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완벽’하게 쓰는 사람은 분명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완벽’은 자신이 볼 때 더 이상 고칠 게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면에서 난 많이 부족하다. 글 한 편을 쓰고 나면 읽어 볼 때마다 고칠 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고치면서 글을 완성시킨다. 내가 완성시킨 글이라고 해도 남이 볼 때는 고쳐야 할 부분이 눈에 띌 수 있겠지만.
예전에 썼던 글 중 초고가 엉터리였던 게 있었다. 무엇을 틀리게 써서 어떻게 고쳤는지 지금 공개를 하고자 한다. 첫째는 앞으로 틀리게 쓰지 말자는 뜻으로 나를 위함이요, 둘째는 글을 쓰는 우리 서재님들이 자신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지를 비교해 보라는 뜻으로 서재님들을 위함이다.
1. 자신 없는 표현은 삼가기
초고 : 내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충돌로 볼 수도 있고, 두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고친 글 ⇨ 이에 대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충돌로 볼 수도 있고, 두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설명 : “내 표현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라는 문장을 뺐다. 이런 자신 없는 표현은 삼가야 한다. 만약 자신 없는 부분이 있다면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게 낫다.
2. 낱말을 통일하기
초고 : 어쩌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충돌로 볼 수도 있고, 두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고친 글 ⇨ 어쩌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로 볼 수도 있고, 두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설명 : 한 문단 안에서 ‘충돌’과 ‘분리’의 낱말이 섞여 있어 혼란스럽다. ‘충돌’을 ‘분리’라고 고쳐서 낱말을 통일시켰다.
다음 글을 보자.
초고 : 상대방이 총을 빵, 하고 쏘면 총알을 맞지 않더라도 죽는 시늉을 해 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우선 만족감을 주고 싶어서다. 그런데 그다음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통쾌함만을 누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 라고.
고친 글 ⇨ 상대방이 총을 빵, 하고 쏘면 총알을 맞지 않더라도 죽는 시늉을 해 주고 싶다. 상대방에게 우선 통쾌함을 주고 싶어서다. 그런데 그다음에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통쾌한 만족감만을 누렸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겠다.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 라고.
설명 : 만족감과 통쾌함이 같은 의미로 쓰이면서 통일되지 않았다. 그래서 두 군데를 고쳐서 통쾌함, 통쾌한 만족감, 만족감 등으로 썼다.
3. 같은 방식으로 나열하기
초고 :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하면 복 받는다, 라고.
고친 글 ⇨ 한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었으니 내가 덕을 쌓은 거야, 라고. 좋은 일을 했으니 복을 받을 거야, 라고.
설명 : ‘같은 방식’으로 나열하기 위해 ‘~ 거야’로 통일하여 고쳤다.
4. 독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쓰기
글의 내용에 대해 간혹 독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글을 쓸 때 이런 점을 조심해야 한다.
초고 :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반응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고친 글 ⇨ 위대한 철학자들은 몸과 마음이 하나이기에 분리될 수 없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몸과 마음은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 몸 따로, 마음 따로 반응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설명 : 몸과 마음이 두 개의 존재로 분리된다고 쓰면, 혹시 다른 철학자들을 들먹이며 그렇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가 생길지 모른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위대한 철학자를 언급했다.
다음 글을 보자.
초고 :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새 내가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고친 글 ⇨ 백화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매장에서 맘에 드는 멋진 핸드백을 발견한다. 가격이 비싸다. 몸은 그것을 원하는데 마음은 그것이 비싸니까 사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는데 내 몸은 이미 그 핸드백을 어깨에 메어 보더니 어느새 계산대에서 그 핸드백의 값을 치르고 있다. 이에 대해 내 안의 감정과 이성의 분리로 볼 수도 있고, 두 마음의 분리로 볼 수도 있겠다. 난 이런 경우 몸과 마음의 분리로 생각하곤 한다.
설명 : ‘몸과 마음의 분리’라고 단정적으로 쓰면 이의를 제기하는 독자가 생길지 모른다. 감정과 이성의 분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두 마음의 분리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고쳐 썼다.
다음 글을 보자.
초고 : 이처럼 마음이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우울·불쾌·슬픔·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좋은 감정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고친 글 ⇨ 이처럼 마음이 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 우울·불쾌·슬픔·분노 따위의 부정적인 감정 상태를 좋은 감정 상태로 돌리는 것도 가능하겠다.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말이다.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설명 : “의도적인 노력만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든 타인의 마음이든 마음을 움직이는 게 가능하겠다.”라고 썼는데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독자가 있을 수 있다. 의도적으로 노력했는데도 상대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을 테니. 그래서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이라는 문장을 넣었다. 그러면 독자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독자가 말로써 직접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라도 만약 마음속으로 ‘이 글은 문제가 있어.’라고 생각한다면 그 글은 완벽한 글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의를 제기할지 모를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게 바람직하다.
.....................<후기>
위의 글은 예전 이곳 서재에 올렸던 글을 다시 정리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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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소설가 어네스트 헤밍웨이(1899~1961)가 <노인과 바다>를 400번 이상 고쳤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는 노력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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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글은 쉽게 읽히고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깊은 글이다. 반대로 가장 좋지 않은 글은 어렵게 읽히고 그 글이 담고 있는 의미가 깊지 않은 글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와 같은 작품이 쉽게 읽히고 의미가 깊은 작품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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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별의 사람들은 한 정원 안에 장미꽃을 5천 송이나 가꾸지만……. 그들이 찾는 것을 거기서 발견하지는 못해…….”
어린 왕자가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그들이 찾는 것은 단 한 송이의 장미꽃이나 물 한 모금에서 얻어질 수도 있어…….”
“그야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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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 내 비밀을 일러 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로지 마음으로만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단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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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노력하고 훈련하면 비슷한 수준으로 해낼 수 있다.
논리 글쓰기는 문학 글쓰기보다 재능의 영향을 훨씬 덜 받는다. 조금 과장하면 이렇게 주장할 수 있다. 노력한다고 해서 누구나 안도현처럼 시를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구든 노력하면 유시민만큼 에세이를 쓸 수는 있다.(59쪽)
- 유시민,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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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능 없는 사람이 노력한다면 시나 소설을 잘 쓰기 어렵지만 에세이나 서평은 잘 쓸 수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