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봄에 빠지다 : 겨울을 좋아하는 나는 지난 3월에 겨울과의 작별이 좀 섭섭했는데, 그 섭섭한 마음을 지울 만큼 벚꽃이 피어 있는 이달 4월의 봄에 빠져 버렸다. 봄꽃이 피어 있고 봄바람은 살랑거리고 봄 햇살은 퍼지고 있는 포근한 봄날. 그 봄날의 찬란함에 감탄하곤 했다. 요 며칠 동안. 

 

 

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여인이 봄 햇살을 받으며 왜 진작 봄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를 몰랐을까 하는 장면을, 드라마를 통해 본 적이 있다. 이처럼 세상과의 작별을 코앞에 두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흔하게 있는 것의 가치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인가? 그런데 난 세상과의 작별을 코앞에 두고 있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다. 세상에 흔하게 있는 것의 가치를, 그 찬란한 아름다움을.

 

 

봄날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지금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을 두고 죽는 게 얼마나 억울할까?’

 

 

내가 봄이 뿜어내는 아름다움을 알게 된 건 나이 때문이리라. 계절마다 가지고 있는 풍경에 감탄할 줄 알게 된 건 나이 때문이리라. 이삼십 대엔 몰랐으니까. 이런 게 나이 듦의 이점인 듯. 여러 근심과 불행을 거치고 나면 얻어지는 깨달음인 듯.

 

 

 

 

 

 

2. 체험해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다 : 누군가 이런 말을 한다면?

 

 

“누구든 나에게 비난의 돌을 덜질 수 없어요. 왜냐고요? 나처럼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내 감정을 공감할 수 없을 테니까요.”

 

 

수전 손택도 이런 말을 했다. 체험해 보기 전까지는 실감할 수 없는 일이라고.

 

 

프루스트 전공자인 제 친구가 아내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 적이 있어요. 그는 끔찍한 질투심에 시달렸고 심한 상처를 받았어요. 그때 그는 질투를 다루는 프루스트의 작품을 완전히 다른 기분으로 읽게 되었고 질투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하면서 그 관념들을 계속 집요하게 파고들었다고 내게 말했어요. 그 과정에서 프루스트의 텍스트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경험과도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요. (…) 하지만 그 시점까지 그는 심오하게 성적인 질투를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과거에 프루스트의 작품에서 질투에 대해 읽을 때는 자기 경험의 일환이 아닌 무언가를 읽는 사람의 방식으로 읽었던 거죠. 정말로 체험해보기 전까지는 진심으로 실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 수전 손택 · 조너선 콧, <수전 손택의 말>에서.

 

 

그러니 연애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청소년이 연애 소설을 읽는 것과 연애로 인해 고통을 겪어 본 성인이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은 차원이 다르겠다. 어쩐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학창 시절에 읽었을 때와 나이 들어서 읽었을 때 그렇게 다르더라. 그 이유를 알겠네.

 

 

사별을 경험해 본 사람이 어느 장례식장에 손님으로 간 것과 사별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어느 장례식장에 손님으로 간 것은 차원이 다르겠다.

 

 

중요한 건 공감하는 능력. 

 

 

 

 

 

 

 

 

 

 

 

 

 

 

 

 

 

 

 

 

 

3. 글쓰기의 가치 : 글을 쓰는 것은 한 가지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한 가지란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무리 글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글을 쓰면서 최소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바로 이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글쓰기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닐까 한다.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사고력이 발전할 테니까. 

 

 

에밀 시오랑은 다른 측면에서 글쓰기의 가치를 높게 매긴 것 같다. 

 

 

글을 쓸 때는 한 줄을 쓰더라도 창의적인 면모가 있어야 한다. 반면에 책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책일지라도 약간의 주의력만으로 충분하다. 우편엽서 한 장을 끄적거리는 게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읽은 것보다 훨씬 더 창조적 행위에 가깝다.(74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글을 쓰는 것은 창조적인 행위이므로 헤겔의 어려운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는 뜻도 되겠다.

 

 

나는 글쓰기의 가치를 ‘생각’에 두는데, 에밀 시오랑은 글쓰기의 가치를 ‘창조’에 두는구나.

 

 

그런데 여기서 딴 얘기 하나.

 

 

대체로 행복한 사람은 글을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행복한 사람은 매일 삶이 즐거운 파티와 같을 텐데, 뭐하러 책상 앞에 구부리고 앉아 글을 쓰겠는가? 파티를 즐기기만 하고 살면 될 터인데.

 

 

 

 

 

 

 

 

 

 

 

 

 

 

 

 

 

 

 

 

 

4. 무거움을 더는 방법 :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내 경험에 따르면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눈꺼풀’이다.

 

 

잠을 자서는 안 될 상황에서 졸릴 때 감기는 눈꺼풀로 고생해 본 사람이라면 눈꺼풀의 무게를 잘 알리라.

 

 

내가 중학생이던 시절에 교감 선생님이 도덕을 가르치셨다. 어느 도덕 시간에 얼마나 졸리던지 내려오는 눈꺼풀을 아무리 올리려고 해도 되지 않아 고생한 적이 있다. (혹시 그때 감기약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때 교감 선생님과 몇 번이나 눈이 마주쳤는데 혼내지 않으시고 끝까지 모른 척해 주셨다. 아마 내가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인 것 같다. 생리적 현상을 어쩌겠는가? 

 

 

최근에도 그런 일을 겪었다. 창피하게도 지하철에서였다. 잠이 마구 쏟아져서 눈꺼풀이 얼마나 무겁던지, 큰 바위처럼 느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게 느껴지는 게 눈꺼풀이 아닐까 생각했다.

 

 

때로 우리는 졸릴 때의 눈꺼풀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것들을 달고 살 때가 있다. 그것들의 이름은 고독, 불안, 고통, 슬픔, 걱정 등이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무겁게 달고 살지라도 버틸 수 있는 것은 ‘흐르는 시간’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쉼 없이 흘러 언젠가는 그것들이 가벼워진 다른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순간, 시간이 가진 위대한 힘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무거움을 덜고 싶을 때 이런 아이디어가 있네.

 

 

미칠 듯한 괴로움 혹은 끈질긴 불안을 이겨 내기 위해 자신의 장례식을 머리에 떠올리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 혹은 임종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여,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그것을 쳐다보았다는 교황 인노센트 9세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하여도 좋을 것이다.(162~163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몸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 암과 같은 큰 병인 줄 알고 얼마나 긴장했던지 검사 받는 날 아침엔 입맛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평소에 가지고 있던 바위 같은 걱정들이 아주 작은 돌멩이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걱정이 있다 한들 큰 병에 대한 걱정만 할까 하는 생각에.

 

 

큰 병과 비교하면 평소의 걱정거리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므로.

 

 

이런 시가 생각난다.

 

 

적(敵) 1

 

우리는 무슨 적이든 적을 갖고 있다
적에는 가벼운 적도 무거운 적도 없다
지금의 적이 제일 무거운 것 같고 무서울 것 같지만
이 적이 없으면 또 다른 적 - 내일
내일의 적은 오늘의 적보다 약할지 몰라도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도 내일의 적처럼 생각하면 되고

 

 

오늘의 적으로 내일의 적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적으로 오늘의 적을 쫓을 수도 있다
이래서 우리들은 태평으로 지낸다(163쪽)
- 김수영, <사랑의 변주곡>에서.

 

 

오늘의 근심으로 내일의 근심을 쫓으면 되고
내일의 근심으로 오늘의 근심을 쫓을 수도 있겠네.

 

 

 

 

 

 

 

 

 

 

 

 

 

 

 

 

 

 

 

 

 

5. ‘다름’을 받아들이기 : 어떤 게 좋은 문화인가?

 

 

상대가 커피를 권하는 상황이라고 하자. 이럴 때 카페인 때문에 밤잠을 잘 자지 못할까 봐 평소 커피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커피를 사양해야 맞다. 그런데 상대방의 성의를 생각해서 억지로 마시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마시고 싶지 않은 커피를 상대를 배려해서 마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인가? 아니면 상대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편하게 커피를 사양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인가?

 

 

배려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 마시고 싶지 않은 커피를 상대를 위해 마셔 주는 배려가 필요할까, 아니면 커피를 사양해도 상대가 기분이 상하지 않는 배려가 필요할까?

 

 

이런 사회는 어떤가? 취향에 관한 한, 남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마음 편한 사회. 누가 무엇을 권했을 경우에 싫을 땐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상대의 기분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야말로 국민의 행복지수가 올라가는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다음의 글을 읽고 생각한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중성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너그러워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과는 다른 시점이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을 질책하고 비난해서는 곤란하다.
다른 사람의 행동, 혹은 살아가는 방식이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아도 너그러워야 한다.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45쪽)
- 기시미 이치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에서.

 

 

남을 불행에 빠뜨리는 게 아니라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해봄으로써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된 생각을 한 번 흔들어 보고 싶었다.

 

 

착각에 빠지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확신을 하나하나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버리는 것이다.(26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작가가 하는 일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고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일입니다. 공감과 새로운 관심의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르게 더 나아지려는 열망을 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하는 일입니다.(210쪽)
- 수전 손택, <문학은 자유다>에서. 

 

 

 

 

 

 

 

 

 

 

 

 

 

 

 

 

 

 

 

 

 

 

 

 

 

 

 

 

 

 

 

 

 

 

 

6. 중요한 건 이미지 : 상대가 바람을 피운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철학자   하지만 아들러는 상대를 구속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상대가 행복하다면 그 모습을 순순히 축복해주는 것. 그게 사랑일세. 서로를 구속하는 관계는 결국 깨지게 되어 있어.
청 년   아니아니, 그건 부정(不貞)을 인정하는 이론이잖아요! 상대가 바람을 피워서 행복해한다면, 그 모습까지도 축복하란 말인가요!
철학자   적극적으로 바람을 인정하는 것은 아닐세. 이렇게 생각해보게. 함께 있으면 왠지 숨이 막히고 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지는 관계는, 연애는 가능해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네.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고, 우월함을 과시할 필요도 없는, 평온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진정한 사랑이란 그런 걸세. 반면에 구속이란 상대를 지배하려는 마음의 표정이며, 불신이 바닥에 깔린 생각이기도 하지. 내게 불신감을 품은 상대와 한 공간에 있으면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수 없겠지? 아들러는 말했네. “함께 사이좋게 살고 싶다면, 서로를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133~134쪽)
- 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미움받을 용기>에서.
      

 

 

A : 저는 이 글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상대 배우자인 남편이 바람을 피웠을 경우에 아내 입장에선 마구 화를 내게 됩니다. 남편을 한 대 때릴 수도 있고 욕을 퍼부을 수도 있겠죠. 화를 내면서 자신이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하나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말이죠. 바람을 피운 남편 쪽에선 보면 그렇게 화를 내는 아내의 모습이 추하게 보입니다. 정이 떨어집니다. 안 그래도 마음이 딴 데 가 있는데 아내가 더 싫어지는 겁니다.
B : 그럼 아내가 화를 내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요?
A :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화를 내면 아내가 더 불리한 상황이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겁니다. 화를 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B : 아니, 화가 나서 죽겠는데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죠?
A : 물론 그렇죠. 그런데 말이죠. ‘달을 보라고 손을 들어 가리켰더니 손가락만 본다.’라는 말처럼 남편의 입장에선 본질을 외면하게 되는 게 문제라는 말입니다. 바람난 남편은 아내가 가리키는 달을 보는 게 아니라 아내의 손가락만 볼 수 있다는 거죠. 다시 말해 아내가 말하는 것의 내용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아내가 화를 내는 겉모습에만 집중하고 정이 떨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겉모습의 이미지가 말의 내용보다 훨씬 중요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런 때도 그렇거든요. 
B : 그렇군요. 생각해 볼 만한 일이네요. 

 

 

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건, 이미지. 이   미   지   였   구   나, 하는 생각.  

 

 

 

 

 

 

 

 

 

 

 

 

 

 

 

 

 

 

 

 

7. 이해와 오해의 의미 : 내가 알기로는 누군가에 대해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에 대해 이해하는 것도 어려울 때가 얼마나 많은데.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원하는 내 모습으로 나를 잘 오해해준다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내가 보여주지 않고자 했던 내 속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어 보았느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182쪽)
- 김소연, <마음사전>에서.

 

 

이와 비슷한 글을 여러 번 읽은 것 같다. 내가 쓴다면 이렇게 쓰겠다.

 

 

“너는 나를 이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너는 일의 진실보다 나의 마음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뜻이며, “너는 나를 오해하는구나”라는 말은 너는 나의 마음보다 일의 진실이 더 중요하구나 하는 뜻이다. 여기서 진실이란 밝혀지면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나쁜 진실이겠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진실을 밝히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보다 자신을 무조건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진 사람을 더 좋아하겠지. 다시 말해 자신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겠지. 다시 말해 자신의 마음이 다치든 말든 관심이 없고 오로지 ‘진실 밝히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싫어하겠지.

 

 

 

 

 

 

 

 

 

 

 

 

 

 

 

 

 

 

 

 

 

8. ‘에밀 시오랑’에게서 나를 보다 :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나를 위해 쓴 글로 읽혀지는 글을 만날 때가 있다. 에밀 시오랑의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 그런 글이 많았다. 그러니 그의 책을 좋아할 수밖에.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글.

 

 

“당신이 그의 입장이 되어 보기 전에는 아무도 판단하지 말라.” 이 해묵은 격언은 모든 판단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의 입장이 될 수 없는 까닭에 남을 비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8쪽)

 

 

아무도 그의 입장이 될 수 없을까?

 

 

어떤 경험 후엔 사람은 이름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이미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112쪽)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이혼을 하고 나면 사람이 달라질 것 같네. 이미 이전과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

 

 

괴로움이 극에 달할 때까지 괴로워해야 한다. 괴로움이라는 것을 믿지 않게 될 때까지.(113쪽)

 

 

나, 아직 멀었네. 괴로움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경지에까지 가지 못했으니.

 

 

 

 

 

 

9. 행복과 불행의 총합이 우리의 삶이다 : 우리의 긴 인생을 놓고 보면 행복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불행하기만 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현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 행복이 영원하지 않듯이, 현재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그 불행이 영원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평생 겪어야 할 행복의 총량과 불행의 총량은 각각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비율로 말하면 행복한 시간 10프로와 불행한 시간 10프로와 행복도 불행도 아닌 시간 80프로로 채워지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닐까 하는.

 

 

(10프로의 사람들은 제외하겠다. 90프로의 사람들에게 이 비율이 맞을 것 같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들을 돌아보니 그런 것 같다.)

 

 

(물론 더 살아 보면 다르게 느낄 수 있겠지만.)

 

 

 

 

 

 

10. 패배에 굴복하지 않기 : 살면서 늘 승리만 하는 사람은 없다. 늘 패배와 마주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우리의 삶 속에는 얼마나 많은 패배가 있는가? 나만 해도 패배는 내가 자주 마주치는 친근한 이웃이다.

 

 

우리가 삶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패배들을 열거해 본다.  

 

 

-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 패배를 맛보다.
- 블로그에 올린 글의 공감 수나 댓글 수가 없을 때 패배를 맛보다.
- 회사 승진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패배를 맛보다.  
- 손님들을 초대해 놓고 자신이 만든 음식이 맛이 없다고 느낄 때 패배를 맛보다.
- 누군가로부터 단점을 지적받을 때 패배를 맛보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예전에 비해 미워졌다고 느낄 때 패배를 맛보다.
- 나도 늙었구나 하고 느낄 때 패배를 맛보다.
- 부자 친구와 자신을 비교할 때 패배를 맛보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패배를 배우는 것.(169쪽)
- 에밀 시오랑, <지금 이 순간, 나는 아프다>에서.

 

 

이 글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패배를 배우는 것이란 패배에 익숙해짐을 말하게 아닐까? 패배에 익숙해져서 패배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는 것이 중요하단 뜻으로, 나는 해석하겠다.

 

 

내가 고쳐 쓴다면 패배로 인해 불행해 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렇게 쓰겠다.

 

 

....................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패배를 무시하는 것.

 

중요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다. 패배와 웃으며 악수할 수 있는 것.
....................

 

 

친구로부터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들었을 때를 예로 들면 이렇게 하라는 것.

 

 

내게 호의적인 친구에게 집중하고 그렇지 않은 친구는 무시하고 생각하지 말기.

 

 

그 친구로 인해 느낀 패배와 웃으며 악수하기.

 

 

“패배야, 너 오랜만이구나.” 이러면서 웃는 거지.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패배에 완전히 굴복하는 순간 삶은 힘들어진다. 예를 들면 패배로 인해 불면증에 걸린다든지, 패배로 인해 우울증에 걸린다든지, 패배로 인해 직장(하던 일)을 그만둔다든지...

 

 

오늘 패배를 겪은 사람은 자신의 두뇌에 이렇게 입력하기.

 

 

‘패배를 한 번 겪었으니 그다음엔 승리가 올 차례야. 그러니 승리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하지만 삶은 총량에 있어서는 수학적이지만 일의 순서에 있어서는 뒤죽박죽이어서 패배 다음에 승리가 올지 또 한 번 패배가 올지 알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인생의 구슬 주머니에 빨간 구슬 백 개와 파란 구슬 백 개가 들어 있다. 평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이 구슬 주머니에서 구슬을 이백 번 뽑아야 한다. 단 눈을 감고 뽑아야 한다. 이때 빨간 구슬을 많이 꺼낸 사람은 그 다음엔 파란 구슬을 꺼낼 가능성이 많아질 터이고, 파란 구슬을 많이 꺼낸 사람은 그 다음엔 빨간 구슬을 꺼낼 가능성이 많아질 터이다. 여기서 빨간 구슬은 ‘승리’이고 파란 구슬은 ‘패배’이다.

 

 

나는 현재 어느 쪽의 구슬이 많이 남아 있을까?

 

 

당신은 현재 어느 쪽의 구슬이 많이 남아 있을까?  

 

 

불행을 겪을 때마다 ‘패배’라는 구슬을 하나 없앴다는 생각을 한다면 삶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왜냐하면 ‘패배’라는 구슬을 많이 빼낼수록 ‘승리’라는 구슬이 많이 남게 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일생 동안 겪어야 할 불행의 총량은 정해져 있어서 누구나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진지하지 않게 재미로...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삶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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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4-29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 글에 관해, 말씀드리면.

아래 세 가지 용어를 달리 사용합니다. (알라딘의 제 글 또는 제 댓글 어딘가에 있을 것입니다.)

1. 안다. - 머리로만 아는 것.
2. 이해한다. - 머리로도 알지만, 옛 경험을 통해 감정의 변화를 알고 있는 경우.
3. 동감한다. - 현재 시점에서 감정의 변화를 함께 하는 것.

사건에 따라, 1, 2, 3이 크게 구별되기도, 또는 구별되지 않기도 하겠지요.

페크pek0501 2015-04-29 14:29   좋아요 0 | URL
아휴, 어려워라...ㅋ

앞으로 많이 배우겠습니다.
더 많이 깨지도록 하겠습니다. 제 안에 아직 깨질 게 많습니다.
여러가지로,
진심으로,
깊게,
감사를 드립니다. ^^

2015-05-01 13: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5-05-01 15:28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이미 써 놓았던 글인데 딴 데 정신 파느라 올릴 여유가 없었어요.
이 글 올리는 날에 생각난 것을 약간 추가해 올렸답니다.

날씨가 좋고 공기도 좋은 것 같아 창문 앞뒤로 활짝 열어 놓고, 습기야 날아가거라, 공기야 환기되거라.
하고 있어요.
내일 (아마) 아버지 계신 묘지에 가게 될 것 같아요. 오는 길에 절에도 들르고요.
마음 수양이 필요... 마음을 비우고 올게요. 느긋함을 배우고 올게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게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내일은 밖에서 봄을 많이 만나게 되겠죠. 그래서 오늘은 집에 있는 걸로...

님도 하루하루 좋은 삶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

페크pek0501 2015-05-01 15:32   좋아요 0 | URL
추신)

아, 제가 오늘 신문 보다가 발견한 것 알려드려요.
통화 아니고 문자 한 통으로 성금 보내기...

네팔 지진 피해자 돕기 성금 모금

휴대폰 문자 기부 : #0095(1건당 2000원)

저는 벌써 했답니다.

2015-05-02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2 1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5-03 13: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