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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 「제5도살장」
어느 서재에서 커트 보니것의 책을 보고 그의 에세이를 재밌게 읽었는데 소설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댓글을 쓴 적이 있다. 뒤늦게 알았다. 내가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을. 그것도 정독하여 완독했다는 것을. 그 소설의 제목은 「제5도살장」이다. 이 책은 반전(反戰)소설이다. 책에 대한 내 기억이 흐려진 것은 리뷰나 100자평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나중에 꼭 쓰기로...)
나는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학살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적의 대학살 소식을 듣고 만족하거나 기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34쪽)
나는 또 아들들에게 학살 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는 일하지 말고, 우리에게 그런 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경멸하라고 말해왔다.(34쪽)
로즈워터는 빌리보다 두 배는 똑똑했지만, 그와 빌리는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위기에 대처하고 있었다. 그들 둘 다 인생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전쟁에서 본 것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로즈워터는 독일군 병사라고 오인하여 열네 살짜리 소방수를 쏘았다. 뭐 그런 거지. 빌리는 유럽사 최대의 학살을 보았는데, 그것은 드레스덴 폭격이었다. 뭐 그런 거지.(131쪽)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커트 보니것이 왜 블랙유머의 대가인지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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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민, 「아름답고 쓸모없는 독서」
김성민 저자가 쓴, 소설 「스토너」의 서평에서 뽑았다.
‘셰익스피어가 30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자네에게 말을 걸고 있네, 그의 목소리가 들리나?’ 소네트의 의미를 묻는 아처 슬론 교수의 질문에 스토너의 몸이 굳어 버린다. 생전 처음 경험하는 기분을 느낀다. ‘모르겠나, 스토너군? 아직도 자신을 모르겠어? 자네는 교육자가 될 사람일세. 이건 사랑일세, 스토너군. 자네는 사랑에 빠졌어.’ 스토너 자신도 정의할 수 없었던 문학에 대한 이끌림을 슬론 교수는 사랑이라고 정의한다.(145쪽)
스토너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 실패한 인물처럼 묘사되지만, 마지막 장면이 그 시선을 뒤집는다. 놀라운 반전 아닌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삶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스토너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으로 살았다.(148쪽)
스토너가 물었던 ‘넌 무엇을 기대했니?’, 어떻게 기억되길 원하는가?는 어쩌면 부차적인 질문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희미하게 기억되고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하더라도 스토너는 문학을 향한 사랑을 끝까지 지키며 헌신했다. 자신과 동일시한 문학을. 그는 어떻게 기억되는가를 위해 자신을 버리거나 문학을 희생하지 않았다. 패배로 보이는 삶을 한 꺼풀 벗겨 보면 그 안에는 단지 패배라고만 부를 수 없는 한 사람의 고투가 있다. 스토너는 조용한 성취를 이루었다. 그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스스로에게 영웅이 되었다.(149~150쪽)
스토너는 남이 추구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 추구하지 않고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살았기에 영웅이 되었다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오직 내 마음속에서 절로 우러나오는 삶을 살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어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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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무렵, 방에서 뉴스를 시청하고 있었다. 닭장 속에서 많은 닭들이 모이를 먹고 있다.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비좁은 공간에 있는 닭들을 보니 가엾게 여겨졌다. 닭을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인간의 이기심을 새삼 느꼈다.
거실에서 딸이 나를 불렀다.
“엄마 치킨 왔어.”
그 소리를 듣자마자 거실로 나갔다. 배달된 프라이드치킨의 바삭한 맛은 일품이었다.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꺼내 마시며 우리 가족은 즐거운 환성을 질렀다.
“역시 치맥이 최고야.”
나는 인간의 이기심 따위는 잊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