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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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먹고, 입고, 자고 쉴 수 있는 공간, 사람이라면 해야 할 당연한 행동, 예컨대 주머니에 남아있는 잔돈 정도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저하지 않고 줄 수 있는 마음,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것에는 화내고 맞서야하는 용기, 웬만하면 나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과 척을 지지 않고 사는 것-은 중요하지만 너무 당연해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사소하게 보일 정도로 기본적인 것을 일상적으로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많은 사람들은 이 조차도 갖지 못해 매번 허덕이며 살아간다.

 

빈주먹(p.15)으로 태어났지만 운 좋게 석탄목재상으로 빚 없이 그럭저럭 살게 된 빌 펄롱은 아내와 다섯 아이를 둔 가장으로, 가정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주위의 모든 것을 모른 척하며 눈을 감고 살아야 한다. 1985, 아일랜드의 경제가 혹독하게 힘들었을 때, 자칫하면 모든 걸 다 잃을 수 있는 시기였을 때, 그나마 따뜻하게 살고 있는 펄롱이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편치 않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그에 따른 가책을 느낀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수용소)’를 소재로 했지만 그 내용보다는 빌 펄롱이라는 인물의 마음과 생각을 함께 따라가고 느끼며 읽게 된다. 매 페이지마다 멈춰 사람 사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하며, 거기에서 오는 수많은 상념과 심란함으로 한숨이 쉬어졌다. 밤마다 잠에서 깨어 자신을 돌아보고 고민하는 펄롱의 양심, 별로 잘나지도 않은 인생에, 자신에게 주어진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 보잘 것 없는 딱 그만큼조차 잃지 않고 지키기 위해, 침묵하고 모른 척 하며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회한이 나의 고민과 다르지 않았다.

 

펄롱의 딸들이 다니는, 다른 딸들도 앞으로 다니기를 원하는 세인트마거릿 여자 중학교와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는 선한목자수녀회가 운영하는 곳이다. 말이 여학교이지 사실 이곳은 교화를 목적으로 들어 온 가난한 어린 미혼모들이 갇혀서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는 노동을 하는 수용소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들이 낳은 아기는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돈을 받고 보내진다. 선한 목자라고 이름 붙여진 곳에서 아이를 팔아먹고 돈을 버는 것이었다.

 

종교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루 세 번 울리는 종소리에 일손을 멈추고 드리는 삼종 기도에 사람들은 하느님께 무엇을 기도하는가? ‘너희 가운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을 뉴로스의 사람들은 무시한다. 아일랜드 모자 보호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았으면서도 그들은 침묵했으며 자신들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미시즈 케호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 정말 열심히 살아서, 나만큼이나 열심히 해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 딸들도 잘 키우고 있고, 알겠지만 그곳하고 세인트 마거릿 학교 사이에는 얇은 담장 하나뿐이라고.”

-p.106]

 

얇은 담장 하나처럼 삶을 떠받치는 것이 불안정한 사람들에게 그 얇음은 언제라도 깨지기 쉽다. 그나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뒤를, 주위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권력자의 눈 밖에 나서도, 알고 보면 다 한통속(p.117)’인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하찮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그것이 거의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펄롱은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p.116)”라고 하며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했지만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의 갈등을 느낀다. 사람들의 싸늘한 태도에 신경 쓰고, 최악의 상황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고생길을 예상하며 그냥 그만 두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신발도 신지 않은 세라를 데리고 나오는 그의 마음은 편해진다. 펄롱의 선택에 나는 무조건적인 응원을 보내지는 못했다. 펄롱이 자라오면서 받은 도움과 그것에 대한 빚을 갚고자 하는 그의 선택이 가져 올 좋지 않을 대가가 고스란히 그의 가족에게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펄롱이 먼저 함으로써 세상이 서서히 달라질 것임을 믿는다.

 

[펄롱은 차를 세우고 노인에게 인사를 했다.

이 길로 가면 어디가 나오는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이 길?” 노인은 낫으로 땅을 짚고 손잡이에 기댄 채 펄롱을 빤히 보았다.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

-p.54]

 

우리는 모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각자의 몫이다.

 

작가 클레어 키건의 하지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소녀와 여성이 수감되어 강제로 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거의 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경향신문, 2023, 12, 08)”에 대한 답과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p.24)’ 마음이 불편하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침묵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조그만 것이라도 용기 내어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펄롱을 나락에 빠뜨리지 않는 것이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p.119]


-사진 출처(경향신문, 2023.12.08., 임지선 기자),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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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5 15: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님...성탄절의 참된 의미가 새삼 무겁습니다 오늘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5 16:05   좋아요 2 | URL
마침 이 책의 배경도 크리스마스이고 지금 우리도 성탄을 맞이하고 있어 그 의미가 새로웠습니다.
작가가 주는 메시지가 의미 있어 좋았어요
서곡님께서도 남은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래요^^

꼬마요정 2023-12-26 0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아프네요. <맡겨진 소녀>도 맘이 좀 아팠지만 이 책은 더 아플 것 같아요. 읽어보고 싶네요.

페넬로페 2023-12-26 05:10   좋아요 2 | URL
네, 짧은 분량이지만 의미가 많이 담긴 책이라 좋았어요.
맡겨진 소녀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서니데이 2023-12-26 06: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연휴 잘 보내셨나요.
클레어 키건의 이 책 출간 소식은 들었는데, 이번에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거군요. 아일랜드가 지금은 소득이 높은 나라지만, 예전에는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크리스마스 시기가 등장해서 그런지, 연말에 읽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잘읽었습니다.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페넬로페 2023-12-26 10:30   좋아요 2 | URL
지금 아일랜드의 경제가 엄청 좋다고 하는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도 들고요.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는데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 좋았어요.
서니데이님!
따뜻한 연말 인사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음장수 2023-12-26 1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시도 떠오르고 여러가지를 생각나게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0:33   좋아요 1 | URL
김수영의 시 구절이 떠오르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자목련 2023-12-26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짧은 분량이라 읽는 건 바로 읽었는데 리뷰는 못 쓰고 있어요. 어쩌면 쓰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아직은...

페넬로페 2023-12-26 10:34   좋아요 1 | URL
짧은 분량인데 저도 이 글 쓰는데 며칠 걸렸어요.
그래도 자목련님의 리뷰 읽고 싶어요^^

페크pek0501 2023-12-26 15: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완독까지는 하겠는데 정말 리뷰를 완성하는 건 힘든 작업입니다.
페넬로페 님의 리뷰 완성을 응원하는 바입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4   좋아요 2 | URL
정말요.
책을 읽기는 쉬운데 매번 리뷰 쓰기가 너무 힘들어요.
페크님의 응원으로 더 열심히 읽고 글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3-12-26 17: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아 쉽지 않은 소설이군요. 여학교를 빙자한 세탁소라니 으 ㅜㅜ 얼마전 읽은 <바람의 열두 방향> 속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생각나네요. 모른 척 하고 지내는 편안함을 버리고, 어려운 길로 나선 펄롱이 대단합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7   좋아요 1 | URL
읽기는 쉬운데 매 페이지마다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 있는지, 클레어 키건 작가가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과 의미가 통하네요.
우리들을 대신해 누군가가 희생해 주는 것이 이 시대에도 많은 거겠죠 ㅠㅠ

미미 2023-12-26 18: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공감가는 대목들이 여럿 보입니다.
어제 용기에 관해 책에서 읽는 문장들도 떠오르고요. (하워드 진) 페넬로페님 별5개 주셨으니 저도 내년에 꼭 읽어보고싶네요~♡
연말 웃음가득하시길 바래요🙆‍♀️

페넬로페 2023-12-26 21:21   좋아요 2 | URL
책을 읽으면 주먹을 불끈 지지만 막상 용기를 내야 할 때엔 숨기 바쁜 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책을 읽으며 매번 달라져야 할텐데요 ㅠㅠ
미미님의 덕담으로 더 한층 웃음짓는 페페가 되겠습니다^^

희선 2023-12-28 00: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하고는 수녀원 같은 데서 일을 시키고 낳은 아이는 다른 나라로 입양 보내기도 했더군요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 막달레나 강제 세탁소는 실제 있었던 곳이기도 하군요

그런 곳이 있으면 있는가 보다 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살기도 바쁠 테니... 펄롱은 그런 걸 아주 모르는 척하지 않았네요 그런 거 쉽지 않을 듯합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3-12-28 17:41   좋아요 1 | URL
보수적인 생각이 사람을 구속시켰고, 비참하고 폭력적으로 변질된 것 같습니다.

모른척하고 살지 않는 것, 정말 쉽지 않죠^^

캐모마일 2023-12-30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용소 영화로 만들어지고 역사, 미스터리 유투브로도 많이 봤습니다. 소설 제목이 낯익지만 그 내용일 줄은 몰랐네요. 장바구니에 넣어둡니다.

페넬로페 2023-12-31 00:49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 님께서는 벌써 알고 계셨네요.
저는 이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고
‘필로미나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어요.
다른 영화도 있는 건가요?
유튜브로도 봐야할 것 같아요^^

책친놈 2024-03-20 11: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문단 부터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사소하다고 생각하는것들을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었어요. 저는 책의 후반부에 ‘왜 가장가까이있는게 가장 보기 어려운걸까?‘라는 부분에서 <이처럼사소한것들> 이라는 제목과 맞물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덕분에 책에대한 생각이 정리되는 느낌이라 잘 보고갑니다. 읽고서 리뷰 쓰는걸 미뤄와서 반정도만 쓰고 저장해놨는데, 페넬로페님 리뷰보고 오늘 꼭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4-03-20 12:13   좋아요 1 | URL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라는 제목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더라고요.
펄롱을 통해 저의 삶도 한 번 되돌아 볼 수 있었고, 사회적 이슈들과 약자들에 대해 회피하고 무관심한 것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다 이처럼 사소한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더라고요 ㅎㅎ,ㅠㅠ
책친놈 님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닌 서구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은 과거의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단절되었습니다. 반면 서구의 문물은 새롭고 진보된 것으로 여겨지며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현상이 20세기 내내 일어났죠. 그런 근대화 현상은 서구에서 만든 것이 우리가 만든 것보다 좋다는 착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근대화의 잔재는 현재까지도 사회문화 전반에 남아 있으며, 미술에 대한 인식에도 역시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미술하면 (이상하게도자꾸만) 서양미술을 먼저 떠올리고, (이상하게도 자꾸만) 서양미술만 즐기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비판적으로 판단해볼 겨를 없이 문화적, 예술적 편식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 P6

뛰어난 미술가는 현재가 아닌 내일의 시대정신을 예리하게 감각해작품에 담아냅니다. 고로 뛰어난 미술가의 작품은 내일을 선취하고 또예견합니다. 오늘날의 미술이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세계 역시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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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3-12-24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이웃을 만난 2023년을 기억하겠습니다. 청안하시길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4 12:40   좋아요 0 | URL
무한냥님, 감사드려요.
‘청안‘이라는 말을 항상 기억하겠습니다.
크리스마스 즐겁고 행복하게 잘 보내십시오^^

페크pek0501 2023-12-26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뛰어난 저술가들은 미래를 예언하더군요. 소로우의 <월든>을 읽으면서도 한 생각입니다.^^

페넬로페 2023-12-26 17:58   좋아요 1 | URL
그것이 예술가의 위대함 같습니다~~

서곡 2023-12-31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오늘 밤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부터 새해 잘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4-01-01 03:29   좋아요 1 | URL
서곡님!
감사드립니다.
2024년에도 책을 통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건강 기원하겠습니다^^
 














사마천의 사기 세가(史記世家) 중 진 세가(晉世家)뽕나무 아래의 굶주린 자에 의해 목숨을 구하다에 나온 내용이다. 조순(趙盾)은 양공과 영공(靈公) 때에 정권을 잡았다. 조순이 사냥을 나갔을 때, 뽕나무 아래에 굶주린 사람(시미명)이 있는 것을 보고 밥과 고기를 주었다.

 

사치스럽고 성정이 나쁜 영공은 간언하는 조순을 근심거리로 여겨 조순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병사를 매복시켜 죽이려고 했다. 영공의 주방장이 된 시미명은 조순이 떠나가게 해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병사들은 조순을 죽이려고 맹견을 풀어 놓았는데 시미명이 개를 묶어 죽였다. 병사들이 조순을 뒤쫓아 죽이려고 했지만 시미명이 반격을 가하고 조순은 탈출했다. 조순은 그제야 그를 도와 살려준 사람이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리고 있던 시미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망간 조순은 국경을 벗어나기 전에 사촌동생 조천으로 하여금 영공을 시해하게 하고, 영공이 죽자 양공의 동생 성공(成公)을 추대하였다. 조순은 다시 돌아와 국정을 맡게 되었다.

 

 

사기 세가 중 조 세가(趙世家)아이 울음소리에 종족의 존망이 달려 있다에 나온 내용이다. 조순이 죽고 그의 아들 조삭(趙朔)이 뒤를 이었다. 삭은 성공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이 왕이 되었다. 경공 3,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순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 조삭을 주살하려고 했다. 한궐은 반대하고 조삭에게 달아나라고 했지만 조삭은 조씨 가문의 제사를 끊어지게 하지 않기만을 당부하고 죽었다. 도안고는 조삭의 씨족을 모두 죽였다. 임신하고 있었던 조삭의 아내는 그때 아들을 낳았는데 도안고가 아이를 찾아내려고 했다.

 

[조삭의 아내인 공주는 갓난아이를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는 축원하여 말했다.

조씨 종족이 멸망하려면 네가 큰 소리로 울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 내지 마라.”

{아이를} 찾아내려 했을 때 아이는 결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p.477,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세가, 진세가, 민음사]

 

다행히 울지 않아 아이는 살아났지만 도안고는 포기를 모르고 아이를 찾아 죽이고자 했다. 조삭의 문객 중 공손저구(公孫杵臼)는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고아를 부탁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조씨의 고아라 속이고 아이와 함께 죽었다. 정영은 진짜 조씨 고아와 산 속에 숨어 있었다.

 

15년이 지나고 경공이 병이 들어 점을 쳐 보니, 후대가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 재앙이 생긴다고 해서 한궐과 의논하여 이름이 무()인 조씨 고아를 데려 온다. 여러 장수들은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쳐 그 종족을 멸한다. 정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무는 정영을 위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대대손손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사기 세가의 내용은 민음사 판 사기세가진세가(p.315~327)’조세가(p.474~481)’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중국 원나라 희곡 작가 기군상(紀君祥)의 작품인 조씨 고아는 사기의 진 세가와 조 세가의 내용을 토대로 한 비극 작품이다. 조씨 고아의 주인공은 정영이다. 이야기는 배경을 생략한 채, 도안고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순을 해치려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안고는 조순의 삼백 명이나 되는 일족을 모두 죽인다. 조순의 아들 조삭은 부마였는데, 임신하고 있는 공주에게 아이의 아명을 조씨 고아라 지어주고 원수를 갚아 달라 유언하고 죽는다. 공주는 떠돌이 의원인 정영에게 조씨 고아를 맡기고 자살한다.

 

조씨 고아는 복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복수 비극인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는 결이 다르다. 동양의 정서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이 희곡에는 자신의 욕망보다는 한 집안의 복수를 위한 씨앗 하나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이 주를 이룬다.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단지 조씨 집안의 복수를 위해 정영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불사하고도 아이를 살리려고 한다.

 

기군상은 사기 세가에 없는 내용을 절절하고도 절묘하게 희곡에 넣는다. 정영은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귀한 아들을 보았는데 그 아들을 조씨 고아라 속여 대신 죽게 하고 자신은 20년 동안 조씨 고아를 돌본다.

 

조씨 고아(정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정영은 예전에 억울하게 죽었던 충신과 명장을 한 권의 두루마리에 그려 내 그동안의 일을 정발에게 자세히 알려 준다. 정발은 이러한 사실을 주공에게 알리고 왕은 도안고의 집안 일족 가운에 어린 아이 하나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한다.

 

[정발이 노래한다.

 

<탈포삼(脫布衫)>

저놈(도안고)을 형틀에 목 박아 형장에서 끌어내되,

바로 목을 치고 가슴을 쪼개지는 말라!

저놈을 다지고 다져 한 움큼

고기즙으로 만든다 해도,

내 가슴 가득한 이 울분은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으리라!

p.112]

 

도대체 복수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가? 정영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조씨고아를 살려야 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조씨 고아가 장성해 행한 복수는 결국 도안고 일족 전체를 죽이는 것이었다. 조씨 고아 또한 나머지 삶을 사는 내내 그들에게 또다시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고,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씨앗이 있는지를 계속 의심해야 할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것은 끝이 없다.

 

기군상의 희곡은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았고, 많은 것이 생략되고 절제되어 있지만 거기에 들어있는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설자(楔子)가 있어 계속 내용을 복기시켜 주었고, 고대 그리스 극의 코러스 역할과 비슷한 노래()가 배우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조씨고아의 연출가 고선웅의 연출과 각색은 너무 좋았다. 고선웅 연출가는 기군상의 원대(元代) 희곡 내용 중 현대인이 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각색해 관객을 이해시켜 주었다.

 

또한 기군상이 정영의 자식을 등장시켜 사기 세가의 내용을 뛰어 넘는다면, 고선웅은 거기에 더해 정영의 아내를 등장시켜 훨씬 더 절절하고 먹먹하게 기군상을 기절시켜 버린다. 정영이 조씨 고아와 자신의 아들을 바꾸기 위해 집으로 왔을 때, 그의 아내는 정영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말 억울해 한다. 그런 마음을 담은 정영의 아내의 절규, 남편에 대한 실망과 원망, 그럼에도 기어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 죽임을 당하게 할 때, 모든 관객이 울었다. 내 옆의 남자 분은 정말 많이 울더이다.

 

20년 동안 조씨 고아를 길러내고 도안고에 대한 복수가 마무리 되었을 때, 정영은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늙어빠진 왕은 조씨고아에게 도안고 일족 모두를 죽여주겠다고 하고, 남은 뿌리조차 없도록 하겠다고 할 때 정영은 허탈하게 왕을 바라본다. 권력과 욕망, 인간의 삶 모두가 부질없고, 인생은 잠깐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끊임없는 전쟁이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연극에서 하성광배우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드라마 며느라기에서 약간 얄미운 작은 아버지역으로 나온 분이었다. 정영을 연기한 하성광 배우는 연기를 신들린 것처럼 했다. 딱 정영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자신의 아들을 기어코 빼앗아 오는 장면, 자기 아들의 무덤에서 뼛가루(의견이 분분하다)를 칠하는 모습, 조씨 고아에게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그 간의 사연을 얘기하는 연기를 넋을 잃고 보았다. 커튼콜 때 나를 포함한 관객의 기립박수는 그의 연기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과 감탄이었다. 심지어 나는 아이돌 가수의 팬처럼 큰 소리로 환호했다.

 

조씨고아마지막 장면에서의 그의 대사가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보면

어느새 한 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들어 보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감정의 카타르시스의 실현이 떠올랐다. 어떤 씻김굿을 하고 나온 기분도 들었다. 사람 사는 것이 늘 거기서 거긴데, 왜 매번 내 마음엔 미움이 싹트고, 분노와 욕망이 생기는지....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에 담고 있는 타인에 대한 미움을 없애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욕심내지 말고 살기로 결심했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 저녁 어스름의 명동은 활기찼다. 나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가 전쟁을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복수는 그저 허무한 복수를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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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12-14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선웅 연출 믿고 본다고^^ 저는 2019년 오페라를 봤었습니다. 조씨고아전 정말 재밌겠어요. 원작과는 다른 각색을 보는 것이 연출의 힘인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2-14 18:52   좋아요 1 | URL
고선웅 연출가가 뮤지컬도 연출했군요. 좋았을 것 같아요. 조씨고아는 원작도 괜찮았는데, 연극이 넘 좋았어요.
먹먹하고 재미있고~^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잘 어우러졌더라고요.

Falstaff 2023-12-14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씨고아>는 을유세계문학전집 78번으로 나온 <원잡극선>에 나옵지요. 물론 여러가지 판본이 있겠으나 어느 것을 읽어본들 원래 텍스트가 조금 낡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현대극이 부러운 건 계속해서 과거 행적을 지양하려고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음사 <사기세가>는 조심해서 읽으셔요. 역자 김원중이 설마 그랬겠습니까만 의심스러운 곳이 하필이면 중요한 곳에 있더라고요. 교정/교열할 때 잘못한 거겠지요.

페넬로페 2023-12-14 18:58   좋아요 1 | URL
을유판 조씨고아도 있군요. 찾아봤더니 무려 836페이지네요.
번역자가 다르니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원작의 내용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죠. 그냥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언지 생각하고 배워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사기세가를 읽을 때, 번역가의 진의를 알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어요 ㅠㅠ
그저 주는대로 받을 수밖에요.
그러니 폴스타프님께 언제나 의탁하고 있습니다.
잘 이끌어 주십시요^^

꼬마요정 2023-12-14 19:12   좋아요 1 | URL
<사기세가> 어떤 부분인가요? 요새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혹시 <사기본기>에는 없나요? 좀 반항심이 드는 부분이 있긴 했거든요...

Falstaff 2023-12-15 05:51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 님: 을유판 읽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836페이지에 달하는 원나라 시대 곡曲 대본입니다. 원곡이 베이징 오페라라고 하는 북경 경극의 원류라고 하지만 천년 전의 뻔한 스토리라서 읽어보시라고 권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보신다면 좋을 듯합니다.
꼬마요정 님: 민음사에서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 중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정, 교열에 참여한 거 같습니다. 나라 이름이 비슷비슷한데요, 진나라 만 해도 천하를 통일하는 秦만 있는 게 아니라 晉도 있고 陳도 있고 그런데요 이걸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을 했더니 인정은 하는데 그렇다고 수정을 하지는 않더군요.

꼬마요정 2023-12-15 12:42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 님 고맙습니다^^ 전 가끔 동북공정 때문에 화가 나서요ㅠㅠ 다행히 진 나라들이군요. 근데 솔직히 너무 헷갈립니다. <본기> 읽을 때도 진 나라 표기 잘못된 거 있었어요.

꼬마요정 2023-12-14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씨 고아> 연극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봤어요. 전 처음에 기군상의 희곡과 역사가 일치하는 줄 알고 기겁했답니다. 진짜 정영이 자기 아들 바꿔치기 한 줄 알고... 조씨 고아가 진짜 말 그대로 조씨의 고아란 뜻인 것도 한참 있다 알았죠... 중국은 나라도 크고 사람들도 많아서 이야기들도 참 많습니다. 자기들 것이 좋은 건데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구요.

마지막 대사 좋네요... 제발 전쟁이 모두 끝나기를...ㅠㅠ

페넬로페 2023-12-14 19:42   좋아요 1 | URL
조씨고아의 의미가 넘 직접적이죠? ㅎㅎ
기군상의 원작을 읽을 때, 사실 조씨고아가 바로 복수를 감행한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근데 한편으로 그 시대에는 또 그럴 수 있지 않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연극이 주는 의미가 좋더라고요.
마지막 대사도 좋고요.

그레이스 2023-12-14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기 읽었던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네요^^

페넬로페 2023-12-14 22:43   좋아요 1 | URL
아마 거의~~

호시우행 2023-12-14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사일생으로 한 생명을 구출한 의미가 처절한 복수로 이어진다는 게 정말 참으로 허망하네요.ㅠㅠ

페넬로페 2023-12-15 00:16   좋아요 0 | URL
네, 그것이 이 희곡이 전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부질 없고, 허망하고요^^

희선 2023-12-15 0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도 아니고 한 집안에 하는 복수라니... 그렇게 사람을 다 죽이면 뭐가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죠 그런 걸 보여주고 그걸 보는 사람은 복수할지 말지 생각하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12-15 10: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게 맞는데 사람 사는 것이 그렇지 않나봐요.ㅠㅠ
그때나, 지금이나요^^

새파랑 2023-12-15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첨들어본 작품인데 연극으로도 있고 유명한가 보군요~! 조씨 고아라라고 해서 성이 조씨인 고아에 대한 이야기? 인가 생각했습니다 ㅋㅋ 동양의 특성이 가미된 비극적 이야기라니 이건 재미가 없을수가 없겠네요 ^^

페넬로페 2023-12-15 10:11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어요.
연극 보러 가기 위해 책을 읽었는데 사연이 절절했고 먹먹했어요.
서양의 비극과 약간 달랐어요^^

cyrus 2023-12-15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공연 보고 싶은데 일정과 시간이 맞지 않네요. 서울에는 보고 싶은 공연이 너무 많아요.. ^^;;

페넬로페 2023-12-15 10:26   좋아요 1 | URL
공연 보려면 시간 맞추고 일정 조절하기가 쉽지 않죠.
또 예매하기도 어렵고요.
기회 되시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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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12-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오늘도 춥네요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요 ㅎㅎ 연말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22 15:59   좋아요 1 | URL
서곡님! 감사합니다^^
날씨가 엄청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래요^^
 














혹독한 스탈린 시대와 세계 대전을 거치는 동안 러시아인은 누구나 힘들게 살았고, 인텔리겐치아에게도 그 힘든 삶은 비껴가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죽음과 이유도 모르는 수용소로의 유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엉뚱한 곳으로의 강제 발령이 비일비재했고, 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억울함과 부당함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류드밀라 울리츠카야의 소네치카는 그러한 시대와 그 후 주어진 기만적인 해빙기를 온 몸으로 지나온 소냐(소네치카)라는 여인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행복보다는 불행 쪽에 가까운 이 여자의 일생을 작가 울리츠카야는 정확하고 사실적인(어떨 땐 폐부를 찌르는-‘무언가를 앗아가는 사람에게는 역설적으로 관대하고 퍼주는 사람에게는 끔찍이도 잔인한 여자의 본성(p.16)’ 같은), 신랄한 문장으로 압축적 서사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흔들림 없는 객관성을 유지함으로써 소네치카의 인생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금지시킨다. 불행한대도 의연하게 살아가는 여자의 강인함을 부각시키는지, 아니면 그것으로 사실 이 여자가 엄청 불행하고 바보스럽다고 하는지 조금 헷갈린다.

 

특별히 예쁘다고 할 게 없고 근시이기도 한 소네치카는 일곱 살 때부터 스물일곱 살까지 책에 빠져 산다. 자신의 인생에 독서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시작부분에 서술된 소네치카의 광적인 독서에 머물 수밖에 없다. 똑같이 책을 좋아하는 습성에 대한 반가움은 잠시이고 그 뒤에 따르는 울라츠카야 작가의 뼈를 때리는 문장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든 책벌레가 된다는 것은 타고난 기질과 그쪽에 대한 재능이 있어서이다. 하지만 책벌레의 삶은 책 속의 삶과 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거나 가벼운 정신병리적 기운(p.11)’마저 들게 만들 수 있다. 경계에 머물며 그저 그렇게 인생의 대부분을 보낼지도 모른다.


[이것은 무엇이었을까모든 예술에 전제되는 유희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인가미숙한 어린아이의 덜 깨인 순진한 믿음인가상상력의 부재로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가 존재한다는 인식이 없는 것일까아니면 그 반대로 자아를 잊을 정도로 환상의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 경계 바깥의 모든 것들이 의미와 내용을 상실하는 것일까?

그녀는 마치 꿈조차도 읽는’ 듯했다. -p.10~11]

 


소네치카는 도서관의 지하 보관실에 근무하며 책 속의 삶을 이어간다. 그곳에서 예술가의 삶을 포기하고 부조리와 강압적 삶에 적응한 유린당한 유럽 인텔리겐치아47세의 로베르트 빅토르비치의 뜬금없는 청혼을 받아들인다. 결혼과 동시에 소네치카는 믿고 있었던 책 속의 삶을 너무나 가볍게 던져 버리고 억척스럽게 집안을 이끌어가는 일상의 삶을 사는 전사가 된다. 남편을 사랑하고 그가 주는 사랑에 황송할 만큼의 행복을 느낀다. 다시 예술가로 돌아간 빅토르비치는 소네치카가 가족으로 받아들인 폴란드 소녀 야샤와 사랑에 빠져 그녀를 자신의 뮤즈로 삼는다. 소네치카는 남편과 야샤의 사랑을 아무 저항 없이 인정한다.

 

그토록 애써 마련한 집과 남편도, 자신을 전혀 닮지 않은 딸인 타냐도 모두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소네치카에게 남은 건 늙어버린 자신밖에 없었다. 공허와 주어진 인생을 그대로 수긍하며 살아왔다는 안타까움뿐이었다. 소네치카는 그 적막과 외로움을 이겨내고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결국 소피야 이오시포브나에게, 책벌레인 우리들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독서에 대한 타고난 재능으로 책 속의 문장에 공감하며 감동을 느끼는 행복을 얻지만, 그것은 일상에, 자신의 선택에 그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책 안에서 위안과 충분한 자유를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건 아닌지.

 

 


거의 같이 늙어가고 있지만 아흔의 무르는 예순의 딸인 안나 표도르브나에게 폭력적으로 군림하고 있다. 안과 의사인 안나는 인텔리겐치아이지만 엄마에게 꼼짝없이 복종한다. 안하무인에 참을성 없고 변덕스러운 무르는 평생 딸을 부려 먹는다. 소네치카보다 스페이드의 여왕의 안나가 더 불행해 보인다.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격동의 시기를 지나온 러시아 여성의 삶을 짧은 분량이지만 시대적 배경 안에 각 인물의 성격과 개성을 밀도 있게 잘 녹여내고 있다. 그렇지만 왜 소네치카와 안나가 자신의 삶에 놓인 부당성에 분노하지 않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시대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또는 계속되는 인생의 부단한 전진 속에서 다져진(책읽기를 포함한) 포용력이라고 보기엔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다.



 

 

 

 

 

 









소네치카가 남편의 공방에서 발견한 그림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하얀 눈을 가진 여자가 야샤라고 알아챈 순간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눈이 쌓여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길에는 5월의 형형색색의 녹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는 십칠 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끝났다고, 벌써 오래 전에 벌어졌어야 하는 일이 지금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책장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 책이나 골라 읽는다. 소네치카가 고른 책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벨킨 이야기귀족 아가씨-농사꾼 처녀였다.

 

그녀는 책 속의 문장에 몰입하며 다시 행복을 느낀다. 예술가인 남편의 기질을 이해해주고 그의 뮤즈가 될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본래 좋아했던 책의 세계로 돌아간 그녀에게 더 이상의 불안과 강박은 없어졌고, 책을 통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심결에 고른 책은 러시아 문학에 냉소적이었던 남편에게 유일하게 예외적이었던 푸시킨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감추어져 있는 앙심을 의미(p127-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하는 그대로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은 권선징악적 내용을 담고 있다. 노 백작 부인에게 카드 게임에서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3장의 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해 백작 부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게르만은 스페이드 여왕 카드 패로 전 재산을 잃고 정신병원으로 가게 된다. 백작 부인에게 모질게 시달렸던 가난한 양녀 리자베타는 상당한 재산을 가진 친절한 젊은이와 결혼을 한다.

 

푸시킨의 스페이드 여왕과 동명의 소설인 울리츠카야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푸시킨의 소설과 플롯은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간다. 스페이드 여왕인 무르의 존재는 너무나 크고 확고해서, 주변 사람들을 시들게 한다. 안나는 어머니인 무르를 의자로 내리치고 싶어 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싶고, 혐오와 구역질(p.110-울리츠카야의 스페이드의 여왕)’을 느끼지만 한 번도 실천한 적이 없다.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아이들을 전 남편이 있는 곳으로 보내려는 계획을 세우지만 안나의 삶은 너무 어이없게 끝나고 만다.

 

울리츠카야의 스페이드 여왕의 악령은 나쁜 사람을 벌주는 것이 아닌 자기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오히려 잠식해 버린다. 푸시킨의 소설보다 울리츠카야 소설이 더 빛나는 건 이 부분 때문이다. 어이없고, 말도 안 되지만 사실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난다. ‘관계라는 종속적인 것이 사람의 발목을 잡고 지옥으로 끌어당긴다. ‘스페이드의 여왕의 마지막 내용이 너무 먹먹하고도 슬펐다. 섬뜩하기도 했다.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은 도스토옙스키 작가의 작품이 많다. 언제나 그의 작품을 읽으며 감탄하지만 새롭게 만나는 러시아 작가도 정말 매력적이다. 이번에 만난 울리츠카야의 작품 역시 좋았다. 너무 장황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보다 분량이 훨씬 적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큼 풍성했다. 러시아 여성에 대한, 러시아 여성 작가가 쓴 글이라 재미있었고 공감한 내용이 많았다.


[안나 표도르브나는 차가운 우유팩을 들었다십오 분 후에 아이들이 떠나고두 시간이 더 지나서야 무르는 아이들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그때는 아마도 이미 파흐라에 있을 것이다안나 표도로브나는 무르의 눈이 휑해지고조용하고 쉰 목소리가 유리가 쨍그랑하는 듯 날카롭게 올라가 고함치는 것을 상상했다깨진 그릇의 파편들가장 비열하고 참을 수 없는 여편네의 욕설.....그러고 나서는 별안간 이 일이 이미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즉 안나는 힘없는 손을 들어 화장을 한 늙은이의 따귀를 기분좋게 힘껏 갈긴다이후에 어떻게 될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p14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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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0 10:4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러시아 특유의 가난하고 비극적인 이야기가 좋더라고요~!!
이 책을 읽었던 감상평이 떠오르네요 ㅋㅋㅋ

페넬로페님 역시 러시아 소설 전문가 이십니다~!!

페넬로페 2023-12-10 11:55   좋아요 3 | URL
러시아가 워낙 역사의 굴곡이 심해 비극적인 스토리가 많은 것 같아요.
러시아 전문가는 당연 새파랑님 이십니다. 아마 누구나 인정할걸요^^

dokkikorea 2023-12-10 15: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미미 2023-12-10 22: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녀는 마치 꿈조차도 ‘읽는‘ 듯했다!! 읽다 보니 김영하 작가 팟케스트에서
<소네치카>줄거리를 들어봤었네요. 남편이 너무 어처구니 없어서 가슴 아팠던 것 같아요.
그래도 페넬로페님의 리뷰를 보니 책으로 읽고 싶어집니다. 어느 것이 발췌문이고 어느 것이 리뷰인지 페넬로페님 문장이 아름다워서 헷갈렸습니다. >.<

페넬로페 2023-12-10 23:09   좋아요 3 | URL
남편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죠.
러시아 여성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는 걸 울리츠카야 작가가 잘 썼더라고요.
새로운 작가의 발견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훑었을 뿐입니다 ㅎㅎ

희선 2023-12-11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류드밀라 울리츠카야는 박경리상 받기도 했어요 예전에 다른 나라 사람이 상을 받아니 했군요 그저 그렇게 알고 책은 읽어본 적 없어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한 사람이 나오다니, 저는 어릴 때는 책을 안 봐서... 책과 현실은 아주 다르다고 생각하기도 하는군요 그래도 사람이 사는 데 책이 주는 게 있기는 하겠지요 사람은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 문제 없군요 안 보는 것보다 보는 게 좀 나을 듯합니다 다른 즐거움이 없다면... 제가 그렇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3-12-11 16:41   좋아요 1 | URL
박경리상이 있다는 걸 저는 이번에 알았어요. 소네치카는 프랑스 메디치상도 받았는데, 이번에 한강 작가가 받은 상이더라고요.
책은 안보는 것보다 보는 게 훨씬 더 좋겠지요^^

서곡 2023-12-11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사 바꾸셨네요 예쁩니다 ㅎㅎ 월요일 저녁 편안히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12-11 20:30   좋아요 1 | URL
네, 오늘 일리야 밀스타인 전시회 보고 와서 작가의 서재 그림으로 바꿔봤어요^^
오늘 하루종일 비가 오네요.
건강한 저녁 되시길요^^

책읽는나무 2023-12-12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한 기분이 절로 들었습니다.
페페 님의 리뷰를 읽는 동안 말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페넬로페 2023-12-12 12:46   좋아요 1 | URL
우아한 기분~~넘 좋으네요 ㅎㅎ
덩달아 저도 순간적으로 우아한 기분이 들어 기뻐요♥

2023-12-12 1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2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2-1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