼마나 졸리던지 내려오는 눈꺼풀을 아무리 올리려고 해도 되지 않아 고생한 적이 있다. (혹시 그때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때 교감 선생님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는데 혼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모른 척해 주셨다. 아마 내가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인 것 같다. 생리적 현상을 어쩌겠는가? 

 

 

최근에도 그런 일을 겪었다. 창피하게도 지하철에서였다. 잠이 마구 쏟아져서 눈꺼풀이 얼마나 무겁던지, 큰 바위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게 눈꺼풀이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우리는 졸릴 때의 눈꺼풀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것들을 달고 살 때가 있다. 그것들의 이름은 고독, 불안, 고통, 슬픔, 걱정 등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무겁게 달고 살지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은 ‘흐르는 시간’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쉼 없이 흘러 언젠가는 그것들이 가벼워진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순간, 시간이 가진 위대한 힘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무거움을 덜고 싶을 때 이런 아이디어가 있네.

 

 

미칠 듯한 괴로움 혹은 끈질긴 불안을 이겨 내기 위해 자신의 장례식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 혹은 임종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것을 쳐다보았다는 교황 인노센트 9세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162~163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암과 같은 큰 병인 줄 알고 얼마나 긴장했던지 검사 받는 날 아침엔 입맛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바위 같은 걱정들이 아주 작은 돌멩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걱정이 있다 한들 큰 병에 대한 걱정만 할까 하는 생각에.

 

 

큰 병과 비교하면 평소의 걱정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므로.

 

 

이런 시가 생각난다.

 

 

적(敵) 1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 - 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163쪽)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오늘의 근심으로 내일의 근심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근심으로 오늘의 근심을 쫓을 수도 있겠네.

 

 

 

 

 

 

 

 

 

 

 

 

 

 

 

 

 

 

 

 

 

5. ‘다름’을 받아들이기 : 어떤 게 좋은 문화인가?

 

 

상대가 커피를 권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럴 때 카페인 때문에 밤잠을 잘 자지 못할까 봐 평소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커피를 사양해야 맞다. 그런데 상대방의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마시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마시고 싶지 않은 커피를 상대를 배려해서 마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인가? 아니면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편하게 커피를 사양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인가?

 

 

배려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 마시고 싶지 않은 커피를 상대를 위해 마셔 주는 배려가 필요할까, 아니면 커피를 사양해도 상대가 기분이 상하지 않는 배려가 필요할까?

 

 

이런 사회는 어떤가? 취향에 관한 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마음 편한 사회. 누가 무엇을 권했을 경우에 싫을 땐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상대의 기분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야말로 국민의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다음의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중성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너그러워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시점이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을 질책하고 비난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사람의 행동, 혹은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아도 너그러워야 한다.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45쪽)
- 기시미 이치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에서.

 

 

남을 불행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봄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된 생각을 한 번 흔들어 보고 싶었다.

 

 

착각에 빠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확신을 하나하나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26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210쪽)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에서. 

 

 

 

 

 

 

 

 

 

 

 

 

 

 

 

 

 

 

 

 

 

 

 

 

 

 

 

 

 

 

 

 

 

 

 

6. 중요한 건 이미지 : 상대가 바람을 피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자   하지만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게 사랑일세.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 있어.
청 년   아니아니, 그건 부정(不貞)을 인정하는 이론이잖아요! 상대가 바람을 피워서 행복해한다면, 그 모습까지도 축복하란 말인가요!
철학자   적극적으로 바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133~134쪽)
- 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에서.
      

 

 

A : 저는 이 글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상대 배우자인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경우에 아내 입장에선 마구 화를 내게 됩니다. 남편을 한 대 때릴 수도 있고 욕을 퍼부을 수도 있겠죠. 화를 내면서 자신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하나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말이죠. 바람을 피운 남편 쪽에선 보면 그렇게 화를 내는 아내의 모습이 추하게 보입니다. 정이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는데 아내가 더 싫어지는 겁니다.
B : 그럼 아내가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요?
A :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화를 내면 아내가 더 불리한 상황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화를 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B : 아니, 화가 나서 죽겠는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죠?
A : 물론 그렇죠. 그런데 말이죠.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본다.’라는 말처럼 남편의 입장에선 본질을 외면하게 되는 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바람난 남편은 아내가 가리키는 달을 보는 게 아니라 아내의 손가락만 볼 수 있다는 거죠. 다시 말해 아내가 말하는 것의 내용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아내가 화를 내는 겉모습에만 집중하고 정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겉모습의 이미지가 말의 내용보다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때도 그렇거든요. 
B : 그렇군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네요. 

 

 

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이미지. 이   미   지   였   구   나, 하는 생각.  

 

 

 

 

 

 

 

 

 

 

 

 

 

 

 

 

 

 

 

 

7. 이해와 오해의 의미 : 내가 알기로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어려울 때가 얼마나 많은데.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82쪽)
-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이와 비슷한 글을 여러 번 읽은 것 같다. 내가 쓴다면 이렇게 쓰겠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너는 일의 진실보다 나의 마음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너는 나의 마음보다 일의 진실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뜻이다. 여기서 진실이란 밝혀지면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나쁜 진실이겠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보다 자신을 무조건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더 좋아하겠지.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겠지. 다시 말해 자신의 마음이 다치든 말든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진실 밝히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싫어하겠지.

 

 

 

 

 

 

 

 

 

 

 

 

 

 

 

 

 

 

 

 

 

8. ‘에밀 시오랑’에게서 나를 보다 :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나를 위해 쓴 글로 읽혀지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 그런 글이 많았다. 그러니 그의 책을 좋아할 수밖에.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글.

 

 

“당신이 그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는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 이 해묵은 격언은 모든 판단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의 입장이 될 수 없는 까닭에 남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8쪽)

 

 

아무도 그의 입장이 될 수 없을까?

 

 

어떤 경험 후엔 사람은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미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112쪽)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이혼을 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이미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까지 괴로워해야 한다. 괴로움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될 때까지.(113쪽)

 

 

나, 아직 멀었네. 괴로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경지에까지 가지 못했으니.

 

 

 

 

 

 

9. 행복과 불행의 총합이 우리의 삶이다 : 우리의 긴 인생을 놓고 보면 행복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불행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현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 행복이 영원하지 않듯이, 현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 불행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평생 겪어야 할 행복의 총량과 불행의 총량은 각각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율로 말하면 행복한 시간 10프로와 불행한 시간 10프로와 행복도 불행도 아닌 시간 80프로로 채워지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10프로의 사람들은 제외하겠다. 90프로의 사람들에게 이 비율이 맞을 것 같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그런 것 같다.)

 

 

(물론 더 살아 보면 다르게 느낄 수 있겠지만.)

 

 

 

 

 

 

10. 패배에 굴복하지 않기 : 살면서 늘 승리만 하는 사람은 없다. 늘 패배와 마주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얼마나 많은 패배가 있는가? 나만 해도 패배는 내가 자주 마주치는 친근한 이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패배들을 열거해 본다.  

 

 

-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패배를 맛보다.
- 블로그에 올린 글의 공감 수나 댓글 수가 없을 때 패배를 맛보다.
- 회사 승진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패배를 맛보다.  
-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자신이 만든 음식이 맛이 없다고 느낄 때 패배를 맛보다.
- 누군가로부터 단점을 지적받을 때 패배를 맛보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예전에 비해 미워졌다고 느낄 때 패배를 맛보다.
- 나도 늙었구나 하고 느낄 때 패배를 맛보다.
- 부자 친구와 자신을 비교할 때 패배를 맛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패배를 배우는 것.(169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이 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패배를 배우는 것이란 패배에 익숙해짐을 말하게 아닐까? 패배에 익숙해져서 패배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 뜻으로, 나는 해석하겠다.

 

 

내가 고쳐 쓴다면 패배로 인해 불행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렇게 쓰겠다.

 

 

....................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패배를 무시하는 것.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패배와 웃으며 악수할 수 있는 것.
....................

 

 

친구로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들었을 때를 예로 들면 이렇게 하라는 것.

 

 

내게 호의적인 친구에게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친구는 무시하고 생각하지 말기.

 

 

그 친구로 인해 느낀 패배와 웃으며 악수하기.

 

 

“패배야, 너 오랜만이구나.” 이러면서 웃는 거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패배에 완전히 굴복하는 순간 삶은 힘들어진다. 예를 들면 패배로 인해 불면증에 걸린다든지, 패배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다든지, 패배로 인해 직장(하던 일)을 그만둔다든지...

 

 

오늘 패배를 겪은 사람은 자신의 두뇌에 이렇게 입력하기.

 

 

‘패배를 한 번 겪었으니 그다음엔 승리가 올 차례야. 그러니 승리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하지만 삶은 총량에 있어서는 수학적이지만 일의 순서에 있어서는 뒤죽박죽이어서 패배 다음에 승리가 올지 또 한 번 패배가 올지 알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인생의 구슬 주머니에 빨간 구슬 백 개와 파란 구슬 백 개가 들어 있다.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이 구슬 주머니에서 구슬을 이백 번 뽑아야 한다. 단 눈을 감고 뽑아야 한다. 이때 빨간 구슬을 많이 꺼낸 사람은 그 다음엔 파란 구슬을 꺼낼 가능성이 많아질 터이고, 파란 구슬을 많이 꺼낸 사람은 그 다음엔 빨간 구슬을 꺼낼 가능성이 많아질 터이다. 여기서 빨간 구슬은 ‘승리’이고 파란 구슬은 ‘패배’이다.

 

 

나는 현재 어느 쪽의 구슬이 많이 남아 있을까?

 

 

당신은 현재 어느 쪽의 구슬이 많이 남아 있을까?  

 

 

불행을 겪을 때마다 ‘패배’라는 구슬을 하나 없앴다는 생각을 한다면 삶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패배’라는 구슬을 많이 빼낼수록 ‘승리’라는 구슬이 많이 남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일생 동안 겪어야 할 불행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서 누구나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진지하지 않게 재미로...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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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4-29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글에 관해, 말씀드리면.

아래 세 가지 용어를 달리 사용합니다. (알라딘의 제 글 또는 제 댓글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1. 안다. - 머리로만 아는 것.
2. 이해한다. - 머리로도 알지만, 옛 경험을 통해 감정의 변화를 알고 있는 경우.
3. 동감한다. - 현재 시점에서 감정의 변화를 함께 하는 것.

사건에 따라, 1, 2, 3이 크게 구별되기도, 또는 구별되지 않기도 하겠지요.

페크pek0501 2015-04-29 14:29   좋아요 0 | URL
아휴, 어려워라...ㅋ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더 많이 깨지도록 하겠습니다. 제 안에 아직 깨질 게 많습니다.
여러가지로,
진심으로,
깊게,
감사를 드립니다. ^^

2015-05-01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5-01 15:28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이미 써 놓았던 글인데 딴 데 정신 파느라 올릴 여유가 없었어요.
이 글 올리는 날에 생각난 것을 약간 추가해 올렸답니다.

날씨가 좋고 공기도 좋은 것 같아 창문 앞뒤로 활짝 열어 놓고, 습기야 날아가거라, 공기야 환기되거라.
하고 있어요.
내일 (아마) 아버지 계신 묘지에 가게 될 것 같아요. 오는 길에 절에도 들르고요.
마음 수양이 필요... 마음을 비우고 올게요. 느긋함을 배우고 올게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내일은 밖에서 봄을 많이 만나게 되겠죠. 그래서 오늘은 집에 있는 걸로...

님도 하루하루 좋은 삶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페크pek0501 2015-05-01 15:32   좋아요 0 | URL
추신)

아, 제가 오늘 신문 보다가 발견한 것 알려드려요.
통화 아니고 문자 한 통으로 성금 보내기...

네팔 지진 피해자 돕기 성금 모금

휴대폰 문자 기부 : #0095(1건당 2000원)

저는 벌써 했답니다.

2015-05-02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2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3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

 

 

 

 


<페미니즘의 도전>은 나에게 충격을 많이 준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을 읽으며 놀라면서 많이 배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으로 인해 두 편의 글을 썼다.

 

 

1) 칼럼 형식으로 써서 2009년 6월에 이 서재에 올렸다.

그 칼럼의 제목은 <사유하지 않음은 폭력이 될 수 있다>이다.

그 칼럼은 여기에...   http://blog.aladin.co.kr/717964183/2933563 

 

 

2) 이 책에 대해 리뷰를 써서 2011년 12월에 이 서재에 올렸다.

그 리뷰의 제목은 <이 책은 아직 유효하다>이다.

그 리뷰는 여기에...   http://blog.aladin.co.kr/717964183/5281993

 

 

잊고 지냈다.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고, 책의 내용을 잊었고,

내가 그 두 편의 글을 썼다는 사실도 잊었다.

 

 

‘잊지 않고 살기’가 중요한 것 같아 이 글을 올린다.

 

 

 

 

 

 


 

 

 

 

 

 

 

 

 

 

개정판,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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