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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8월
평점 :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삶이 끝난 사람은 저승에 가게 되어 이승에서의 삶에 대해 심판을 받게 된다고 믿곤 했다. 죽고 나면 생전에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얼마나 했는지에 따라 저승의 왕이 판정하여 망자에게 상벌을 줄 것 같은 막연한 생각이었다. 나의 막연한 생각이 베르나르 베르베르 작 「심판」에서 재현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 혼자만의 추측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죽음 이후의 세계를 나처럼 추측하는 것일까.
「심판」은 아나톨 피숑이라는 한 남자가 폐암 수술 중 사망한 뒤 천국에 있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되어 심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담긴 희곡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피고인의 직업은 판사였다. 즉 판사의 위치에서 피고인의 위치로 바뀌게 된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천국에서는 잘한 일과 잘못한 일의 평가 기준이 이승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베르트랑 검사는 피고인 아나톨 피숑이 잘못한 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베르트랑 : 피숑 씨, 당신은 배우자를 잘못 택했고,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삶을 잘못 택했어요! 존재의 완벽한 시나리오를 포기했어요……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했죠. 당신에게 특별한 운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몰랐어요.(128쪽)
이에 따르면 피숑은 세 가지의 잘못을 저질렀다. 첫째, 피숑이 ‘솔랑주’를 배우자로 택하지 않고 다른 여성과 결혼한 점이 잘못이다. 둘째, 피숑이 연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데도 배우가 되지 않고 판사가 된 점이 잘못이다. 셋째, 피숑이 순응주의에 빠져서 그저 남들과 똑같이 살려고만 한 것이 잘못이다.
베르트랑의 말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천국에서는 남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것을 나쁘게 본다는 점이다. 이는 유행하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고 남들처럼 살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들을 작가가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대부분은 유행에 민감하지 않은가. 의류 매장에서 점원이 손님에게 “이 옷이 요즘 잘 나가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남을 따라 하고 싶은 인간의 동조적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서다. 요즘 지하철을 타면 승객들의 열에 아홉은 고개를 숙여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유행에 따라가고 남들과 비슷하게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똑같은 모습을 보았다면 질색하였으리라. ‘밀’은 「자유론」에서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는 일들, 고통을 느끼게 되는 상황, 이런 문제들을 지각하는 육체적 · 정신적 작용은 사람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그러므로 각자의 경우에 맞는 다양한 삶의 형태가 허용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없다. 제각기 타고난 소질에 맞게 정신적 · 도덕적 · 미적 능력을 발전시킬 수도 없게 된다.”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붕어빵같이 동일한 가치관과 동일한 삶의 방식으로 살게 만드는 현대 사회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다. 밀의 시각에서 보자면 스마트폰 사용이 생활에 끼치는 영향은 개인에 따라 다르다. 누구에게 스마트폰이 유용한 교육 매체가 될 수 있지만, 누구에게는 학습에 방해가 되거나 스마트폰 중독으로 인해 심각한 상황에 이를 수 있다.
베르트랑: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 그걸 여기서는 아주 좋지 않게 보죠!(132쪽)
아나톨 피숑이 실패할까 봐 두려워 시도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라고 한다. 실패하더라도 시도하는 것이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설명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이 있을 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좋은 삶이라는 뜻이겠다.
아나톨 피숑이 잘못한 점이 많음을 지적한 베르트랑 검사는 아나톨에게 사형을 구형한다. 천국에서 말하는 사형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여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이 최상의 판결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최악의 판결인 줄 알았으니 말이다. 자신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것에 대한 아나톨의 반응 또한 신선한 놀라움을 준다. 아나톨은 지상에 돌아갈 마음이 없다며 지상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에게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딱 맞는 표현인 모양이다.
검사의 지적이 자기의 기억과 다르다고 해서 피고인이 항변할 수가 없는 이유가 있다. 천국에선 리모컨만 누르면 이승에서 살았던 때의 생활 모습이 그대로 화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카롤린 변호사는 피고인을 변호하느라 이렇게 말한다.
카롤린: (계속해서 서류를 뒤적이며) 여기 피고인이 행한 5,281개 선업의 목록이 있습니다.
베르트랑: 5,281개?
카롤린: 그래요. 선업 5,281개. 그는 거지에게 적선을 했어요. 시각 장애인이 길을 건너게 도와주고 대중교통에서 자리를 양보했죠. 뭐가 더 있더라? 아, 그래요. 교통사고 부상자 두 명을 구조하기도 했어요. 자선 단체들에 기부금도 냈죠.(143~144쪽)
카롤린 변호사의 열띤 변호에도 불구하고 가브리엘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가브리엘: 따라서 피고인 아나톨 피숑을 삶의 형에 처합니다.(156쪽)
가브리엘: 그러므로 피고인은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지상의 태아로 환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법정과 전생에 대한 기억은 모두 잃게 될 거예요.(156~157쪽)
이로써 심판은 끝났다. 만약 환생을 하지 않고 검사, 변호사, 재판장 들처럼 천국에 남고 싶다면 한 번은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한다. 가령 영웅이 되는 것이다. 카롤린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불 속에 띄어들어 어린아이들을 구하다 질식사하는 것이 점수가 아주 높다고 한다.
결국 아나톨 피숑은 태아로 환생하게 되는 판결을 받으나 환생하지 않기 위해 다른 방도를 궁리하여 제시한다. 그 방도란 무엇일까? 이것이 궁금한 이들은 이 책을 직접 읽기를 권한다. 카르마와 자유 의지에 대해 언급한 대목도 있으니 자세히 읽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소설과 희곡 등 장르를 넘나들며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작가가 상상한 사후 세계를 엿보는 재미에 빠져 볼 수도 있는 책이다.
희곡은 등장인물이 많아 읽기가 어려운데 「심판」은 피고인(아나톨 피숑), 변호사(카롤린), 검사(베르트랑), 재판장(가브리엘) 등 딱 네 명이어서 읽기가 수월하다. 게다가 얇기도 하고 여백도 많은 책이라 서너 시간이면 읽을 수 있어 완독의 기쁨을 누리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금한 이에게는 강추한다. 독자들은 신선한 관점을 제공해 주는 이 책을 통해 사후 세계를 깊이 음미해 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정신적으로 풍요로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리라고 본다. 혹자는 이 책을 읽고 나서 착하게 살아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고,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겠단 다짐을 하게 될지 모른다. 자기의 생을 돌아보며 겸손의 미덕을 배울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심판」의 저자 베르나르 베르베르(1961년 출생)는 일곱 살 때부터 단편소설을 썼다고 하니 그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것은 필연이었던 것 같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것 또한 필연이 아닌가 싶다.
....................<재밌어서 뽑은 밑줄긋기>....................
베르트랑: 피숑 씨는 신호 위반을 873차례, 속도 위반을 1,525차례 저질렀어요. 하지만 이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119쪽)
아나톨: 경찰한테 걸린 적 없어요.
베르트랑: 경찰은 못 봐도 우리는 봤어요.
베르트랑이 핸들을 잡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속도를 내고 있는 피숑의 사진을 보여 준다.(119~120쪽)
....................<후기>....................
『심판』은 만성적인 의료계 인력 부족, 교육 개혁, 법조계 부패 같은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고, 결혼 제도의 모순과 부조리를 위트 있게 지적하기도 한다.(옮긴이의 말, 219쪽)
이 리뷰는 위에 언급된 프랑스 사회의 문제에 중점을 두지 않고 내가 독자로서 주의 깊게 살펴본 대목을 중심으로 쓰고자 했음을 밝혀 둔다. 천재 작가인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그린 천국의 법정에서는 좋은 인생과 나쁜 인생의 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관심이 컸으므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