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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어 서점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최인호 그림 / 마음산책 / 2021년 11월
평점 :
'과학‘을 잘 알지 못해, 처음 SF 소설을 읽기 시작할 때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작가가 그려내는 여러 장면들을 모두 다 이해해야만 책을 잘 읽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것을 가져와 현재의 시점에 대비시키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독자의 몫인 것 같았다. 그러다 점점 SF라는 장르가 꼭 원인과 결과에 따른 과학만이 바탕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이 장르는 인간의 상상이 불러올 수 있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김초엽의 소설은 이러한 나의 느낌에 날개를 달아주고,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타게 만들었다. 그녀는 비교적 쉽게 과학과 미래를 끌어와 지금 ’현재‘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만날 미래의 모습이며, ’존재하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거나‘의 선택이기도 하다.
《행성어 서점》에는 14편의 짧은 소설이 담겨 있다. 짧아서 유독 단숨에, 스르륵 문장이 풀려 나왔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들은 짧다. 짧아서 읽기에 좋았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가 짧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짧게 읽고, 길게 멈춰 오래 생각할 것이 많았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030년인 것도 있지만, 대개는 외계인들과 인류가 교류하고, 은하계로의 여행이 가능하고, 때론 옛 지구가 등장하기도 한다. 사이보그의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하고, 클론, 시간 여행, 수만 개 은하 언어를 지원하는 범우주 통역 모듈이 있어 우주 공간을 돌아다니는데 별로 불편하지 않다.
그런 세상에서도 전뇌 통역 모듈 부적응자는 존재하고 망해가는 시골 행성에서 판매하는 해독 불가능한 책을 읽기 위해 ‘행성어’를 배우는 사람도 있다. 이 책의 표제작인 『행성어 서점』엔 평생 읽지 않을 책을 사 가는 이색적인 취향을 가진 이도 있고, “수만 개의 언어를 할 수는 없지만, 그 수만 개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조차 읽지 못한 책들을 읽을 수 있는(p72)‘사람도 있다.
사진을 찍으려다 잘못 놀러 핸드폰에 내 얼굴이 갑자기 나타날 때가 있다. 어떨 때에는 그런 내 얼굴이 생경스러워 당황하기도 한다. 화면에 비친 내가 평생 내 속에 있는 내가 맞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나 자신을 계속 쳐다보는 것이 쑥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평생 내 속에 있는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기를 원할 때도 있다. ‘라이프 사진전‘에 전시된 ’앨프리드 아이젠스타트‘의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동명의 소설엔 여러 세계에 존재하는 동일한 인물이 등장한다. 멜론 장수와 바이올린 연주자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지만 같은 사람이고 가끔씩 만나기도 한다. 동일한 인물이라도 다른 세계에 존재하면 달라야 하지만, 그들은 그 두 세계에서 똑같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구절에서 난 많이 웃었다. 재미있기도 하고 뭔가 김이 빠지기도 해서이다. 동일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난 좀 달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 좀 더 잘났고, 더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동일한 존재는 하나의 아이덴티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허탈했다. 결국 나란 인간은 니체의 영원회귀를 숭배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미친듯이 뛰어다녀야만 하는 허접한 존재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하고 두 남자는 똑같은 목소리로 키득거렸다. 그들은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나와 줄리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을 굴렀다. 나는 멜론 장수의 말을, 그게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면, 한 세계에서는 멜론을 팔고 다른 세계에서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같은 존재라면, 어느 세계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어야 할 텐데.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정말로 유쾌해 보였다. -p52]
출처; 네이버 이미지
같은 현실을 공유하지만, 거기서 느끼는 빛과 맛과 관점은 다 다르다, “평생을 살아도 우리는 타인의 현실의 결에 완전히 접속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각자의 현실의 결을 갖고 있다”는 『데이지와 이상한 기계』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먼 곳에서 가져온 생물 샘플의 유출로 시몬 사람들의 얼굴엔 모두 가면이 생겨버린다. 처음엔 불편했지만 점점 그들은 가면을 쓴 생활을 편리해하며 가면을 쓴 채로 살아가기로 한다. 『시몬을 떠나며』는 코로나로 인해 마스크를 쓴 삶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의 현실이 연상되었다. 불편하기도 하지만 어느새 나의 많은 것을 가려주어 편리함으로 변해버린 마스크를 코로나가 끝났을 때 난 쉽게 벗지 못할 것 같다.
필요 없으면 제거하고, 문제가 생기면 격리해버리는 살벌한 미래의 어느 시점에, 클론인 소년 하나가 만신창이가 되어 늪으로 도망쳐 온다. 늪은 안락하고 평온한 자신의 세계로 들어오라고 하지만 소년은 완강히 거부한다. 그럼에도 늪은 드론이 다시 소년을 공격했을 때, 그를 도와준다. 소년은 스스로 회복하고, 자신의 고유성을 위해 위험한 세상으로 다시 떠난다. 『늪지의 소년』은 클론이지만 인간의 개체성과 고유성을 지향한다. 복제되어도 자신의 의지가 있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러한 행동을 부여받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내 몸의 모든 것이 기계로 대체되어도 본래의 뇌와 생각할 수 있는 능력만 있다면 그건 나인지도 잘 모르겠다.
[개별적 개체성, 그게 인간일 때의 나를 가장 불행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었어. 동시에 나를 살아가게 했지. 개별적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전체의 일부라는 건 모순이 아니야. 아니면, 전체라는 건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p119]
‘개별적 개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은 누군가의 도움과 자생력이다. 이 소설에서의 늪과 버섯의 존재는 인간의 개별성을 위해 끝까지 보존되어야할 마지막 보루이다. 적대적이고 파괴적인 저쪽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는 경계인지도 모른다.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인 『가장자리 너머』에도 이것은 연결된다. 감시, 처분, 삭제하는 세상에서 결국 필요한 것은 공존이며, 그것을 위한 것은 늪과 운무림이라는 환경이다. 그것만이 인간의 자생력을 도울 수 있다.
김초엽작가는 이 책에서 두 개의 큰 제목인 ‘서로에게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와 ‘다른 방식의 삶이 있음을’으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산뜻한 이야기의 마을(p7)’에서 가져 온 다양하고도 재미있는, 가벼우면서도 무거운 이야기로 생각과 대안, 방향을 제시한다. 난 이 좋은 이야기를 딸아이에게 들려주다 식겁했다. 그 아이가 나를 붙잡고 3시간동안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나의 생각을 물었다. 복제 인간에 대해, 작가가 말하는 미래의 모습이 과학적으로 진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난 정확하게, 과학적으로 대답하진 못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말해주고 싶었다. 세상의 그 어떤 변화에도 다수의 공감과 동의가 필요하다고. 먼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문 밖에서 변하고 있는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내가 흘리는 진땀과 상실감이 고려되어 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말하고 싶다.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까, 아니면 고통을 견디는 것이 사랑일까...
그때 나는 불행히도 나에게 고통이 곧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선인장 끌어안기』 중에서,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